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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기획】<신수용 한국정치사(7)> 우익 거목 송진우 제1호 암살...김구 배후설에 정국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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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탁의 김구.이승만, 신탁불가피론 편 고하 송진우간의 갈등 표출,
-1945년 12월30일 새벽 서울종로구 원서동 고하의 자택에서 괴한 6명의 권총피습,
-장택상, 4개월뒤 한현우등 6명 모두 체포했으나 정부수립특사로 모두 석방.
-하지,장택상, 조병옥 모두 김구가 배후라고 했으나, 이르 뒷받침할 증거 증언없어.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해방을 맞은 민족은 태극기의 물결 속에 감격도 잠시, 시련이 닥쳤다. 1945년 12월28일 미·영·소 3국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협정문을 동시에 발표했다. 생각지도 못한 5년간이 신탁통치가 주요 골자다. 


내 나라, 내 산하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며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이 알려져, 국민들이 충격에 싸였다.


전국에서 국민들이 일어났다. 신탁통치반대를 외쳤더, 좌우 어느 파를 막론하고, 신탁 통치를 반대했다, 



◇…미영소의 5년간 신탁통치 발표에 국민들 반기


그해 말인 31일에는 국민동원대회까지 열기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며칠 뒤 좌익계열은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로 돌변했다. 좌익과 우익 모두 반탁이었다가  좌익이 찬탁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국 속에 대회를 하루 앞둔 국민들에게 불행한 사건이 터졌다. 우익의 거목이자 동아일보사장, 한민당 당수인 고하(古下) 송진우 선생(1887.5.8 ~ 1945.12.30.) 의 암살사건이 그것이다.


해방과 함께 이 땅을 휩쓴 암살의 계절을 예고한 첫 희생자였다.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했던 송진우가 피살된 것이다. 

 

한국민주당( 한민당) 당수인 송진우의 피살은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쯤 서울 종로구 원서동(苑西洞) 자신의 집에서 일어났다.


그는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나 한학을 배우고, 1907년 창평(昌平)의 영학숙(英學塾)에 들어가 고광준(高光駿)·김성수(金性洙) 등과 영어 등 신학문을 배웠다. 


그때 김성수와 함께 가족들 몰래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와 긴조(錦城)중학을 거쳐 1910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했다가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귀국했다.


이듬해 다시 건너가 메이지(明治)대학 법과에 입학, 유학생친목회 총무, 호남유학생 회장 등으로 항일운동을 벌였다.


그 무렵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金炳魯)선생 등과 유학생회의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발행했다.  여기서 최남선· 장덕수· 현상윤· 조만식· 신익희· 김준연· 조소앙 등과 사귀었다.


1915년 졸업후 김성수가 중앙중학교를 인수하자 교장에 취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데 주력하였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1년 반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했다.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중 남강 이승훈 선생을 추대하는등 막역한 사이였다.  


같은 해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1921년 사장에 취임, 1936년까지 사장·고문·주필 등을 역임하면서 동아일보를 민족의 대변지로 이끌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신문이 무기정간된데 책임지고 사임했다.


하와이에서의 범태평양회의에 신흥우(申興雨)와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이어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일제에 대한 협력을 거부, 회피하여 오던 중 1945년 8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정권인수의 교섭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8·15해방후  몽양 여운형 등이 주동이 된 건준(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맞서 우익세력을 규합, 한국민주당을 결성하고 수석총무가 됐다.


미군정에 적극 협력하면서 뒤이어 환국한 이승만 및 임시정부 지도자들과 함께 정부수립에 힘쓰는 한편 속간된 동아일보사장에 취임했다.


◇…해방정국 1호로  우익의 거목 고하 송진우 암살


그는 동아일보사장으로 여운형의 ‘건준’에 맞서 한민당을 창당, 당수인 수석 총무로 당세 확장에 나섰다.


한민당의 노선은 미군정에 협력했고, 그리고 망명 정객들과의 연계를 통해 정략적인 활동을 개시해 왔다.


그러나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과 발표된 조선의 미,소 양측의 5개년 신탁통치의 문제에 대해서는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와 견해 차이를 나타냄으로써 마찰을 빚다.


 이를 송진우가 신탁통치를 지지한다고 잘못 생각한 한현우(당시 34세)와 유근배(21세) 두 사람에 의해 피격 암살당하고 말았다. 


한민당 당수에다, 민족주의자로 정계의 비중이 컸고, 또 촉망받던 지도급 인물이었던 상황이라 그의 암살은 적잖은 물의를 일으켰다.



당시 사고 상황은 이랬다. 송진우는 그날 그시간에 잠자리에 있었다. 부인 유 여사는 일찍 깨어 아침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매일 오전 8시30분까지는 한민당당사로 출근하기 때문에 이날도 서둘러 조반을 준비 중이었다. 


이 때 느닷없이 총소리가 들렸다. ‘탕, 탕, 탕...’. 분명히 집안에서 나는 총소리였다. 분명히 사랑방 쪽에서 들렸다.


그 무렵 얼마 전부터 ‘송진우 타도’운운하는 벽보와 비라가 집근처에서 발견된 터라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 후 총소리는 연이어 몇 번이 더 들려왔다. 그후 사랑채속에서 신음에 가까운 소리가 나는 듯하더니 어느새 아들이 달려왔다.


“엄마, 큰일 났어, 아버지가......”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유 여사가 황급히 사랑방으로 뛰어갔을 때  이미 사건은 벌어진 다음이어서, 남편 송진우가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6발의 총탄을 맞고 56세의 나이에 나라의 큰 재목이, 쟁쟁한 세상을 남기고 쓰러졌다. 유언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스스로의 최후를 상상하지도 못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5, 6명의 괴한들이 계획적으로 몰려와 난사한 흉탄은 얼굴에 1발, 심장에 1발, 복부에 3발, 하관절에 1발의 권총탄알을 맨몸으로 받았다.


그때 송진우집에 다니러왔다가, 흉변을 같이 겪고 총탄에 맞은 송진우의 친척 양신묵이 유일한 목격자다.


양신묵은 전남 광산군(현 광주광역시) 임양면에서 올라온 송진우와 내외종지간이다.


양신묵은 병석에서 누워서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29일 저녁 형님과 둘이서 잠을 잤는데 새벽 4시쯤 깼다. 일어나  두어대 담배를 태우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5시쯤 다시 잠이 들었다. 이때 뒤꼍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형님이 ’누구요?‘하며 평상 때와 같은 말투로 소리쳤으나, 대꾸가 없었다. 뒤이어 마루의 덧 유리 창문이 열리더니 난데없는 육혈포 소리가 방안에 가득했다. 기억으로는 예닐곱 발 쏘는 소리가 났는데 형님은 아무런 말없이 태연자약하게 쓰러지셨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송진우는 이처럼 눈깜짝할 사이에 운명을 달리했다.


사랑채에서 자고 있던 아들 영수와 정종근 비서는 총소리에 놀라 방문을 여는 순간 행랑계단에서 일당 중 한명과 부딪혔다. 범인은  정비서르 향해 총을 쐈지만 다리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비서도 “누구냐”며 호신용 권총을 범인에게 쐈지만 빗나갔다. 일당등 5, 6명이 모두 집을 빠져 나갔다. 


◇…암살 전 날 김구 선생 만난 송진우...서로 설교전


송진우의 암살을 보려면 당시 국내외 정세를 살펴야한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국 외무장관 회의가 열렸다.


제2차 세계대전 뒤의 일본 점령지구에 대한 관리 문제를 비롯하여 얄타회담에 따른 대한민국의 독립 문제가 의제였다.


회의가 매듭된 뒤인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남북한 분할 신탁통치가 결정됐다고 발표했다


앞서 송진우는 12월들어 한 미국계 인사와의 인터뷰에서 주한 미군이 주둔해야 함을 역설하기도 했다.


송진우는 “우리들은 미군이 적어도 2년 동안은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이어 “만일 미군이 지금 떠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될 염려가 있다”라며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우리들보다 조직이 더 잘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송진우는 미군정에 도전할 경우 우익 진영에게 정권을 넘기지 않고 제3의 세력에게 정권을 넘길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탁치의 불가피성을 역설했지만 송진우는 자신을 적극적인 탁치론자나 신탁통치에 지지하는 것으로 몰고 가는 여론을 불쾌히 여겼다. 



송진우가 군정의 주둔을 어쩔수 없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서울 거리에는 '송진우 타도' 등을 적은 벽보와 삐라가 대량으로 살포됐다. 


이런 가운데 12월 29일 저녁 송진우가 경교장을 찾아와 김구와 만났다. 


송진우의 전기작가는 그가 김구로 하여금 신탁통치 문제에 관하여 미군정과 정면대결을 피하게 하려고 시도했다고 전한다.


브루스커밍스에 의하면 김구는 경교장을 방문한 송진우가 반탁운동에 가담하도록 설득시켰다. 


그러나 송진우는 그보다 미국치하의 후견기간을 주장했다. 즉, 송진우는 5개년간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송진우의 주장은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얻는다는 생각을 김구에 전했다.


이날 저녁 10시부터 경교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요인과 우파 회의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하되 그 방법은 직선적, 감정적이기보다는 신중하고도 합리적이어야 함을 역설했다. 


한민당내에서조차 신탁통치 반대론과 신탁통치 불가피론으로 갈렸다. 반탁의 대표는 김성수였고, 불가피론자의 대표는 송진우였다.


경교장의 이날 저녁 회의에서도 표현되었다. 경교장에서는 미군정을 타도하자는 여론이 강하게 나왔다. 


하지만 송진우는 신중론을 폈다. 미군정을 무조건 적대시하다가는 상대방에게 유리한 일만 할 것이라며 당분간의 신탁통치는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송진우와 임시정부 측의 면담은 12월 30일 새벽4시에 끝났다.


송진우의 이같은 미군의 주둔필요성 주장을 찬탁으로 착각한  김구의 추종자들은 그를 자택에서 저격, 사살했다는 설이 있었지만 확인 된 것은 없다..


◇…임정요인들과 송진우와의 갈등·표출


이 무렵 송영수는 정국이 흐려지고 이상한 소문이 돌 뿐 아니라 집 주위가 어수선해지자 문단속을 제의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응하지 않았다. 송영수가 “문을 안으로 걸까요?” 라고 하자 송진우는 “문을 왜 거느냐? 그냥 내버려 둬.”라고 라고 대답했다. 


이보다 앞서 1945년 12월 중순 송진우는 한민당 수석총무로서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환국 환영 준비회를 겸한 간담회를 서울 관수동 근처 국일관에서 열었다.


김구, 김규식,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조완구, 엄항섭 등을 비롯한 임정 요인이 전원 초대된 자리였다.


임시정부 내무부장였던 해공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가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다.지금까지 국내에서 친일을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좌석은 싸움판으로 변하였다. 


장덕수는 “해공!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는 거야? 아니 국내에 있던 사람은 다 친일파라니? 임정 요인들은 그런 색안경을 쓰고 우리 국민들을 보고 있었나? 내 참 기가 막혀서..... 그렇다면 해공, 난 어김없는 숙청감이군 그래”라고거칠게 항의했다.


그러자 송진우는 신익희를 설득하였다.


“여보 해공. 표현이 좀 안됐는진 모르지만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시정부를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 소리가 나오는 거요? 소위 인민공화국 작자들이 했을 것 같아? 천만에요. 해외에서 헛고생을 했군. 해방된 우리 국민들에게 임시정부를 떠받들도록 하는 것이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의 법통 때문이지 노형들 개인을 위해선 줄 알고 있소? 여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뭣을 해먹고 살았는지 여기서 모르고 있었는 줄 알어?  국외에서는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국내사람들보다 오히려 적었을 거 아니야? 가만히들 있기나 해” 


그로부터 임정측의 친일파 숙청론은 고개를 숙였다.



송진우 측은 정치적 헤게모니와 친일파 문제 등으로 중경 임시정부측과 갈등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은 송진우측의 중경 임정측에 대한 과거의 이미지가 크게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또한 반탁투쟁이 반 미군정 투쟁으로 되어서는 안된다는 그의 미군정과 밀착된 그의 입장은 중경임정측의 즉각 정권 인수 의지와 대립각이 되었다. 


송진우는 모측의 위협을 받았으며 미군정 CIC가 이를 경고를 하였다. 그리고 그의 보디가드들이 항상 경계태세에 있었다.


◇…4개월에 걸친 수사 끝에 한현우등 6명 체포


당시 장택상(張澤相) 미군정청 수도경찰총장(총감)은 수사에 박차를 가했다.


장택상은 그해 2월  송진우 생존시 신변보호자의 동정을 살펴보던 형사로부터 ‘ 전에 신변보호자로 있던 김일수가 해안 경비대에 입대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장택상은 미군측의 양해를 얻어 미군 2명을 해안경비대에 보내고, 대신 그날 오후 서울역에서 당시 송진우선생의 신변보호책임자인 정종칠과 김일수를 데려다 취조한다.


그 결과 송진우 신변보호자였던 백남석,김의현,신동운,박민석,유근배등이 사건이 있기 한달전 쯤 의견이 충돌, 신변보호자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힌트를 얻은 경찰은 사건이 있은 뒤 김일수가 서울 종로를 걷다가 김의현을 만난 사실을 단서를 계기로 구체적인 수사에 나섰다. 



그때 김일수가 김의현에게 “송진우를 암살한게 누구냐”고 물었고, 김의현은 “그걸 왜 묻느냐? 누구면 알아서 무얼하게?, 그만둬라”라고 문답이 오간 단서도 잡았다.


다음날 경찰은 신동운, 백남식,김의현을 체포했다.  사흘 뒤에는 그들의 연락자를 이용해 1개월 10일간  각종정보를 수집, 드디어 주범을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4월 8일, 인천시 화평동에 잠복중인 유근배를 체포해 취조하다보니, 진범이 한현우라는 것을 알고 이날밤 서울중구 신당동에서 한현우를 체포했다.


한현우는 한현율이라는 평북강진에서 태어난 29세 청년. 일본 와세다대학 경제과를 나온뒤 일본 중야철강의 동방회 회원으로 일본수상의 암살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친  적이 있었다. 수상 암살 기도로 10개월을 언도받고 4개월 복역후 해방으로 귀국했다.


좌.우익 양측의 통일을 부르짖던 그는 성사가 어렵게되자, 이를 택했다고 했다. 그는 ‘힘에 의해 지도자라는 사람을 숙청하는 것이 승리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실행에 옮겼다고 진술했다.


그는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를 민족분열자라고 규정짓고 제거를 시도했다.


송진우 암살동기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자기의 뜻을 실현하기위해 심복인 유근배. 김의현, 이창희, 김인성들로 하여금 여운형과 박헌영을 먼저 살해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실패하자 송진우 암살을 시도해 성공한 것이다.



◇…송진우 암살후 밝혀진 배후 인물들


송진우 암살범을 추궁한 결과 몇가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계획적으로 정계요인을 제거할 뜻을 세운 그들은 한현우의 지시에 따라 여운형,박헌영,그리고 송진우 암살에 나선 것이다.


송진우 암살후 주범 한현우는 북한에도 다녀왔다. 북한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대화를 가졌는 지, 어떤 새로운 모의를 했는 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수감중에 쓴 옥중일기에서 그의  일단이 보인다.


‘……피와 땀 없이 자유를 획득하여 행복을 차지할 수는 없다.피르 아끼고 땀을 아끼는 민족에게 무슨 자유 무슨 행복이 있을 것인가. 노력하지 않고 싸우지 않는 자에게는 승리가 없다’


어찌됐던 한현우는 그 수기를 통해 보듯이, 일종의 비장한 결의를 가지고 이 암살 계획을 실천에 옮긴 셈이다.


이같이 나라와 사회의 혼란 구도에서 한국 젊은이들의 생각이 안정되지 못한, 이른바 ‘폭력으로 자유 쟁취’를 합리화 시키려는 점에 경악했다.


이후에 연달아 여운형, 김구등 연쇄적인 암살사건이 한현우가 보여준 비극의 씨앗들이다.



재판정에 선 한현우는 법정에서 “왜 송진우 선생을 죽였냐”고 물으니 “좌익에선 여운형, 우익에선 송진우가 나라를 망치려 해서 둘 다 죽이려고 했다”고 진술했다.


한민당계열의 성토가 있었지만 그를 옹호하는 방청객도 존재했다. 


한현우는 이어 '둘 다 죽일 생각이었는데, 먼저 여운형 선생을 죽이려고 따라다녔다. 그러다 종로3가 파고다공원 근처에서 여운형이 걸어오는 걸 보고 죽이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여운형이 멀리서 자신을 알아보고 ‘아, 현우군! 오랜만일세’ 하고 다가와서는 어깨를 탁탁 두드리니 차마 못 죽이겠더라”고 진술했다. 


한현우가 송진우 암살에 사용한 권총의 출처를 확인하니, 미묘한 배후를 짐작하게 한다.


재판과정에서 한현우의 입을 통해 나온 인물이 전백(全柏)이란 인물이다. 전백이란 사람은 영화기업사(永和企業社)사장으로 한현우 일당에게 물심양면 원조해준 사람이다.


전백역시 공범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경남 양산출신으로 중국 광동의 건국대학을 마치고 귀국, 소파 방정환, 조처호등과 함께 소년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재판장이 전백에게 ‘조선을 중병환자이고, 그대는 독약이 든 주사사기를 소진한 의사라고 볼수 있다. 그 주사기를 잘못사용하면 급사할 것이니 경솔하게 쓰지 말고  주사기의 소독과 주사액의 분량과 시기를 적당히 할 것등을 충분히 연구하고 적당한 각오를 갖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인가’랏 질문했다.


그러자 전백은 “그런 말을 한현우에게 직접할 일은 없소. 경찰에서 취조관이 취조할 때 그 당시 나의 심정을 말했던 것 뿐이요”라고 거짓 답을 했다.


뿐만아니다, 전백은 한현우에게 범행에 쓸 권총을 준게 사실이냐고 묻자 시인하면서도 거짓말을 했다. 그것은 권총을 고쳐달라고 준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명백한 기본 증거는 적극적으로 시인했다. 송진우 암살전에 10여만원의 현금을 준 사실은 자백했다.


그러나 그것도 거짓이었다. 그는 한현우에게 계몽의숙(啓蒙義塾)같은 것을 만들어 청소년을 훈련한다기에 그 자금을 줬다고 허위 답변까지 했다.


한현우와 전백을 전후사정을 봐 떼려야 뗄수 없는 관계였다.


전백은 한현우를  송진우 암살후  전화로 불러 살해경위등을 듣고 칭찬과 격려하는 듯했다는 사실도 법정에서 폭로됐다.


하지만 검찰의 전백에 대한 구형은 7년에 그쳤다.


또한 구속기소된 범인들은 재판을 계속 끌다가, 1948년8월2일 검찰이 대부분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재판부는 한현우에게 무기징역, 김의현과 김인성에게 징역10년,이창희에게 단기 5년 장기 10년가 선고했다. 그뒤 미군정 3년에서 대한민국 전부수립과 함께 모두 특사로 풀려났다.



한편 송진우의 영결식은 1946년 1월6일 오전 한민당,국민대회준비회, 동아일보사등 3단체 합동장으로 치러져 서울 망우동에 안장됐다.

◇…송진우 암살 후 배후 인물로 지목된 김구 선생


송진우 암살을 놓고 여러 가지 추측과 뜬 소문이 나돌았다.


반탁핵심으로 임정요인인 김구. 이승만이 배후라느니, 북한 정권의 사주라느니, 한민당내 갈등이라느니 별의 별소문이 나왔다.


해방 당시 한때 송진우가 건준에 반대하고 여운형, 박헌영에 반대했으며, 좌파와의 협력을 놓고 안재홍과 갈등을 벌인 것을 두고 한민당세력에서는 '송진우의 암살 배후는 좌파 진영'이라고 주장도 했다.


특히 재판과정에서 한현우가 송진우를 암살한 거사를 두고 이승만과 김구가 자신들을 애국자라고 칭송했음을 거듭 주장해 파문이 일었다.


미군정 사령관인 하지 중장도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였다. 장택상도 송진우의 암살범으로 김구를, 조병옥도 김구를 송진우의 암살 배후로 지목했다.



시카코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나 리처드 로빈슨 역시 사건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 


송진우를 암살한 암살범중의 한 사람인 한현우는 후에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 동기였다고 말했다.


한현우는 법정에서 진술하기를 배후는 없었으며 김구와 이승만이 자신들을 의거를 단행한 의사로 칭찬해 주었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확인도 안된 김구선생의 배후설은 한동안 시중에 떠돌았다. 


김구 선생은 1945년 광복 이전까지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우국지사였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며 민족주의자였다. 그 바람에  여러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미군정청 하지 사령장관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로 예단했다.


하지 사령관은 송진우가 살해된 이틀뒤 1946년 1월 1일 김구를 소환하여 경고까지 줬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낭설이다. 확실한 증거도 없고, 주범  한현우 등도 김구선생의 배후설을 적극부인했다. 


후일 강원룡 목사의 증언도 그렇다.


강원룡은 “장택상이 술자리에서 미군정 인사에게 ‘송진우 암살사건 배후에 김구가 있었다. 경교장에서 모인 날 싸워서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얘기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장택상이 미군정 인사에게 김구 배후설을 제기하기 이전에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는 김구를 매우 싫어했다.


때문에 아무런 증거나 증언도 없이 송진우 암살을 반탁대표인 김구로 몰아갔다. 


강원룡은 “한현우가 두 사람을 다 죽이고자 했다면 김구 선생이 개입됐을 리는 없다. 김구 선생은 1947년 장덕수 선생 암살 배후로도 의심받아서 미군정이 그를 법정에 불러내 조사하려 한 일이 있다."며 김구선생의 개입 가능성을 부정했다. 


강원룡 목사는 “송진우 선생 암살과 김구 선생과는 무관하다고 본다”라면서 “미국 사람들이 송진우 선생을 죽인 배후에 김구 선생이 있다고 봤다면 거기에는 정치적인 음모가 있을 것이다. 미군정은 김구 선생을 싫어했으니까”라고 했다 


당시 경찰의 책임자인 조병옥도  미국인들과의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술에 취해 말하기를, “송진우가 우파 내에서의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꺼려한 김구가 암살자를 고용하여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자기는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과 다른 시대적 배경에서 한국은 정치혼돈과 함께 남북 대결구도로 이어진다.


한편 일본에 거주하던 한현우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불러 서울을 방문했을 때 그는 박 전 대통령에게 ‘유엔군 절대 주둔 필요성’을 주장, 시대적 아이러니를 엿볼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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