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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기획탐방】마산면 새장터 3․1운동 기념탑 앞에서...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 山河(서천산하)'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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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마산면 새장터 3․1운동 기념탑 앞에서

3·1 독립 선언은 우리 민족의 독립이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의 단계라고 말한다. 신분과 계층, 이념과 사상, 종교가 다르더라도 우리 민족은 오직 독립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위하여 열과 성을 다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초개와 같이 버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리도 바랐던 민족의 해방 이후에 마주한 민족의 또 다른 고통, 곧 분단과 전쟁, 오랜 대립과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언제까지 이를 극복해야 하고, 우리의 진정한 의미의 한반도 평화를 이루어낼 것인가.


2019년 9월 26일 목요일 오후

날씨가 무척 더웠으나 하늘이 보살핌이 있었던가, 구름이 얄포름하게 끼어 있어 그다지 더운 맛이 없어진다. 좋다. 마산면 소재지를 지날 무렵 문득 ‘새장터 3․1운동 기념탑’의 모습이 떠오른다.

몇 번 그 앞을 지난 적은 있었지만 자세히 살펴볼 요량으로 승용차의 핸들을 꺾어 ‘새장터 3․1운동 기념탑’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향한다. 바로 마산초등학교 못미처에 위치해 있다.

특히 이곳에는 필자가 1979년 4월 첫 부임지로 근무한 마산초등학교 바로 곁이기 때문에 기념탑을 찾아가는데 옛 생각이 떠올라 조금은 설레기도 한다.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때 그 푸르던 나무들은 지금도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을까, 그보다도 내가 담임하던 아이들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이제는 건강에 대한 걱정도 해야 할 만큼 어른이 되어 있을 그 코흘리개들, 까마귀가 친구하자고 조를 정도로 새까만 손발을 학교 앞 개울의 그 찬물로 강제로 씻게 했던 그 시절, 지금쯤 그 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어른이 되어 있을까.


그때 그 시절 마산초등학교 교문 둘레의 논밭이 이제는 대한민국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부르던 선열들의 목소리를 모아 서천삼일운동기념비(舒川三一運動記念碑)를 세워 놓은 새로운 터전으로 변해 있다. 지난 시절의 추억이 문득 변하여, 대한민국의 국화인 무궁화가 마산면 신장리에서부터 길 양쪽으로 심겨져 있어 3․1운동의 그 민족적 자존을 떠올리게 한다.

올해는 3.1운동의 100주년이 되는 해, 내가 담임했던 아이들이 머지않아 회갑을 앞둔 어른이 되어 있는 동안 세월은 참 많이도 흘러있고, 만세운동의 소리는 100년 전으로부터 들려온다.

우리 민족 근현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100년 전 탑골공원에서 역사적인 3․1운동이 일어난 지도 어언 100주년이 되었으니 얼마나 뜻 깊은 일이겠는가.

그 의미와 교훈과 역사성을 슬기와 지혜를 모아 가슴 깊이 다시 세우고 보존함으로써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면서 하늘을 우러른다. 그 하늘 한 가운데로 목이 찢어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는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 돋보인다.

구름이 낀 하늘임에도 더욱 돋보이며 울려오는 소리, 구름 사이를 뚫고 치솟아 오르는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다.


그렇다. 1919년 3월 29일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장날에 큰 시위운동이 일어난다. 이 날 기독교도 송기면 등은 오후 1시경 준비한 7천여 매의 태극기를 모여든 군중에게 나누어 주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선창하니, 수백 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누빈다.

누가 그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노도처럼 쉬지 않고 멀리 가까이에서 달려와 천둥처럼 소리를 높여 만세를 부른다. 그러나 경찰은 만세시위를 주동한 송기면, 고시상 등 6명을 체포한다. 이에 격분한 2천여 군중이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만세 행렬을 한산으로 확산하여 시위를 하던 중 일본 경찰과 충돌한다.

14명의 의사 등이 투옥되고 수많은 선민들이 태형을 당하고 만다.

우리의 3·1 독립 선언은 우리 민족의 독립이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의 단계라고 말한다. 신분과 계층, 이념과 사상, 종교가 다르더라도 우리 민족은 오직 독립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위하여 열과 성을 다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초개와 같이 버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리도 바랐던 민족의 해방 이후에 마주한 민족의 또 다른 고통, 곧 분단과 전쟁, 오랜 대립과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언제까지 이를 극복해야 하고, 우리의 진정한 의미의 한반도 평화를 이루어낼 것인가.

닫힌 문을 굳이 열 사이도 없이 주차장과 이어진 공간을 통하여 ‘서천 3․1운동 기념비’ 앞에 이른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은 다음에 찬찬히 기념탑 주위를 돈다. 그리고 우리 고장 출신의 소설가 고 박경수의 글로 새겨진 서천삼일운동기념비(舒川三一運動記念碑)의 설립문(設立文)과 그 당시의 독립만세운동의 모든 내력이 적힌 비문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이 비가 선 우리의 고장 마산 새장터는 예부터 광천 강경 충청도 서남부의 3대 시장의 하나로 꼽는 모시장으로 유명하였다. 우리의 선대들은 이 장날을 이용하여 이 비문과 같은 역사적인 거룩한 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이때 高時상, 李東洪, 金印斗, 朴在曄, 鄭日彰, 梁在與, 宋箕勉, 宋汝直, 李承達, 劉性烈, 李根浩, 林學圭, 趙南明이 운동을 선두에서 이끌었으며, 끝내는 외경에 인치 모진 고문 끝에 투옥 실형을 받는 희생을 치루었다.

위와 같은 위대한 역사와 선대를 가졌음에도 이를 미처 받들어 기릴 기회를 갖지 못하여 숙원이 된 끝에 온 군민의 합심과 동아일보사의 후의로 이 비를 세우게 되었다.


서기 1987년 3월 1일. 서천 3.1운동기념비 건립위원회
1919년 3.1운동은 이날에 폭발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었다.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에 항거하여 이를 되찾으려는 우리 온 민족의 비장한 결의를 만천하에 천명한 운동이었다.

남녀노소 빈부 상하의 구별 없이 온 민족이 한 덩어리가 되어 지축을 울리는 함성으로 만세를 외쳐 이 나라가 우리의 것임을 당당히 주장한 운동이었다.

우리는 맨손이요 적은 총칼이었으나 이에 굴함 없이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싸울 것을 하늘에 맹세한 우리 겨레의 살과 뼈에 선혈이 튀는 통분한 싸움이었다.

서울을 기점으로 한 이 운동은 피바람에 실려 삼천리 산과 들에 퍼졌으며 이 해 3월 29일에는 우리 서천 고을 월명산하 이곳 마산 새장터에서 장날에 맞춘 운동으로 거듭 폭발하였다.

이 날을 기하여 우리 고을의 의사들은 미리 감절고개와 일광재 숲 속 등에 회동 은밀히 태극기 7천여 개를 제작 당일 장꾼들에게 배포하였다.

하오 1시가 되자 마침내 장거리 돈대 위에서 독립선서가 낭독되고 이에 대한독립만세의 선창으로 2천 군중이 일제히 충천하는 만세를 외치며 온 장터를 누비기에 이르렀다.

목이 터지는 절규의 만세시위를 벌이던 중 6명의 의사가 일경에 린치 저들의 경찰관 출장소에 감금되었다.

이에 의분한 우리 군중은 저들을 습격 감금된 동지들을 구출하였으나 이때 2명의 의사가 악귀들의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에 더욱 격앙한 2천군중의 만세함성은 천지를 진동시키고 즉각 기수를 서천으로 돌려 행진하였다.

그러나 그 만세행렬은 한산을 2리 앞둔 죽촌 모새다리에서 행진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곳 냇둑에 무장매복한 일대의 왜군에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적의 무차별한 발포로 일진일퇴하던 우리의 만세행렬은 결국 역불급의 일시후퇴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로 하여 우리의 무행(無幸)한 의사들은 투옥 실형을 받고 수많은 양민이 태형을 당하였다.

이에 우리 후대들은 선대의 그 거룩한 얼을 기리며 이를 만대후까지 이어 받들기 위하여 여기 유서 깊은 마산 새장터에 이 비를 세운다

1987년 3월 1일. 서천3․1운동기념비건립위원회. 동아일보사


머릿속으로 새장터를 그려본다. 이러한 독립만세운동조차도 모르고 무심히 출퇴근하며 지나온 새장터를 멀리로 바라본다. 조금씩 황혼이 밀려오고 있는 새장터의 하늘이 잠시후에는 어둠으로 휩싸일 듯하다. 그러나 이 어둠은 내일을 확실한 밝음으로 굳건하게 이어줄 것이다.

그러한 믿음 속에서 오늘날 삼일운동을 100주년으로 맞고 있다. 그 날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얼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밝음 속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문득 백범 김구선생의 말씀을 떠올린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이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가 강력이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계두우미(鷄頭牛尾)’라는 성어(成語)를 생각해보면서 전국시대의 웅변가 소진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7대국 중 강국인 진(秦)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6개국이 단결하여 제각기 독립을 지키는 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외쳐댔던 소진(蘇秦), 그는 작아도 닭의 머리가 되느냐, 크더라도 소의 꼬리가 되느냐, 즉 독립을 하느냐 신종(臣從)하느냐를 두고 목소리를 높여 6개국을 제각기 독립된 나라로 이룩하게 하지 않았던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지금 서천삼일운동기념비 앞에서 그 날의 애국선열들이 보여주었던 숭고한 얼을 후세에 기리고 국민의 애국심 함향을 위한 산교육의 장소로 활용되기를 기원해본다.

*이 글에서 기념비 내용의 한자를 한글로 적었으며, 인명은 그대로 한자로 두었음을 밝힌다. 


새장터 3·1운동기념탑 앞에서
                                   구재기
어떠한 외침으로
어떠한 몸부림으로
그때의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 있었으랴
동백꽃, 봉오리 영글기 시작하는
예고된 봄날의 어느 하루
어디에서부터 밀려왔던 물결이었던가
푸른 삼월의 하늘에는
아직도 남아있는 조춘早春의 한기寒氣
부르르 부르르 치를 떨다가
피를 토하는 뜨거운 함성
상수리나무 오리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아카시아 미루나무 버즘나무 개입갈나무
피나무까지 알몸으로 끼어들어
꿈틀꿈틀 움돋는 소리까지 가득 모아
앞뒤를 따지지 않고 
마구 북을 치면서 
일제히 드높였던 소리를 들었는가
어쩌다 늦잠에 든 시간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지막 목숨까지 다하는 양
새장터 한 곳에 일제히 모여 
불꽃 튀는 행진곡을 연주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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