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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기획】<신수용 한국정치사(4)> 해방후 첫 정치세력, 건준결성과 패퇴...한민당 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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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여운형과 우익 안재홍중심의 건국동맹이 해방과 함께 건국준비위 조직, 전국 145지부결성.
-건준이 우익인사와 임정요인들의 승락없이 내각구성했다가 되레 역풍.
-우익인사중심 한민당, 임정요인등 우익인 김구 이승만 서재필 송진우 조병옥등 참여.
-건준이 박헌영등 좌익집결체로 변질되자 미군정이 이를 인정하지 않아 결국 몰락.

[sbn뉴스=세종] 신수용 대기자 = 해방후 정치권은 어땠을까?


1945년 8월14일 라디오에서는  다음날(8월15일) 정오에 중대발표를 예고하고 있었다.


방송예고가 아니어도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는 말이 항간에 나돌았다. 연합군이 승리했다는 소식도 나돌았다. 때문에 우리 민족의 독립이 결정적임을 예견된 것이다.


역사적인 8월15일, 전국적으로 일제에게 수감되었던 수많은 항일투사들이 일제히 옥문을 열고 나왔다. 갖은 학대와 수난을 당했던 독립투사들이 쇠사슬에 풀려났다.



민족해방을 예견한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과 민세(民世)안재홍(安在鴻)은 건국동맹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여운형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도 참여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으로 활동한 언론인이었다. 

 

그는 1944년 8월 10일 서울 삼광한의원에서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지방 조직에 이어 10월에는 경기도 용문산에서 농민 동맹, 1945년 3월에 건국동맹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북경과 연안 등지에 연락원을 파견하여 임시정부와 화북조선독립동맹 등 해외 혁명단체와의 연계를 시도했다.


이어 1945년 8월14일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를 조직했다. 일본이 패망해 물러난 뒤 이 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를 준비하고 나섰다.


여운형의 생각이 맞아 떨여졌다. 일제가 패망한 것이다. 나라를 새로이 세워야하는 중대한 순간을 맞았다.
 
◇좌파의 여운형과 우파 안재홍이  정치세력 건국준비위 조직


그가 주도한 건준은 8월15일부터  서울 제동 임용상 소유의 2층 양옥 건물에 본부를 두고 본격적인 활약을 개시했다.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안재홍. 허헌이었다. 


총무부장에 최근우, 재무부장 이규갑, 조직부장 정백, 선전부장에 조동호 ,경무부장에 권태석이 맡았다.


고하 송진우를 포섭하려다 실패한 일본 조선총독부는 비밀리에 여운형을 접촉했다. 중대한 발표가 있다는 8월15일 오전 7시30분에도  여운형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인 엔도(遠藤)과 만났다,


정무총감이라는 작자는 몽양에게 보기좋게 딱지맞은 고하 송진우에게  썼던 술책을 다시 내놨다.



총독부로부터 4, 5차례나 교섭을 받은 송진우나 김성수(金性洙) 장덕수 등 우익인사는 총독부의 회유에 즉석에서 거부했다. 일본이 패전했으니 조선을 안전하게 떠나도록하는 신변보호 총책임자자리를 냈지만 거절했다.


여기에 온갖 특혜와 재물도 제시했으나,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러자 총독부는 송진우에게 거절당하자, 여운형에게 접근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여운형에게 모종의 조건을 미끼로 회유했다. 


일본이 한반도를 떠난 뒤 나라를 통째로 잡고 흔들 구상을 그린 여운형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도 다같이 독립투사요, 애국자라고 믿었기에 모두가 여운형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날 이를 승낙한 여운형은 돌아와 건준을 재정비, 조직을 전국화하려고 판을 짰다.


이튿날인 8월 16일 오후 1시에는 만세소리와 태극기물결이 서울 등 전국 지방과 도시를 뒤덮었다. 해방의 감격과 환희가 수라장을 이뤘다.


그 시각 건준본부이웃에 있는 서울 제동의 휘경중학교 운동장에는 수천관중이 모였다.


연설대에는 여운형이 올라섰다. 그는 이름난 말재주꾼이었다. 웅변에 능한 여운형은 화려한 말솜씨로 군중을 휘어 잡았다.


여운형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유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하는 웅변가였다.

그를 아는 정치인들은 천재적인 달변가였다고 했다. 또 그를 능가할 말잘하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그의 격앙된 목소리가 교정을 울릴 때마다, 열광적인 군중의 박수가 쏟아졌다. 여운형의 연설을 이랬다.


‘조선민족 해방의 날이 왔다. 어제(15일) 아침 8시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인) 엔도의 초청을 받아 조선 일본 두 민족이 서로 헤어질 오늘을 당하여 오해로서 피를 흘린다든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이에대해 조선각지에 구속돼있는 정치.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는 등 5가지를 요구했는데, 즉석에서 무조건 응락을 하였다.


이것으로 우리 민족 해방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오게될 터이니 그들이 올때까지 우리는 작은 힘이나마 서로협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매일신보 1947년8월17일자)


확인해보니, 여운형은 조선총독부로부터 80만 조선거류 일본인의 신변보호를 요구하자 대신 5가지를 총독부에 요구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치·경제범의 석방, 3개월분의 식량 확보, 조선인의 정치활동 및 청년 학생 노동자 농민의 조직활동 불간섭 등이다.


◇건준이 당사자 승인 없는 이승만. 김구등을 인민위원에 임명


다급해진 총독부는 이를 즉석에서 승낙했다. 이 배경으로 건준을 만든 것이다.


이어 이날 오후 3시에는 건준 부위원장인 안재홍이 경성방송국에 출연, 건준의 활동과 역할을 소개했다. 그는 20분간 ‘해내·해외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방송에서 그는 이제 해방된 마당에 우리 동포들이 다같이 냉정과 침착을 유지하면서 경거망동하지 말고, 건국대업에 총궐기하자고 외쳤다.


당시 안재홍은 ‘국민 각위 남녀노유는 이즈음 언어동정을 각별히 주의하여 일본인 주민의 감정을 자극함이 없도록 진력해야한다.


5백만 조선동포가 수난의 생활을 하는 것을 생각할 때 1백 몇십만밖에 되지않는 일본인의 생명 재산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을  총명한 국민 제씨가  충분히 이해하실것으로 의심치 않습니다’(매일신보 1945년8월17일)


이후 서울(경성)시내에는 치안대 완장을 두른 한무리가 군중의 힘을 배경으로 일부 경찰서나 파출소에 들어가 일본인을 강제로 내쫓았다. 



이렇게 건준이 드러나면서 정계의 기선을 제압했다. 건준으로서는 국민의 해방조국에 대한 기대감에 편승, 존재와 가치를 드높였다. 더구나 정부수립을 위한 정권을 장악하는데 매우 유리한 조건에 선 것이다.


건준은 8월말 쯤 145개의 전국 지방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9월말 미군정이 들어오기까지 수송과 통신, 치안과 행정권을 맡아 행사했다.


12국 1부라는 건준의 중앙조직은 정부형태를 갖춰  여운형중심의 중도좌파와, 안재홍중심의 우파, 그리고 이강국중심의 좌파로 연합체를 만들어 8.15 광복 후 정치과도기에 대중적 지지를 받는 듯했다. 


해방의 감격이 채가라 앉기도 전에, 정치적인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이번엔 조선인민공화국에 태어났다. 


여운형게의 건준에서 9월6일 서울시내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 인민대표라는 인사를 불러모아 결의를 한 것이다.


참석자만도 1000여명의 대규모였다. 이날 건준주최 전국인민대표대회는 국호(國號)마저 ‘조선인민공화국’이라고 정했다.


여기에는 독립투사는 물론 항일운동가, 국내 각계 리더들이 총망라되었다.


당시 기록에 보면 전국인민위원에는 이승만(李承晩), 김구(金九), 여운형 등 55명을 비롯, 후보위원에 김준연(金俊淵), 최창익(崔昌益), 황태성(黃泰成) 등 20명, 그리고 고문으로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김창숙(金昌淑) 등 12명이었다.


문제는 당사자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건준이 이들을 임명한데 있다.


건준은 당시 9월8일에 있을 UN과의 절충할 취지에서 이를 내세웠다.  건준은 그 때 ‘조선인민층의 결집체가 있어야한다’는 명분을 들어 정부의 조각(組閣)을 서둘렀다.



그러더니 건준 간부들은 연일 비밀회동을 갖더니, 그들 마음대로 조각에 착수해 이를 세상에 공표했다. 이어 9월13일, 14일 양이틀에 걸처 좌익계가 중심이되어  회의를 거듭했다.


◇건준, 국호를 인민공화국으로 선포...우익진영 한민당 창당


그뒤 14일 오후 소위 ‘인민공화국’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이어 벽보로 내각 명단을 공표하자 세상이 시끄러웠다.


내각명단에 포함된 인사의 대다수는 검증도 거치지 않았다. 검증은 그만두고도 본인에게 의사를 타진해 승낙조차 받지 않은 ‘묻지마 조각’이었다.  
 

대체 본인의 일언반구 승낙도 없는 ‘즉흥조각’이었다는 말이 유행어가 됐을 정도다. 


당시 신문들은 ‘불과 하룻밤사이에 완성해 놓은 성급한 각본으로 세인의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했다’고 적고 있다.


조각이 발표되자, 우익진영인사들은 조소를 금치 못했고, 미군정은 벽상정부(壁上政府)를 상대하려고하지 않았다.


얼마되지 않아 박헌영이 나서 조선공산당인 좌파를 건준에 더 넣으려고 나서자 안재홍이 사퇴했다.


좌파와의 주도권 경쟁에서 우파는 거의 없어 안재홍이 밀리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안재홍은 사퇴서에서 ‘건준이 초계급적 협동정신으로 명실상부한 과도적인 기구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편향된 성격인 특히 좌익세력의 집결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고 비난했다.



좌익인사들로 결성된 건준을 상대로, 우익인사들이 결집한 한국민주당(한민당)이 창당한 것도 이 즈음이다.


같은해 9월16일 오후 3시 서울 경운동에 있는 천도교 대강당에서 한국국민당, 고려민주당, 조선민족당, 국민대회준비위, 중경임시정부 및 연합군환영준비위원회 등의 대표 등 2000여명이 모여 결당식, 즉 창당식을 가졌다


한민당은 좌익계열의 정치적인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당 조직을 강화했다.


한민당의 주도세력은 인공타도와 중경임시정부 절대지지를 밝히면서 영수에 이승만·김구·이시영·문창범·서재필·권동진·오세창 등을 추대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수석총무 송진우, 총무 원세훈·백관수·서상일·김도연·허정·백남훈·조병옥·김동원 등을 인선 발표했다. 


한민당은 정강으로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국가완성', '민주주의 정체수립', '근로대중의 복리증진', '민족문화 앙양과 세계문화에 공헌', '국제헌장준수와 세계평화 기여' 등을 제시했다. 


우익진영의 최초의 통합정당인 한민당은 정책으로는  '국민기본생활의 확보', '호혜평등의 외교 정책수립',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신앙의 자유',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중공업주의의 경제정책 수립',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국방군의 창설' 등을 내세웠다. 


한민당은 김구와 이승만 등 해외망명 지도자들이 아직 환국하기 전에 이들을 영수로 추대하면서 해방정국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했다. 


한민당의 모체는 두 군데서 태동한 대한민주당과 민주국민당이다. 대한민주당이나 민주국민당은 민족진영인사들의  모임이 결사체다.


이 민족진영 우익인사들은 대동집결체를 이루어야한다는 목적으로 이승만, 김구, 서재필(徐載弼), 이시영(李始榮), 권동진, 오세창, 문창범 등을 추대했다.


그러나 이듬해 10월 원세훈·이순탁·김약수 등 진보적인 중진간부 100여 명이 탈당하면서 한민당은 전형적인 보수정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한민당은 지주·친일관료·법조인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로인해 인민공화국을 발표한 좌익계와 그를 반대하며 나선 우익진영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사면초가에 빠진 여운형의 ‘건준’


여운형의 일방적인 인민공화국의 조각에 대해 한민당은 공식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건국이니, 조각이니 따위의 주장을 일거에 가치도 없는 것으로 평가했다. 한민당은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인사들이어서 명분도 반듯했다.


여운형등 인민공화국을 발표한 건준세력들은  한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다.



여론에서 밀린 여운형은 그해 10월1일 자신의 집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내외 인사가 모두 단결해야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혁명에는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럴수록 여운형은  험난한 난관에 직면했다.


직후 10월16일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 박사는 자신이 주석으로 피임되어 있음에도 ‘인민공화국’에 눈길을 주지않았다.


한민당이나 미군정 당국에서는 여러차례 공식적인 논평을 냈다.


한민당이나 미군정은 ‘조선에는 군정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켰다.  


특히 미군정은 여운형의 인민공화국에 대해 인민공화국은 다만 정치능력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규정했다.


이에 격분한 여운형의 인민공화국은 반박성명을 내는 등 사태는 매우 긴장되었다.


한민당과의 대립에 이어, 미군정과도 대립하면서 인민공화국에 대한 일반국민의 여론은 매우 나빴다고 신문들은 전한다.


이로써 여운형의 좌익계열은 악화된 민심으로 사면초가에 싸이게 됐다.


문제는 우후죽순 저마다 정당과 단체를 만들어 극심한 혼란에 빠진 것이다. 그러자 뜻있는 우익인사들은 각 정당과 단체들을 무조건 해체하자는 제안했다. 


그런뒤 통일전선에 힘쓰자는 대안도 나왔다. 이 통일전선에는 인민공화국에서 여운형이, 국민당은 안재홍이,공산당은 박헌영 등이 참석하겠다고 밝혔다.


◇우익 정당 한민당은 좌우익회의 불참...통일전선회의 불발


그날이 10월17일로 이승만 박사가 귀국한 다음날이다.


여운형은 인민공화국을 해제하는 하는 일이 있더라도 무조건 참석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한민당은 불참할 뜻을 표명했다. 당시 기록들에는 한민당 수석총무인 고하 송진우를 통해 불참이유를 밝혔다.


내용은  중국임시정부와 여운형이 대립되는 한 만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 여운형이 인민공화국을 성립시킨데 대해  정식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나오지 않는 한 공식회담에 응할수 없다고 설명했다.


여운형은 이에 대해 “통일을 위해서는 인민공화국 해체도 시킬 용의가 있다”고 밝혔지만, 송진우는 완강했다.


송진우는 “여씨의 그 의견을 누가 증명할 것인가. 우리는 오직 중경(重輕)에 있는 임시정부밖에 없으니, 그와 대립되는 그 어떠한 단체나  개인과도 회담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라고 천명했다.


한민당은 이처럼 입장을 분명히 했다. 때문에 여운형의 벽상정부를 극력반대하면서 통일전선집결문제는 끝내 결렬됐다.


연합군의 진주로 해방된 조국의 통일독립을 급속히 성취하려는 꿈에서 하루아침에 급거 날조한 인민공화국의 벽상정부는 여운형의 노력에도 보람이 없이 몰락했다.


너무도 조급하게 서두른 조각발표가 동기가 되어 화(禍)를 얻어 고스란히 참패한 것이다.


미국 군정정은 군정대로 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고, 한민당은 한민당대로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모두 우익민족진영으로 집경했다.


이후 한민당 등은 국민대회 준비위원회까지 만들어 이승만 박사와  김구·김규식 선생의 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다렸다.


얼마 후 여운형과 손을 잡았던 연안파 공산당은 그들대로 독립을 선언하고 떠났다.


스스로 비운을 맞은 여운형은 실의에 빠져 한동안 낙향의 정객이 됐다. 이로인해 건준, 건국준비위원회도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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