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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단독】<신수용 한국정치사(14)> 첫 좌·우익 충돌 남대문 3.1사건...언론과 경찰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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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행사놓고 좌익. 우익 따로짜로 행사 가져.

-우익 서울운동장, 좌익 남산광장서 행사후 시가행진중 충돌.
-경찰의 저지행동 등으로 서울에서 16명 죽고 22명다쳐.
-사상자 40여명, 총격여부놓고 장택상 수도청장과 언론, 앙숙
-서울이어 제주. 전북정읍. 전남순천등서 대립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sbn뉴스=신수용대기자] 1945년 8월 15일,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해방을 맞은 우리 겨레는 일제의 설움을 채 달래기도 전에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해방 전부터 미.소.영.중 등의 열강 앞에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인 것이다.


해방전 카이로 선언이든, 포츠담선언이든, 또 얄타협정이든 남한은 미국이, 북한은 소련이 통치하는 것으로 결정되고서부터 3.8선을 경계로 나뉘었다.


그래서 3.8선은 원한의 분단선이다. 


결국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면서.남북한간의 이념대결은 곧 가시화됐다.



잠시나마 신탁통치에 반대해온 좌우익 리더격인 정치인들이 미국과 소련의 야심에 놀아나기도 했다.


남한의 우익과 상해임시정부요인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시종일과 반탁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군지배하에 있던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박헌영등 좌익은 하루아침에 신탁으로 돌아섰다.


이게 곧 ‘남한 우익반탁’, ‘북한 좌익 신탁’이란 권력구조로 돌변했다.


8.15 해방전만해도  좌우를 가리지 않고 조선독립을 위하여 하나였던 일은 까마득히 잊게 됐다..


이는 곧 북한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잉태해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남한과 사사건건 부딪혔다.


해방 후 6.25 한국전쟁까지, 아니 지금까지 이념과 사상의 대결을 지속되어 왔다.  


해방과 함께 찾아온 한반도 분단, 그 경계는 3.8선이었다.


1947년은 좌익과 우익이 드러내놓고 충돌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남대문 3.1사태다. 그해는 1919년 3월1일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28주년이 되는 해다.


◇…3.1절 독립만세운동 좌익. 우익 따로 행사 열어=전국적으로 3.1절 기념행사는  좌.우 각각열었다.



그리고 폭력충돌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먼저 서울의 경우를 보자.


1947년 3.1절 행사에 우익은  서울운동장,  좌익은  남대문에서  따로 가졌다. 


 이후 서울 시가행진 중 좌우익 간에 서울 남대문-서울역 간 충돌, 투석전과 각목싸움이 벌어졌다. 


 우익진영이 주최한 서울운동장 대회는‘기미선언 전국대회’라고 했다.


좌익 진영 민전(民戰)이 주최한 행사는  ‘3.1기념 시민대회’라 했다.


 서울 운동장에서 이날 12시에 열린 대회에는 하지 중장을 대신한 브라운소장이 러치 군정장관 대신 윕스 소령 등 군정 당국자가 참석했다.


대회 도중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외치며 모스크바 3상회의에 보내는 메시지를 결의한 후 오후 1시 30분 대회는 큰 차질 없이 끝났다.



한편 남대문 대회는 남산 정상의 광장에서 시작되어 민청원을 비롯한 각 단체의 축사 낭독 등으로 오후 3시경에 끝났다.


사건은 양측의 시가행진에서 비롯됐다.


그렇잖아도 각각 양보나 타협없이 사사건건 충돌한 좌익과 우익은 이날 행사마저 따로 열만큼 감정대립도 심각했다. 


이런 마당에 행사 참가자 일부가 시가행진에 나서면서 살벌한 좌우충돌의 열전을 빚게 되었다. 


오후 1시반 대회를 끝마친 ‘기미선언 전국대회’에 참가했던 학련(學聯)을 선두로 일부 학생들과 청년단체는 시가행진에 돌입했다.


이들은 서울 운동장에서 출발해 옛 중앙청인 군정청 앞→ 광화문→ 서대문을 거쳐 서울역 앞에서 일단 해산하기로 했다.



이들은 무리를 지어 남대문 앞을 통과하게 되었다.우익학생과 청년들이 남대문 주변에 이르렀을 때 공교롭게도 ‘3.1기념 시민대회’측도 머리를 수건으로 질끈 동여맨 민청원들을 선두로 하여 남산에서 내려왔다.


바로 그때 어느편에서 먼저 투석을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와, 와’하는 함성과 함께 돌팔매질이 시작되었다. 


그때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험악한 상태가 계속되자 남대문 근처에 배치되어있는 경찰대가 지하도에 숨어서 발포를 개시한 것이다.


때마침,이곳을 지나던 미군정 지프차에서도 미군들이 총소리에 놀라서인지 자동차에 탄채 위협발포를 하고 달아났다.


◇…사태심각해 지자 경찰대출동=소란한 틈에 당시 수도청장(서울지방경찰청장)인 장택상과  수도청 간부, 그리고 수많은 기마 경찰대원이 현장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맹렬한 투석전과 각목전을 벌인 양측은 경찰의 총격을 피해 숨은 뒤였다.


남대문 인근 전선주 주변에는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당시 조선중학교 학생 정인수라는 소년으로 나이는 16살 앳띤 얼굴이었다.


또,  근처인 대한기선회사 뒷마당에는 26세의 박수호라는 청년도 관통상을 입고 절명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었다.수많은 중경상자가 발생해 세브란스 병원과 적십자병원에 옮겨져 입원, 응급치료를 받는등 야단이었다.


이러는 사이에 충돌은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날 충돌사건의 사후처리는 간단한게 아니었다.


사상자의 대부분이 좌익진영측이라는 점부터 경찰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결국 수도청과 신문사 간에 얄굿은 암투가 벌어졌다.


왜냐면 이날 자 석간신문들이 ‘축전 끝에 불상사, 경찰 발포로 수 명 사상’이라고 보도하니 수도청이 매우 불쾌해 했다.



당시 전국일대에서 벌어진 3.1절 행사의 참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당국이 발끈한 것이다.


신문들이 이날 보도한 불상사의 보도 논평은 대략 이렇다.


‘관의 잘못인가, 민의 잘못인가.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행사에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전국각지에서 발생하여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좌.우익 사이에 갈수록 반목이 더하여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틈만 있으면 싸움을 벌일 때였다.


민족은 가는 곳마다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던 때인 만큼 3.1절이라하여 예외는 아니었다.


3.1절 기념행사가 폭동으로까지 확대되어 사상자가 무려 40여명이나 되었다면 숭고한 3.1정신이 무색해지고 만 것이다.’


그때 3.1절 행사와 관련, 치안총수인 경무부장(현재는 경찰청장) 조병옥의 발표와 신문들의 보도내용을 종합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전국 도처에서 기념행사에 참가했던, 군중들이 집단적으로 충돌에 가담했다,


곳곳에서 폭행을 일삼는가 하면, 경찰서를 습격해 무기를 약탈하는 등 무법행위가 절정에 달했다.


경찰에서는  치안유지를 위해 진땀을 뺐으나, 별효과를 거두지 못한 채 군중들의 반감만 사게되어 사태는  악

화되더니, 폭동으로 화하기까지 한 곳이 많다.


경찰에서 치안유지상 부득이 발포를 하면서까지 폭동진압에 임한 결과 전국적으로 사망자 16명, 부상자 22명등 38명의 사상자로 적지 않은 인명피해를 냈으니 이는 관(官)의 잘못인가, 민(民)의 잘못인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3.1절 좌,우익 충돌=경찰발표에 의하면, 서울 남대문 충돌은 시작은 시가행진이었다.


엄숙한 항일독립운동의 기념일인 3월1일 서울운동장에서 기념식을 마치고, 오후 4시 서울 남대문 앞에서 사

전허가도 없이 전국학련을 비롯한 우익청년들이 시위행진을 했다.


때마침 남산에서 기념식을 하고 내려오던 좌익 군중들 사이에서 충돌했다.


경찰조사결과 이를 저지하자 우익 쪽에서 먼저 돌을 던졌다.



돌은 기마순경이 맞았으며, 좌익 쪽도 그냥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갑자기 사태가 악화되자,발포소동이 일어 난 것이다.


조선중학생 정인수군이 그 자리에서 즉사 한 것을 비롯  남대문주변은 삽시간에 살벌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수도경찰청은 이사건의 발생의 책임이 우익청년단체의 무허가 시위강행을 도발한데 있다고 단정했다.


때문에 서울 운동장에서 기념식을 거행한 주최자 엄항섭(嚴恒燮), 박윤진(朴允進)등 5명을 소환조사를 했다.


그러나 신문기자들은  경찰 발표가 사실과 다르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좌익측을 공격하는등 옥신각신했다.


서울뿐만 아니다. 부산등 전국 각지에서도 3.1절 행사를 기화로 충돌사건이 일어났다. 


부산에서는 좌익측의 민전주최로 열린 ‘3.1기념 시민대회’장에서 일어났다.


대회가 끝날 무렵 갑자기 괴한이 단상에 올라가 연사를 구타하자 훙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졌다. 


경찰의 경고에도 연단을 향한 투석이 계속되자, 경비 중이던 경관대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상을 입는 대참사를 빚었다.



민전측의 연사가 ‘이승만은 제2의 이완용’이라고 모욕하는 축사를 하자, 광복청년단원 3명이 그 연사를 구타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이에 놀란 군중들의 울부짖는 소리는 차마 눈뜨고 볼수 없었다고 기록들은 전한다.


경찰이 이들을 체포하자, 군중들은 자기들이 보복하겠다며 3명을 넘겨달라고 요구했으나 경찰이 거부했다.


이로인해 군중들이  경찰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날 제주에서도 일어났다. 제주도에서는 오후 3시쯤 ‘3.1기념 도민대회’를 당국이 허가해주지 않은데 사건이 촉발됐다.


더욱이 시위행렬을 금지한다는 이유로 격분한 군중일부가 경찰서와 감찰서를 습격하자 경찰이 발포했다.


결과는  사망자 6명, 부상자 8명이 발생했다


이는 이후 이로인한 구금자를 석방시키라는 민중봉기로 이어지더니 결국 악몽의 제주 4.3사태로 이어진다. 또한 여순 사태로 비화되기도 했다.


전북 정읍과 전남 순천지역에서도, 비슷한 일이 빚어졌다.


당시의 참상은 군중이 폭도화됐다는 기록과, 경찰의 무자비한 대응 때문이었다는 상반된 기록이 존재한다.



◇…수도청장 장택상은 친일파일까=여러 기록을 보면 창랑 장택상은 1893년 10월 22일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경북 칠곡군 북삼읍 오태동)에서 판서를 지낸 장석룡(張錫龍)의 손자로 태어났다.


또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운정(雲庭) 장승원(張承遠)과 정부인 풍양조씨(豊壤趙氏)사이의 3남가운에 막내아들이다. 


장석룡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탐관오리이고, 장승원은 친일파 출신으로, 거부지주로서 만석꾼의 대부호였다. 장택상의 두 형 장길상, 장직상 모두 친일 활동을 했으나 장택상은 오히려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한학을 하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신문물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경성으로 올라가 신문물을 배울 것을 결심한다.   


그는 상경하여 우남학회가 운영하는 한성소학교에 입학, 서구의 과학, 수학, 천문학 등의 서구의 문물에 대한 것을 처음으로 접하였다. 


12세에 4년 연상의 진주정씨와 결혼했으나, 15세 되던 해에, 본처가 사망, 이웃에 사는 풍산 류씨(서애 류성룡의 후손)와 재혼했다.


성격이 괄괄하고 활동적이었으나 양반가의 자손이라는 품위 때문에 체육활동은 다소 뜸하였다. 


1908년 15세에 일본으로 유학, 16세때 일본 와세다 대학교(早稻田大學)에 입학하였다. 1909년 10월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安重根)이 이등박문을 저격했다.


동경 조선 공사관에서 파견한 시학관이 훈시 중 안중근의 의거를 모독하는 발언을 하자, 소년 장택상은 그것은 의병행위이지 어떻게 폭도행위이냐며 규탄했다.



이어 , 한일병합이 되자 '일본인들의 통제와 발굽 밑에 살아갈 수 있는 내 기질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망명을 결심하였다.


1910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으며, 러시아로 갔다가 아버지의 벗 이상설을 만난다.


이상설의 권유와 주선으로 그는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이갑을 만나 항일투쟁 내용을 전수받았으며, 이갑의 권유로 독일에 가서 도산 안창호를 만난다. 


안창호를 깊이 추앙한 그는 도산이 별세하자 독일에서 영국으로 건너가  1919년 에든버러 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이 민족 자결주의를 발표하자 그는 김규식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갔다.


그러나 조선의 문제는 언급도 되지 않자 실망,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 등과 함꼐 구미외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다.



이때 유석 조병옥을 만나게 된다.    그의 집안은 조선의 손꼽히는 친일파 거부집안였지만 장택상은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송금하고 고학생 단체에 주기적으로 쌀과 기탁금을 후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든버러 중퇴하고 귀국했을 때 조선 총독이 마중을 나갈 정도로 그의 집안은 절대적 친일 대지주 부호로써의 위세가 대단했다.


총독부에서 함께 일하자는 권고를 누차 받지만 장택상인 이 모든 제안을 거절한다. 


그의 꾸준하고도 지치지 않는 항일독립운동에  총독부도 그를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하기 시작했고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그는 투옥되어 고문을 받기까지 하였다. 


40년대 이후 일제 창씨개명은 거부하는 등의 저항을 했을 뿐 적극적 독립운동 활동은 자제하다가 45년 광복을 맞아 경북 칠곡에서 서울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쓰촨 성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봉대(奉戴. 모시어 떠받드는 것)해야 된다는 견해를 반복하며 좌파에 맞섰다.


9월 2일 미군이 진주하고 미군정이 선포되자 그는 미군정 서울특별시청 상임고문에 선출되었다.   9월 16일 장택상은 조병옥, 윤보선, 김도연, 김준연 등과 한국민주당의 결성에 참여, 외교부장에 선출되었다. 


그후 수도경찰청장, 경기도경찰부장 등으로 있으면서 한민당 활동에 소홀하였고, 46년 이후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한민당을 탈당하게 된다.



미군정하에서 영국에 유학하여 교육받은 경력과 영어에 능통한 점을 인정받아 수도경찰청장에 임명되었고 대한승마협회 초대회장, 경기도 경찰부장을 역임하다가 이승만이 귀국하자 친이승만파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경찰청장으로서 경찰 채용에 있어서 장택상이 임명한 경찰관은 모두 전직 일제 경찰관들이었는데, 이유는 ‘자기 직책을 완수하는 것은 어느 때나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에 경찰의 업무를 한 것이지, 그들의 의지는 아니었다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지금껏 친일경찰 감싸기의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다.그 무렵 좌익과 우익이 충돌한 남대문 3.1충돌사건에서 경찰대의 발포와 관련해 언론들과 큰 갈등을 빚었다.


그러면서 전직 친일파 경찰들과 함께 경찰로서의 업무인 조선공산당원과 남로당 탄압을 주도했고, 이로인해 공산당으로부터 10차례나 테러를 당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직후 제1대 외무장관을 역임하였고 제5차·6차 UN총회의 대표단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952년 5월부터 7월 무렵 피난지인 부산에서 이범석 등과 함께 부산정치파동에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고,



1952년 5월 6일부터 1952년 10월 5일까지 대한민국의 제3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부통령 후보로도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한국 민주화의 두 거목 김영삼과 김대중을 정계에 진출시킨 인물이 장택상이다.


김영삼은 1952년 대한민국국회부의장 장택상의 비서관을 역임했고, 장택상이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는 국무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을 지냈다. 


김대중도 1950년대 중반에 그의 비서역으로 근무하며 대변인을 한 적이 있다.


4·19 혁명 이후 장면 정권과 박정희 정권 기간 중에는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자유당을 재건하여 총재가 되었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1964년 이후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윤보선, 장준하, 함석헌 등과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이어 1969년 신민당 고문이 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등 좌파 정당과 좌파 정치운동에 대한 구속, 탄압을 가하였으나, 여운형, 이만규, 조봉암 등과는 인간적인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 등이 이적행위자와 공산주의자로 몰리자 조봉암의 석방, 구명운동을 폈고, 법정에서 조봉암을 변호하기도 했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서 일본과의 아시아 예선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이었는데 그때 ‘일본에 지면 현해탄을 건너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 주인공이다.


박정희 둘째 형이 장택상 형의 소작농이었기에 박정희가 장택상을 매우 껄끄러워 했다고한다. 
  
◇…사건진상에 대해 경찰과 언론간의 맞대응=남대문 3.1사태 이틀 뒤인 3월3일 수도경찰청은 신문보도에 대해 불만을 노골화했다.


수도청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는 진상을 대라’며 반박에 나선 것이다.


현장을 취재한 신문기자들은 ‘사실임에 틀림없는데, 그렇지않다면 누구총에 맞았다고 경찰이 대보라’고 재반박했다.



신문기자들은 ‘경찰이 군중들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는 물적반증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이러면서 경찰은 경찰대로, 신문기자들은 신문기자들대로  진상규명에 나섰다.


사건은 기어코 수도경찰청과 수도경찰청 출입기자간에 분규를 야기시켰다.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은 출입기자단에게 ‘수도청 출입기자단’이란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하는 공문을 보냈다.

내용은 이렇다. ‘사건진상조사를 하는 것은 자유지만 수도청출입기자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라. 그 이유는 수도청의 명칭을 사용하면 내용을 모르는 일반인은 마치 수도청 내부에 두조류가 있어 싸우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 쉬운 까닭이다’  


수도청이 공문을 통고한  1주일 뒤인 3월 10일 조사한 3.1 남대문사태의 진상을 발표했다.


①일시:3월1일 오후 3시40분경. 

②장소: 남대문- 서울 역 사이노상과 남대문부근
.
③충돌상황:우익 측 행렬은 학생대를 선두로하여 서울 역 방면에서 남대문을 항하여 행진하였고, 좌익 측은 남산에서 해산하여 구 조선신궁연도로 밀려 내려와 남대문 옆에서  갈라져서 한 파는 시내를 향하고 한 파는 서울역으로 갔다.


경관대는 쌍방의 충돌을 사전에 방지하기위해  대열경계중 우익측 선두에서 몽둥이를 들고 좌익측에 도전하려고 하는 것을 경관대가 제지했다.


그러나 우익학생대와 좌익측에서 석전(石戰)이 시작되었을 때 제2 일화빌딩 쪽에서 총소리가 수발연발하므로 이를  제압하기위하여 경관대가 공포를 발사하여 총소리는 약 5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부군중은 해산하지 않았으나 후에 도착한 응원경관대와 함께 오후 5시30분 완전히 해산시킴.


④수사상황:진압직후부터 계속수사한 결과 첫째 남대문로5가29번지 제 2일화빌딩 2층 및 옥상에서 노상의 우익학생들을 향하여 사격한 것 둘째 옥상에서 노상에 낙하한 보자기와 비리 및 소련군파 있는 것(이상 미군

수사과장 리이드대위외 4명확인), 셋째 제 2일화빌딩옆 층층대 군중속에서 권총발사한 것(이만영확인),네째 남로당 본부에서 총성이 난 것, 다섯째 괴한 2명이 동 본부 후면 담을 넘어 도주한  것(반성환외 1명확인),여섯째 각 피해자의 피해당시 상황과 탄적을 조사한결과 1인의 예외도 없이 전부 높은 곳에서 아래로 사격한 것으로 인정되는 점.......



이상 여러 가지를 종합한 결과 좌익측에서 무장대를 미리 요소요소에 배치하였다가, 우익측 행렬에서 도전한 것을 기화로 발사하여 살상자가 난 것으로 인정됨로 혐의자 수십명을 검거해 면밀히 조사중임.


이같이 수도청의 발표가 있은 후 이것을 게재한 신문들도 3월14일 수도청출입기자단의 명의로 조사서를 발표했다. 


‘남대분 3.1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는 일반의 이목을 크게 끌었던 만큼, 떳떳이 수도청의 수사능력향상을 염원하는 우리로서는 그 진상조사의 맡은 수도청 권위자들의 성과에 대해 남달리 큰 기대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디어 그 진상개요와 목격기자들의 제공 자료에 대한 반증이 범죄수사의 입장에서 검토하였다.


그중에서  우리의 가장 흥미를 끌고 즉각적으로 의문을 품게하는 점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가 피해자의 피해당시의 상황과 탄적을 조사한 결과, 1인 예외도 없이 전부 고소에서 하향사격하여 사상케 한 것’이라는 수도청의 발표다.


더구나 이 단안의 진부야 말로 이사건 진상의 흑백을 가리는 열쇠임이 틀림없으니 그핵심을 향해서 해부의 메스를 댔던 것이다.


우리는 수사법의 철칙, 즉 일체의 억측을 버리고 오로지 물적증거에 의한 귀납적방법에 따라 먼저 3병원에서 가료중인 6명의 총탄사망자와 중상자의 각 피해 상황을 각 담임의사릐 책임있는 진술과 검안서에 의해서 면밀히 조사하고 아울러 수평선을 기본축으로 한 사망자의 그피탄 각도를 산출하였다.


그 결과 첫째 뜻밖에도 ‘예외없이 고소에서 운운’의 결론적 명제속에 ‘수평사격의 예외있다’는 모순이 지적되었다.


둘째 진상판명까지는 아직 검토될 여지가 있는 모든 점이 노출되니 그 실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박수호(상인)=유탄사망. 피탄 각도는 거의 수평으로 0도에 가깝다.  이 사격각도는 37도로서 피탄 각도가 그만큼 어긋나는 셈이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밖에서 총을 맞고 들어와 졸도했다는 공산이 10중 8.9라는 것이 인정된다.

 

▲김윤태(서북청년회원)=좌측상박골관통.피탄 당시 엎드려 있었다는데  피칸 각도로 보아 고소(高所)사격으

로 볼여지는 있으나,정확한 근거가 없는 한 고소인지 수평인지 판단이 곤란하다.


▲김진호(민청원)=우상 복부 사출사망.사격각도가 21도로 적지않은 오차가 있으니 수도청의 설명이 필요하다.


▲김영달(상인)-금성빌딩 내에서 발포했다는 혐의로 이 빌딩 정문내에 돌입한 경관의 실내 순회발포로 말미암아 3층 계단에 엎드린 순간, 좌측 목 부분을 관통 중상 가료중임을 확인했다.


▲오학훈(서북청년 회원)=좌측 폐일부를 관통 중상.피탄각도는 하향 30도로서 고소사격으로 오인되기 쉬우나 본인의 진술에 의하면 대한빌딩 현관내로 피시하는 순간에 약 30도와 상쇄되어 사격각도는 거의 완전한 0도로 수평선임을 확인했다.즉, 수평으로 쏜 총탄에 맞은 것이다.


◇…남대문 3.1사건의 수사결말=이처럼 수도청과 수도청출입기자단의 조사내용과 주장이 엇갈리면서 국민적 관심은 매우 컸다.


사건자체도 문제였지만, 사건여파가 더욱 말썽이었다.


대체 종잡을 수 없는 상태에서 누가 먼저 싸움을 시작한 건지, 참가자와 현장 목격자, 신문과 수도청의 입장은 제각각이었다.


수도청은 우익청년들인 대학학련이 먼저 돌팔매질을 하면서 좌우 충돌이 빚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누가 쏜 총탄에 시민들이 희생된 데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수도청과 출입기자단을 상반된 결론에 이르고 보니 사건자체보다 경찰의 책임론이 급부상했다.


이를 두고 쌍방이 서로 엇갈린 주장을 공표해 사회적으로 대단한 물의를 일으켰음은 물론이다.


기자단의 조사 발표내용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나니, 장택상 수도청장은 기자단에대해 악수(惡手)를 둔다.


화가 난 장 청장은 손수 ‘오늘 자로 수도청에 출입기자단 출입을 금한다’고 통보해, 보복성 조치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그러자 출입기자단도 장 청장의 발표가 있기전에 스스로 ‘거짓 수도경찰청 출입을 않겠다’고 통보하고 수도청에 대한 일체의 취재와 보도를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이같은 기자단 취재보도거부에 수도청은 난감했다.


기자단은 대국민성명도 냈다.


 “…… 이렇듯 머리가 낡은 장택상 수도청장과는 구태여 신성한 공석을 같이하고 싶지 않았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보도책임상 은인자중(隱忍自重)해 왔습니다.그러나 이번 처사에 이르러서는 보도의 중책과 자존심에 비춰 장택상 수도청장의 대오달관밑에 이번 통고를 췻 사과할 때까지 우리는 스스로 수도청 기자실 문을 닫고 소힌한바 언론의 본도(本道)를 민중과 더불어 유유히 걸어 나갈 따름입니다.……‘


갈수록 기자단과 수도청, 언론과 미군정청간의 감정대립은 싸여갔다.


그후 약 2개월간 수도청 기자실로부터 서울 시청 기자실로 옮긴 수도청 출입기자들과 장택상 수도청장간의 냉전은 지속됐다.


그런사이 신문사 편집국에 우익의 청년단원들이 난입해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우익 청년들은 

심지어 기자들에게 주먹질을 하고 잉크병을 내던지는등 행패도 심각했다.


일부 청년들은 “장택상 수도청장의 발표에 따르라”.“왜 우익단체를 미워하느냐”는등 구호를 외쳤지만 수도청은 이들의 행패를 모른 척했다. 


언론은 그럴 때마다 이같은 사실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보도했다.


결국 세월이 흘러 장 청장이 언론사를 돌며, 회유했지만 기자들은 대국민사과와 대 언론 사과를 하지 않는한 타협이 없다고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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