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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이해찬, '민주화운동과 정치의 삶...회고록 쓴다'

-동북하평화경제협회 이사장 맡아 연구활동 재개
- 이전대표의 민주화운동과 정치역정등을 담을 이해찬 회고록 집필 중
-지인들 "70,80년대 유신과 군사정부에 앞장서 민주화운동


[sbn뉴스=대전] 신수용 대기자 = 지난달  29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이낙연 대표에서 당권을 물려주고 2선으로 물러난 이해찬 전 대표( 전 국무총리)는 어떻게 지내나.

21대 총선전에  불출마를 선언, 7선의원으로 그쳤으나 지난 4.15 제 21대 총선을 당대표로  진두지휘, 정치사상 대승이란 기록을 쓴 주인공이다.

고향인 충청권에서는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 전 국무총리) 이회창 전한나라당(전 국무총리) 이인제 국민의힘 고문 김용환 전 자민련 부총재(전 재무장관) 정석모 전 자민련부총재( 전 내무부장관)와 심대평 전 국민중심당대표( 전 자민련부총재.전 충남지사)등과 함께 한 시대를 대한민국 정치요인으로 꼽힌다.

더구나 이 전 대표는 20대이던 1970년대 민청학련 사태 때부터 30대 중반까지 학생 민주화 운동에 참가하였고, 30대 후반에 김대중의 추천을 받아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한 7080 민주화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다.

민주화 정부인 김대중. 노무현정부의 정권창출등에 크게 기여했고, 이들 정부에서 국무총리나 장관등을 지낼만큼 보수성향이 짙은 충청권에서 보기 드물게 진보진영의 중심인물이라는  새기록을 남겼다.


▶▶이해찬 전 대표가  정치 2선으로 물러난 지 한 달

이 전 대표는 평소 큰 관심을 가진 한반도통일등과 관련한 연구모임의 대표로,  그리고 자신의 민주화운동과 정치역정을 담는 회고록을 집필중이다.

이 전 대표의 한관계자는 지난 25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이 전 대표는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동북아평화경제협회 이사장'으로 일하고 계신다"고 근황을 전했다.

관계자는 또 "이  전 대표께서는 30여년이 넘는 정치인생과, 무엇보다 독재정권에 앞서 싸운 민주화운동등 기록하는 회고록을 쓰는 중"이라고 말했다.  

먼저 이 전 대표는  동북아 평화경제협회 이사장을 맡았다.

동북아평화경제협회는  포럼형식의 연구기관으로, 이미 서울 여의도 국회인근에 사무실도  냈다.

동북아평화경제협회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남.북한 통일문제등을  연구하는 모임체다.  

특히 남북한 통일문제를  비롯 미국.  중국.러시아. 일본의  한반도 안보.평화 통일 외교와  남북한 평화경제문제를 연구하는 모임이다.


이 전 대표는 또 동북아평화경제협회 사무실과 세종시의 자택을  오가며 그간 가깝게 지낸 지인들도 만난다고 한다.

관심을 끄는 것은 회고록을 쓰고 있다.

회고록은 '이해찬의 삶과 체득한 민주화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이후 정치역정'등을 담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전 대표를 가까이서 보좌했었다는 세종지역의 A씨는 "이 전 대표는 1970년대 박정희 유신정권에 반대운동에 나서 투옥과 탄압은 물론, 민청학련사태로 사형선고를 받고 80년대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우다 투옥과 서울대 제적등을 겪은 민주화인사"라고 말했다.

A씨는 "그렇잖아도 이 전 대표를 면담하면 정치역정과 민주화운동, 그리고 민주화정부를 창출과정등을 담은 회고록 집필을 권유할 생각이었는데 회고록을 쓴다니 잘됐다"라며 "7선 의원으로  후배들을 위해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도 진두지휘해 정치사에서 볼수 없는  최대의석을 확보한 그분의 삶을 기록한 회고록이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이 전 대표는 1952년 7월  충청남도 청양군 장평면에서 청양면장은 지낸 이인용씨와 어머니 박양순씨의 3남으로 태어나 청양중. 덕수중.용산고를 졸업했다. 

1971년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진학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자퇴하고 이듬해인 1972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그해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고향 청양에 내려왔으나 부친이 "나라가 이모양인데 학생들이 데모도 하지 않느냐?"며 질책을 받고 바로 상경하여 학생운동 써클에 가입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복역한뒤 생계를 위해 무역회사와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차린 번역실에서 번역도 했다.

결혼 후  출판사 '한마당'과 '평민서당'을 차렸으나 등록이 취소되자, 돌베개 출판사를 설립하고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출판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 투옥됐지만 수감 2년 6개월 만에 성탄절 특사로 석방된 뒤 재야운동을 본격 뛰어들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연) 총무국장을 맡기도 했다.

서울대는 입학후 14년만인 1985년 8월에야 졸업장을 받았고  19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6월 항쟁 당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황실장을 맡았다.

6.29 선언이후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을, 그리고 평화민주당에 입당해 1988년 제13대 총선거에 서울 관악구에서 금배지를 단뒤 내리 5선을 했다.

이해찬은 13대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노무현,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활약했다. 1988년 5.18 광주청문회 당시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간사로  5공 관련자들을 집중추궁하여 노무현, 이인제 등과 청문회 스타의 한사람으로 떠올랐다.  


1995년 6월 4대지방동시선거때 민주당 조순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에 이어 1995년 7월 그는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에 발탁된 뒤 새정치국민회의 총선기획단장을 맡았다. 

1995년 9월 김대중이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이해찬은 입당하여, 1996년 5월부터 1997년 5월까지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아 자민련과의 정책공조를 이끌었다.

1997년 7월 새정치국민회의 제15대 대통령선거기획본부 부본부장에 선출되었다. 12월 대선에서 김대중이 이회창을 39만여 표의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자 12월 그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분과 간사에 임명되었다. 

1998년 2월까지 이해찬은 15대 대선기획본부 부본부장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분과담당 간사로 활동했다. 이어 교육부장관을, 그리고 2004년 노무현 참여정부때 국무총리와 신행정수도 건설추진 공동대표로 활약했었다.

훗날 국무총리 정무비서관실 국장을 지낸  정두원 전 한나라당 의원은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라는 책에서  “역대 총리 가운데 ‘밥값’을 제대로 한 사람은 이회창·이해찬 전 총리 정도다. 대부분 법에 정해진 권한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의전총리, 대독총리에 그쳤다"고 평가할 정도로 일벌레 총리였다.

그는 '청양 이 면장 댁 셋째 아들 이해찬( 푸른나무, 2007), '광주민주항쟁( 돌베개, (공저),1988). '열두 편의 가슴시린 편지( 행복공작소, (공저),2005). '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오마이북, (공저), 2010)등 여러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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