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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12)> 해방 후 처음 터진 충북 친일교원 고광만 사태...그러나 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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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사학관에서 서울대사범대학장. 경북대총장. 부산대총장거처 문교부장관까지 올라.
-일제때 이름바꾸고 친일, 해방되자 이름고쳐...충주공립중교장때 학생들 퇴진요구.
-충북도 학무국장때 청주지역 교사들 전체명의로 불신임안제출...그러나 수용안돼.
- 친일인사 청산 대상자가 이승만. 박정희정권 거치며 문교차관 문교부장관...81년 전두환까지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sbn뉴스=서울] 신수용 대기자 = '꺼삐딴 리'라는 소설이 있다. 소설가 전광용 선생이 5.16 군사쿠테타 이듬해 내놓은 작품이다.


주인공은 의사 이인국이다. 이인국은 일제땐 뼛속까지 친일, 북한 소련군정 하에서의 친러, 그리고 월남한 뒤에 미군정 아래에서는 친미인사로 능란하게 변신한다.


이후 이인국은 아예 미국으로 떠나는 과정에서 이렇게 독백한다.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 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 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나보다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있는데, 나쯤이야….”


이게 '까삐딴 리'주요 대목이다. 시대와 정권에 따라 '지조나 신의,절개, 자존심따위는  내팽개치고' 능숙 능란하게 변신하는 처세꾼들을 꼬집었다.



꺼삐딴은 영여의 Captain에 해당하는 러시아어다. 8.15 직후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자 까삐딴이 우두머리나 최고라는 뜻으로 많이쓰였지만, 그 발음이 와전되어 꺼삐단으로 통용되었다. 


◇…충북에서 미군정에 친일교원 불신임안 제출


치욕과 쓰디 쓴 일제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아, 친일 앞잡이들을 청산하자는 것이 가장큰 과제였다.


때문에 친일 기업과 기업인, 친일 경찰, 친일 검사.판사와 친일 공무원들에 대한  청산요구 움직임이 거셌다. 여기에는 친일 교원 청산도 마찬가지 였다.


친일교원 응징을 위한 공식적인 움직임은 교육의 도시 충북청주에서 일어났다.


'꺼삐딴 리'를 연상하게하는 일이었다.시대에 따라 충성의 대상을 달리 하는 '꺼삐단 리'의 이인국처럼 기민한 변신한 친일교원 얘기다.



지난해 10월 오성철 교수(서울교대)는 친일파 교원으로 시작 교장과 대학장, 해방 후 문교부장관까지 오른 고광만이란 인물을< 한국교육신문>에 학술·연구로 소개했다.

 
이<한국교육신문> 2019년 10월22일자 오 교수의 '조선총독부 시학관에서 문교부장관에 오른 꺼삐딴 리’라는 학술.연구다. 


이른바 해방직후 충북지역에서 교원으로 재직한 '고광만(1904년∼미상.존칭생략 ) 사태'이다.


고광만이 얼마나 출세가도를 달렸는지 정부 수립 후 5, 60년대 공직자들이 승승장구허거나 영전하면 ‘고광만이 복(福)타고 났네’하던 덕담이 이런 사실에서 기인했다. 


고광만은 일제부터 해방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시대에 맞는 기민함과 변신으로 공직또는 공식석상에 드러난 실존인물이다.


지난 ​2009년 11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가 모두 1006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중에 고광만이 들어있다. 


시작은 1946년 7월 13일 미군정청 문교부가 발표한 국립서울대설치안(약칭 국대안)반대운동에서 비롯된다.


국대안이 뭐냐면 미군정청이 당시 경성대학과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경성법학전문학교·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고등상업학교·수원고등농업학교 등을 통합하는 국립서울대학교 대학설치계획이다.


이후 8월 23일 미군정령으로 국립 서울대학교의 신설을 강행하자 이에 일부 교수와 학생들의 반대하면서 국대안반대운동이 촉발됐다.


오 교수의 고광만에 대한 의 연구는 이렇다.


국대안 반대시위가 전국에서 일기 시작한 1947년 3월 새학기, 충북 청주에서 ‘충북도 고광만 학무국장에 대한 불신임건의안’이 충북도 미군정장관에게 제출됐다.


이 불심의안은 청주지역의 각 초‧중학교 전체 교원 명의였다.


친일교육을 그대로 답습해 감히 상부의 지시에 절대 복종하는 잔재가 남았을 때 일선 교원들이 도 학무국장을 상대로한 불신임안은 상상할 수없는 '파격'이자  '충격'이었다.



또한 미군정은 물론 전국에서 큰 관심이었다.


그해 3월 29일 독립신보 제291호 보도에 의하면 청주지역 초.중등 전체 교원이 낸 불신임장의 요지는 세가지 였다.  요지는 이렇다.


“1. 고광만 충북도 학무국장은 일제때 조선총독부 시학관과 충주공립중학교장을 역임했다. 그러면서 일본천황의 소위 ‘교육칙어’를 라디오를 통해 해설했고 조선동포와의 면담에는 통역을 필요로 했다는 등 황민화교육에 충성을 다한 친일파다.

2. 작년 2월 청주중학교  교원 3명을 무고 파면, 교육계의 큰 혼란을 가져오게 하고 이번에는 중학교 4곳에 대하여 휴교령이라는 비민주적 조치로 중등교육계를 파괴하였다. 

3. 이상으로 충북도 교육계의 파괴를 초래한 책임은 전적으로 친일파 고광만 국장에게 있는 것다. 이는 미군정을 훼손하는 것이니 청주시내 교원 일동은 서명 날인하야 이에 불신임함.” 


이 불신임안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그해 2월 청주에서 일어난 국대안(국립서울대학교설치계획)반대 맹휴(盟休. 동맹휴업또는 동맹파업)였다. 


미군정의 일방적 지시와 명령에 따른 최고의 지식집단인 일선 교원들이 국대안을 계기로, 미군정청이 내린 충북도 고광만학무국장의 친일행적을 문제삼아 자격미달이라고 항의에 나선 것이다.


◇…고광만 학무국장의 맞대응과 혼란


자신에 대한 청주지역 일선교원들의 불신임안 제출에 흥분한 학무국장 고광만은 강경한 입장이었다.


​고광만은 이에 대한 대응조치로 청주사범에 대해 전교원 무고강제사직권고와 무조건휴교령을 발령했다.


맹휴에 들어간 청주중학, 청주농업, 청주상업 세 학교에 대해서도 무조건휴교령을 내렸다. 


​이 불신임건의안제출을 시작으로 국대안 반대운동은 고광만에 대한 교원들의 '자격미달'항의가 점차 거세졌다. 



고광만은 해방 직후에도 물의를 일으켰던 충북에서는 나름대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1940년 4월 개교한 5년제 충주공립중학교에서  1944년 9월 한국인 초대교장으로 임용,  해방을 맞았다.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이 공립학교 교장으로 임명되는 경우가 아예 없었다. 


더구나 공립중학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조선인인 고광만의 교장 임명 자체가 의혹이자 이례적일 수밖에 없다.


오 교수는 그의 승진 배경에는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졸업자라는 보기 드문 학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봤다. 


오 교수는 그러나 그의 승진을 가능케 한 요인은 단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졸업자라는 고급 학력만은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일제 말기 그의 이름은 ‘고광만’(高光萬)이 아니었다.  


다카미네 히로미쓰’(高峰啓光)로 창씨 개명을 했다.


다카미네 교장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다. 


그는 충주중 교장 당시 조선인 학부모가 찾아오면 방문한 학부모의 자녀 학생을 불러다 자신에게 통역을 시켜 일본 말로 대화했을 정도였다.



​다카미네는 집에서 늘 일본식 복장인 하오리와 하카마를 입고 지냈다는 소문이 났을 정도다. 그 만큼 전설적인 친일 교원이었다. 


​그래서 고광만에 대한 청주지역 전체 초.중교원들의 불신임안 제출은 전국의 교육계를 뒤흔들었다.


​친일경찰, 친일공무원등의 청산요구가 해방후 첫 과제였던 것처럼 친일교원들의 청산또한 최대 관심현안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일제 때 같은 처지에 있던 서울. 부산. 충청. 호남.영남등 곳곳에서 친일교원 청산움직임이 들끓었다.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정청은 골머리를 앓았다.


​미군정청이 들어서자 마자 김구.이승만중심의 우익과 여운형. 박헌영중심의 좌익이 대결하던 시대였다. 그러면서 좌우익진영이 공히 내세운 것이 친일인사, 친일기업 청산였다.​


​하지 미군정청은 남한내 친일경찰, 친일 공무원, 친일 법조인사청산요구에 곤혹스런 터에  청주에서 공개적으로 친일교원 고광만 불신임안이 제출되니 이래저래 손을 쓰지 못했다.



더구나 사회 오피니언층의 반일 감정이 충북도 고광만 학무국장 불신임안을 계기로, 다시 일고 있는데다  미군정청의  친일청산에 대한 소극성에 불만이 높아갔다.


​◇…교사와 학생들에 친일사과, 퇴임 약속과 번복


충주중 교장으로 임명되기 전에는 조선총독부학무국의 시학관으로 일했다.


​그러면서 라디오방송에 나가 ‘교육에 관한 칙어’를 해설한 적도 있다. 


​일상생활에서조차 드러나는 그의 친일 행적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게 정설이다.


매우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었다는 게 오교수등 학자들의 판단이다.


이런 일이 고급 학력 못지않게 그의 ‘출세’를 가능케 한 요인임에 틀림없었다. 



전설적 친일 교원의 행태를 가까이서 지켜봤던 충주중 조선인 학생들은 참지 못했다.


학생들과 교사들은  해방 이후 그의 친일행적을 그대로 좌시하지 않았다. 


다카미네(고광만)교장은 당연히 학생들에게 배척당하고 퇴진 압력을 받았다. 코너에 몰린 다카미네 교장은 그들에게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했다.


지난 2004년 유종호 선생이 펴낸 ‘나의 해방전후, 1940〜1949’에는 다카미네 교장이 학생들에게 그 자리에서 공개사과했다.


알겠다. 내 자신의 과오에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 점 사과한다. 

다만 지금 내가 그만두면 당장 학교 운영이 공백 상태가 된다. 

일본인 아래서는 학교 관리에 열심히 임했다가 해방된 지금 이 시점에 그만두면 이중으로 민족에 죄를 짓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후임자가 올 때까지 인계 준비를 하면서 학교를 지키겠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나도 조선 사람이며 일본인 교사가 다수파인 학교에서 고충이 많았다. 

그러나 변명 삼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제군들도 나중에 사회생활을 해보면 얼마쯤 그 고충이 이해가 될 것이다.”


이 공개 사과를 학생들과 교사들은  곧이 곧대로 믿었다.  


학생들은 일단 받아들여 후임 교장의 부임을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후 사태는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지난날의 고광만에서 다카미네 히로미쓰로 개명했다가 해방되자마자  다시 고광만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래놓고 미군정아래에서 충청북도 학무국장으로 승진한 것이다.
 
이후 그에 대한 학생과 교사들의 불신임과  반대 운동이 거세지자 오히려 역공으로 돌아섰다. 


반대운동의 중심이었던 청주중 교사 3명은 좌익으로 몰아 파면했다. 교단을 떠났던 이들 교사들은 훗날 좌익이 아님이  판명났다.
 
국립서울대학교 설치계획반대움직으로 촉발된 학생들의 움직임이, 청주에서도 중등학교 학생들의 맹휴와 고광만 불신임안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고광만은 학생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다 결국 합의를 파기했다. 



2차 맹휴가 이어지자 되레 주동학생을 체포하고 3명의 교사를 파면을 강행하는 등 파동이 이어졌다. 


​이 모두 학무국장 고광만에 대한 반대였고, 고광만은 이들에게 보복했다. 


​청주지역 초.중등 교원들이 낸 불신임건의안은 해방정국에서 전국적 큰 관심이자 친일교원 청산이 미흡한 교육계 혼란으로 이어졌다.


​고광만은 전북 익산출신으로  친일 반민족 행위자 1,006명 포함됐다.  전주보통고등학교를 나온뒤 히로시마 고등사범 영문과를 나왔다.



​경신학교와 해주고등보통학교등에서 18년간 교사로 활동했다. 1963년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제 14대 문교부장관에 취임했다.


​그러나  당시 학원가의 한일회담반대운동이 격렬하자 학생들에게 학원으로 돌아가라는 성명과 함께 각대학 총장에게 총장인사로 압박해 논란이 일기도했다.


1968년 민주공화당 전북도당위원장과 중앙위원으로 몸담았다. 이후 부산대 총장과 경향신문사장을 맡았다.


2008년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 1,006명 중 고광만,김성수,김활란,  박마리아,백낙준, 유진오, 이병도 등 87명에 포함된 인물이다.    


◇…고광만 불신임안 수용안돼, 면죄부로 .문교장관까지 승승장구


미군정은 전국의 교원과 학생들의 예상과 달리 그의 불신임안을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게 친일교원이란 면죄부를 준 것이다.



그는 이를 계산한 듯 대학 쪽으로 활동 영역을 바꾼다. 충북 학무국장을 떠나 대구사범대 학장으로 영전한다. 

이후 이력을 보면 줄곧 비단길이자 눈부신 영전의 연속이다. 


1948년 대한민국 입법위원 후보 심사 결과에서 그의 인준이 부결된 것이 이력서 상에서 유일한 흠결이었다.  


6.25 한국전쟁에 앞서 그는 1950년 2월에는 서울대 사범대 학장으로 임명됐다.


국내 최고 교원양성기관의 수장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어 1952년에는 미국의 교환교수로 유학한 뒤 귀국, 다시 서울대 사범대 학장으로 복귀했다.


자유당 정권에서다. 이어 1956년 6월에는 문교부차관으로 임명돼 이승만 정권 내각 안으로 들어갔다. 


차관에서 물러난 후에도 화려한 경력은 계속 이어진다. 


4.19월 혁명 직전인 1960년 3월에는 국립 경북대학교 총장으로 옮겨간다. 


그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교육계가 아닌  정계에 진출하기로 결심한다. 



1960년 7월 그는 동아일보에  ‘교육전선을 떠남에 제하여’라는 제목의 출사표를 광고로 내고, 참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그해 7월 1일 동아일보에 그가 낸 광고를 보면 이렇다.


“본인은 삼십 삼성 상의 꾸준한 교육생활에서 떠나려합니다. 사월혁명에서 젊은 학도의 붉은 피를 본 나는 새로운 사명이 나에게 주어진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치가 부패하고 문화가 후퇴하고 경제가 몰락하여가는 이 딱한 민족의 터전이 송두리째 썩어 터지려할 때 우리 교육이 길러낸 젊은 우리의 학도들에게 삼일정신의 피냄새를 맡을 줄 모르는 둔물들이라고 질책하였던 것입니다.…(중략)…이들 젊은 영웅들의 피를 이 이상 더 흘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나는 무엇을 해야겠느냐고. 여기에 결심한 바 있어 참의원 의원에 입후보하여 의정단성에서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한 입법활동에 내 정성을 바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친일교원 고광만의 시대를 초월 변신


전국이 다 알 만큼 떠들썩한 친일 활동으로 해방 이후 교사와 학생들에게 지탄 당했던 그 인물이다. 


그는  ‘삼일정신의 피냄새’ 운운하는 대목이나 불과 4년 전에 문교부차관으로서 그 권력의 일부에 가담한자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사월혁명’의 학생들에 대해 새삼스레 영웅 운운하고 치켜세웠다.


자신의 출마를 정당화하려는 대목을 교육계와 정계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참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신흥 권력에 가담하기로 한다. 박정희 정권에

붙었다. 그는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회에 참여했으며 정책부의장을 맡았다. 


이런 배경으로 급기야 1963년 12월 제14대 문교부장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따지고 보면 1944년 조선총독부 학무국 시학관에서 출발한 교육 관료로서의 이력이 최고의 정점을 찍는 장면이었다. 친일부역 행위로 처벌받기는커녕 문교의 수장으로 오른 것이다.



다섯 달도 채우지 못하고 장관직에서 조기 하차했지만 이후에도 국립부산대 총장(1967년), 국회의원선거 출마(1969년, 낙선), 경향신문사 회장(1969년) 등 화려한 이력을 유지하다 1970년대 말 미국으로 도미했다. 


언론을 통해 확인 가능한 그의 마지막 공식 활동은 1981년 1월 전두환 방미 당시 LA교민회 주최 환영회에서 그가 교민 대표로 나서 환영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 어디서건 예외 없이 늘 권력 쪽에 몸을 두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에서 미군정청,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진 뒤 충성 대상은 마침내 전두환에게까지 넘어오며 변신의 변신을 한 것이다. 


이를 연구한 오 교수는 고광만이라는 인물에 대한 도덕적인 포폄으로 일관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오 교수는 1962년 소설가 전광용 선생의 ‘꺼삐딴 리’ 주인공 의사 이인국의 말마따나 고광만보다 더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닐뿐더러, 당시로는 보기 드문 그의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수학 경험과 교장으로서 축적한 일제시대의 교육 및 행정 경험이 해방 후 한국교육 전개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에 대한 평가도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 교수는 그러니 고광만을  반면교사로 삼든 아니면 그의 삶에서 취할만한 장점을 찾든 그것은 독자들의 몫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편 1∼3공화국 시절 20여년간은 친일파 득세하고  항일세력 위축됐다는 민족문제 연구소의 보고가 있다.' 


1∼3공화국 시절 ‘파워엘리트’ 10명 중 적어도 4.5명꼴로 해방 전 일제 침략전쟁·식민정책을 집행하거나 협조하는 기관(이하 일제 집행·협력기관)에 몸담았던 것으로 분석됐다.


이 중 상당수의 경우 구체적인 친일 행적이 드러났다. 이에 비해 일제 저항 경력이 있는 이들은 10명 중 1.2명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1공화국(이승만 정권·1948년∼1960년 4월)에서 3공화국(박정희 정권·1961년 5월∼1971년)에 이르는 동안 파워엘리트의 항일(抗日) 인사 비율은 20.0%(1공)에서 3.4%(3공)로 급격히 줄었다. 이에 비해 일제 집행·협력 기관에 몸담았던 인사 비율은 45.5%(1공)에서 45.4%(3공)로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이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을 처벌하려던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1948년 10월∼49년 9월)가 친일세력의 방해로 와해되면서 친일파 득세· 항일세력 위축 현상이 가속화했음이 통계치로 처음 확인된 것이다. 


▶▶참고 자료와 문헌=이기택의 한국야당사.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회),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독립신보, 高光萬문교 데모방지에 강경방침(조선일보) .   ‘나의 해방전후, 1940〜1949’( 유종호) `960년 7월1일 자 동아일보. 사건반세기(신수용),한국교유신문(오성철교수시리즈), '꺼삐딴리(전광용. 을유문화사). 충남대도서관,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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