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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기획】<신수용 한국정치사(9)> 해방후 최대 의혹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이관술 처형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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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소련의 북한 주둔을 시작으로 한반도 공산화 확산.
-박헌영중심의 조선공산당이 일제가 남긴 100원권 지폐원판으로서 1200만원 위폐제조.
-항일 독립운동가인 사회주의 계열 이관술 선생...연루의혹에 투옥중 대전산내에서 처형.
-조선공산당 불법화제동걸자, 철도노조.평전등 제1차 파업
-이관술유족등 나서 대법원 소송에서 승소...학계등에서 사건 조작의혹 제기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sbn뉴스=서울] 신수용 대기자 = 해방직후, 좌우익의 대립과 혼란은 격동의 역사였다.

그중에도 항일독립운동가지만 사회주의운동을 했다가 대전형무소에 투옥된 뒤, 대전산내 골령골에서 처형된 학암 이관술선생(1905-1950)이란 분이 있다.

일제강점기 후반 국내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는 박헌영(1900~1956), 이관술, 이주하(1905~1950), 김삼룡(1908~1950) 등이다.

이들은 이후 국내 공산당에 깊이 관여해, 기존의 역사와 우익진영에서는 ‘*갱이’로 분류하는 인물들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인 이관술

1902년 울산 입암에서 출생한 이관술 선생(존칭생략)은 서울 중동고와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로 동덕여고 교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1930~40년대 국내에서 항일운동에 앞장서다 수배,  체포를 거듭하며 투옥돼 모진 고문을 겪었다.

이관술은 당시 조선 유력 정치가인가운데 다섯 손가락에 드는 인물이었다.  

해방 직후 이관술은  잡지 ‘선구회’의 최초 정치여론조사(1945.12)에서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가장 양심적이고 역량 있는 정치지도자' 5위에 선정될 정도였다.

때문에 조선의 현대사의 중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는 이유다.

그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발생한 '조선정판사위폐사건'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5월 경찰의 고문수사를 당한 김창선의 진술에 따라 억울하게 주범으로 몰렸다.

이후 이관술도 체포.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대전형무소에 투옥됐다.

이어  6.26 한국전쟁 발발하자 국군이 대전형무소에 갖힌 이관술등을 대전시 산내 낭월동의 골령골으로 끌고가   처형됐다.

그러나 이관술 선생 유족과 시민단체, 정치권이 그의 억울한 죽음에 이의를 제기하는등 그의 활동이 재조명되고 있다. 


유족 등은 명예회복에 나서 이선생이 처형된지 65년만인 2015년 3월 대법원으로부터 승소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은 "학암 이관술이 국가 공권력에 억울하게 희생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국가가 유가족들에게 그동안 입은 피해를 배상을 해야 한다"는 확정 판결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이관술에 대한 유족과 시민사회단체등이 나서 선생의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의 연루을 재조명하며 서훈수여까지 주장하는 등 그간의 알려진 것과 달리  새로운 사실들이 나오고 있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나, 역사가등은  해방 직후 최대의 정치사건 중 하나인 조선정판사사건이 조작됐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의 학자들은 해방과 6.25 한국전쟁사이에 사회주의자들은 상당수가 붉은 완장을 차고 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해 국민을 살상한 이가 많았고, 정부수립과 5.10 선거를 방해하는등  역사가 왜곡되지 않았다고 맞받는등 아직도 진상규명은 미완성이다.

◇…해방직후 소련야욕과 남한의 사회주의자들

해방직후 한반도의 정세는 한 치 앞도 볼수 없었다.  좌익이냐, 우익이냐를 놓고 이념 대결로 시국은 혼란이 극심했다.

 

남한에는  미군정이 주둔하고, 북한에는 소련군정이 들어서면서 한반도는 미소간 국익에 우왕좌왕하면 암울한 정국을 맞았다.

그중에도 당시를 기억하는 역사가들이나, 정치인들은 해방직후 우물안 개구리같은 식견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이 남북한에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고 말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과 중공(중국)이 아시아는 물론 세계를 붉은 사상으로 물들여 장악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미군정은 그런데도 소련과 중공의 이런 속내를   자세히 몰랐다. 

미군정청 관련, 다수의 기록에서는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는 북한의 김일성이 한반도를 공산화 시키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았다. 그 무렵  소련과 중공은  30대 젊은 김일성과 북한 동포들은 총알받이로 내세워 전쟁계획까지 세웠다.

 우선 미군이 주둔한 남한을 공산주의국가로 만들기 위한 기습전을 명령했다. 

소련의 레닌은 한반도의 적화를 위해 1차 소련 돈 3백만 루불을 김일성에게 전달했다.

이어 스탈린도 김일성에게 수백만 루불로 자금지원을 했다. 소련 공산당의 속셈은 김일성의 인민군과 중공을 전선에 앞세워 싸우게 한 후, 소련이 패전국인 2차대전에서 패해 조선에서 철수한 일본까지 접수하겠다는 흉계가 있었다. 남한내 사회주의자들의 수괴인 남로당(南勞黨) 박헌영(朴憲永)이다.

충남 예산출신으로 친소련주의자인 박헌영에게는 해방 직후 여러 정치세력들이 등장한 가운데 자신의 취약한 아킬레스건은  경제력이다.


◇… 조선 공산당, 소공동 근택 호텔에 간판걸어

일제 때 현재 서울 중구 웨스틴 조선호텔이 있는 소공동일대는 ‘하세가와쵸(長谷川町)’라고 불렸다.

 제2대 조선총독이었던 하세가와(長谷川)라는 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곳의 도로 맞은편 에 근택빌딩(조선호텔 앞)이 있었다. 박헌영이 당수인 조선공산당은 1945년 11월 23일 이 빌딩에  간판을  정식으로 내걸었다.

 1925년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이란 이름으로 비밀리에 창당된 후 숱한 검거와 탄압을 거친 뒤 20년 만에 이제야 수면위로 얼굴을 내민 것이다.

조선공산당 당수인 박헌영은 간판을 걸기 1주일 전인  11월 16일 미군정청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과 회담했다. 박헌영은 하지와 아놀드와 가진 회담후 “조선공산당은 군정에 협력을 아끼지 않는다는 뜻을 밝혔다”고 설명했다.

여기에다 “협력은 하되 군정이 잘못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경우에는 공산당에서는 비판할 자유를 가졌고 또한 우리의 의견을 건의 하겠다”며 조선공산당이 미국으로부터 인정된 정당임을 부각시켰다.


박헌영은 하지 중장도 공감했다고 밝혔다.

그런 뒤 1주일 만에 공개적으로 간판을 내걸고 조선공산당이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구성되자, 1946년 2월 좌파 정당과 사회단체의 연합조직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을 결성했다. 

이는 우파진영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우익진영이 김구(金九)선생 중심의 비상국민회의를 출범시키고 미군정 자문기관으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설치된데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박헌영은 이에 대응해 좌파 정치 세력의 결집을 시도한 것이다.  민전에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조선민족혁명당 등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청년총동맹, 부녀총동맹, 각종 문화단체 등이 가입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한 김원봉(金元鳳), 장건상(張建相) 등도 참여했다. 

공동의장단은 여운형(呂運亨), 박헌영, 허헌(許憲), 김원봉, 백남운(白南雲) 등 다섯 명으로 구성됐다.

조직역량 측면에서 민전은 우파를 압도했다. 

◇…80년대 민주화이전 까지의 정설...박헌영, 일제가 남긴 지폐원판 입수

남로당 박헌영에겐 고민이 있었다. 서울 소공동 근택호텔에 당의 간판은 걸었지만 재정이 문제 였다.

하루 이틀 고민이 쌓여 갈 때 경제난을 일소해 해결할 방법이 생겼다.

박헌영에게 입이 딱 벌어지는 정보를 입수했다. 


패전국 일제가 1945년 8·15 이후 철수면서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근택(近澤)빌딩의 인쇄소에 아직 일제 지폐의 원판이 있다는 보고를 남로당 간부로부터 받은 것이다.

박헌영은 재빨리 인쇄소를 접수하여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로 이름을 고쳤다.

그리고 이를 위조지폐 발행장소로 공모하여, 실행에 돌입했다. 당시 김창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일제때 정판사 평판과장으로 근무할 때 일제의 패망 소식이 들려오자 남몰래 100원권 원판(징크판) 등을 훔쳐 보관하고 있었다.

이후 그는 남로당 라인에 이를 알리게 되고, 급기야 박헌영의 귀로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정판사위폐사건은 무엇인가. 최근까지 기록이나 역사물에는 해방직후인 1945년 10월 20일부터 6차례에 걸쳐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朴洛鍾) 등 조선공산당원 7명이 위조지폐를 발행한 사건으로 적혀있다.

조선정판사를 인수한 박헌영은 초기부터 개입, 위조지폐 발행의 총책임자로 사회주의자인 박낙종을 사장으로 앉혔다.  최근까지 정설로 된 기록은 이렇다. 


1945년 10월 20일 서울시 소공동 74번지의 조선정판사 사장실에서는 사장 박낙종과 서무과장 송언필(宋彦弼), 재무과장 박정상(朴鼎相), 기술과장 김창선, 평판기술공 정명환(鄭明煥), 창고계주임 박창근(朴昌根) 등이 모였다.

비밀리 모인 이 자리에서 김창선이 훔쳐 보관한 100원권 원판(징크판) 등을 통해 일과후 극비리 모여 위조지폐를 인쇄할 것을 결의한다.

또한 인쇄된 위조지폐는 남로당에 제공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를 계기로 사장 박낙종은 100원권 원판 등으로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위조지폐 1200만 원을 위조하여 박헌영의 최측근이던 이관술을 통해 박헌영에 제공, 공산당의 활동비로 사용하게 했다. 

박헌영. 이관술은  박낙종등이 찍어낸 위폐를 받아들고 감격해 했다.

박헌영 위폐라는 사실을 감별할 전문가가 없는 점을 악용,  무제한으로 위폐를 발행하여 유통시키고, 만약 화폐가 바뀔 때는 정식 화폐로 교환받을 계산까지 세웠다.

그러니  재정난에 시련을 겪던 박헌영의 꿈은 하늘을 찔렀다. 

위조지폐를 쥔 날, 박헌영은 고급술집에서 축하연을 열어 자축했다.

그러면서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의 김일성까지 제끼고 한반도의 주인으로 등극하려는 계획을 꾸몄다.


박헌영은  위폐다발을 들어 보이면서 ‘권력은 총구가 아닌 돈에서 나온다“라며 승리에 도취되어 고주망태가 되었다는 후일담(後日譚도 있다.

◇…조선정판사 위폐사건, 입단속 못해 꼬리 잡혀

하지만 꼬리가 길면 오래 가지 못한다는 속담처럼 이 위폐인쇄도 잠히는 게 된다. 박헌영은 위조지폐를 내던지며 연일 술과 여자에 빠지는 바람에 ‘건배’라는 별칭이 붙었을 정도다.

연속해 건배를 외치던 박헌영은 그러나, 단하나를 소홀히 하는 중대한 실수를 했다. 

위폐를 만드는 현장 직원들의 입단속, 처신단속을 시키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조선정판사 직원들을 잔혹할 정도로 입단속.처신을 시켰어야하는데 무제한 위폐를 발행할 수 있다는 안하무인격  착각에 빠졌다.

그 감격에 취해  위조지폐 발각의 발단이 된 것이다.  


위조지폐를 대량으로 찍어내던 조선정판사 인쇄공들 가운데 손에 기름때를 비누칠해 씻어 내면서 불만의 소리를 동료에게 토로했다. 

그들은 조선정판사 주변 술집에 종종모여 술을 마셨다.

그중에 한사람이 “혁명사업도 좋지만, 우리도 적당이 수고에 대한 보답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한 기록에 따르면 그들도 단골이던 작은 술집에서 위조지폐로 술을 마시다가, 간덩이가 부어 고급 술집을 드나들게 되었다. 

고급 술집들은 예나 지금이나 정보요원 뺨치는 종업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고급 술집마담의 능력은 대단했다. 

그 마담은 여러 손님이 오더라도 어떤 사람이  술값을 낼 것인가를 보고 접대하곤 했다고 한다.

술집을 찾는 이를 현금손님인 지, 외상손님인 지, 무전취식자인지를 족집게처럼 알아 맞췄다. 그 영리한 마담이 어느 날 술집을 찾아온 조선정판사 직원들의 관상과 행동을 보고 수상하게 여겼다.

마담은 기름때가 묻은 손을 재빨리 살펴보니 그런 직공들이 이런 술집을 매일 찾는다는 게 이상히 여겼다.

거기다가 빳빳한 신권 지폐로 술값, 팁을 내는 것도 이상했다.

그녀는 잘아는 정보형사에게 이를 알렸다. 

그 형사는 위조지폐를 분석하고 미군에게 통보했다.

미군정청과 경찰은 이보다 앞서 그해 5월4일 이른바 ‘뚝섬 위조지폐사건’을 수사중이었다.


또는 ‘뚝섬위폐단’이라거나  ‘독립촉성국민회 뚝섬위원회사건’이라고도 당시는 불렸던 사건이 먼저 터진다. 

조선정판사 기술과장 김창선이 뚝섬위폐단에 연루되면서 결국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으로 이어진 것이다. 

미군과 서울중부경찰서 형사대는 1946년 5월 8일  서울 소공동 74번지에 위치한 박헌영의 자금줄인 근택호텔 조선정판사를 압수수색했다.

또, 현장에 있던 사장 박낙종과 서무과장 송언필, 재무과장 박정상, 기술과장 김창선 등을 체포했다. 

검거령이 내려진 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 이관술도 2개월 후인 7월 6일 체포되었다.

◇…미군정청과 경찰이 그해 5월 15일 결과발표

제1관구 경찰청(장택상)의 보고를 받은 미군정청 공보과는 5월 15일 이 사건의 일체를  공식 발표했다.

그 다음날 신문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미군청정 발표 내용의 요지는 ‘조선공산당 본부가 있는 근택빌딩 지하실의 인쇄소 조선정판사에서 위조지폐 300만원을 찍었다’는 것이다.

사건의 시작은 ‘뚝섬위폐단’이었고, 독촉국민회 뚝섬위원회 조직부장 이원재를 중심으로 하는 위폐제조단 일당을 검거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공산당원인 인쇄소 직원 14명과 2명의 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이관술 총무·재정부장과 권오직 해방일보 사장)이 관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틑날 이튿날 제1관구 경찰청 정보과에서 위폐 인쇄량이 300만 원이 아니라 900만 원이라는 정정 발표했다. 

그 동안 위폐 사건이 몇 차례 있었는데, 인쇄량이 대개 몇 십만 원에서 백여만 원이었다. 900만 원이라면 여타 위폐 사건과 차원이 다른 대규모 조직범죄인 것이다.

즉, 근택인쇄소에서 평판과장으로 근무하던 김창선은 일본인들이 9월 철수하면서 은행권 종판 관리가 소홀해진 틈을 타 을(乙)100원권 인쇄판을 절취·보관하고 있다가 조선공산당 활동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1945년 10월 하순부터 1946년 2월 상순까치 6차례에 걸쳐 약 1200만원의 위조지폐를 인쇄·유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청은 남한 내에서 공산당 활동을 불법화했다.
 

여기에 첫 등장하는 해방일보는 1945년 9월 19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로 창간됐다. 

사장 권오직은 일제때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등으로 두 차례에 걸쳐 13년간 복역했던 거물 공산주의자였다. 

후일 월북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주중(駐中)대사 등을 지내다가 숙청당했다. 해방일보는 ‘만국 무산자는 단결하라’는 구호를 1면에 내건 철저한 공산주의 선전선동 매체였다.

이승만·김구·한국민주당 등을 공격하는 게 일이었다.

1946년 5월 17일자 동아일보 보도내용을 보자. 

1946년5월17일자 동아일보의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의 보도내용을 이렇다.

‘조선공산당 간부와 당원들의 위조지폐 사건은 15일 공보부 발표로서 사회에 새로운 파문을 던지고 있는데 그 뒤 취조에 따라 죄상은 더욱 확대되어 도합 900만 원을 남발한 것이 드러나 액수가 많은 점으로도 다시금 사회의 빈축을 사고 있다. 
일개인의 행위도 아니고 적어도 근로 대중을 위한다는 공산당의 간부와 정당원들이 당 본부 안에 있는 인쇄소를 이용하여 지폐 남발로서 인민을 도탄에 빠지게 한 사건인 만큼 보다 더 우리의 관심은 커가고 있는데, 백일하에 드러난 일당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 
‘공산당원들의 화폐 위조 사건의 전모는 작보하였거니와 범인 14명을 방금 제1관구경찰청에 유치하고 엄중 취조 중인데 이 범인들의 지금까지의 진술로서 판명된 배후 관계와 동기는 다음과 같다’  ‘일당이 위조지폐를 박게 된 동기는 8·15 이후 조선공산당의 재정난으로 말미암아 당 자금 선전 운동비를 만들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한 결과 정판사를 접수하였다. 
그래서 이 기관을 접수한 박낙종은 동 공장에서 전부터 근무하는 공산당원 김창선에게 이관술과 권오직의 지령을 전한 다음 작년 10월 20일 하오 6시경 시내 장곡천정 74번지 근택빌딩 정판사 사장실에서 박락종 서무과장·송언필(宋彦弼)(46) 재무과장·박필상(朴弼商)(40) 기술과장과 평판과장 김창선(36)·기술공 정명환(鄭明煥)(30)·창고계 주임 박상근(朴相根)(43) 등이 비밀히 집합하여 위조지폐를 박을 계획을 세우고 또 공산당이 재정난이라는 것을 명시한 다음, 지폐를 위조 발행하여 이것을 공산당에게 제공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곧 그 날 20일 하오 7시 경 공장 직공이 일을 마치고 돌아간 틈을 이용하여 김창선이 평판과장으로 있을 즈음 절취하여 보관하였던 100원 권 원판 4매 두 벌로서 먼저 200만 원을 박아내었던 것이다’  ‘즉 그들이 인쇄한 경로를 보면 제일착으로 작년 10월 22일 오후 7시경부터 다음날 오전 4시까지 사이에 정판사 평판과장 김창선(36) 외 13명이 200만 원을 박아 내었고 그 다음 제 2회는 작년 12월 5일 하오 7시경부터 6일 오전 4시경까지에 200만 원 그리고 제3회는 금년 2월 12일 밤 10시경부터 13일 새벽 4시경까지 100만 원 또한 제4회는 2월 20일 오후 7시경부터 21일 상오 4시경까지 200만 원 제 5회는 3월 25일 하오 7시경부터 상오 4시까지 200만 원 이렇게 전후 5회에 걸쳐서 900만 원을 원판 9개로서 전부 100원 권을 박아 내었던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 일당이 사용한 도구는 전부 본정서와 중앙경찰청에서 압수하였는데, 압수된 증거품은 다음과 같다.  100원 권 원판 9매 / 소각아연판 잔해(300문) / 옵셋트인쇄용 원판 3매(대형) / 잉크 3종 / 잉크헤라 2조 / 인쇄기 4대 / 재단기 2대 / 공산당원증 2매 / 대의원증 1매 / 용지 2연(모조지) / 페파 2매 / 회계장부 5책 등’

◇…조선공산당 등 좌파 ‘음모’·‘조작’ 강력 반발

발표 직후 조선공산당 측이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함에 따라 조선 정판사 위폐 사건은 수사 및 공판 진행 내내 사건의 진위 논란으로 정국의 뜨거운 이슈가 되었다.

조선 정판사 위폐 사건은 해방 정국 최대의 의혹이었다.

더욱이 조선공산당의 확산세가 엄청났던 때라 국민의 충격은 대단했다. 금액도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즉각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은 미군정청의 발표가 나오자마자  당일  즉각 성명을 내고 권오직·이관술 두 사람은 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해명했다.

조선공산당은 성명에서  “이 사건과 조선공산당 간부를 관련시킨 것은 어느 모략배의 고의적 날조와 중상으로 미소(美蘇)공동위원회 휴회의 틈을 타서 조선공산당의 위신을 국내외에 걸쳐 타락시키려는 계획적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다음날 오전 9시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직접 미군정청을 방문했다.

그러나 아놀드 군정장관과 공보부장을 만나지는 못한 채 하급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군정장관에게 재고를 바란다는 의견서를 전달했다.

‘해방일보’는 5월 17일자 사설에서 위폐 사건이 군정 당국의 무고(誣告)라고 주장하면서 공산당을 향한 중상모략의 대표적 사례로 “공산당은 조선을 소련에 예속하기를 음모한다”, “공산당은 무기를 은닉하였다” 등을 거론했다. 이로인해 ‘해방일보’는 다음날 무기 정간을 당하고, 이후 폐간됐다.


이어 공산당은 1946년 7월 26일 이른바 ‘신전술’을 발표했다. ‘신전술’은 “지금까지 미군정과 그 비호하의 반동들의 테러에 대하여 그저 맞고만 있었으나 지금부터는 맞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정당방위의 역공세로 나가자. 테러는 테러로써, 피는 피로써 갚자”면서 극좌폭력투쟁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코너에 몰린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정판사 사건 재판이 열리기 직전인 1946년 6월 27일~7월 12일 비밀리에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 등과 만났다. 

이때 허가이·김책·주영하 등 북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관계자들은 박헌영에게 추궁했다.

이들은 박헌영에게 “미군정이 정판사사건을 만들 만한 빌미를 조선공산당 측에서 제공한 꼴이 아닌가” “일제 때 근택빌딩에 있던 인쇄소에서 총독부가 지폐를 찍어 냈던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냐. 그렇다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기계 같은 것들은 미리 다 치워 버렸어야 하지 않느냐”고 추궁했다. 

좌파신문인 해방일보 등도 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한 추잡하고, 비열한 음모라고 신문 등에 대서특필은 물론 선전지를 가두에 살포했다. 

또, 북한도 여기에 가세했다. 미군과 경찰이 민주주의 정치를 말살하기 위한 폭압정치를 한다면서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다.


북한은 이어 민주화를 사랑하는 국민들은 미군과 앞잡이 경찰의 속임수에 속아서는 절대 안 되고, 민주화를 위해서는 허위날조한 미군과 경찰에 대항하여 투쟁해야 하며 그것이 혁명정신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는 의혹을 꺼내지 못했다가 지난 1987년 6.29이후 새로운 주장들이 당사들의 유족과 시민사회단체, 진보정치권, 학자등에서 나오고 있다.

초고속으로 진행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재판은 경찰조사과정에서 피의자에 대한 고문, 충분한 변론기회 박탈, 증거 불충분 등의 숱한 조작혐의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재판에서 우선 연루자들 모두 억울하다고 말했다. 

당시 박낙종 등과  위조지폐를 찍어낸 김창선등은 미군과 경찰의 음모라고 법정에서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검찰은 재판 과정에서 유효한 증거는 제시되지 못했다. 

오히려 주범으로 몰린 이관술과 박낙종은 위폐를 인쇄했다는 시기 서울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무엇보다 검찰이 제시한 증거물 중에는 기소사실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것이 없었다.


또한 정판사에서 압수한 인쇄판으로 만든 위조지폐 역시 제출되지 않았다. 

재판 당시 피고인과 변호인은 위폐 제조한 일이 없는데다, 경찰의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검사 측은 피고들의 자백을 앞세워  유죄를 주장했다. 

재판부는 검사 측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피고들에게 최소 징역 10년, 최고 무기징역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했다. 

훗날 안재성 작가는 조선정판사 사건이 조작혐의가 짙다고 했으며, 한국외국어대 임성욱 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정판사사건이 조작된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들은 “해방 후 좌익진영을 분쇄한 사건은 '모스크바 삼삼회의 결정에 따른 논쟁'과 '정판사 사건'이었다”고 단정했다.


또한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던 이 사건과 재판으로 이관술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송언필과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만 4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대전 산내에서 '위조 지폐범'이라는 오명(汚名)을 쓴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조선정판사위폐사건 재판후 파업나선 좌익 움직임

이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들은 11월 23일 선고 공판에서 모두 중형을 선고받았지만 이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논쟁이 되고 있다.  

분명한 점은 이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이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조선공산당으로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위기에 몰리자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의 분열공작과 탄압에 맞서 이른바 ‘신전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조직의 건재함을 보이기 위해 미군정의 정책을 변화시키려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으로 심각한 내부 분열이 일고 있었다.

앞서 박헌영은 1945년 9월 8일 계동에서 열린 공산주의자 ‘열성자대회’에서 당수로서 주도권을 확보하면서 반대파들에게 공식적인 당대회 개최를 약속했다. 

그러나 반대파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1945년 말부터 소련군과 북조선공산당에 당대회 개최를 촉구하는 서신을 보내기 시작했고, 2월에 열린 당 대표자 연석회의에서도 박헌영에게 당대회를 요구했다. 

당내 갈등은 7월 박헌영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 좌익 3당의 합당을 추진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박헌영은 반대파들이 계속 당대회를 요구하고, 독자적으로 9월 말에 당대회를 위한 준비대회 개최를 추진하자 반대파의 중심인물 6명을 제명 등 중징계를 내렸다. 

그리고 당초 10월로 예정해 준비하던 총파업을 9월로 앞당겼다. 이에 따라 9월 23일 철도노동자들이 ‘가족수당 1인당 600원, 물가수당 2000원, 해고 절대반대, 임금인상 등’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총파업에 들어갔다.

이어 9월 25일 서울의 출판노조가 일상적·경제적 요구인 식량문제 외에 정치적 요구인 ‘민주주의 애국자에 대한 지명체포령 철회’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전평 소속의 다른 노동자들은 9월 28일 총파업에 들어갔다. 전평의 총파업은 미군정이 9월 7일 박헌영을 비롯해 민전의 주요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 직후 시작됐다.

이러한 ‘9월총파업’은 이후 농민들의 전국적인 ‘추수봉기’로 이어졌고, 당내 반대파들의 추진한 ‘당대회 준비대회’도 철도파업으로 400명의 참석예정자 중 반수도 참석하지 못한 채 열렸다. 


당시 전평은 농민들과의 연계가 가능한 10월 추수기를 목표로 파업을 준비했으나, 파업이 앞당겨지면서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파업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들이 의도한 ‘노동자·농민동맹에 기초한 강력한 대중투쟁’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박헌영은 체포령이 내려지자 주모자들이  제3의 인물의 타계를 위장하고, 또  상여를 메고 3.8선까지 가서 곧바로 월북했다. 

좌익3당 합당은 파행을 반복하다 그해 11월에 가서야 창당작업을 마쳤다.

9월총파업과 10월 농민봉기로 빚어진 경색국면은 좌우합작운동을 견제하고, 좌익 3당 합당과정에서 반대파의 손발을 묶는 정치적 효과를 가져왔지만, 전반적으로 좌익세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정판사 위폐사건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검찰은 경찰수사과정에서 고문에 의한 자백 말고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됐다는 점등이 의문 투성이다.

 
공산당 기관지를 비롯해 진보적 신문들이 모두 폐간되는 한편  검찰의 일방적인 주장만이 사실로 인정되면서  남한에서 공산당을 괴멸시키려는 미군정의 의도가 작용했다는 점등 의혹과 새로운 주장들이 나온다.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이 조작이란 주장

'조선정판사 위폐연구'라는 논문을 쓴 임성욱박사(한국외대)와 ‘이관술 1902-1950’을 쓴  안재승 작가 등은  최근 “이 사건의 물증은 33장의 100원권 위조지폐와 징크판, 증언으로는 인쇄기술자들의 말밖에 없다”라면서 “ 재판관들은 정판사에서 압수한 징크판으로 100원권 지폐를 찍어보았는데, 너무 조악하여 화폐의 형태도 나오지 않았고 물증으로 제시된 33장의 위조지폐와 형태도 달랐다”고 했다.

또 “인쇄기술자들이 재판정에서 고문으로 허위 자백했음을 호소하기도 했다"며 허위진술 강요로 이관술은 억울하게 죽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은 김창선 등의 정판사 인쇄기술자들이 징크판을 다른 곳에 팔아넘기려다 적발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라며 “그 후 경찰이 조선공산당을 연루시키면서 확대되고 조작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런 의혹이 있는데도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은 재판후 누구도 재조사하지 못했고, 학자들도 연구하지 않았다. 

그 만큼 이 사건이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검찰의 기소내용을 보면, 1945년 10월부터 정판사 직원들이 정판사 빌딩 2층 조선공산당 사무실에서 이관술의 명령을 받고 인쇄기를 돌려 위폐를 찍었다고 발표됐다.

하지만 이때 이관술은 정판사 건물에서 근무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조선공산당이 조선정판사가 입중한 근택빌딩 건물에 입주하기 시작한 것은 11월 말부터이고, 완전히 입주한 것이 이듬해 1946년 1월이다.

더구나 해방된 지 한 달 반밖에 안 된 시점인데 공산당이 자금부족을 겪었다는 것도 의혹중에 하나라고 안작가등을 말한다.  

한편 우리나라 화폐는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부터 한국은행 설립(1950년 6월12일) 이전까지는 여러 종류의 조선은행권과 1원 미만의 조선은행 소액권이 제조·발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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