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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22)> 김구·김규식, 3 .8선 넘어 北行...김일성과 남북 협상 담판

-유엔, "남한만이라도 총선거실시'의결에... 이승만, '찬성'VS 김구,'반대'
-김구, "내뜻을 성취 못하면 38선을 베게삼고 자결하겠다"며 방북.
-김구가 남북협상 제안하고 북한이 수용하는 형식으로 남북요인회담성사.
- 미군정청 하지 사령관, 김구 방북 반대성명을 내기도.
-남측 김구 김규식과 북측 김일성 김두봉간의 '4자회담'
-북한측 3가지 합의해놓고, 약속하나도 안지켜.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1948년 한반도는 건국이란 과제안고, 분열이 더욱 더  골이 깊어갔다.

38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갈라지더니, 남한은 이승만 계열과 김구.김규식 계열로  쪼개졌다.


배경은 1947년 5월까지 한국문제 해결을 위해 서울과 개성을 오가며 열린 미국과 소련 간 1, 2차 공동위원회의 합의없이 끝나면서다.

때문에 미국은 한국문제를 UN(국제연합)으로 넘겨 그 해 11월14일 UN 총회는 미국이 제안한 한국통일안을 43대1로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그해 1월 8일 이 결의에 의해 8개국의 유엔한국 위원회 대표단이 방한하여 총선거의 임무활동에 들어갔다.

인도 대표인 메논 의장은 서울에 머물며 남북한 지도자들과의 회담을 통해 통일자주독립정부수립에 매우 헌신적이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단일언어를 쓰는 한국민족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독립국가를 세우도록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위원회는 이 과정에서 남북한 정치지도자들과의 면담을 통해 의견을 수용하겠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위원회는 남북한 지도자들의 면담대상으로, 이승만, 김구, 조만식, 김규식, 김성수, 박헌영, 김일성, 허헌, 김두봉 등이었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측이 서울에 체류중인 유엔한국위원회의 북한방문과 조사를 거부하면서 위원회 활동이 반쪽이 됐다.

이는 곧 '남북 통일선거의 꿈'이 물거품이된 것이다. 

유엔한국감시위원회는 소련과 북한의 반대로 입경이 무산되자, 메논의장은 위원달은 대표해  뉴욕으로 건너가 유엔 소총회에 보고했다.

더구나 1948년 2월 유엔소총회에서는 참석한 메논의장이 한국문제해결 4개 방안 가운데 제3안으로 “남북한의 지도자회담과 같은 한국의 민족적 독립을 확립할 다른 가능성을 탐구하며, 또한 최소한도로 그것을 주시한다.”고 설명했다.


애초 메논의장과 중국대표 리우위완〔劉馭萬〕은 북한 측 회답이 오는 대로 UN 소총회에 반영하기로 했다.

그러나 북한으로부터 아무런 회답이 없자, 그 달 26일 유엔소총회는 미국대표의 제안에 따라 메논의 제1방안, 즉 “총선거는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만 추진시킨다.”는 방안을 표결에 붙여 31대2로 가결되었다. 

이로써 '유엔 감시하에 한국 전역에서 총선거를 거행하라'는 미국측의 제안이 통과됨으로써 한국의 분단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남시욱 언론인이 한국보수세력연구라는 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유엔 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들어와 구체적으로 국가수립 문제를 논의하자 김구와 김규식은 이를 저지하기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한다. 

두 사람은 우선 공동명의의 서한을 통해 북측에 협상을 제의했는데 북측은 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이 있다가 4월14일부터 평양에서 남한의 모든 민주주의 정당 단체들과 북측과의 연석회의를 하자고 평양방송을 통해 알려왔다.

대표자 연석회의는 김구 일행이 평양에 도착했을때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회의는 '미.소 양군철수' '단정반대' 등을 결의문으로 채택했는데 김구 등은 발언다운 발언도 하지못한 채 모든 회의가 기정화된 사실에 따라갈수밖에 없었다.

소련 붕괴 후 밝혀진 '한국 관련 소련 공산당 정치국 결정' 이라는 문서에 의하면 평양의 남북 협상회의는 평양에 소련군사령부가 건의해 1948년 4월12일 소련공산당이 승인한 것이었다.

또다른 기록은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 지은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다'란 글에서 당시 상황을 읽을 수 있다.

두 김씨(김구·김규식)의 북행을 묵인하기로 해준 뒤에 이승만은 윤석오 비서에게 이렇게 말했다.

"평양은 무엇 하러 가나? 모스크바로 가야지. 김일성을 백날 만나봤자 무슨 소용 있나? 스탈린을 만나서 직접 담판이라도 한다면 모를까!"



◇…'남한 만이라도 총선거 유엔 의결'... 한반도는 급랑

유엔 소총회는 그러나 결정에 따르지 않거나, 소련과 북한이 서울에 머물고 있는  유엔한국위원회의 방북거부를 감안, 결의안에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다.

유엔한국위원회 결의안 내용은 '부득이 한 경우에는 남한부터 선거를 실시하되, 3분의 2인 200명은 남한 선거로 충당하고, 나머지 3분의 1인 100명은 북한 대표로 남겨둘 것'과 "우선 남한부터의 총선거준비를 진행할 것'으로 되었다.

유엔 소총회 결의안이 국내 알려지자 남북 정치권이 찬반논란에 휩싸였다.

또한 남한 내 정치권의 표정도 가지가지였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이승만 진영과 한국민주당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비롯한 정당단체 대표들은 이승만을 방문하여 유엔 소총회결의안 통과에 따른 축하국민대회를 열기로 하는 등 적극 찬성했다.

그러면서 국민대회를 열기로 하고, 이후의 선거대책을 토의한 뒤 “남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한 뒤에 점진적으로 통일을 성취하자.”고 밝혔다.

반면,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한국을 분할하는 남한단독정부도, 북한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라며 "오직 남북통일을 위하여 최후까지 노력하겠다.”라고 선언했다.

이들은 "남북정치요인회담을 통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남한내에서는 이처럼 이승만 계열과 김구·김규식 계열로 양분되었다.

그중에도 김구와 김규식 등이 이끌던 한국독립당, 민련을 비롯한 군소정당사이에서는 남한에서만의 총선거는 남북분단을 항구화하게 될 것이며, 조국의 완전한  통일은 불가능케하게 될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북한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서 조국의 완전통일위한 협의를 갖도록하자는 협상론을 들고 나왔다.   

또한 1948년 2월, 14개 정당과 51개의 사회단체로 구성된 중간파 정치세력의 집결체인 민족자주연맹은 위원장 김규식의 숙소인 서울 삼청장에서 연석회의를 가졌다. 

김규식 주재회의에서는 정치위원 홍명희와 원세훈 등 5명과 상무위원 안재홍·여운홍·최동오·유석현·이상백 등 17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회의결과,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의 개최를 요망하는 서한을 보내기로 결의했다.

한국독립당 위원장 김구의 승낙을 얻어 김구와 김규식 두 사람의 연서로 보낼것에 합의하여 같은 달 16일 서울의 소련군 대표부를 통해 전달했다.

◇…이승만 '김일성회담 반대', 김구 '남북협상론', 김규식 '좌우합작'

그 뒤 북한은 김구와 김규식이 보낸 서신에 대해서는 언급 없었다.

대신 김일성과 김두봉을 비롯한 9개 정당단체 대표자들의 연서로서 3월 25일의 평양방송과 서신으로 북한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제26차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알려왔다

1948년 3월25일 당시 평양방송은 화답내용은 이렇다.

방송은 '김구, 김규식 두사람이 서한을 보내어 남북협상을 요청해왔다'고도 소개했다.


이에 대해 남한 정치권에서는 이를 "그들의 상투적인 선전 술책의 하나"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김구는 다음 날인 26일 경교장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식으로 남북협상을 제의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3월29일 김구는 북한으로부터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리는 남북협상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는다.

북한은 같은해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남한의 모든 민주주의 정당사회단체와의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조선의 민주주의독립국가 건설을 추진시키는 것을 공동목적으로 하자고 알려왔다.

이 서한은 민족자주연맹· 한국독립당·남조선노동당 등 17개 정당사회단체와 김구·김규식 등의 15명에게 전달됐다.

주요 인물은 김구, 김규식, 조소앙, 김붕준, 백남운, 홍명희, 김일청, 이극노, 박헌영, 허헌, 유영준, 허성택, 김원봉, 송을수, 김창준 등이다.

미군정청에서는 즉각 사령관인 하지중장 이름으로 김구의 방북에 반대했다.

'남조선에서 김구, 김규식 등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북행했으나, 그들은 결코 남조선의 대표자가 될 수 없다. 남조선에서 북행한 정치가들이 북조선의 김일성과 자기마음 대로 협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이다'

또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정당사회단체에도 이를 전달하였다.

북한이 남북협상에 의한 통일정부수립 제의를 유엔이 반영할 수 있을 때에는 회답이 없다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자 이러한 제의를 한데 비난이 일었다.

우익에서는 이를 남한 측의 정부수립노선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북한 측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평가했다.

북한이 내민 서한은 급조된데다, 간계에 빠질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갔다.  

그러자 김구와 김규식은 3월 31일 그 동안 남북간에 오고간 서한을 공개했다.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협상) 회담은 그들이 미리 준비한 잔치에 참여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우가 없지 않으나, 우리 두 사람은 남북요인회담을 요구한 이상 좌우간 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보였다.

이승만은 남북협상에 관해서는 김규식과 양해한 바에 따라 일체 언급을 회피하고 총선거 준비를 진행하였다.

국내의 여론이 찬반 양론으로 갈라져 들끓는 가운데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 측의 진의를 알아보기 위하여, 4월 8일 안경근과 권태양을 평양에 파견했다.

그들은 김일성과 김두봉을 직접 만나 김일성으로부터 “우리가 통일을 위하여 만나 이야기하는 데는 아무런 조건도 있을 수 없다. 두 선생님께서는 무조건 오셔서 우리와 모든 문제를 상의하면 해결된다.”라는 회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방북 보고에 김구는 북행을 결심했으나, 김규식은 태도를 결정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평양회의는 당초 예정했던 4월 14일에서 19일로 늦췄다.

이 사이에 서울에서는 4월 14일 저명한 문화인 108명이 연서하여 남북요인회담의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김규식도 이들의 지지선언 후 “남북 협상만이 조국의 영구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는 구국의 길이다.”라고 밝힌 뒤 북행을 결심하게 하였다.

김규식와 가깝던 하지사령관은 그의 정치고문 버치 중위를 보내 북행을 만류하였다.


김규식은 민족자주연맹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 자신이 북행에 앞서 김일성에게 5개 항의 조건을 제시하여 그 수락을 전제로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건은 ▲어떠한 형태의 독재정치도 이를 배격할 것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하는 국가를 건립할 것 ▲전국적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어떠한 외국의 군사기지도 이를 제공하지 말 것 ▲미소 양군의 철퇴는 양군 당국이 조건·방법·기일을 협정하여 공포할 것 등 5가지였다.

김구가 평양 출발 하루 전날인 4월 18일, 김규식은 권태양과 배성룡 두 특사가 다시 평양으로 가서 김일성을 만나, 5개 항의 조건을 수락한다는 의사를 확인했다.

이런 답신은 이날 밤 평양방송을 통하여 남한으로 보도되었다. 

김규식은 이것으로 북행의 명분을 세우고, 21일 민족자주연맹의 대표단 16명과 함께 평양으로 떠났다. 이미 김구가 단독으로 떠난(4월 19일) 뒤였다.

◇…김구 4월 19일, 김규식은 21일 평양행...김일성등과 연석회의

4월19일 이른 새벽에 김구가 거처하는 경교장 앞에는  60여 명의 청년들이 모여, 김구의 뷱한행을 포기하도록 권고했다.


김구는 "가야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야하는 것이다. 남북통일을 위해서는 모든 고난을 위해 무릅쓰고 가야하는 것이다. 만약 나의 목적이 성취되지 않으면 나는 38선을 베게삼고 자결할 것이다'.

비장한 김구의 각오가 나오자 유림(儒林)들은 방북반대 입장문이 나왔다,

'백범이 독립운동을 하니까, 백범 김구선생이지 (공산주의자들과) 타협하면 김구가 아니다'

그러나 김구의 뜻을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구는 4월 19일 오후  늦게 승용차편으로 평향을 향해  출발, 이틑 날 평양에 도착했다.

이 무렵 평양에서는 김구를 비방하는 욕설 등이 담벽 등에 페인트로 씌여진 것을 김구가 목격하고 이맛살을 찌쁘리게 했다.

당시 평양의 신문과 방송에서는 백범과 김규식을 최고의 대우로 대접했다,

'전 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라는 것은 북한의 공산주의자들과 노동자, 농민, 청년문학가, 음악가 등 이름모를  온갖 글의 허수아비단체들이 총동원됐다.

각 단체는 14명의 대표와 똑같은 결의권을 갖게 했으며, 회의는 남한의 정치요인들이 평양에 도착하기 전인 19일부터 열렸다.

때문에 '남북연석회의'는 그럴 듯한 간판을 내건 남북협상을 김구를 비롯해 남한 정치인들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 회의는 이미 19일부터 열려 21일 모두 퇴장했으니, 남한인사들은 김일성의 얼굴도 익히지 못하고, 단지 김구, 조소앙, 조완구 등 3명만 참석했을 뿐이다.

이들은 주석단에 22일 오전에야 보선되었다.

김구는 "우리는 한 피를 가진 겨레이니 갈라 질 수 없다"는 요지로, 조소앙도 비슷한 취지의  인삿말을 했다.

이렇게 남북연석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남북연석회의란 남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의 준말로, 남북의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관심사인 문제를 토의하는 회의 방식이었다.


남북연석회의는 1948년 4월 19∼23일 평양에서 닷새간 열려 남한의 단독 총선거를 반대하는 투쟁을 결의한 것이 출발이었다. 

당시 북한은 한반도 전역에서의 총선거 실시라는 유엔 결의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가로 막았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인민회의에서의 헌법 초안 마련, 인민군 창설, 주요 산언 국유화 등 사회주의 개조 작업을 진행하여 독자 정권 수립을 진행시켜 나가고 있었다.

이는 북한 공산당이 미리 작성한 각본대로, 모든 의제를 통과 가결시키니 낙북 통일을 위한 진지한 토론따위는 시간적 여유도 없이 다만 김일성일당에게 이용만 당하는 꼴이었다.

당시 공산당이 급작스레 남북통일 협상을 음모한 목적은 너무도 분명했다.

미군정을 비난하고 5.10선거를 반대하는 동시에 착착 그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이른바 인민국 정부수립에 명색만 남한 정치권 대표를 이용한 꼴이 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 당시 기록을 보면 남북연석회의 제1일차 회의는 같은 달 9일 오후 1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대표자 545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주석단 28명 입장, 김일성 사회, 대표심사위원 9명, 김두봉·허헌 외 여러 명의 축사로써 일정을 완료하였다.

제2일차 회의는 같은 달 21일 오전 11시에 개회, 북조선 정세에 관한 김일성의 보고가 있었고, 오후 1시부터 백남운과 박헌영의 남조선정치정세보고에 이어 토론이 있었다.

제3일차는 이튿날인  22일 오전 10시 20분부터 백남운의 사회로 개회, 청년대표의 축하, 21일에 이은 토론, 오후 김구·조소앙·조완구·엄항섭(이상 한국독립당), 원세훈·김붕준최동오·윤기섭·송남헌·신숙(이상 민족자주연맹), 홍명희(민주독립당)의 입장, 김구·조소앙·조완구·홍명희 등 4명을 주석단으로 보선하였다.

제4일차는 같은 달 23일 김원봉의 사회로 개회, 북조선여성대표의 축사, 이어 홍명희의 ‘남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낭독이 있고 나서 이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한 뒤, 본회의의 이름으로 '3천만 동포에게 호소하는 격문'을 채택하고, 이극로가 낭독했다.

여기에 이 회의에 참가한 16개 정당대표와 40개 단체대표가 서명하였다.

이어 4월 25일에는 오전 11시부터 김일성광장에서 34만 명의 연석회의 축하대행진과 시민대회, 오후 4시부터 북조선인민위원회의실에서 김일성 초대연 등이 있었다.

제5일회의는 26일 미소 양군의 즉각 철군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양국에 전달할 것을 결의, 채택하고, 허헌의 남조선대책보고연설이 있은 뒤 단선단정반대전국투쟁위원회를 결성할 것을 결의하는 것으로 연석회의의 공식일정이 끝났다.

◇…남측 김구·김규식, 북측 김일성·김두봉...4김씨 회담

연석회의의 공식일정이 끝난 이틀뒤인 27일부터 30일까지 남북요인회담을 같은 장소에서 열었다.

남북요인 15명은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붕준·이극로·엄항섭·김일성·김두봉·허헌·박헌영·최용건·주영하·백남운 등이다.

회의에서는 김규식이 제시한 5개 항의 조건을 중심으로 토의가 이루어졌다.

이어, 남북통일정부 수립방안을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첫째,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 철거하는 것이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유리한 방법이다.

둘째,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퇴한 뒤에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셋째, 외국군대가 철퇴한 이후 다음 연석회의에 참가한 모든 정당사회단체들은 공동명의로써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통일적 조선입법기관을 선거하여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넷째, 위의 사실에 의거하여 이 성명서에 서명한 모든 정당사회단체들은 남조선단독선거의 결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지지하지도 않을 것이다.

남북요인회담이 열리는 동안에는 남한측에서 김구·김규식, 북한측에서 김일성·김두봉 간의 회담이 열렸다.

신문들은 이른바 ‘4김 회담’이라고도 했고, '4김씨 회담'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는 북한 측의 김두봉의 제의로 연백평야에 공급하다 중단된 수리조합 개방 문제, 남한으로 공급하다 중단한 전력의 지속적인 송전 문제, 조만식의 월남 허용 문제, 만주 여순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유골 국내 이장 문제 등에 관해 논의했다.

김일성은 이에대해 수리 조합 개방, 전력 송전과 관련, 즉석에서 수락하였고, 조만식과 안중근 이장 문제는 뒤로 미루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그해 5월5일 서울로 돌아왔다.

김구·김규식은 서울로 돌아와 국민들에게 이 사실과 함께 3가지를 북 측으로부터 약속받았다고 발표했다.

그 약속은 남한에 송신(送信)계속, 연백저수지 개방, 조만식 선생 월남 허용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돌아온 지 며칠 뒤, 북한은 다시 수리 조합과 전력 송전을 중단하고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단 한가지의 약속도 북 측은 지키지 않았다.

이렇게 결국 남북협상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정에서 이들 통일정부수립노선을 택하였던 인사들이 배제되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미소냉전체제의 국제정세하에서 민족의 분열을 막고 통일국가수립을 위한 노력은 분단시대의 중요한 민족적 과제라 할 수 있다. 

남북협상이 민족의 꿈으로 사라질 것을 예견하면서도 김구, 김규식 두 지도자가 북행을 결행한 것은 민족과 역사 앞에서 민족정신이라는 의무를 완수하겠다는 의지로 긍정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승만정권이 들어서고는 이들의  북행은 김일성단독정권 수립책략에 이용된 것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북한에 당한 참패라고도 했다.

김구는 이후 서울로 돌아오기 전인 4월 28일 침통한 표정으로 말한다.

"내가 대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몸도 피곤하고 또 대표들이 참가했기 때문이다. 모든 결정서에 대해서는 단선(單選) 단정(單政)반대가 그 취지인 만큼 대체로 찬동한다.
다만 남북요인회담이 선행되어야 할 것을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장차 있을 예정인데, 내 본의는 이 회망에 있는 만큼 그 결과를 보아서 공적 의사표시를 하겠다.
그성과에 대해서는 난항을 각오하나 끈기있게 의논화하련다. 
어쨋든 남조선 단정은 반대요, 북조선 단정도 반대라는 것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해둔다."
 
이후 북한은 대남전략에 입각하여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또는 정치협상회의를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를 협의하는 회의체 형식으로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다.

1970년대에 들어와 당국 간 회담인 남북조절위원회가 가동되어 불완전하나마 사실상 서로의 실체를 인정한 후에도 이 연석회의 주장은 계속되었다.

그 명칭은 시기에 따라 바뀌어 왔지만 기본적으로 각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모여 남북의 입장을 떠나 개인적인 의사를 표명하고 이를 집합하여 결론을 낸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남북협상으로 우호적 제스처를 써온 북한은 따발총과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도발훈련을 비밀리 준비해오다, 결국 6.25 동란으로 이어진다.

▶▶참고문헌및 인용자료: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역사의현장(한국편집기자회),신수용 사건반세기,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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