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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기획탐방】서천 남산성(舒川 南山城)에서...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 山河(서천산하)'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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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서천 남산성(舒川 南山城)에서 - 충남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22-1

2019년 5월 3일 금요일.

절정에 이른 봄의 햇살은 한낮으로 치달리면서 맑을 대로 맑아져 성숙함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관광객들로 북적스러운 서천 특화시장의 주차장에서 바라본 서천 남산은 온통 연초록의 신록으로 뒤덮여 있어 싱그러움을 그대로 전한다.

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 보이는 족족 모든 풍경들이 홍모의 날개를 단 듯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 환한 웃음을 선뜻 앞세워 터뜨려놓는다. 절정의 봄은 하나의 커다란 웃음 속에 모든 산천을 끌어 안아주는가 보다.

문득 노천명의 <푸른 오월>이라는 싯구절이 떠오른다.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절정의 봄 날씨는 자못 때 이른 여름날씨에 빠진 듯 국도 4호선의 굴다리를 지나면서 서늘한 기운으로 이마를 찐득한 물기를 훔쳐내게 한다. 문득 두 눈 안으로 가득 차오르는 남산마을이 환하다. 분명 북향의 마을임에도 어찌 저리도 푸르고 밝고 맑을 수 있으랴. 과연 계절의 여왕의 나라처럼 보인다.

그렇다. 아마도 시인 노천명은 저리고 아름다운 봄을 앞자락에 가득 품고 의연하게 자리한 남산마을 같은 정경을 바라보면서 계절의 여왕이라 일컬었음이 분명하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은 정오/ 계절의 여와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노래한 시인의 가슴을 그려보면서 너르고 너른 서천들을 가로질러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어느덧 서천 남산성을 알려주는 이정표 앞에 발걸음을 휴대폰의 카메라 속에 반가움을 담는다. 남산마을의 가운데로 조금씩 가팔라지는 오르막 산길 위에 발자국을 찍어댄다. 마을 안길에 이르기까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깨끗하다 못해 눈부시다.

텃밭을 노타리치고 있는 농부의 뒷덜미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햇살을 바라보며 빛나는 길을 따라 천천히 오르는데 문득 무엇인가 짙은 그늘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멋진 모습으로 우람히 서서 마을을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다. 아직 가지 끝마다에 지난겨울이 남아 있음직도 한데, 어쩌면 저리도 곱고 보드라운 연초록을 매달아 놓고 있는 것일까? 우듬지 곳곳에서 무한히 헤살대고 있는 어린 새싹이 마치 자애로운 할머니 등에 업혀 철없이 맑은 웃음을 터트리면서 헤헤거리는 어린 아기의 패인 볼우물과 함께 고사리 같은 손짓이 마치 하늘을 향하여 제멋대로 춤을 춰대는 듯하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정상까지는 146.9m. 조금씩 흘리기 시작하는 땀방울을 씻어내기도 한다. 그러다가 시원한 물줄기를 흘러내리고 있는 물줄기를 만난다. 그 옛날 남산성을 지키던 이름 모를 병사들의 목마름을 씻어주던 샘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옹달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옹벽과 잘 다듬어진 돌로 쌓아놓고 둘레를 경계하며 물길이 치솟아 오르는 자리에 두꺼비 한 마리를 얹혀 놓여 있다. 두꺼비 입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그 옛날 눈앞에 펼쳐지는 서천들을 적시면서 풍요를 구가하였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마을사람들조차도 외면하는 옹달샘이 되었는지 두꺼비가 토해내는 맑은 물줄기보다도 더 높게 자라난 잡초가 바닥을 무성하게 한다.


비록 오르막길이지만 햇살을 가로막아주는 숲길이라서 한결 몸을 가볍게 해준다. 시원하기만 하다. 무럭무럭 잘도 자라나고 있는 잡초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뜨이는 홍괴불주머니가 무리지어 반겨 맞아준다. 서천 남산성을 소개한 안내판 앞에 멈춘다. 충청남도문화재 기념물 제96호. 1995년 3월 6일 지정.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 산22-1 위치. 26,855.5㎡. 백제시대. 관리자(소유자) 서천군. 안내의 글을 그대로 적어본다.

백제시재 테뫼식 산성으로 산정상부를 둘러싸서 성벽을 쌓았다. 성 둘레는 620m에 달하며, 정상부에는 건물자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벽의 외부 높이는 7~9m이고, 내부의 높이는 30~50cm이며, 윗부분의 너비는 1.3m정도이다. 문 자리는 남문과 서문의 터가 확인되고 있다. 남문의 터는 폭 2.6m, 측면의 성벽 높이는 2m이며, 서문의 터는 폭이 2.5m이다. 성 안에는 6~9m의 통로가 성벽을 따라 돌아가고 있다.

성의 동쪽 부분이 비교적 넓고 평평하며 건물자리가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데, 이곳에서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들이 수습되었다. 주변을 널리 바라볼 수 있고, 서해와 금강의 입구를 감시할 수 있어서 벡제시대부터 이 지역을 지키는 요충지였다.

이 서천 남산성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세종때까지 서천의 관아가 있었던 산성이란다.

산성의 규모는 둘레가 1545자이며, 성내에는 우물이 한 곳이 있었다 하며 석축산성으로 일부 붕괴된 곳에서 백제 토기를 수습할 수 있어 분명 남산성은 백제의 성을 수축한 것으로 판단이 된다고도 한다.

또한 백제가 망하고 의자왕과 귀족들이 당나라로 끌려갈 때 부녀자들이 마지막 떠나는 님을 바라보던 곳이기도 하며, 이것이 연유가 되어 음력 8월 17일에 부녀자들이 만남의 장소로 즉흥적인 춤과 노래를 하며 하루를 즐기던 남산놀이가 전하고 있다하니 백제 망국의 한이 여기에도 깊이 서려있을 것이 아닌가.

저 부여의 도성에서부터 출발한 백제 의자왕 등 2800여명의 포로들을 실은 배가 금강 물줄기를 따라 흘러내려 올 때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눈물을 강물에 흘려 출렁거렸을까를 생각하니 새삼 망국의 저린 가슴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듯하여 문득 불어오는 봄바람까지도 칼날 같다.


산성의 정상에 오늘다가 그만 짐짓 놀라고 만다. 이리저리 흩어진 성돌을 젖혀 놓고는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방송국 안테나는 흡사 천 년 전의 아스라한 흉물처럼 살아서 꿈틀대고 있다. 도대체 어찌하여 천 년 전 망국의 한처럼 처절하게 남아 있는가? 무너져 내라는 산성의 흔적을 마구 짓이기듯 버티어 서 있다.

아직도 조금은 남아있는 남문지를 찾아 안테나를 빙 돌아 내려가는데 어디서인지 짙은 신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바로 안테나 시설물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다. 어서 남산성의 살아있는 숨소리로 되살아나 망국의 진실한 참소리를 다시 들어 오늘날의 귀감으로 삼고 싶다.

무너져 내리는 성돌, 그리고 남문지의 아스라한 흔적, 깨어진 기왓장의 낯선 줄무늬하나하나를 더듬어가면서 백제의 마지막 울부짖음을 달래고 있는 햇살의 온기를 온몸으로 받는다.

서쪽 봉우리는 남으로 전북 옥구점방산과 응하고 있는 서쪽 봉우리와 북으로 비인 칠지산과 응하던 운은산 봉수대가 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비친다.

남산성南山城에 올라
                                   구재기

피할 래야 
피할 수 없고 
숨을 래야 숨을 수도 없는데
어찌 확신할 수 있으랴
어리석은 마음은 자꾸만 한정되는 것
주저할 수밖에 없다

지혜라는 것도 
결코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을 말하는 순간 
이미 그 흐름은 사라지고 
지상에 남은 것은 오직 
든든한 성을 쌓았던 돌부리들뿐이다
성이 무너지며 남긴 흩어짐뿐이다

천년을 두고도 멀리 흘러가기만 하는 
금강의 물줄기는
시대를 먹고 자라난 수목에 가려 
전혀 보이지도 않는다
섧디 서러운 망국의 슬픔이 
어디에 묻혀 있으랴

노래 불러보아도
춤을 추어보아도
열어젖힐 성문도
건너야 할 징검돌 하나 없이
시대를 피하거나 숨길 수 없는지
방송국 안테나가 불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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