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선 송당 김성희 판교에 잠들다

2023.06.26 13:45:19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조선의 재정을 일본의 재정에 예속시키고 식민지건설을 위한 작업을 4차례에 걸쳐 1,300여만 원이라는 거액을 조선정부에 차관을 제공하였다.

조선정부는 빈약한 재정으로 상환하지 못하자 내정간섭이 시작되었고 1907년 나라의 빚인 국채를 국민이 상환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펼쳤다.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 주변에는 나라의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는 목숨을 건 애국지사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일부는 우리 주변에서 잊혀가고 묻혀버린 애국지사들이 많다.

 

필자는 우리 고장에서 애국 운동에 큰 업적을 남겼음에도 빛을 보지 못하고 잊혀가는 애국계몽운동가이며 국채보상운동을 주도 하였던 송당(松堂) 김성희(金成喜) 애국지사를 지면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1. 구한말 조선에 열강의 군대 상륙

 

1894년은 우리 역사에 큰 의미를 지닌 한 해이다. 신분 질서에 맞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썩고 무능한 조정은 이를 진압을 위해 청(淸)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자 일본군은 ‘텐진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상륙했다.

 

동학군의 봉기로 청일 양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긴 했으나, 동학군이 조정과 화약(和約)을 맺고 해산하자 더 이상 조선에 주둔할 명분이 없어졌다.

 

주둔한 양국 군대를 공동 철수하자고 청나라가 주장하자, 일본은 되레 양국이 함께 조선의 내정(內政)을 개혁(改革)하자고 제안했다.

 

청이 거절하자 그걸 구실로 일본이 청나라 군대를 공격 일본의 승리한 전쟁이 청일전쟁이다. 승리한 일본은 김홍집을 중심으로 온건개화파의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국정개혁으로 내정간섭에 이르렀다.

 

 

2. 조선정부에 1,300여만 원의 차관제공과 내정간섭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의 재정을 일본의 재정에 예속시키고 식민지건설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 4차례에 걸쳐 1,300여만 원이라는 거액을 조선정부에 차관을 제공하였다.

 

조선정부는 빈약한 재정으로 이를 상환하지 못하자 일본의 내정간섭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당시 국내 지식인들은 빚진 상태에서 일본의 국권 침탈을 막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사장 김광제(金光濟), 부사장 서상돈(徐相燉)이 나라의 빚인 국채를 국민이 대신 상환하자는 취지로 단연회(斷煙會-금연회) 설립 동맹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고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했다.

 

 

3. 민간 주도 국채 보상 운동 전국적으로 전개

 

때를 같이해 우리 고장 판교면 출신 애국계몽운동가 김성희(金成喜)는 1907년 2월 22일 서울에서 유문상(劉文相), 오영근(吳榮根) 등 24명의 인사가 발기해 국채보상운동의 집행조직체인 국채보상기성회(國債補償期成會)를 조직했다.

 

한편 국채보상기성회는 의연금을 수합하는 7개소 수전소를 지정하고, 각 지방 도, 군, 면, 단위로 찬동 지지하는 취지서를 발표하고 3월 말까지 27소의 국채보상소를 설립하였다.

 

충남에는 공주, 예산, 한산, 금산군 4개소로, 우리 고장 한산호서국채보상 기성의무사(韓山湖西國債補償 期成義務社)는 3월 17일 설립했다.

 

국채보상기성회의 취지서에는 ‘멀리 동래, 대구의 제공으로 더불어 단합해 한 몸이 되고자 하여 이 회를 조직하고 이름하여 ‘국채보상기성회’라 한다. 이에 우리 동포에게 널리 고하여 우리 국민의 의무를 다하게 하려는 바이다. 아아, 나라가 망하면 인민이 망하는 것이니 힘쓸지어다. 우리 국민이여’라고 하여 조직의 취지를 밝혔다.

 

 

또 기성회 회칙에서 ‘본회는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 원을 보상함을 목적’으로 하며, ‘보상 방법은 국민의 의금을 모집함. 단, 금액은 다소를 불구한다’라고 정하였다.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황성신문>, <만세보> 등 언론들도 각 지방의 모금 상황 및 취지서, 의연금 납부 명단 등을 연일 게재하며 운동을 독려했다.

 

보상 운동은 국내를 비롯하여 국외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운동이 시작된 이후 4월 말까지 보상금을 의연한 사람은 4만여 명에 달했고 1907년 3월 이후 1908년 7월까지 의연금 총액은 20만 원에 이르렀다.

 

 

이같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자 일제 통감부는 이 운동을 배일 운동으로 규정하고 운동을 주도했던 언론을 탄압했다.

 

또 양기탁(梁起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언론인 베덜(Ernest Thomas Bethell) 등 운동 주도 인물들을 의연금 누명을 씌워 구속하였다.

 

하지만, 다섯 차례의 재판 결과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됐지만, 일본의 방해 공작은 계속됐고, 이로 인해 보상 운동은 상당 부분 위축됐다.

 

이에 따라 국채보상운동 지도부는 모금보다는 모금액의 관리와 감독에 치중하였고, 1909년 11월에는 의연금 처리를 위해 유길준(兪吉濬)을 회장으로 국채보상금처리회를 조직했다.

 

 

처리회는 은행이나 학교설립, 식산 진흥 등 다양한 방안을 논의한 끝에 1910년 9월 모금액을 교육 사업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 직후 모금액 전부를 경무총감부에 빼앗기면서 이 같은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전국으로 확산한 국채보상운동은 나라의 위기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시민 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지난 2017년 10월 30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4. 송당 김성희, 국권 회복을 위해 교육을 통한 애국계몽운동 전개

 

일제의 조직적 방해로 결과를 이루지 못하고 말았지만, 관료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실력양성을 통하여 국권을 수호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송당 김성희는 이러한 국권의 수호를 위하여 정치, 사회단체에 참여하고 학교의 교육 통해 국민의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애국계몽운동가 송당 김성희는 1847년 8월 14일생으로 부친 김노규(金魯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호적으로는 애초 서천군 종천면 지석리 149번지였으나 흥림저수지 조성공사로 수몰되는 관계로 지석리 228번지로 이거를 하였고, 1925년 7월 21일 사망 후, 장남 김상찬(金商燦)은 판교면 현암리로 전적하고 거주지를 옮겼다.

 

1893년 교보통상사무아문 주사(9품)의 공직을 시작으로 1895년 9월 홍주부 주사를, 경북 관찰부 주사, 1902년부터 다음 해 5월까지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정3품) 역임하였다.

 

그는 또 1907년 1월 한성덕어학교(독일어) 부교관으로, 1907년 5월에는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교관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그 후 자강회 및 대한협회 회원으로 사회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사회 활동하면서 협회 월간지에 애국계몽운동에 따른 많은 30여 건의 논설을 남겼다.

 

 

송당 김성희는 각종 논설을 통하여 당시 시대를 사회진화론적 시각에서 보고, 우승열패, 약육강식의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국권을 상실하여 보호국 상태에 처한 원인은 외국의 침략 때문만이 아니라 실력양성, 자강 실현에 힘쓰지 않는 한국 자체에 있다는 자기반성의 입장에서, 실력의 부족으로 상실된 국권의 회복, 독립의 실현은 실력의 양성, 자강의 실현에서 가능하다는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선자강(先自强) 후독립(後獨立)론을 주장하였다.

 

아무리 기회가 있더라도 실력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하므로 먼저 실력을 양성하여 장차 독립의 기회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다.

 

첫째로 교육 진흥에 의한 실력양성론 폈다.

 

국가의 독립은 오직 자강(自强) 여하에 있을 뿐이며 자강의 방법은 국민교육을 통하여 실력을 쌓고, 산업을 진흥시켜 국가가 부강해져야 한다며 교육자강론을 주장하였다.

 

학교 교육은 물론 가정교육과 사회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여성교육과 의무교육 및 노동야학의 중요성도 강조하였다.

 

 

둘째로 식산흥업(殖産興業)에 의한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다.

 

국권 회복은 농공상업의 발달에 있고 한국이 일본의 보호 국민으로 전락한 주요 원인은 식산의 부진에 따른 국가의 빈약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셋째로 정치개혁에 의한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다.

 

지배자가 국가를 사유(私有)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 등 민권보장이 불가능하여 백성의 힘이 쇠잔해지고, 국민에 대한 정치참여를 불허하여 국민이 국가의 일을 남의 일보듯이 하므로 애국심이 생길 수 없고, 국민에 대한 가혹한 압제와 수탈로 국민의 생산 의욕이 감퇴해 산업이 피폐해지고 국력이 쇠퇴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정치발전은 국민교육에 달렸다고 주장하였다.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여 무단통치로 통제하고 반민주적인 방법으로 인권탄압을 더욱 강화하자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5. 송당 김성희 조선총독부에 12가지 정객 개선책을 건의

 

많은 인사가 구속되며 피해가 극심해지자, 송당 김성희는 조선총독부에 12가지의 의견서를 만들어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건의서 기록을 보면, “나는 구한국민의 한사람입니다. 일본 천황폐하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 73세의 노인으로 죽을 날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지금 미충하지만, 한마디의 건의함으로 다른 날을 기대합니다. 현재 학생계에 예사롭지 않은 소요가 발발한다고 합니다. 전에 교육자였던 자신으로서는 안심하기 전에 조선인 학생의 활동적인 성질과 일본정치의 평원적(平元的) 처치에 대해 12의 의견을 말하고 참고로 일본 천황폐하의 은혜를 본인도 보답하겠습니다. 저 국민의 정치사상은 즉시 독립을 구조하고 보전하는 것입니다. 근세동서각국의 국민은 헌법에 의하여 활동하고 입법권, 자치권과 같은 참정의 기관을 이용, 분명한 복리를 누려야 하는 것은 모든 다 아는 바입니다. 이와 같이 정치적 사상으로 국민의 자격을 없애고 국가를 포기하고 사람의 도를 멸절시키는 것은 백만인이 있어도 국가에 어찌 이롭고, 통치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비록 국민의 권리의 사상은 사실이지만 어떤 이는 정부에 대해 얕은 지혜로 격렬하게 논쟁하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열심히 애절하게 고소의 정을 하는 자가 있습니다. 전자는 옛 영국 중세기에 여러 번 나타나는 일이고 후자는 벨기에와 네덜란드 분리 시 때의 현상입니다. 이를 총괄해서 말하자면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앞장서서 소요를 일으켜 정치사상을 알게 하고 이 정의 애정하게 하소연하고 마치 굶주린 자의 음식을 구하는 것과 같이 지금 어린 아이가(미성숙한 아동)이 음식을 요구하기 시작하면 적당히 경계하여 타일러 서서히 멈추게 하고 슬프게 울며 벽 구석에 이를 숨어서 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조선인의 정치적 사상은 무엇보다 유래가 있고 이는 지난 총독부 10여 년의 교도의 은덕이다. 공자가 말하길 천하평[天下平]하다 또 말하기를 천하국가는 균일하다. 공자가 말하길, 적은 것을 근심하고 균일치 못한 것을 근심하고 가난한 것을 근심하고 편안하지 않을 것을 근심하고 편안하지 않고 균일하지 않으면 천하가 안녕하지 않음은 당연합니다. 통치권을 가지고서 천하를 평안하고, 균일하지 않은 것은 법률의 집행을 균일하게 교육의 시설을 동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불평의 종자를 융화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서인의 타 종족 식민지에 압력으로 이와 같이 불평등의 조치를 했다면 장차 동화되지 못할 것이고 오늘날과 같은 사건이 있을 것입니다. 조선인의 성질은 역사의 관념, 풍속습관을 4천년 전래이고 물론 도덕성 재식성에도 결여, 인내성 결여이기 때문에 동기를 이용도를 넘어 생명상의 해를 볼 뿐 아니라 후일에 이 같은 행동을 일으킬 것입니다. 특히 동화책 억압을 한다면 일본 정부의 명예상 누가 되고 정의 인도상 정당한 행동으로 진화, 오늘날과 같이 애절하게 호소하오니 인자 군자의 마음으로 이 억압을 오늘날 적당한 처치방법을 연구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건의 하였다.

 

송당 김성희는 애국계몽운동에 진력하다가 1925년 7월 21일 향연 78세 나이로 서천군 종천면 지석리 자택에서 졸하였다. 묘소는 판교면 현암리에 있다.

박수환 위원(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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