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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기획탐방】서천의 순교성지를 찾아서 (중) - 성聖 황석두 루카...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山河(서천산하)' 4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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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 서천의 순교성지를 찾아서 (중) - 성聖 황석두 루카
- 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길 81번길 119 

복숭아나무나 살구나무에 비해 좀 늦게 새 잎을 돋우고 꽃을 피우는 것이 감나무라지만, 아마도 지금쯤 지난겨울 내내 눈보라 속에서 고통과 고난과 역경의 시간들을 묵묵히 인내하면서 새로운 봄을 기다리는 간절한 기도의 나날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늘과 땅 사이 봄을 맞고 여름을 지나는 동안 비바람을 인내하는 등 온몸의 힘을 다하여 가을에 이르러서야 소중한 열매를 맺는 감나무, 그 열매는 다시 ‘곶감’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현양(顯揚)하곤 한다. 그래서일까? 산막골 성지에 있는 한 민가의 처마 밑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곶감이 유난히 눈에 뜨인다.


2020년 4월 28일 화요일. <산막골>에서의 시간은 자못 경외스럽기만 하다.

어디에선가 조금씩 엄습해오는 경건함은 마음가짐에 자못 경배스러움에 젖어들게 한다. 시각은 정오 가까이에 이른다. 하늘에서 내리는 햇살로 인하여 그림자조차 점점 더 짧아지더니 마침내 발자국 밑으로 스며든다. 조심스럽게 성 황석두 루카 상(像)을 향하여 걷는다. 조금씩 다가서면서 성인(聖人)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신약성서에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에 대한 명칭으로 ‘성도(聖徒)’ 또는 ‘성스러운 사람들’이라는 말이 쓰여지고 있지만(골로 1:2), ‘성인’이라는 칭호는 초기 교회서부터 성덕(聖德)이 뛰어난 분들에게만 불러져 왔다고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성인은 생존 시에 영웅적인 덕행(德行)으로써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어, 교회가 보편적인 교도권(敎道權)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하는 사람들, 또는 ‘성인록’에 올라, 장엄한 선언에 의해서 성인으로 선포된 분들을 가리켜 왔단다.

교회가 어떤 이의 성성(聖性)을 공인하는 것은, 그분이 하늘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라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 성인에게 전구(轉求)하여도 되고, 그분의 생존 시 덕행이나 순교가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증언이요 본보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교회에는 103위의 성인이 있는데, 한국 교회의 103명의 성인을 총칭하는 ‘한국성인(韓國聖人)’ 중 79명은 1925년에, 그리고 24명은 1968년에 시복(諡福)된 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에 즈음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모두 시성(諡聖)됨으로써 성인품(聖人品)에 오르게 된다.

한국 성인의 축일은 9월 20일이고, 축일의 명칭은 ‘성 안드레아 김대건과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이다. 103명의 성인 중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10명의 선교사(3명의 주교와 7명의 신부)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의 국적이 비록 프랑스일지라도 그들은 한국의 선교사로서, 한국인의 구원을 위해 그들의 목숨을 바쳤으므로 그들 역시 당연히 한국 교회에 속하는 성인들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세례를 받을 때나 새 성당을 봉헌할 때 개인과 성당의 수호자로 성인의 이름을 붙이게 되는데 한국 성인이 탄생하였으므로 외국 신자들도 한국 성인의 이름을 자신의 세례명이나 성당의 이름으로 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말을 할 때마다/ 쓸쓸함이 깊어 가는 것은/ 내가 아직/ 어리석기 때문일까// 마음속 고요한 말을 꺼내/ 가까운 이들에게 소리로 건네어도/ 돌아오는 것은 낯선 메아리뿐// 말을 하는 사이에/ 조금씩 빠져 나간/ 내 꿈의 조각들은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말을 거듭할수록 목이 말라 찾아오는/ 침묵의 샘// 이곳에 오래 머물러야 나는 비로소/ 맑고 고운 말 한 마디가/ 내 안에 찰랑이는 소리를 듣네 ― 이해인의 <말과 침묵> 전문


한국의 성인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을 모으다가 대형 십자고상(十字苦像, Crucifix)을 만난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을 표현한 기독교의 조형물을 말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옥스퍼드 운동 이후의 성공회에서는 교회의 제대(사제가 성체성사 즉, 성찬 전례 Holy Communion를 집전하는 탁자) 뒤에 십자고상이 놓여 있으며, 성공회 이외의 개신교에서는 루터교가 유일하게 신앙 전통에 따라 십자고상을 사용한단다.

문득 제대 앞으로 다가선다. 절로 엄숙해지고 숙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성서에 의하여 구약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주었지만 뱀을 통해 속삭이는 유혹에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결국 욕심과 과욕에 끌려 그만 선악과를 따 먹는다.

그 순간 이후 아담과 하와는 물론 전 인류에게 불행의 서막이 시작된다. 전 인류는 질병과 죽음과 고통과 절망에 빠져 버린다. 희망이 전혀 없는 절망 속에 구원자 메시아의 예언으로 ‘자기 백성(택함을 받은 사람)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를 가진, 바로 ‘예수’를 만나게 된다.

예수는 예슈아(Yeshua)의 라틴어 발음으로 여호수아(Yehoshua)의 변형이기도 하다. 즉 여호수아(Yehoshua)는 ‘여(Ye-/ Yhwh, Yahveh 야훼, 즉 하나님)’와 ‘-호수아(-hoshua /hoshea, 호세아, 구원)’가 합친 이름이다. 즉, ‘야훼(하나님)는 구원이시다; Yahweh is salvation’란의 의미인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성이 아니라, 예수의 신분을 나타내는 말이다.

십자가상을 옆으로 하고 곧바로 성 황석두 동상 앞에 이른다. 경외로워지는 마음은 잠시 깊은 침묵 속에 깃들게 한다.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면서도 애틋한 마음은 져버릴 수 없다. 공경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고이 길러야 할 듯하다. 성 황석두 상 앞에서 고개를 숙이면서 그의 일생을 그려본다.


성 황석두(黃錫斗, 속명은 재건, 루카, 회장, 1813-1866)는 1813년에 충북 연풍에서 부유한 양반 집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가문을 번영케 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그를 정성껏 공부시켰을 뿐 아니라, 과거 급제하여 입신양명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20세가 되던 해에 황석두는 서울에로 가는 과거시험 길을 떠났다.

어느 날 저녁 주막에 들어가 묵을 때, 천주교 신자를 한 사람 만나 천주교 교리를 오랫동안 듣게 되었다. 젊은 그는 그토록 유식한 교우의 말에 크게 감명을 받아, 그의 주선으로 천주교 교리 책을 여러 권 얻어 가지고 떠난 지 3일 만에 집으로 되돌아와 버렸다.

그의 부친은 그 이유를 알자 분노가 치밀어 아들을 마구 때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입교했으며, 자기 부인까지도 영세 입교시켰다.

한편 그의 부친은 이 나라에서 천주교를 신봉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천주교가 가문을 파괴하는 종교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황석두의 부친은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여물을 썰던 작두를 마당 가운데로 나르게 하고, 아들에게 명하여 목을 작두에 걸라고 하였다.

온 집안이 벌컥 뒤집혀졌는데, 그는 태연히 목을 작두에 내밀었다. 그의 부친은 빨리 밟으라는 엄명을 내렸다가 할 수 없이 통곡하면서 사랑방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날부터 황석두는 부친의 책망과 매질 속에 지냈다. 나무라는 부친이나 꾸중 듣는 아들이나 피차 고집불통이었다. 그리하여 황석두는 세상만사를 듣지도 보지도 않겠다고 결심하고서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가족들은 갑자기 벙어리가 된 그에 대하여 대단히 걱정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정월 초하루 설날에 황석두는 읽던 성서를 조용히 내려놓고 그의 아버지 앞에 공손히 세배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어서 “아버지”라고 불렀다. 매우 놀란 그의 부친은 대단히 감격해서, “애! 석두야, 너 말할 수가 있구나! 네가 믿는 성교회란 참 이상하구나! 아마도 그것이 참된 도(道)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어떤 도인지 나도 다시 생각해 볼 터이니 내게 네가 가진 책을 보여 주려무나”하고 뜻밖에도 입교의 의사를 표현했다.

그 후 그의 부친을 비롯하여 집안 가족들은 모두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거의 다 입교 영세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고 페레올 주교가 한국에 입국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성교회를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하느님께 서약하였고, 고 페레올 주교는 그의 아내와 별거한다는 조건하에 황 루카를 사제품에 올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때 교황청에서는 당시 한국에는 여자 수도회가 없어 그의 부인이 지낼 곳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부친이 사망하고부터는 그의 친척들이 집안일을 맡아보면서 아버지의 가산을 횡령함에 따라 황 루카도 자기 유산마저 모두 친척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런 모든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권 페롱 신부는 황 루카를 자기 한문 선생으로 있게 하였다. 그 후 권 페롱 신부가 황 루카에게 전교 회장의 일을 맡기게 되자, 그는 이 회장 직분을 가장 훌륭하고 열성적으로 이행해 나갔다.

이어 황 루카 회장은 장 베르뇌 주교를 돕게 되어 주교와 함께 《회죄직지(悔罪直指)》 발간에 기초 원고를 썼다. 그리고 그 후 다시 안 다블뤼 주교를 도와 교리서 번역 출판과 그 교정에 힘을 기울였다. 이와 같이 그가 검소한 생활인으로 차차 바꾸어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병인박해가 일어나 안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어 가니, 그는 주교의 권고와 포졸들의 엄포를 뿌리치고 자기를 떼어 남겨놓고 가려던 포졸들한테 매까지 맞아가며 끝까지 쫓아가서 스스로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그를 놓아주려고 했으나 헛수고임을 알고 선교사들과 함께 그를 서울로 압송하였다.

또한 황 루카 회장에 대해 목격 증인들은 “계명을 지킴에 열심이고 충실하였기 때문에 모든 이에게 그 이름이 자자하였으며, 신자로서 본분을 다하는 그의 태도는 가장 훌륭하였고, 모든 천주교 교리에 통달한 동시에 대단히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나는 큰 박해를 바라지는 않지만, 작은 박해에 순교하였으면 제일 좋겠소”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이런 점에서 황 루카와 비슷한 교우는 한국 천지에 없다고 할 만큼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누구와도 교리를 토론하였고, 《회죄직지》가 발간될 때는 모든 교우들에게 성사를 잘 받도록 권유하였다.

그는 정결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으며, 1858년부터는 고 페레올 주교의 허가를 받아 아내와 별거생활을 하면서 죽을 때까지 그 결심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슬하에 자녀 하나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이와 같은 남다른 열의가 대단함을 보고 관리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황 루카를 더 가혹하게 곤장으로 치게 하였다.

많은 문초와 고문 끝에 드디어 그는 1866년 3월 30일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고, 같은 날 왕의 윤허와 함께 3월 30일(성 금요일)에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감옥에서 마지막 식사를 손에 받아든 그는 “우리는 지금 하느님이 창조하신 음식을 마지막으로 먹습니다”하면서 기꺼이 먹었다.

안 다블뤼 주교와 다른 두 신부들과 더불어 보령 갈매 못으로 끌려가서 그의 차례가 되자 용감하고도 침착하게 참수에 임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53세였으며, 시체는 3일이 지나서야 안 주교와 함께 같은 곳에 매장되었다가 얼마 후 신자들이 와서 모셔다가 장례를 지냈는데, 그때가 6월이었는데도 시체는 하나도 썩지 않고 있었다 한다.(김옥희, 《103위 성인전》.도서출판 순교의 맥, 2004, 331~334쪽 / http://cafe.daum.net/DivineVolition)


십자고상과 성 황석두 상을 연하여 바라보다가 바로 뒤켠에 감나무 한 그루에 시선을 옮긴다. 마치 한 그루의 감나무는 십자고상과 성 황석두 상을 받들고 옹위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잎 하나 돋우지 않은 겨울나무의 모습 그대로이다. 감나무에게는 아직 봄이 오지 않는 모양이다.

복숭아나무나 살구나무에 비해 좀 늦게 새 잎을 돋우고 꽃을 피우는 것이 감나무라지만, 아마도 지금쯤 지난겨울 내내 눈보라 속에서 고통과 고난과 역경의 시간들을 묵묵히 인내하면서 새로운 봄을 기다리는 간절한 기도의 나날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늘과 땅 사이 봄을 맞고 여름을 지나는 동안 비바람을 인내하는 등 온몸의 힘을 다하여 가을에 이르러서야 소중한 열매를 맺는 감나무, 그 열매는 다시 ‘곶감’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현양(顯揚)하곤 한다. 그래서일까? 산막골 성지에 있는 한 민가의 처마 밑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곶감이 유난히 눈에 뜨인다. 

산막골에 들어올 때는 그다지 마음을 앗기지 못하였는데, 산막골을 나오려는 데에서야 비로소 허물어져 가는 집에 시선을 잡는다. 길가에는 그야말로 죽은 고목 한 그루가 서 있고, 거의 허물어져 가는 빈 집에는 문짝 하나 제대로 걸쳐있지 아니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방안에서는 시누대 하나가 방문을 열고 나와 마치 영혼처럼 푸른 잎을 흔들어댄다. 그 또한 경이롭기만 하다.


산막골 감나무
            구재기

산막골 감나무는 
빨리 오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
말할 때나 
말하지 않을 때나 마음이 
한 곳으로 모으고
오로지 넓고 큰 길
고요히 한 곳에 서서
모든 것을 버린 채
모든 것을 가진 듯이 행복스럽다
정신을 집중하여
한 곳에 오래오래 서서
하늘을 우러르다 보면
아침처럼 반가이 맞다 보면
신실한 자리에는
빈 마음도 끝이 없다
눈보라도 천둥 우레에도
평안하고 마냥 즐겁기만 하다
봄눈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이제 머지않아 감나무는
감나무의 봄을 맞을 것이다
넉넉한 시간을 내어도
감나무는 감나무 밑으로
그늘 하나 허투 내려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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