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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기획탐방】장항 후망산後望山에 오르다...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山河(서천산하)' 3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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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 장항 후망산後望山에 오르다 - 충남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


037. 장항 후망산後望山에 오르다 - 충남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 

아, 아무리 둘러보아도 새롭다. 가슴이 탁 트인다. 후망산은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게 사위(四圍)를 바라보게 한다.

때로는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게 하고, 자신에 대한 존재감을 새롭게 느끼도록 해주기도 한다. 후망산(後望山)은 한 걸음 건너로 전망산(前望山)과 마주하고 있다.

마주하면서 삶의 아름다운 정도(正道)를 한층 높여주고, 그만큼 신선한 삶의 길을 깨닫게 해준다.

비록 말 없는 한 덩이 거대한 바위일망정 후망산은 전망산과 더불어 하나의 엄연한 존재로써 사람들의 존재와 삶의 가치를 바른길로 안내해 주었음이 틀림없다.

비록 사면의 경사가 급하고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면서도 이곳에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굴곡을 미리 보여주었는지도 모른다.


2020년 4월 24일 금요일. 테크 계단을 타고 내려오니 장암진성(長巖鎭城)이 끝나는 곳에 이른다.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나타난다. 성이 끊어지면서 깊은 골짜기 사이로 꼬리를 감춘다. 나무가 우거져 있다. 이곳에서 알바위(卵巖)쪽으로 평지성을 이룬다고 한다. 완연한 골짜기이다.

그러나 골짜기로 타고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다시 바위를 타고 오른다. 골짜기에 이어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바위다. 가파른 바위다. 산 전체가 하나의 바위다. 

곳 후망산(後望山)으로 올라가야만 보고 싶던 ‘두꺼비 바위(개구리 바위로도 불린다)’를 만날 수 있다.

‘두꺼비 바위’는 어렸을 때 모시방으로 모시하러 온 동네 누이로부터 들은 옛이야기이다. 그 당시에는 무척 재미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 두꺼비 바위를 실제 만나고 싶어 했고, 언젠가는 한 번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온 것인데, 오늘에서야 그 생각의 끝을 맞게 될 듯하다.

비록 어릴 적에 들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방금 전에 들은 이야기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그렇게 잊혀 지지 않는다. 두꺼비 바위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전해져 내려온다. 다만 어릴 적에 들을 때만큼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두꺼비 바위만큼은 꼭 한 번 보고 싶어진다. 실로 60여 년 전에 들은 그 전설의 살아있는 증거를 찾으려는 것이다.

‘두꺼비 바위’ 이야기는 하나의 전설에 불과하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전해져오는 이야기를 구비문학(口碑文學)이라고 하는데, 신화(神話)나 전설(傳說), 그리고 민담(民譚) 등으로 구분된다.

신화는 아득한 옛날, 일상적인 경험으로 측정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태초에 일어난 일로 특별히 신성한 장소에 따른 신이 그 주인공이며, 전설은 증거물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유래나 특징을 이야기로 꾸며낸 것이고, 민담은 그 자체로 완결된 이야기이며 증거물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

후망산에 있는 두꺼비 바위 이야기는 전설이다. 그러므로 두꺼비를 닮은 바위가 당연히 있어야 한다. 두꺼비 바위를 찾아 오르는 후망산에 만약에 테크가 놓여있지 않다면 무척 힘이 들었을 것이다.

아니 오르내리기에는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바위산은 쉽게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다행히 테크가 놓여있어 한 계단 한 계단 무릎에 힘을 주면서 오른다. 계단은 바위 등성이로 매달려 있고, 오르는 발걸음은 계단에 매달린다. 가파른 계단이라서 오르는 데에도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그 계단은 정상에 못 미쳐 끝나고 만다. 이제는 바위 위에 기다란 밧줄이 이어져 있다. 테크 설치에도 힘겨웠음일까, 하는 수없이 길게 늘어뜨려진 밧줄을 힘겹게 잡고서 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만큼 후망산은 정상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후망산은 해발 90.1m의 낮은 산에 불과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서해바다요 그 바다로 흐르는 금강이며 너른 들판이거니와 깊은 산의 여느 높이처럼 쉽사리 가늠되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해발 0m에서 출발한 후망산의 높이로서는 그다지 낮은 높이라 할 수 없다. 가파르기가 천인단애(千仞斷崖)요, 험난하기가 해식절애(海蝕絶崖)를 이룬 한 덩이의 거대한 바위다.

더더구나 그 표면이 거칠기보다는 수 천 수 만 전부터 밀려갔다가 밀려오는 바닷물에 씻기고, 비바람에 닳고 닳아 미끄러워 한 발 내딛기가 그리 만만하지 않다.


흡사 살얼음으로 덮여진 대리석 위를 걷는 듯하다.

정상 부근에 이르러보니, 미처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소나무 한 그루는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거센 비바람을 견디어낼 수 없었던지 하늘을 향해 자라기는커녕 아예 바위 위에 몸을 눕혀 버렸고, 조형물로 세워진 바닷새 한 마리는 땅 위로 그만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겨우겨우 온몸을 지탱하고 있는 듯이 깃을 접고는 풀섶 사이 몸을 눕힌 채로 앉아 있다.


헉헉 숨찬 모습이다.

날씨가 포근하고 바람이 없는 날치고 후망산 정상으로 부는 바람이 보통이 아니다.

바다로부터 부는 바람은 갯내음을 가득 싣고 와 바위에 부딪쳐서야 잠잠해지고, 금강 하구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부드러운 갯벌의 숨소리를 싣고 와서는 나뭇가지마다에 푸른 생명의 숨소리를 달아준다.

전망대에 오른다. 테크 기둥에 ‘장암산 110m’라고 쓰여진 글씨가 보인다. 아마 이곳 사람들이 이 후망산을 ‘장암산’이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높이는?

그러나 눈 아래 펼쳐진 장항 시가지가 있는 그대로 안겨와 마음을 앗기고 만다. 굽어보는 시가지에 부드러운 햇살로 가득 차 평화와 안녕으로 흘러넘친다.

아, 아무리 둘러보아도 새롭다. 가슴이 탁 트인다. 후망산은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게 사위(四圍)를 바라보게 한다.


때로는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게 하고, 자신에 대한 존재감을 새롭게 느끼도록 해주기도 한다. 후망산(後望山)은 한 걸음 건너로 전망산(前望山)과 마주하고 있다.

마주하면서 삶의 아름다운 정도(正道)를 한층 높여주고, 그만큼 신선한 삶의 길을 깨닫게 해준다.

비록 말 없는 한 덩이 거대한 바위일망정 후망산은 전망산과 더불어 하나의 엄연한 존재로써 사람들의 존재와 삶의 가치를 바른길로 안내해 주었음이 틀림없다.

비록 사면의 경사가 급하고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면서도 이곳에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굴곡을 미리 보여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김남조의 「그대 있음에」 전문

후망산의 전망은 그야말로 일망무제(一望無際)이다. 바다와 뭍이 한 눈 안에 들어온다. 바로 눈앞의 전망산과 나란히 형제처럼 보인다.

바위로 된 두 산이 마치 한 핏줄의 형제 같은 모습으로 닮아 있다.

바위로 되어 있으니 그 굳세기를 이루 말할 수 없음은 물론이요, 깎아지른 듯한 단애(斷崖)를 이루고 있거니와 날랜 날짐승이라도 함부로 날개를 접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재빠른 길짐승이래도 거침없이 날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옛날의 기벌포에서 벌어진 대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도록 한 근원에는 바로 저 전망산과 이 후망산이 조망대(眺望臺)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비록 두 다리로 내딛고 있는 바로 이 자리임에 삼가 경이롭기만 하다. 이른바 기벌포해전(伎伐浦海戰)의 대승리는 민족자존을 지켜낸 위대한 승리임에 틀림없다. 잠깐 먼 옛날로 돌아가 본다.

신라의 대당전쟁은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 지속된다.

그런 가운데 676년 11월 금강 하구인 기벌포(현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앞바다에서 벌인 전투에서 신라가 당나라 20만 대군을 격파하여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였으니 이를 일러 기벌포 해전(伎伐浦海戰)이라 한다.

645년 신라와 당나라가 군사동맹을 맺고 연합해 660년 백제를 무너뜨리고,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이후 당나라는 그 지역을 직접 지배하고, 신라마저 지배하려 한다.

그리고 김춘추와 당(唐) 태종 사이에 백제와 고구려의 평양 이남 땅을 신라에게 주기로 약속한 영토 분할약정을 당나라가 어김으로써, 신라는 독자적으로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적극적인 점령 정책을 펴나갔고 마침내 나당전쟁이 벌어진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싸움은 670~676년까지 7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신라가 675년 매초성에서, 이듬해 기벌포에서 당나라를 크게 깨뜨려 나당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만들어진다.


676년 11월에 있었던 기벌포해전(伎伐浦海戰)은 당나라 군사가 북쪽의 천성(泉城)과 매초성에서 신라군에게 크게 패하고, 당의 설인귀(薛仁貴)가 그 남은 군사를 이끌고 바다로 남하하자 신라군이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이들을 공격해 이긴 싸움이 된다.

신라는 673년 함선 100척을 보내어 서해를 지키면서 적극적인 방비책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676년 설인귀의 해군이 기벌포로 내려오자 이곳에서 큰 접전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이끄는 신라 해군이 당군에게 밀렸으나 크고 작은 22회의 싸움에서 결국 당나라 해군을 크게 무찔러 적군 4,000여 명의 목을 베어버린다.

이 전투는 매초성 싸움과 더불어 나당전쟁을 끝맺는 중요한 싸움으로, 신라가 승리함으로써 당군을 축출할 수 있게 된다.(『다음백과』에서)

이 기벌포해전의 승리로 신라는 서해에서의 제해권을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7년에 걸친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둠으로써 당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던 것이다.


기벌포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백강(白江)이 지금의 금강이요, 금강 입구가 기벌포이며, 지금의 장항읍 앞바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벌포해전에서 전망산과 후망산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도록 끈 훌륭한 조망대(眺望臺) 구실을 했음은 물론이다.

마침내 전설의 증거물인 두꺼비 바위 앞에 이른다. 그러나 두꺼비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전혀 어떠한 동물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본래 하나였던 바위가 두 개로 갈라졌기 때문일까? 둘레의 다른 돌과는 색깔부터 다르다. 검은색을 띄우고 있다. 벼락을 맞았기 때문에 타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나란히 마주 앉아 있는 두 개의 바위를 바라보면서 전설이 주는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비운의 침묵에 싸인 두 바위를 전설로 엮어 달래본다.


옛날 아주 옛날  ‘솔리’라는 마을에는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그들이 마을에서 사는 동안 무슨 일이든지 하기만 하면 성공이었으니, 농사를 지으면 풍년이요, 고기잡이를 나가면 만선을 이루고, 장사를 하게 되면 배가 넘게 돈을 벌어들여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대궐 같은 집을 짓고 하인들을 많이 부리면서 살았다. 그렇게 잘 살게 된 까닭은 멀리 두꺼비 바위가 바로 이 집안을 굽어보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두꺼비 바위를 수호신으로 여기면서 살았다.

그러나 부러울 게 하나 없는 그들은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일은 다하며 살면서도 다른 성을 가진 사람들과는 잘 아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시하고, 도도해지기까지 했다. 그들은 그들의 집안만 서로 도우면서 살아갔다.

어느 해였다. 봄부터 가물기 시작한 가뭄은 한여름이 다가도록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산과 들이 타들어가고 샘조차 말라서 먹을 물도 구하기 힘들어졌다.

동네 우물조차 모두 말라버렸는데 오직 ○씨 집안의 우물만이 물이 솟아올랐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곳으로 달려가 간신히 먹을 물만 얻어왔다. 그러던 중 한 아낙네가 물을 길러 그 집에 갔다.

마침 대문이 열려있었다. 마침 물 긷는 사람도 없었다. 아낙네는 잘 되었다며 물을 길었다. 한참 물을 긷는데 주인 남자가 나타났다.


주인 남자는 아낙네를 힐끗 쳐다보고는, “당신이 물을 길어 가면 우리는 어디서 물을 길어다 쓰란 말이여?”라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아낙네가 길어 놓았던 물을 자기들 물그릇에 쏟아버리고는 아낙네를 쫓아버렸다. 아낙네는 찍소리도 못하고 그 집을 나왔다.

‘어디 가서 물을 길어야 할까?’ 아낙네는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아낙네는 조금 전에 당한 모욕에 분하기만 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멀쩡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하늘에서는 천둥 번개가 치고 천둥을 울렸다. 아낙네의 분한 가슴이 한꺼번에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느닷없이 솔리마을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이 무너지는가 했다. 이튿날 아침에서야 겨우 집을 나온 마을 사람들은 누구의 입에서부터인지 ○씨 집안에서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두꺼비바위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만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고도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씨 집안은 하나 둘 솔리마을에서 떠나고 말았다.

<한상수, 『충남의 전설』(1986.08.05.어문각)의 내용을 재구성함>



전망산과 후망산이 마주하여
                                 구재기

바람을 거슬러
티끌을 날린다면
티끌은 어디로 날리게 될까
후망산에 올라
전망산을 바라보다가
전망산과 후망산이 마주하다가
끊임없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이르는 강물을 본다
바다가 흘러들어
강물 깊이 이르는 것을 본다
하루하루 널리 세상을 굽어보고
세상 속의 길을 열어
애틋하게 그리워하던
먼 마을의 창빛을 본다
거울을 닦아 때가 없어지면
오직 밝음만 있는 것 같지만
흐름이란 무엇이든 견디어 내는 것
가장 큰 힘을 쌓아가는 것
티끌로 마음을 품지 않아
바다는 아무리 출렁여도
강물이 아무리 흐른대도
전망산과 후망산이 마주하여
오늘에까지 든든히 서 있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이 없고
알지 못하는 것이 전혀 없는
생각 많은 생각으로
풀풀 날리는 티끌을
세상 밖으로 씻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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