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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기획탐방】서천 성북리 오층석탑(舒川 城北里 五層石塔)...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 山河(서천산하)'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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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성북리 오층석탑(舒川 城北里 五層石塔)각 부재의 치석(治石) 및 구조나 형식 등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백제계 석탑양식의 지방분포에 따라 그 전파 경로를 알아내는 데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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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봄 햇살은 더욱 따스하다.


멀리 바라보아도, 가까이를 굽어보아도 온통 봄기운으로 가득한 대지는 생명의 약동을 그대로 보여준다.


산과 들에서 햇살을 온몸으로 가득 담고 있는 푸르름들이 한결 싱싱해 보이면서도 부드럽게 느껴진다. 국도 21번을 따라 비인으로 달려가는 게 아니라 봄의 가슴 속으로 뛰어들어 동행하는 기분에 휩싸인다.


그렇게 점점 깊어져 가는 봄날 오후. 성내 사거리에서 잠시 머물다가 곧바로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舒川 城北里 五層石塔) 앞에 이른다.


오래인 지우(知友)라도 만난 듯이 반갑다. 그 동안 몇 번인가 지나치거나 만나왔던 터라 이제는 두 눈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탓이리라.



탑 앞에 이른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천천히 기단부(基壇部)로부터 탑신부(塔身部)로 점차 시선을 옮기면서 마침내 상륜부(相輪部)에 이르자 여느 때와는 다르게 다가오는, 다소 긴장된 느낌에 빠져든다.

 

원래 석탑은 석조탑파(石造塔婆)’의 줄인 말로서, 재료로는 화강암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안산암이나 점판암 등을 사용하기도 하고 그 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기단부(基壇部), 탑신부(塔身部), 상륜부(相輪部)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곤 하는데 기단부가 생략되고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석탑이 발생한 시기는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으로 추정된다.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 약 200년간은 목탑(木塔)의 건립 시기로, 오랜 목탑의 건조에서 쌓인 기술과 전통의 연마가 드디어는 석탑을 발생하게 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보물 제224(1963.01.21. 지정), 명칭은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舒川 城北里 五層石塔), 화강암으로 재료로 하여 높이 6.2m의 고려시대 유적 건축물로 소개된 안내판의 쓰여진 글부터 읽어보기로 한다.

 

이 탑은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오층 석탑으로 백제시대 석탑을 모방한 같은 유형의 많은 석탑 중에서 가장 충실하게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을 모방하고 있다.


탑의 기단부는 1층으로 4매의 판석 위에 놓였으며, 네 모서리에는 돌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면석面石을 다듬어 세웠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큼직한 네모난 돌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벽면석壁面石을 끼웠다.



2, 3층의 몸돌은 1층에 비하여 높이와 너비가 지나치게 축소되었으며, 한 개로 만들었다.


지붕돌은 현재 4층까지만 남아 있으며, 기단이 협소하고 2층 이상의 몸돌들이 지나치게 작고 각층의 지붕돌이 커서 안정감을 잃고 있다.

 

안내판에 소개된 글을 읽어가는 가던 중에 잠시 시선을 멈추게 하는 곳은 백제시대 석탑을 모방한 같은 유형의 많은 석탑 중에서 가장 충실하게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을 모방하고 있다는 구절이다.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충남 부여군 정림로 83(동남리) 정림사지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9(19631220)로 백제시대의 석탑(石塔)이다.


머릿속으로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그려보면서 눈앞의 오층석탑을 얹어 생각해본다.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舒川 城北里 五層石塔)의 구조는 기단부와 탑신부(塔身部), 그리고 상륜부(相輪部)의 세 부분으로 형성되어 있다.


먼저 기단부(基壇部)부터 살펴보면 기단부를 받고 있는 지대석(地臺石)은 몇 장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결구하여 2단을 이루고 있으나 현재는 상층의 1단 하대만이 보이고 그 밑의 부분은 파묻혀 있다.


전체 1층으로서 4매석으로 구성된 하대석(下臺石) 위에 놓였는데 네 모서리에 방형의 돌기둥을 하나씩 세우고 그 사이에 면석(面石)을 다른 돌로 다듬어서 세워 모두 8매석으로 기단 면석을 조립하였다.


각 모서리의 방주(方柱)는 마치 우주(隅柱: 모서리기둥)와도 같은데 약간의 배흘림이 있어 전체의 형태는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 위의 갑석은 4매의 판석으로 덮였는데 하면의 부연(副椽 : 탑의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나 상면의 굄대가 없으며 기단부 전체의 규모는 탑신부에 비하여 좁아서 안정감이 없다.

 

탑신부(塔身部)의 초층탑신은 네 모서리에 큼직한 방형 석주를 1주씩 세우고 그 사이에 별개의 석재로 조성한 벽면석(壁面石)을 끼웠는데, 전체가 상촉하관(上促下寬위는 좁고 아래는 넉넉함)’의 형태를 이루었으며 다른 조식은 없다.


2, 3층의 탑신은 초층에 비하여 높이와 너비가 지나치게 감축되었으며 1석으로 조성하고 있다.


각 층의 탑신석 위에는 높직한 2단의 받침가구가 있는데 초층에서 하단은 4매석으로 각형(角形) 받침을 만들고 상단도 역시 4매석으로 된 소로(小累) 모양의 부재를 얹어 정림사지오층석탑의 양식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옥개석은 현재 4층까지 남아 있는데 이 부재도 상층부로 올라가면서 규모가 축소됨에 따라 그 구성석재가 줄어들고 있다. 초층 옥개석은 8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었고 형태는 평박할 뿐 아니라 매우 넓어서 기단부보다도 광대해졌다.


추녀 밑은 수평으로 전개되다가 네 모서리에 이르러 약간의 반곡(反曲)을 이루고 전각(轉角)에서는 반전(反轉)을 보이고 있다.


낙수면의 경사는 매우 완만하고 네 모서리의 우동형(隅棟形)은 전각에 이르기까지 거의 수평을 이루었으나 합각머리는 예리한 선을 이루고 있다.

 

낙수면 정상에는 1매의 판석을 한 단 놓아 그 위층의 탑신을 받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형식은 2층 이상에서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 2층 이상에 이르러서는 그 규모의 차이 때문에 옥개석은 4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었다.


상륜부(相輪部)는 완전하지 않은데 노반(露盤 :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 앙화, 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크고 작은 석재가 겹쳐 놓이고 그 위에 방형의 보개(寶蓋)가 있으며 다시 방형의 석재가 놓였으나 이 형태는 원래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석탑은 각 부의 양식과 건조수법에서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의 세부양식을 충실하게 모방하였으나 기단이 협소하고 몸돌에 비해 지나치게 큰 지붕돌, 2층 이상의 탑신석들이 1층에 비해 지나치게 줄어들어 안정감을 잃고 있다.


그러나 각 부재의 치석(治石) 및 구조나 형식 등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탑은 백제계 석탑양식의 지방분포에 따라 그 전파 경로를 알아내는 데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석탑으로부터 물러나면서 다시 한 번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함께 석북리 오층석탑을 나란히 놓고 마음으로 그려보니 문득 선남선녀(善男善女)의 모습으로 떠오른다.


석북리 오층석탑은 양장으로 곱고 멋스럽게 꾸민 늘씬한 선녀의 모습이라 한다면, 정림사 오층석탑은 건장하고 믿음직스러운 든든한 선남의 모습이랄까?


가늘고 보드라운 봄바람에 옷깃을 가볍게 휘날리면서 곁눈질로 살짜기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석북리 오층석탑이라면, 다부지고 굳센 다리로 떡 버티고 서서 부리부리한 눈매로 깊은 정을 가득 담아 옹위하듯 서서 잔잔한 미소를 띄고 있는 모습으로 정림사 오층석탑을 떠올리게 한다.


육중한 탑 사이에 끼어 어쩌면 무언의 손길에 가득한 봄 속 품으로 안겨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봄햇살이 지상에 가득하게 되면 봉곳이 솟아오른 양지쪽의 흙 속에서는 수많은 생명의 무리가 새 기운을 한껏 준비하여 가지고 한 마디 호령만 하면 비집고 솟아오르려고 일제히 등대하고 섰음이 완연하다고 읊은 이효석의 남창앙양(南窓迎陽)이라는 한 구절을 그려보게 한다.

 

문득 뒤를 돌아본다. 육중한 돌로 이루어진 침묵(沈黙)의 석탑이라 하더라도 다사로운 바람결 앞에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온몸을 봄햇살을 끌어당겨 한결 상기된 모습을 하고 있다.


빙그레 웃음을 담고 있는 얼굴이다. 짐짓 발걸음을 멈춘다. 다시 한 번 석탑 앞에 머물고 싶어진다. 좀처럼 떠나기 싫어진다.


그러나 한 발 앞선 그림자가 자꾸만 발걸음을 잡아당긴다. 오후의 햇살은 이미 긴 그림자를 지상에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 탑의 설명부분에서는 안내판과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 따랐음을 밝힌다.

 


 

성북리 오층석탑 城北里 五層石塔

                                          구재기

누가 저리도

오래, 한 자리에 서서

골짜기 물에 귀를 씻고 돌아와

함께 걸어온 그림자를 발밑에 두고

굳이 외면한 채로 서 있는가

 

머리 위에 살짝 얹은 관() 밑으로

저리도 고운 시선을 멀리에 두고 있는가

 

구름 사이사이로 내려앉은

햇살 아래로 드러난 이마의 곡선

우리네 여염집을 한 모습

기둥과 벽과 같이 모서리에

든든한 기둥을 세워 그 사이로

건장한 가슴으로 떡 버티어 막아놓았으니

어찌 시선인들 조이 같이 할 수 있으랴

 

한 천 년은 저대로 살아왔을 것이다

저리도 많은 저 되풀이의 몸짓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연하여 이어지다 보면

하던 짓 그대로 부끄러움이 아니다

 

하늘로 향하여 오를수록

점점 더 좁아지는 저 가슴

건장한 어깨의 부드러운 곡선

() 위에 내리는 햇살을 받아

우러러 받드는 바에야

귀를 씻던 골짜기 물로

이제는 두 눈을 씻어 내렸으니

어찌 시선인들 한곳에 둘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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