[기획] 백정에 대한 차별 폐지를 주장한 형평운동

2023.06.16 15:26:18

 

구한말 천민인 백정의 신분이 철폐되고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 일제강점기가 되었어도 여전히 백정에 대하여는 차별하는 사회가 지속되었다 1923년도부터 신분 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이 우리 고장 서천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서천에서 일어났던 형평운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 형평운동의 배경

 

형평운동(衡平運動)이란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 해방운동을 말한다.

 

1923년 4월 25일 일본에서 전개된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경상남도 진주에서 이학찬, 장지필 등 백정 출신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이 합심하여 조직을 결성했다.

 

진주의 본사를 중심으로 각 도에 지사를, 각 군에 분사(分社)를 두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성하였다.

 

형평(衡平)이라고 한 것은 ‘형(衡)’이라는 글자가 저울을 뜻하는 것으로 이들이 사용하는 저울과 같이 공평한 사회를 만들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당시 백정이라는 신분은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했던 차별을 해소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에 개화 양반도 참여하는 등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형평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었지만, 내부 분열과 일제의 압력으로 10여 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2. 백정에 대한 차별실태

 

백정(白丁)에 대하여 호적대장에서는 16세기 전반에 신백정, 17세기 전반에 백정, 17세기 후반 이후에 유기장(鍮器匠), 피장(皮匠), 대한제국기에 도한(屠漢), 수육상(獸肉商) 등의 이름으로 등재하였다.

 

 

도한은 도살업에 종사하던 백정을 직업적으로 멸시하면서 부르던 명칭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법제적으로 폐지됨으로 천민 신분에서 해방되기는 하였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까지 없어지지는 않아서 대한제국기에도 관습적 사회적으로 차별받아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도살업에 종사하는 것이 고정화되면서 수탈의 대상이 되어 경제적으로도 몹시 열악한 처지였다.

 

 

1920년대까지도 이들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들은 기와집에 살거나 명주옷을 입지 못하고 가죽신을 신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고, 외출할 때도 상투를 틀지 못하고 패랭이를 써야만 했다.

 

또한 예법상에도 차별은 존재하여 장례 때 상여를 사용할 수 없었고, 묘지도 별도로 자리 잡아야 했고, 가묘도 만들 수 없었으며, 여자들도 비녀를 꽂아 머리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름을 지을 때는 인(仁), 의(義), 효(孝), 충(忠) 같은 글자를 쓰지 못하였고, 항렬도 없었다.

 

또한 백정들은 어린아이에게조차 항상 머리를 숙이고 자신을 소인이라고 칭해야 했으며, 상민(常民-일반백성)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실 수도 없었다.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일반교인들이 백정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거부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행정적으로도 차별받아 민적(民籍-호적)에 올라가지도 못하였고, 납세나 국방의 의무도 일반인들과 같지 않았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민적(호적부)에 기록하는데, 이때도 붉은 점 같은 표시를 하거나 ‘도한(屠漢)’이라는 글자를 적어서 백정 신분임을 알게 하였다.

 

그러면서 상민들이 누리는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당하여 학교에 입학할 수도 없었으며, 입학하더라도 백정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3. 서천군 형평사의 설치와 조직 운영

 

형평운동이 전개되면서 중앙조직에서 이어 전국 곳곳에 분사를 설치하였다.

 

1923년 4월 진주에서 형평운동이 시작되었고, 서천군의 경우는 1923년 7월 23일 서천형평분사(舒川衡平分社)가 설치되었다.

 

 

시대일보 1923년 7월 23일 자 기록을 보면 서천군 형평분사(衡平分社)를 서천읍내(舒川邑內-읍성 안)에 설치하였다고 했다.

 

또한, 1924년 4월 3일 백정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서천형평야학회(舒川衡平夜學會)를 설치하였다.

 

서천 공립보통학교장 출구태삼랑(出口太三郞), 훈도 백남진(白南振), 김천식(金天植), 김재곤(金在坤) 등은 어려운 가정으로 나이 많은 아동과 노동자를 위해 일어(日語), 지리(地理), 역사(歷史)를 가르쳤다.

 

입학생이 날로 증가는 등 많은 호응을 받고 있었다.

 

시대일보 1924년 5월 4일 자 기록을 보면, 서천 형평사 분회는 2회 정기총회를 열었고, 회원들로부터 50원의 기탁 성금이 모였다.

 

 

기탁자는 김0달(金0達), 김0학(金0學), 조0년(趙0年)은 각각 8원, 이0용(李0用), 박0성(朴0聲)은 각각 5원 50전, 이0수(李0水) 5원, 그 외의 기탁자도 있었다.

 

서천 형평사의 활동은 날로 활발해지면서 1925년 10월 28일 임시회에서는 경성 중앙 형평 본부 이성(李星)이 참석하고 형평운동의 필요성을 강연하였으며, 이0(李0)을 서천형평분사 상무서기(常務書記)로 선정하였다.

 

임시회 결의사항으로는 그동안 경영 보고, 서천형평분사 야학회 부흥의 건, 상무서기의 급여의 건, 중앙본부건축비 부담과 충남지사 유지비 송금의 건 등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1928년 7월 2일 서천형평분사는 그동안 사장제(社長制)를 위원제(委員制)로 개정하고 위원장 이0용(李0用), 후보위원 박0성(朴0聲), 경리 부장 김0준(金0俊) 부원(部員) 김0학(金0學), 서무부장 박0식(朴0植) 부원(部員) 이0운(李0云), 조사부장 조0봉(趙0奉) 부원(部員) 길0운(吉0云) 최0수(崔0洙)를 선출하였다.

 

 

이러한 전국적으로 형평운동의 발전을 가져왔다.

 

4. 형평운동 조직 내 노선 이념의 갈등과 일제의 탄압으로 결국 중단

 

그러나 내분이 있었다.

 

전자가 형평운동을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한 계급해방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하였지만, 후자는 형평운동을 인권운동으로써 유지하려 했다는 점에서 2파의 노선 차이는 컸다.

 

1925년 4월 양파 합동으로 경성부에서 ‘전조선 형평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이후 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1924년부터 조직된 형평 청년회·형평 학우 동맹의 구성원들이 청년운동단체에 가입하면서 다른 사회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나갔는데, 이러한 형평사의 조직과 운동의 확대에 힘입어 형편청년회는 조선 형평 청년 총동맹으로 발전되었다.

 

이에 1926년 1월 장지필은 ‘재경(在京) 사상단체 합동 신년간친회’에서 형평운동 부분을 보고하고, 조직강화와 무산운동(無産運動)으로의 진출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926년 12월 ‘고려혁명당사건’으로 서광훈(徐光勳)·장지필(張志弼) 등 간부들이 구속되자 1927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5차 형평사 대회에서 명칭을 조선 형평사 총본부로 바꾸고, 1928년 4월 제6차 정기총회에서는 일본 수평사(水平社)와의 제휴를 정식으로 결정했다.

 

이 시기부터 다른 사회운동과의 제휴를 주장하는 신파와 전통적인 평등 운동을 주장하는 구파 간의 대립이 다시 일어나 1929년 제7차 정기 대회에서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이후 신파는 형평사 해소론을 제기했으며, 해소론을 둘러싼 대립은 193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1934년 일반 사회운동의 저조 속에서 형평사 지부의 재정리가 단행되고 활동도 공제 활동 정도로 축소되었으며, 1935년 大同社(대동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적극적인 사회운동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러한 형평운동은 형평사 창립 초기부터 많은 시련에 부딪혔는데, 그중 하나는 봉건적 관습에서 탈피하지 못한 일반 농민들의 거부감에서 오는 반(反) 형평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형평운동이 인권운동의 차원을 넘어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 속에서 다른 사회운동과 제휴하여 전개됨에 따른 일제의 탄압이었다.

 

이러한 2가지 시련에 대한 투쟁은 형평운동이 반제국주의적·반봉건적인 성격을 갖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으며, 형평운동은 백정들의 신분 해방·인권운동인 동시에 다른 사회운동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 진행된 민족해방운동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박수환 위원(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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