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많음동두천 27.7℃
  • 구름조금강릉 26.0℃
  • 구름조금서울 28.8℃
  • 연무대전 27.5℃
  • 구름많음대구 25.1℃
  • 구름조금울산 23.8℃
  • 흐림광주 24.4℃
  • 구름많음부산 24.2℃
  • 구름많음고창 24.8℃
  • 구름조금제주 23.7℃
  • 구름조금강화 24.7℃
  • 구름조금보은 25.3℃
  • 구름많음금산 26.9℃
  • 구름많음강진군 25.1℃
  • 구름많음경주시 25.5℃
  • 구름많음거제 24.6℃
기상청 제공

신수용의 뉴스창

【기획】<신수용 한국정치사(6)> 반탁 이철승, 찬탁 박헌영의 등장...조선반도 회오리.

미국.소련, 조선을 통치하기위해 2년간이나 논의했으나 결론못내.
-김구.이승만등의 반탁운동에 학생운동가1호 소석 이철승 등장.
-충남예산의 박헌영, 조선공산당결성등 공산화에 힘쓰다 김일성 토사구팽.
-충남부여출신 초대외무장관 임병직, 동아일보 주미특파원때 얄타협정비밀내용폭로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한반도 정세가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해가 바뀌어 해방 2년차가 됐다. 1946년 신년, 김구선생을 중심으로 한 76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구체적인 반탁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하루 전까지 반탁에 동조했던 좌익들이 배반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됐다.


1월2일 오후 2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아리송한 성명을 낸다.



앞서 소개했듯이 이들은 ‘신탁통치반대는 민족통일에 있지 무계획한 흥분적 투쟁으로서는 해결될 수없다’는 말로 시작하더니 끝내 속셈을 드러냈다.


이어 ‘조선을 싸고도는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판단, 분석해야한다“라면서 ”을사조약과 같다고 하여 철시파업은 시민의 생활을 질식시키는 행동이니 삼가고, 민주주의적 민족통일전선을 공고히 하자’고 바뀌었다.


◇좌익의 찬탁과 학생운동가 1호 이철승 학생반탁결성.


그들은 심지어 다음날 오후 독립촉성시민대회에 서울시 인민위원회를 비롯하여 각단체가 참여했으면서, 참가한 적이 없다느니, 이 모임과 같이 할 수 없다느니의 군색한 변명만 내놨다.


은근 슬쩍 나라운영의 주도권을 쥔 우익의 눈치를 떠보려는 속셈이었다. 이는 곧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서려는 간교한 계략이었다.


때문에 민족은 신탁통치반대를 주장하는 우익과 신탁통치찬성의 좌익으로 갈라섰다.


1월2일 오후 2시 서울 한청빌딩에서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학생들의 발기로 서울시내 11개 남녀 전문학교 대표들이 반탁 전국학생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위원장에는 서울출신인 이철승(李哲承, 1922년 5월 15일 ~ 2016년 2월 27일)이 맡고 민족자결.신탁통치반대,자주독립등 3개 강령을 만들었다. 이철승등은 전국적인 학생운동을 강력히 전개했다.


이철승은 이를 계기로 공식적인 학생운동가 1호다. 그의 호는 소석(素石)이다.


우리에게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장면, 윤보선 등과 함께 제3공화국·제4공화국 시절 박정희의 경쟁자로 알려졌다. 박정희이후 잠재적인 대안자의 한사람으로 꼽힌 민주당 신파 출신이었다.


그의 본관은 충남 연기군 전의(全義)다. 서울에서 태어나 전북 완주와 전주에서 성장했다. 

일제 후반에는 전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징집반대 등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큰아버지  이석주의 권고로 인촌 김성수선생을 찾아가 보성전문학교로 전학, 교내 반탁 학생이 됐다.


강제 징집 거부로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다가 1944년 1월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끌려갔다. 


그 뒤 오사카의 병참부대에 배속, 1945년 8월 자살특공대로 차 출당했다가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군에서 탈출했다. 


미군정 때는 우익 학생 운동과, 신탁통치 반대 시위 당시 김구, 김성수 등을 도와 학생 반탁 집회를 주관하였고,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제헌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친일 경찰 채용 등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6·25 전쟁 중에는 학생들을 모아 전국학련 학도의용군을 편성, 낙동강전선과 대구에서 참전하였다.


그의 정의감은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국민방위군들 병사들에게 전달해야할 50여억 환의 자금과 재물을 착복한 것을 국회에서 폭로하게 하였다.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6.25 전쟁 중에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 사건이다.  한국에 파견된 외신들이 톱으로 다루고, 유엔 등이 한국 지원을 검토하겠다고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압박하는 사태다.


 이를 계기로 이승만의 제1공화국 기간 중 자유당에 반대하여 야당 정치인으로서 활동했다. 






초대 제헌의원 선거에는 낙선하였으나, 3대, 4대, 5대, 8대, 9대, 10대, 12대 국회의원을 지낸 7선 의원이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의 회유를 거부하고 반 군정 운동을 하였다. 1970년대 김영삼, 김대중, 윤보선, 유진산 등과 신민당의 당권을 놓고 경쟁관계에 있었다. 


이철승은  중도화합론을 주장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 정계 은퇴, 우익 시민사회단체를 지도하였다.


◇충남 예산출신인 좌익박헌영의 등장과 찬탁운동.


우익인사와 단체들은  춘천. 개성 등에서 전국에서 연이어 군중대회를 열어, 미소 신탁통치는 제2의 을사 늑약이라며 기세를 올렸다.


서울에서도 우익이 종로에서 반탁운동을 벌이면, 같은 시각 광화문에서 좌익이 신탁운동을 전개했다.    



1946년 1월3일자 신문을 보면 좌익의 행태가 나온다.


좌익은 이날 서울운동장에서 ‘민족통일자주 독립 촉성 서울 시민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철시파업반대, 연합국배격은 자살행동‘이라고 결의문을 통과시켜 신탁통치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신탁통치반대와 신탁통치찬성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박헌영(朴憲永)이다.


같 은해 1월 5일,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은 2시간에 걸친 내외 기자단 회견석상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한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이는 공산당의 신탁통치 찬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박헌영의 기록을 보자. 그는 충청남도 예산에서  쌀장사를 하던 아버지 박현주(朴鉉柱)와 소실인 어머니 이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살 때인 1912년 예산군 대흥면 대흥보통학교에 입학,1915년 졸업과 함께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교때  서울 종로 YMCA 영어 반에서 공부하며 3.1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졸업했다.



1920년 9월  독립운동의 거점이던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상해에서도 YMCA활동을 하면서 임원근(林元根)·김단야(金丹冶)·최창식(崔昌植) 등과 함께 김만겸(金萬謙)의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입당했다. 공산당 입당후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로 일했다.


1922년 1월 김단야·임원근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고려공산청년동맹 대표로 참가했다. 그러나 그해 4월에 김단야·임원근과 함께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해 귀국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1년 6월의 형을 살았다.


만기 출소한 1924년 직후 그 해 2월 결성된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하여 김찬(金燦)·신철(辛鐵) 등과 청주·대구 등 전국 28개 도시를 순회하며 사회주의선전에 나섰다. 


기관지 ‘신흥청년’의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다. 그해 4월 허헌(許憲)이 사장으로 있던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하였다.


박헌영은 그해 9월 홍증식(洪增植)의 추천으로 조선일보 사회부로 자리를 옮겼으나, 10월 15일 신일용(辛日鎔)의 ‘조선과 러시아의 정치적 관계’라는 사설이 문제가 돼, 조선일보 제3차 정간사건으로 임원근·김단야와 함께 강제해직되었다.


◇박헌영,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 거쳐 국내 공산당조직 결성.


이듬 해 국내 공산주의운동의 한 핵심 분파로 박헌영이 속한 화요회(火曜會)가 중심이 되어 김약수(金若水)·김재봉(金在鳳)·윤덕병(尹德炳)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창당대회’를 열어 국내 공산당 조직을 창설하게 된다.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고 책임비서직을 맡아 본격적인 조직 활동을 전개하다가 11월 30일 박헌영의 처 주세죽과 함께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일경에 또 잡혀 복역하게 된다.


박헌영은 재판 중에 미친 사람으로 가장하여 1927년 11월 병보석으로 출감했고 다음해인 1928년 11월 국내에서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1932년 1월 상해로 가서 김단야와 접선하여 김형선(金炯善)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코뮤니티’라는 기관지를 제작, 국내에 배포했다. 이후  1933년 7월 상해 일본영사관에 잡혀 경기도 경찰부로 압송, 치안유지법·출판법 위반으로 기소, 6년형을 받아 복역하였다.


1939년 만기 출소하여 김삼룡(金三龍)·정태식(鄭泰植) 등과 함께 세칭 경성콤그룹을 조직하는 데 지도역할을 했다. 일본경찰이 검거망을 좁혀오자 광주로 피신하여 김성삼(金成三)이란 가명으로 기와공장 인부로 취직하여 몸을 숨겼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8월 19일 서울로 올라와 광복 다음날 결성된 장안파 공산당에 대항하여 8월 20일 충남금산출신 이현상(李鉉相)을 비롯하여 김형선·이관술(李觀述)·김삼룡 등과 함께  공산당 재건에 주력했다.


9월 1일, 6일, 8일 열성자대회를 연이어 개최했다. 9월 8일 열성자대회에서 세칭 장안파와 재건파가 연석회의를 갖고, 이를 통합한 조선공산당의 중앙기구를 구성하여 책임비서에 취임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창설하자 그는 1주일 뒤인 10월 23일 조선공산당을 이끌고 이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11월 16일 친일파를 우선적으로 숙청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선(先) 건국 후(後) 친일파숙청’을 내세운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서 탈퇴한다.


1945년 말 모스크바3상회의 결과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안이 발표되자 조선공산당이 찬탁으로 노선을 바꾸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46년 1월 8일 그는 ‘뉴욕타임즈’와의 기자회견에서, 소련만의 신탁통치를 찬성하며, 조선은 소련의 연방국으로 편입될 것을 주장했다는 시비로 이의 사실 여부를 둘러싸고 물의가 빚어지기도 하였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뉴욕타임즈’ 서울 특파원발신이라는 기사를 보자. 1월15일 오전 7시5분 아침뉴스에서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인 박헌영이 조선은 소련연방의 신탁통치를 절대지지하며, 5년 후 소련연방에 편입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찬탁운동으로 본색을 그대로 드러낸 박헌영.


유엔과 미국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뿐만 아니다. 김구. 이승만. 신익희. 조병옥등 국내 정치지도자들은 물론 각계의 비난과 함께 더 강한 응집력을 보였다. 



이로 인해 외부의 요인으로 해방감격도 사라지고  우리 민족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이튿날 1월 16일 오후 2시 한민당 집회소에서는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노 박헌영은 조선을 떠나라’라며 비난하는 각단체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여기에 참석한 건청(建靑),청총(靑總).반탁학련(反託學聯)등 20여개의 정당과 단체 공동명의로 ‘박헌영  규탄 성명서’를 냈다. 


이곳 저곳에서 ‘빨갱이 박헌영 때려 *이자’라는 시위집회가 열렸다.


그러자 사태의 심각성을 안 박헌영이 해명하고 나섰다.



그는 “내 영어 실력이 서툴러서 ‘조선이 언제 소비에트 화(化)할 지 모르나 조선은 독립국이다’라고 말한 것이 와전된 것이다”라고 뻔뻔한 거짓말을 했다.


국내외 신문이 이를 일제히 보도했다. 


이어 1946년 2월 15일 좌익세력의 총결집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됐다. 박헌영은 이때 골수 공산주의자인 여운형(呂運亨)·허헌·김원봉(金元鳳)·백남운(白南雲)과 함께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7월 12일 이른바 조선공산당 위폐사건을 계기로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국면이 전개된다. 이후 9월 6일에는 미군정이 박헌영 등 공산당 핵심간부 검거에 나섰다.


박헌영과 그의 일당의 위장술은 대단했다.


9월5일 미군정첩자로부터 검거령이 내려질 것이라는 귀띔을 받은 그들은 하루 전날 관(棺 )속에 누워 영구차 행렬로 자신들을 위장, 북한으로 탈출했다.



그 뒤 1946년 11월 3일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이 합쳐 남조선노동당으로 결성되자 부위원장에 취임했다. 평양에 머물면서 ‘박헌영 서한’을 통해 남로당의 활동을 지도했다.


1948년에는 남한 단독선거인 ‘5.10 총선거’가 실시되자 지하 선거를 실시하여 8월 29일에는 해주에서 남한선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선출하는 데 주도적인 활동했다.


그는 그러나 무너졌다. 1948년 9월 9일 북한에 정권이 수립되자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했다. 

하지만 세력기반이 남한에 있는 그는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1950년 1월에는 ‘남로당의 한국화’·‘남로당지하당의 남북통일에 관한 정책입안의 건’ 등을 작성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이후 그해 6·25전쟁이 발발하자 10월에는 인민군내에 총 정치국을 창설하여 인민군 중장으로 참전했다.


6·25전쟁 발발 원인에 관한 북한의 남침설 중의 한 갈래로 박헌영이 자신의 지지기반인 남한을 해방하여 자신의 세력을 만회하려 했다는 주장도 그래서 나온다.


1953년에 김일성에 의하여 남로당계 숙청이 감행되면서 8월 3일 체포되어 평안북도 철산군 내의 산골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았다. 


1955년 12월 15일 미국의 첩자·정부 전복 음모 등의 죄목으로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신탁통치 찬.반 속에 미.소공동위 개최를 둘러싼 대립.


그해 1월15일 오후 1시부터 군정청(과거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미. 소 공동위원회가 개막됐고, 이후 3시40분부터는 공식회의가 열렸다.


당시 미국 측 군정장관은 러치 소장이었다. 1월18일 소석 이철승이 이끈 반탁학련 학생들이 성토대회를 연 뒤 가두시위대가  미. 소영사관 문전까지 쇄도했다. 


학생들은 ‘탁치 절대반대’를 절규하며 험악한 사태로 이어지자 미 군정청은 불안했다.


다음날 러치장군은 ‘탁치를 초래하는 그 어떤 반탁운동은 자제해달라’고 경고하는 일이 생겼다.


 미. 소영사관 문전까지 쇄도했던 학생시위대는 광화문에서 멀지않은 을지로의 인민보사(좌익지)로 습격했고, 인민당 본부 서울시 인민위원회에 침입해 모두 파괴해버렸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좌익 측에서도 이에 대항하는 바람에 전국 곳곳에서 유혈극을 벌였다. 반탁운동에 참여한 여학생을 좌익이 납치해하는 가하면, 데모군중과 충돌을 빚었다.


러치의 경고에도 사태가 갈수록 험악해지자 무장경찰이 등장했다.


19일 새벽에는 서울 종로구 현 청와대 인근에서 좌익의 학병동맹본부를 둘러싼 경관과 학생 동맹원 사이에서

소총사격전이 벌어져 박진동외에 1명이 즉사했다. 학병동맹본부에는 무기가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심지어 1월 20일 오전 9시에는 종로경찰서가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 의과대(현재 연세대 의대)를 포위하더니 반탁운동 체포를 서둘렀다. 그러다가 이날 회의 중인 반탁학생 41명을 무더기로 체포하는 등 미.소공동위원회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했다.


미 군정청 하지 사령관이 나서 ‘시위 말고 건설하라’는 요지의 점잖은 성명까지 냈으나 반탁. 찬탁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찬탁의 좌익은  앞서 15일  서울 종로의 YMCA에서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더니, 23일 오후 서울운동장에서 ‘미.소양국대표 협의회 환영시민대회’를 열었다. 


반면, 24일 미군정의 고문기구격인 남조선 민주의원이 구성해, 지금껏 김구선생과 손잡고 반탁운동을 벌여온 이승만을 의장에 앉혔다.


이로써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가 커치고 기반을 다졌으나, 김구선생등 임시정부요인들과 맺은 결의대열에서는 서운함을 드러내게 했다.


시간이 흘러 3.1운동 기념행사가 우익은 보신각에서, 좌익은 남산에서 각각 여는 등 좌우의 충돌은 빈번해졌다.


이런 사이  1월6일부터 2월5일에 이르는 미. 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끝나고, 3월20일부터 덕수궁에서 제1차 미. 소공동위원회 정식회의가 열렸다.


이를 본 우익과 좌익은 상반된 입장으로 맞섰다. 급기야 미군정장관 러치 장군은 경기도 경찰국장에게 명령하여 ‘4월 8일 ‘미.소공동위회의기간  어떤 집회도 불허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좌익은 때를 만난 듯이 ‘미.소공동위원회 환영시민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열었다.


여기에다, 김구, 이시영, 신익희 등과 임정요인의 주축이던 김규식이 4월 18일 방송에 나와 ‘미소공동위와 합작노력을 하겠다’는 밝히며  반탁에 반기를 들었다. 


우익과 반탁진영을 흥분했다. 그렇게 믿었던 김규식이 박헌영이 주장하는 신탁통치에 찬성하고 나섰다는데 개탄과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 사령관은 김규식의 발표를 기다렸다는 듯이 성명을 낸다.


‘탁치를 반대하든, 탁치를 찬성하든 여부를 불문하고  미. 소공동위원회에 행하는 각정당, 사회단체와의 협의에서 회견할 수 있는 특권을 보장한다’


이는 신탁통치 찬성론자를 앞세워 조선민족을 설득해보려는 심사였다.


그날부터 30여 개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단체와 대표가 방송에 나와 미. 소 공동위원회에 참석하겠다는 취지로 나섰다. 이들은 이어 미.소공동위원회 제 5호에 서명했다.   


미국과 소련을 등에 업은 좌익에게 힘이 쏠리는 듯했다.  미국과 소련은 이에 맞춰 ‘탁치문제는 정부수립후에 해결하도록 하되 일단 미. 소 공동위원회에 좌. 우익 정당과 단체가 참여하라’고 발표한다.


이번에는 좌. 우익 대립에 앞서 미. 소가 충돌했다. 


미. 소공동위원회 개최 49일 만에 소련대표가 나와 ‘정당사회단체증에 탁치를 반대하는 단체는 임시정부 조직 참여에서 제외하자’ 고 나섰다.


그러나 미국 측 대표는 ‘민주주의의 기본권리인 의사발표와 자유를 봉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맞서, 의견대립으로 번진 뒤 무기한 휴회됐다.


또한 5월 들어 미국이 평양에 미영사관을 개설하자고 요구하자, 소련은 이를 막기 위해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을 돌연 철수했다.


이는 미. 소 공동위원회의 개최가 희박함을 암시한 것이다.

◇충남부요출신인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 임병직의 ‘얄타협정비밀’폭로.


충남부여출신이면서 독립운동가인 우리나라 최초의 외무장관이자 유엔 대사인 소죽(小竹) 임병직(林炳稷.1893년(고종 30) ~ 1976년)선생이 이때 업적이 드러난다.



이승만의 알선으로 미국 오하이오 디킨스대학에서 수학했다. 1918년부터 1919년까지 3·1운동 당시 독립운동에 필요한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진력하고 ‘한국학생평론’ 특집을 발간했다.


스스로 편집장이 되어  일제의 한국 강점의 부당성을 폭로하면서 세계에 독립 지원을 호소한 인물이다.


임 선생은 일제의 양민 학살, 잔혹한 고문 만행 등을 사진과 함께 적나라하게 이 책에 생생히 보도해 세상에 알렸다.


그는 이승만·서재필(徐載弼) 등과 같이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이후  일본 왕에게 보낸 한국독립을 절대적으로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서한을 일본공관에 전달하는 등 이승만 비서로서도 일을 했다.


1920년 6개월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상해 부임을 수행하였다. 1943년 재워싱턴한인협회 수석비서관으로 활동했으며, 1944년 미국전략사령부에 근무하면서, SOS작전을 적극 도왔다.


임시정부 대통령부 무관으로 대령에 임관되어 전 시중에도 한미교섭에 크게 활약하였다. 정부수립 후 1949년 외무부장관에 기용되었으며, 1951년 주유엔 대사가 되어 한국의 국제적 지위향상에 공헌하였다.


그는 1946년 3월13일자 동아일보 워싱턴 주재 특파원으로 3.8도선을 협약한 ‘얄타협의의 비밀’을 특종 보도했다.


당시 신문보도내용은 ‘소련은 조선전체를 요구, 미국은 북조선만 주기로 밀약’이란 기사다. 
3.8선의 미스터리가 풀리는 순간이다.


이는 1년 전인 1945년 2월12일 크리미아반도 얄타에서 열린 협정내용을 폭로한 것이다. 당시 얄타협정의 내용은 백악관 공무서철에 비밀리 보관중인 것이었다.



왜 미 국무성이 3.8도선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애매하게 둘러대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소련에게 미국외교가 한방 먹은 저자세 협정이라는 오명 때문에 ‘소련은 조선전체를, 미국은 북조선을 내주기로 했다’는 수수께끼가 임 선생의 특종보도로 드러났다.


이 보도에는 얄타 비밀협정에는 유럽과 극동아시아의 재분배 논의와, 만주와 조선은 세계전쟁을 끌어들일 위험한 지대로 규정했다.


또한 만주에 있던 소련군대가 3.8도선까지 끌어내리려는 계략이 숨어 있다고 했다. 때문에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전쟁의 위험성이 매우 높아 미국 하지 장군이 초조해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보도는  오래가지 않아 맞아 떨어졌다.


그 후 4년 뒤 6.25 전쟁발발로 이 얄타협정의 굴욕적 비밀이 확인시켰다.


이 보도 후 미국 사람들과 미국 내 한인 단체들이 미국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당시 수백만 명이 회원으로 있는 세계민권조례협회등이 나서 ‘소련의 지나친 행동과 미국의 애매한 굴욕적 협정’이라고 꼬집었다.


그 무렵 미국에서 열린 이 세계민권조례협회 대회에는 폴란드. 헝가리 핀란드. 그리스,터키,중국,한국등 각국대표가 참석했다.

기록을 보니, 당시 한국 측 대표 제임스 신 박사는 공식적으로 이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대변한다.


‘미 국무성은 어떠한 권위와 표준으로 조선이 자주독립정부수립의 준비가 되어있다고 주장하는 가. 일찍이 1776년 당신의 선조들이 독립선언을 할 당시 자유정부수립의 준비가 되었다고 한 영국인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소련군대가 조선에 들어온데 대해 미국은 책임을 져야한다. 조선은 어떻게 하란 말이냐. 우리 조선은 오직 우리 조선 사람의 것이다’ 


◇미. 소 공동위희박해자 좌. 우익 합작시도...유엔회부.     


신탁통치찬성을 해온 좌익은 미. 소공동위원회의 개최가 불분명해지자, 속개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런 가운데 좌익도, 우익도 아닌 이른바 중간파가 나서 좌우합작을 위한 노력에 들어간다.  


그렇지만 조선공산당은 당세 확장에 열을 올렸다. 경남북일대에서 파업과 파괴등 좌익의 폭등아 연이었다. 


서울에서는 좌우 합작위원회가 설립, 여운형. 김규식 등이  미. 소 공동위원회의 속개를 요구하고 나섰다.


미국과 소련도 필요성을 언급했으나 이후 이렇다 할 접근은 없었다. 이로인해 그 뜨거웠던 반탁운동도 열기가 식어가는 모양새였다.


그 다음해인 1947년 11월 늦가을, 미 군정청 공보부가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희망하는 논평을 냈다.



김구등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지도자들과 35개 단체가 모여 성명을 냈다.


‘우리의 자유의사 발표를 보장하지 않는 한 이미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서명을 취소한다. 또한 미. 소공동위원회에 참석하지 않겠다.’


그러면서 강력한 신탁통치반대를 위해, 김구.김준연,양우정등 9명의 실천위원까지 뽑았다.

물론 중간파와 여운형. 김규식이 나선 좌우합작에도 관심이 없다고 밝혔다.


그해 12월 12일  과도 입법위원이 구성됐다. 과도 입법위원들은 다음해 1월20일 표결 끝에 44대 1로 반탁을 결의했다. 


이어 24일 오후에 경교장에 모인  21개 정당 사회단체는  반탁독립투재위원회를 결성했다. 위원장에는 김구, 부위원장에는 조소앙을,고문에는 이승만박사를 추대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2월 5일 하지사령관, 그리고 2월 10일에는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대표인 브라운 소장이 각각 ‘반탁운동은 조선독립에 지장을 준다’며 경고했다.


미. 소공동위 고위측 교섭으로 5월 21일  서울에서 회의를 속개했다. 그러나 반탁운동이 더욱 치열해졌고,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자유통일과 정부수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6월23일  올림픽 마라톤 메달리스트 서윤복(徐潤福)선수의 환영식날, 이철승등 학생들의 반탁데모는 미. 소공동위원회 회의장인 덕수궁 정문앞에서 열려, 회의대표들을 향한 투석사건도 일어났다.


그해 7월10일 민족대표자 대회에서 반탁진영은 ‘미.소공동위원히에 의해 수립되는 정부는 괴뢰정부’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미. 소공동위원회는 ‘협의대상’에 대한 규정과, ‘의사표시로서의 자유’를 놓고 미. 소간  견해가 달라 7월 18일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그러더니 한반도문제는 유엔총회에서 다루자고  넘긴 뒤 ,미국과 소련간 수십 차례의 회동을 가졌지만 설전만 오갔지 해답은 내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미국과 소련은 조선반도의 통치를 위해 1년여의 휴회 기간(1946년 5월 10일~1947년 5월 20일)을 거쳐 2차 회의(1947년 5월 21일~10월 18일)가 속개되었을 때에도 다시 협상 상대로 초청할 한국의 정당사회단체의 대표 문제로 격돌했다. ‘공동 성명 제11호’의 합의에 따라서 협의 대상 단체의 접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훗날 역사가들은  한국 현대사의 논쟁 가운데 미·소 공동위원회를 바로 잡을 필요가있다고 밝히고 있다.


왜냐면  1945년 12월 26일에 발표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보면 조선에서의 임시정부 수립(제1조), 미·소 공동위원회의 개최 (제2조), 신탁통치의 협의(제3조), 2주일 안에 미·소 공위의 개최(제4조)로 되어 있을 뿐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와 신탁통치를 협의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곧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대목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에게는 ‘5년의 신탁통치’라는 단어만 크게 들렸다.

▶참고문현과 협조기관;한국야당사(이기택지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회),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충청남도지(충남도지편찬위), 한밭승람(변평섭지음) 사건반세기(신수용지음). 그리고 국회도서관. 충남대학교 도서관. 한밭도서관. 



#서해방송, #sbn뉴스, #서천, #서천군, #서천군의회, #보령, #보령시, #보령시의회, #대천, #대천해수욕장, #천안, #천안시, #천안시의회, #아산, #아산시, #아산시의회, #당진, #당진시, #당진시의회, #왜목마을, #서산, #서산시, #서산시의회, #육쪽마늘, #태안, #태안군, #태안군의회, #안면도, #홍성, #홍성군, #홍성군의회, #예산, #예산군, #예산군의회, #예당호흔들다리, #청양, #청양군, #청양군의회, #칠갑산, #공주, #공주시, #공주시의회, #백제보, #부여, #부여군, #부여군의회, #계룡, #계룡시, #계룡시의회, #논산, #논산시, #논산시의회, #탑정호, #금산, #금산군, #금산군의회 #인삼, #서해신문, #장항, #스카이워크, #국립생태원, #근대문화, #모시, #소곡주, #충남도, #충남도의회, #충남도교육청, #대전시, #대전시의회, #대전시교육청, #유성구, #유성구의회, #대덕구, #대덕구의회, #동구, #동구의회, #중구, #중구의회, #서구 #서구의회, #세종시, #세종시의회, #세종시교육청, #정부청사, #경찰, #검찰, #감사원, #청와대 감찰, #청와대 청원, #국립해양생물자원관, #뉴스, #갈대밭, #금강하굿둑, #갯벌, #유네스코, #도시탐험역, #인공습지, #삼성, #송전탑, #서천 김, #현대, #강남 아파트, #부동산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