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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기획탐방】봉서사(鳳棲寺)를 찾아서...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 山河(서천산하)'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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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봉서사(鳳棲寺)를 찾아서 - 충남 서천군 한산면 건지산길 122

2019년 10월 17일 목요일 오후.

산애재(蒜艾齋)를 나선다. 가볍게 마음을 모은다. 마악 대문을 나서는데 어디선가 툭, 하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대문 곁의 잔디 위에 붉은 감 하나 떨어져 있다. 유난히 붉은 감이다.

이미 떨어진 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붉어질 대로 붉어진 감일수록 쉽사리 낙하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익을 때가 아닌데 익어버려 통째로 떨어져버리는 붉은 감알, 성급하게 삶을 마감한듯하여 안쓰럽기도 하다.

대부분 익지 않은 감들은 그대로 감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으면서 서서히 익어간다. 익을 때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때마다 감나무 가지는 지상을 향하여 공손히 고개를 늘어뜨린다.

산애재를 빠져나와 가을 들판을 가로지른다. 그야말로 황금물결이다. 태풍과 당당히 맞서 이겨낸 벼일수록 꼿꼿이 서서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런 벼일수록 더욱더 짙은 황금물결을 이룬다. 승용차의 핸들을 이리저리 꺾으며 달리는 마음에 풍요가 넘친다.

그동안 농부들의 발자국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으면서 오늘날을 기다려 왔을 것인가. 농부들의 발자국 소리가 황금물결을 이르고 있다. 아, 가을이다.


봉서사의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띄엄띄엄 자리한 농가들이 산녘의 농촌 풍경을 한 폭의 그림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가을햇살이 모두 모여 도란거리는 초가집 위의 붉은 고추는 보이지 않는다.

지난 날 같으면 초가집 위에 붉은 고추가 널리고, 한낮의 햇살에 입술을 꼬옥 다문 박꽃이 둥근 속살 같은 몸통을 드러내면서 배꼽을 엿보이는 모습도 바라볼 수 있을 터인데, 이제는 마음속에서만 살아오를 뿐이다.

이윽고 봉서사 주차장에 이른다. 한적하다. 주차장은 텅 비어있다. 여유로운 주차는 쉽게 끝난다. 가을바람 한 줄기가 이마를 스친다. 시원하다 못해 산뜻하다. 바람이 맛있다.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 가을 맛이다.

‘차량은 주차장에’라는 안내와 함께 ‘차량진입 금지, 사찰 내 정숙’이라는 글귀와 함께 한 표석이 겹치어 세워져 있다.


주차장에서 천천히 걸어 봉서사로 드는데 두 갈래 길이다. 아랫길은 요사체로 이어진 길이요, 위 길은 대웅전으로 이어진 길이다. 방금 보아왔던 안내판이 또 하나 더 세워져 있다. 혹 누군가는 굳이 봉서사 극락전(極樂殿) 앞으로까지 차를 몰아 올라가곤 하였던 모양이다.

옆 언덕위에 ‘법당으로 가는 길’이라는 표석이 심겨져 있다. 그리고 앞길에는 우람한 느티나무 세 그루가 버티어 서 있다. 안내에 의하면 이 중 두 그루는 수령 500년, 수고 20m, 흉고둘레 3m나 되는 교목이다. 서천군의 보호수란다.

봉서사 안내의 글을 본다. 전통 사찰 제26호인 봉서사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건지산성길 122에 위치하여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마곡사의 말사(末寺)이다.


극락전과 심검당, 그리고 삼성각과 종무소가 있다. 극락전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존불로 봉안하고 좌측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우측은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인데 불상은 모두 목불(木佛)에 금도금을 했다한다.

특히 이 사찰은 이곳 서천의 인물인 석북 신광수(石北 申光洙), 월남 이상재(越南 李商在), 석초 신응식(石艸 申應植) 선생 등이 머물며 웅지를 키웠던 곳이라 전해진다.

느티나무 교목 밑으로는 요사체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그 계간 양 옆으로는 ‘법구경 183번’에 나오는 구절이 나뉘어 돌에 새겨져 있다. 잠시 생각에 머물게 한다.

諸惡莫作衆善奉行 自淨其意是諸佛敎(제악막작중선봉행 자정기의시제불교) : 모든 악을 짓지 않고 선을 행하고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한다. 이것이 불교이다.


마음이 숙연해진다. 느티나무 그늘 속에 묻혀있는 ‘수심도량(修心道場)’이라는 글귀마저 더욱 눈에 잘 뜨이어 심히 경건해지기까지 한다.

‘모든 악을 짓지 않고 선을 행하고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말이 얼마나 크고 무겁게 내려앉고 있는가?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는 쉬운 말이다. 누구나 쉽게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백살 노인조차도 실행하기는 어렵다. 다시 한 번 되뇌어본다. ‘악한 일을 결코 하지 말아라. 착한 일만 행하라. 마음은 늘 순수하게 가져라, 이것이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의 가르침이다’ 몇 번이나 되풀이로 생각해보아도 역시 쉬운 한 마디지만 쉽게 행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거듭 알아차린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샘가에 있는 안내판의 글을 옮겨 적는다.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봉서사목조아미타여래삼존불상(鳳棲寺木造阿彌陀如來三尊弗像)에 대한 안내이다. 

봉서사(鳳棲寺)는 건지산에 봉황이 둥지를 튼 모양에 자리한 사찰로써 조선 후기에 찬건되어 한산 사람들의 기도처이기도 하며 월남 이상재, 석초 신응식 선생 등이 공부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에 있는 봉서사목조아미타여래삼존불상(鳳棲寺木造阿彌陀如來三尊弗像. 보물 제1751호)은 조선 후기 조각승 수연(守衍)의 작품이다. 이 삼존상은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하고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이 협시하는 아미타삼존 형식이다. 삼존산에서 발견된 발원문에는 1619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시기와 조성 주체, 시주자 등 관계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봉서사목조아미타여래삼존불상은 17세기 전반기에 추구했던 불상의 대중적 소박함과 조각승 수연이 추구한 중량감 있는 형태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극락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인다. 무엇인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를 맞닿은 두 입술 사이에서 몇 마디 끌어내려 하였으나 끝내 어쩌지 못한다. 계단으로 천천히 올라 극락전의 왼쪽으로 하여 조심조심 법당 안에 든다.


다시 두 손을 모은다. 작은 시간의 마음으로 삼배를 올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미타삼존불과 마주한다. 인자함이 절로 배어 오르는 입가의 미소 속으로 빠져든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있음을 느낀다.

법당(法堂)에는 전(殿)과 각(閣)이 있다. 법당은 불교의 교리에 따라 예배의 대상이 된 부처나 보살을 봉안되어 있으며, 각은 원래 불교에서 보면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불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수용된 민간신앙이 산신(山神), 칠성(七星) 등이 봉안되어 있다. 불전(佛殿)으로는 적멸보궁(寂滅寶宮), 대웅전(大雄殿), 나한전(羅漢殿), 대적광전(大寂光殿), 극락전(極樂殿), 약사전(藥師殿), 그리고 미륵전(彌勒殿) 등이 있다.

봉서사의 극락전은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었으니 이른바 서방의 극락정토를 축소시켜 묘사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극락이 서쪽에 있다하여 극락전은 보통 동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데는 자연스럽게 서쪽으로 향하게 되어있다 한다.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혹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봉안한다. 

본존불인 아미타불은 서방 정토의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왕생의 길로 이끌어주는 불법을 설한다. 아미타불의 인계는 오른 속을 가슴 앞까지 들어서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왼손을 무릎 위에 놓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잠시 삼존불 뒤에 그려놓은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를 눈여겨본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지배자를 말하며, 불교의 보살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보살 중 하나로, 석가모니의 입적 이후 미래불인 미륵이 출현할 때까지 중생들을 고통으로부터 지켜주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보살이다.

또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은 뛰어난 지혜의 보살로 지혜문(智慧門)을 대표하여 중생을 삼악도(三惡道: 악인이 죽어서 가는 세 가지의 괴로운 세계, 즉 지옥도, 축생도, 아귀도를 말함)에서 건지는 무상(無上)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3악도를 떠나 거짓이 없는 힘을 얻게 해주는 보살이다.

극락전으로부터 나와 가파른 돌계단에 오른다. 삼성각의 둘레를 살핀다. 옆문을 통하여 안에 든다.

삼성각(三聖閣)이란 곧 독성, 칠성, 산신을 봉안한 곳이다, 독성(獨聖)은 나반존자로 천태산에서 홀로 수행한 성자로 긴 속눈썹을 가진 늙은 비구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일을 꿰뚫어 알고,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중생의 소원을 성취시켜준다.

칠성(七星)은 수명을 관장하는데 자손에게 복을 주고 장애와 재난을 없애준다고 하며, 산신(山神)은 민족고유의 토착신으로 불교에 흡수되어 불법을 지키게 되었는데 호랑이와 더불어 산속의 평온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이 같이 봉안한 삼성각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전각(殿閣)이다.

법당에서 물러나오면서 지난날의 언제였던가, 지우(知友)의 손과 하나로 모아 잡고 텅 빈 예배당에 들어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십자가 앞에서 고개를 숙였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나 자신도 알아듣지 못하는 목소리 몇 마디로 물러났던 그때 그 시간, 공경하는 마음이랄까, 아니면 조심스러워진 마음이랄까, 몸가짐이 알게 모르게 스르르 낮아짐은 물론이요, 조금은 저어스럽고 경의로워짐에 빠져든 적이 있다.


경건한 마음을 바르게 하여 스스로 몸을 낮추어지게 하는 것이야말로 순수한 마음이 절로 일어나게 하는 어떤 힘이 나에게 미침을 말해주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무릇 종교란 현재 살고 있는 이 시공(時空)에 새로운 인간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종교는 일상의 삶에 따른 고뇌와 역경으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진정한 의미의 성취이며 또한 위대한 승리가 된다.

비록 무기력한 인간일지라도 인간만이 가지게 되는 이념의 정수리로부터 확신을 얻을 수 있는 지혜로움이 있으며, 그 지혜로움으로부터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정 받을 수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나의 종교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원일 수 있으며 파괴될 수 없는 정신적 지주로서의 정수(精髓)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드는 동안에 어느덧 몸은 절 마당 한 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오후의 그림자가 절 마당에 길게 누워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심검당(尋劍堂)에 닿아 있다.

심검당의 ‘신검(尋劍)’이란 ‘마음을 찌른다’ 함이니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尋牛莊)’이 가지는 의미처럼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이란 의미가 아닐까?

불교 용어로서 도(道)의 대표적인 뜻으로 ‘길 또는 진리’를 말함이요, 진리에 들어가는 길이란 성도(聖道) 또는 무루성도(無漏聖道)이며, 그러한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름을 일컬어 보리(菩提)라 하거니와 심검당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도 나 같은 속인으로서는 불경(不敬)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그림자는 더욱 짙고 길게, 그리고 자꾸만 거듭으로 드리워진다.




봉서사鳳棲寺를 찾아서
                                  구재기


몸에 빛이 깃들어
하나의 생명을 이룬다면
그런 빛으로 무엇인가 깨닫기라도 하겠다
하늘의 해와 달, 그리고 모든 별들까지 
함께 한 몸을 이룰 수 있겠다

태어나자마자 
눈부신 빛의 무리 앞에서
그만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다

빛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할 때
꽃밭 꽃들도 꽃잎을 살포시 닫고
빛이 점점 자라는 아침이면
벌떡 일어나 꽃술을 펼치고는 
벌나비를 불러들이고 있지 않던가. 

아침과 저녁 사이
빛이 있는 시각, 
서로가 서로에게 깃들어
눈부신 빛과 향기를 뿜어낼 때
수많은 길을 걸을 수 있다면

내 몸을 잘 꾸며서 
빛 속에 깃들게 하면 된다
몸이야 어차피 언젠가는 
가장 확실하게 사라지는 것이지만
한 몸 내어 빛이야 깃들게 할 수는 있다

태어날 때 맨 처음으로 
만난, 바로 그 빛의 품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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