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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용의 뉴스창

【단독】<신수용 한국정치사(40)> 해방 후 난립된 이념 정파들, 이승만發 "헤쳐모여"식...첫 정계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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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후 반공과 일민주의 내세운 이승만의 반공정권 굳히기.
-해방전후의 이념,독립운동, 국내정치단제등으로 난립된 정치권 정계개편.
-이승만의 일민주의앞세운 민국민주당 창당...대한청년단도 공식 발족지원.
-이승만,신익희국회의장에 대한 인식공격성 견제 본격화.
-김구, 한독당존립위기속에 서울서 남북통일협상 기대.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물론 지난 2020년은 4.15 총선을 또 2021년 4월7일은 서울부산시장등 재보 선을 치른다.  이처럼 선거와 정치는 이제 참된 백성(民)이 군주(主)의 시대를 정착시킬 기회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 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해방후 우후죽순 생겨난 정파와 정치단체들은 1948년 8월15일 초대 정부가 수립된 뒤 이합집산이 봇물을 이뤘다.

 그 중심은 초대 대통령의 이승만이 있었다.

그는 사사건건 국회와 대립하면서 여당 결성 작업을 추진했다. 

그 중의 하나가 신익희, 이청천, 배은희 등의 주축으로  정부수립 석달뒤인  1948년 11월13일에 창당된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이다.

대한 애국당은 이승만의 일민주의(一民主義)를 당시(黨是)로 표방했다.

◇… 이승만의 대한애국당 창당...그러나 당시 높고 분열

하지만 독촉국민회(獨促國民會)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손세일의 비교 평전 한국 민족주의의 두 유형-이승만과 김구'를 보면  대한애국당과 독촉국민회의 관계가 잘나와있다.

그 때 독촉국민회의가 지도부의 당시(黨是)와 달리, 국민운동을 계속하겠다고 나서며 정당 결성에 반대해  이 대한국민당은 양분됐다.
  
한국독립당(한독당)은 김성수(金性洙)의 한국민주당과 합당,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도 이때 생겼다. 
  
이승만은 그해 10월 19일 여순사건을 계기로 반공태세를 강화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를 계기로 10여개 청년단체를 통합하여 12월17일에 서울운동장에서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을 조직했다. 
  
이 무렵, 사회당(社會黨)도 창당되었다.

한독당 위원장 김구와의 노선 갈등으로 당에서 제명된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조소앙(趙素昻)은 그해 12월11일에 서울 종로  YMCA강당에서 사회당(社會黨)을 창당했다. 

사회당 창당식에 앞서 조소앙은 이승만을 방문했다.

이승만역시  사회당 창당식에 축사를 보냈다.
  
김구는 연말을 맞아 창당이 아니라 가난한 동네를 찾아 90만원을 희사했다. 


서울 금호동과 염리동의 빈민들은 그 돈을 기금으로 ‘백범학원(白凡學院)’과 ‘창암공민학교(昌巖公民學校)’를 개설했다.

 ◇… 여대야소위해 대한 애국당창당과 대한청년단 결성. 
  
  앞서 지적했듯이 정부출범 직후부터 국회와의 알력으로 궁지에 몰린 이승만은 해방과 함께 귀국하며 표명해 온 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버리고 대여당 결성 작업을 시도했다.
  
  이승만은 정부수립 1주일 뒤인 8월20일에 기자단과 만나 정당 조직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이 자유신문 8월21일자'정당필요도 인정'이란 제목으로 실렸다.
  
  “민주정치를 하자면 정당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정당은 내가 늘 말해오는 것과 같이 정부가 선 후에 조직되어야 한다. 정당은 둘이나 셋이 있으면 된다.

 이 정당들이 민주당, 공산당, 사회당과 같이 주의와 정강 정책이 있어야 할 터이다.  앞으로 내가 정당에 도움이 된다면 고문이나 코치를 해서 발전시켰으면 좋겠다. 이 다음 선거에는 정당제도로 하는 것이 좋겠다.…”1)
  
 이런 언급직후 내무장관 윤치영(尹致暎)과 외무장관 장택상(張澤相) 등은 국회 안의 영남 출신 의원 모임체인 태백구락부를 중심으로 3・1구락부, 민족청년단, 독촉국민회 정통파, 이승만 직계세력 등을 규합했다.

그러나 국회 안에 절대다수의 여당세력을 만들어 국회를 장악하려고 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승만의 정국구상은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다시 9월9일에 공보처를 통하여 자신이 정당조직 운동을 추진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듯한 담화를 발표했다.
  
  “근간 항간에는 정당과 파당의 구별을 밝히지 못하는 염려가 있어 보인다. 

원래 정당이란 정치상 커다란 주의가 있어서 자기가 주장하는 그 주의가 성립되어야 국가와 민족이 발전하겠다는 뜻으로 분투하는 것이 곧 정당이다.

이와 반대로 파당이란 아무런 정치상 주의가 없든지 또는 주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막론하고 성군작당(成群作黨)하야 권리를 빼앗기로만 위주하는 것이니, 국가와 민중을 위한 정치상 주의를 가진 정당이 없이는 민주제도를 행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급히 행하려고 하는 것은 정당정치의 지도로 국내에 두세 정당을 만들어 각각 다른 커다란 주장을 내세워 그 주의 주장이 혹은 이기고 혹은 지는 중에서 민권이 보호되고 국권이 진전되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은 2, 3개 정당이  경쟁하는 것이 민주정치라고 강조했다.

  “근래에 정당을 의논하는 사람들이 혹은 여당을 만들고 혹은 야당을 운운한다.

 그 의사를 들으면 어떤 개인이나 단체를 반대 혹은 지지하자는 것이라고 하니, 이것은 민주국가로서 가장 위험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치상 목적을 가진 모든 지도자 제씨는 이러한 현실에서 그 타당성을 밝혀 권리나 지위를 둘째로 하고 먼저 국가민족의 복리를 염두에 둔 후 각 정치상 주의 주장을 세워 거기에 따라서 정당을 세워야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제도에 비로소 토대가 생길 것이다.

이 토대가 굳어야 비로소 민주정부가 완전히 수립되는 동시에 영구한 행복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고는 자신의 정당 조직 구상에 관해서는 속내를 드러냈다.

그해 9월 10일자 조선일보는 '대통령조당공작 시인'기사는 이렇다.
  
 
“항간에는 내가 제1당이나 혹은 여당을 만들어 마치 정권이나 세력을 잡으려는 듯이 언설을 유포하는 인사와 언론이 있는 듯하다.

이는 오해다.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은 나를 돕고 남을 해하려는 파당을 만들고자 함이 아니다.

가령 여기에 평민정당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도와서 그 토대를 만들어 주자는 것이다.

 이와 다른 주의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다른 정당을 만든다면 그것을 도와 그 기초를 튼튼히 해주고자 함이니…”
  
  
◇… " 신익희는  매우 유능한 정치지도자지만, 나와 달리 반민특위에 나서"
  
  이승만은 이튿날  미국인 친구이자 언론인인 올리버(Robert T. Oliv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정당 조직 계획에 대해 썼다.

특히 신익희 당시 국회의장에 대해 인신공격까지 했다.


신익희의장이  대통령 이승만의 말을 듣지않고 달리 친일부역자와 민족반역자청산에 앞장선 데 대해 인신공격까지 해가며 맹비난했다. 

  “3년 동안 외국인 지배 아래 있었던 한국인들은 나라 전체를 파멸시킬 권력욕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서울의 정치인들은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사악한 패거리입니다. 부통령은 반민특위(친일파들을 수색하기 위해 설치)의 지휘권을 요구했다.

 나는 그와 그의 추종자들과의 대립을 피하기 위하여 양보했습니다.   신익희는 유일한 매우 유능한 정치지도자입니다. 그는 못하는 일이 없어요.

 그러나 그는 당이나 다른 어떤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일할 뿐입니다. 나는 그에게 독촉국민회의 위원장을 맡겼습니다.

그는 그것을 오로지 자신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이용했고, 마침내 사람들은 그의 그런 태도에 분노했습니다. 

그는 소수의 추종자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만일 푸른 신호가 켜진다면 어느 누구보다도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보고에 동요하지 마십시오. 지방의 국민들이 내 뒤에 있는 한 모든 것이 잘되어 나갈 줄 압니다. 
  
  나는 독촉국민회를 가지고 정당을 하나 조직할 참인데, 신익희와 이청천(李靑天·그도 매우 분개하고 있음)과 그 밖의 몇 사람을 끌어들일 생각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 회합을 가질 것입니다.…”
  
  이 회합이 경무대에서 열린 신익희, 이청천, 신석우(申錫雨), 배은희(裵恩希), 김약수(金若水) 등을 초청하여 신당조직에 관하여 격의 없는 의견 타진을 했다는  모임이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헌법제정 과정에서 한민당과 권력구조 문제로 알력을 벌이던 때부터 독촉국민회를 주축으로 한 정당 조직을 구상했던 것 같다. 

그는 7월7일에 열린 독촉국민회 제7차 전국대표자대회에서도 훈화에서 이런 언급을 했다.

 “국민회는 국권회복하자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이제는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군주정치가 아니고 민주정치인 만큼 우리는 정부를 옹호 육성하여야 할 것이다.

국민회는 이 책임을 담당하여야 할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7월9일자, '독촉임시전국대회'의 기사를 보면  이 무렵 독촉국민회는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이날의 전국대표자대회도 성원미달로 임시대회로 열렸다.
  
  
◇…  신익희, 이청천은 조소앙과  이승만권력에 대응한 야당 창당 준비.

 이승만은 이처럼 신익희와 이청천, 특히 신익희의 향배를 세심하게 의식했다.

 이승만의 조각 작업에 불만이었던 신익희와 이청천은 정부 출범 직후에 해외파 세력의 규합 공작을 추진했다.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 진영의 제휴를 기도한 것이다. 

이청천은 야당으로 돌아선 한민당의 김성수(金性洙)를 여러 차례 찾아가서 회담했다. 

그리하여 8월24일에는 조소앙(趙素昻), 신익희, 이청천 등 10여명이 회합하여 해내 해외 양 진영이 협력하여 강력한 야당을 조직하기로 합의했다.

이들의 회합이 거듭되면서 김구, 김규식, 김성수, 신익희, 이청천의 5인회담설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 내부의 의견 불일치로 5인회담은 실현되지 못했다. 

한독당은 조소앙, 조완구(趙琓九), 엄항섭(嚴恒燮) 세 사람을 당면정책연구위원으로 하여 한 달 넘게 당노선을 재검토하게 했다.

그러나 조완구와 엄항섭의 고집으로 조소앙의 합법적인 야당 결성 주장은 관철되지 못했다. 

한편 민족자주연맹도 제2차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제명까지 하기는 했다.

그러나 김구.김규식의 통일독립촉진 노선에서 급격히 이탈하기는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다.
  
 조소앙은 독자적으로 정당 조직에 나섰다.

배은희를 중심으로 한 목요회(木曜會)계의 여당 결성 운동에 불만을 품은 독촉국민회 부위원장 명제세(明濟世)와 옛 국민당의 안재홍(安在鴻)과 박용희(朴容羲)도 참여했다.

9월4일부터 조소앙, 신익희, 이청천, 안재홍, 박용희, 명제세의 6인회담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9월23일 밤에 이르러 민족진영 대동단결의 구호 아래 ‘4원칙’에 합의하고 차기 정권 쟁취를 목표로 한 대야당 결성 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하기로 했다.

 9월24일에는 국회의장은 공정중립을 지켜야한다는 여당의원들의 강력주장이 쏟아지면서 일단 신익희를 제외한 5인성명이 발표됐다.

같은 날 오후에 이청천역시 무임소장관 사표를 제출했다. 

그동안 현 단계의 정당 운동과 관련해 신익희는 당시 성명에서 빠졌다.

 ‘4원칙’ 합의 이후의 첫 6인회동은 9월25일에 신익희가 불참한 가운데 개최됐다.

 우선 신당발기 연락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여섯 사람이 각각 연락위원 여섯 사람씩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자 신익희도 ‘4원칙’에 찬동한다는 편지를 보내는 한편 연락위원 명단도 통고해 왔다.
  
  당명도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조소앙은 한국사회당을 주장하고 이청천 등은 민족사회당 또는 국민사회당을 주장했다.


그러다가  사회당으로 낙착되었다. 

이청천은 신당의 성격이 ‘민족적 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당 결성 운동은 10월2일에 열린 신당연락준비 전체회의를 계기로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청천이 “민족진영 대동단결의 견지에서 한민당과의 접촉을 긴밀히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안재홍이 강경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민당 쪽에서도 원칙문제로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어느 정도는 양해한다면서도 농토의 국유화와 교육의 국가 부담을 반대하고 중소기업의 자유방임을 고집하여 협의는 중단되었다.
  
◇… 조소앙 "대한민국은 피두루마기 입은 3·1운동의 골격"...그러나 제명.
  
  조소앙은 당시 이론가로 통했다.

그는 신당 결당 운동을 추진하면서도 한독당을 탈당하거나 한독당 부위원장 자리를 사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신당 결성 작업은 김구의 ‘묵인’ 아래 추진되는 것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10월15일에 열릴 한독당 전국도지부장회의를 앞두고 10월12일에 조소앙이 발표한 장문의 성명서는 한독당과의 결별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소앙은  성명서에서 먼저 ‘대한민국의 지위와 성질’이라는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확언했다.
  
  “목전 서울에 있는 대한민국은 그 자신이 피두루마기를 입은 3·1운동의 골격이다.

 5천 년 독립민족의 적자(嫡子)이며, 장래 통일정권에로 돌진하는 발동기가 되고 가교가 되고 민족진영의 최고조직임을 이에 천명한다.
 
자신이 참가하지 않았다고, 자당의 정책이 집행되지 못했으며 주권과 영토가 완성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을 거부할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한독당과의 관계와 신당’이라는 항목에서는 “한독당은 건국강령, 즉 삼균주의와 당면정책 14개조를 충실히 집행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1948년 10월13일자 서울신문에 게재된 '민국정부(民國政府)는 민족(民族)의 적자(嫡子)'을 당시 조소앙의 선언이 잘 나와있다.

그는 “목전에 걸린 긴급한 문제와 장래에 닥쳐올 곤란을 타개하며 방지하기 위하여는 대중기초 위에서 원칙과 방법을 병행하여야 할 것이다. 

통일의 구호만을 부르고 통일로 가는 첩경을 차단하여도 안 될 것이다. 

통일의 방법으로는 전 민중의 공론을 채택할 것과 권력 형태의 조직을 통할 것과 국제기관의 원조를 고려할 것 등이다.

 이런 때문에 이런 과업을 기성정당으로서 활발하게 집행할 수 없다고 단정한다면 신조직의 형태를 통하여 이것을 운용해야 될 것이다.

 신조직의 사명은 건국강령과 삼균주의를 단계적으로 현실을 통하여 일보일보 집행하는 데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독당을 가지고는 당면과업을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없다고 공언한 것이다.
  
 김구는 분격했다. 10월15일 오전에 건국실천원양성소에서 열린 한독당 전국지부장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본당의 정치노선에 대하여 누구를 막론하고 비난할 자는 없을 것이다. 정의를 위해서 우리의 앞길은 험로이지만 일치단결하여 독립운동의 재출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대회에서는 부위원장 조소앙이 추진하는 신당 문제와 관련하여 격론이 벌어졌다.

조소앙을 제명처분해서라도 종래의 당노선을 견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남북통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인 만큼 조소앙의 노선으로 나가자는 등 열띤 토론으로 회의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엄항섭이 나서서 “이 당은 백범 선생과 조소앙씨의 개인의 당이 아니다. 오로지 한국을 구출하자는 혁명적인 한국인의 당이다.

 그러므로 조소앙씨 노선이 옳으면 신당으로 가는 것이고 한독당이 옳다고 생각하면 같이 가는 것이지 여기서 그렇게 감정적으로 시비를 논할 바 아니다”라고 비장한 결의를 표명했다.

이에 따라, 종래의 노선을 확고하게 지지 추진하자는 결의를 새롭게 하고, 16일 오후 5시에 한독당 전국지부장 회의를 마쳤다.
  
 ◇…  이승만의일민주의를 당시로한 '대한국민당' 창당 

김구는 대회를 마친뒤 '조소앙의 신당 운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에 대하여 나는 여러번 만류하였다. 원래의 노선으로 환원한다면 당은 관용할 것이다. 그러나 끝끝내 다른 당을 조직한다면 당은 조직의 강기(綱紀)를 숙청하기 위하여 적당한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다”라고 제명할 방침임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앞으로도 조직생활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동단결이란 큰 목표하에 다 같이 일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오랜 개인 관계는 유지할 것임을 시사했다.
  
  이어 10월19일에 경교장에서 열린 한독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조소앙을 비롯하여 신당 창당 작업에 참여한 당원들을 당적에서 제명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이튿날 김구는 선전부장 엄도해(嚴道海)와 함께 경상북도 지부조직을 확대 강화하기 위하여 자동차편으로 대구로 떠났다)
  
한편 상대당인 이승만중심의 독촉국민회의 여당 결성도 문제에 봉착했다.
 
독촉국민회를 주축으로 한 대여당 결성 운동도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았다. 

독촉국민회 안에서 위원장 배은희(裵恩希)를 중심으로 한 '목요회'와 이활(李活) 등의 '정치위원회 그룹'의 의견대립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승만 자신의 정당 결성 열의가 시들해졌다.

그러던 것이 여.야각당의 신당 결성 운동에 동시에 참여하고 있던 신익희가 여당 결성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로 태도를 바꿈에 따라 여당 결성 작업은 급물살을 탔다.

 당명은 가칭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으로 정해졌다.
  
  대한국민당 결성 추진 인사들은 10월2일 오후에 독촉국민회 회의실에서 발기준비위원회를 열고, 준비위원으로 신익희, 배은희, 강기덕(康基德), 박승호(朴勝浩) 등 85명을 선정하고, 결당 절차 등 일체를 준비위원회에 일임했다. 

그리고 우덕순(禹德淳)을 사무국장으로 하는 실무부서도 선임했다.
  
  대한국민당의 발기인총회는 10월9일 오후에 시공관에서 개최되었다. 발기인으로 추천된 인사는 국회의원 70여명을 포함하여 1000명 가까이 된다고 했다.14) 발기인에 국회의원 70여명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이승만의 신당 결당 목적을 짐작하게 한다.
  
  우덕순의 개회사로 시작된 발기인총회는 최규설(崔圭卨)의 경과보고에 이어 배은희를 임시의장으로 선출하고, 다음과 같은 당시(黨是)와 정강과 선언을 채택했다.
  
 < ○ 당시
  본 당은 일민주의로서 당시로 한다.
  
  ○ 정강
  1. 우리는 계급과 지역과 성별을 초월하여 민족 완전통일로 자주독립의 국권신장을 기함.
  1. 우리는 정치 경제 교육 등 각 방면에서 국민 균등의 복리증진을 기함.
  1. 우리는 민족의 정의와 문화를 계속 발양함으로써 세계평화와 세계문화에 공헌함을 기함.
  
  ○ 선언
 ' 성조 단군의 한줄기 피로 생겨진 삼천만 형제자매로 이루어진 단일 민족국가인 우리의 조국은 철저한 일민주의 이념을 기초로 한 국가 기본정책 수립에서만이 완전 자주독립과 국권이 완전히 신장 보존될 것을 확신한다. 

현하 국정이 전 민족적 대동단결의 일대 정당 출현이 시급히 요청됨을 직시한 동지들은 진중히 협의를 거듭한 결과 현 정부에 대하여는 여야당 성격을 초월하여 엄정한 시시비비주의로 대처하며 지도 원칙으로는 일민주의 이념을 당시로 하여 역사적 과업의 만전을 기하고자 발당을 각오한 것이다.…

  일민인 우리는 어디서든지 무엇에나 하나여야 하며, 하나 아닌 둘 이상의 상대적 존재가 있을 수 없는 일민주의 정치이념에 입각한 전 민족의 화복안위의 공동운명을 기할 수 있는 국민 생활운동 체제의 확립을 주장하며, 이 목적 달성을 위하여 우리는 일대 민족 정당으로, 또 민족국가 만대 번영을 수호할 간성으로 대한국민당이 발당됨을 선언한다.'

  
  이승만의 정치이념을 당시로 하여 창당하면서 이승만이 이끄는 정부에 대해서는 여.야당 성격을 초월하여 엄정한 시시비비주의로 대처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정당의 당파성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던 지식인들과 일반국민들의 정치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대회는 이어 한민당 대표로 참석한 국회의원 조헌영(趙憲泳), 기독교대표 김상돈(金相敦), 하와이 교민대표 손승운(孫昇雲) 등의 축사, 신익희의 격려사가 있은 다음 290여명의 창립위원을 선출했다.

 창립위원장 배은희, 사무국장 우덕순 휘하에 총무 황보익(黃保翌) 외 15인 등 각 부서의 복수의 책임자들을 선임했다.
  
 결당발기인대회를 마친 대한국민당 창립준비위원회는 창립위원장 배은희를 비롯한 간부들로 지방조직대를 구성하여 전국 각 지방에 광범위한 당원을 확보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독촉국민회는 정당으로 전환하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이 찬성하는 세력보다 더 많아 대한국민당의 결당 작업은 순조롭게 진척되지 못했다.

이후 대한애국당의 주축인 독촉국민회가 그해 10월27, 28일자 각 신문의 1면 광고란에 장문의 성명서를 냈다.

이는  대한국민당 결당 작업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5·10선거 이후 정국의 전환에 따라 국민회로서도 시국에 즉응하는 이념을 확립할 요구에 몰려 이에 우리는 자각적, 자발적, 자활적, 자치적으로 국가 내실의 완비를 위한 건설운동에 매진할 것을 요지로 한 ‘국민운동대강’을 7월 대회에서 제정한 것이다.

 한편 국회 개설 이래 정당운동이 대두함에 따라 본 회로서는 정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문제를 신중 연구하여 오던 바, 정치위원들은 이미 제정된 ‘국민운동대강’이야말로 국민운동과 함께 고도의 정치운동의 이념인 것을 확인한다.

 또한 한국정계의 실정에 비추어 보아 정국을 안정시킬 거족적 대당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하고, 이에 국민회로서는 달리 정당을 만들 필요가 없다 하고 국민운동을 그냥 추진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천명한 성명서는 정당 결성문제는 개인 의사에 맡길 것이며, 그것은 이승만의 뜻이기도 하다고 다음과 같이 잘라 말했다.
  
  “지난 9월5일에 도지부장회의를 개최하고 정당과 국민회 문제를 토의한 결과 정당은 개인 의사에 맡길 것이고 국민회는 국민운동을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결정하고, 그 방안을 강구하기 위하여 특별위원을 임명하였다. 그래서 이로써 새로 결성되는 대한국민당과 본 회와의 관계는 명백히 규정된 것이니, 총재 이 박사께서도 지난번 국민청년단 주최 국민회 출신 정부요인환영회 석상에서 국민운동의 필요성을 누누이 강조하시면서 정당은 그 주의에 찬동하는 자가 개인으로 종교 믿듯이 참가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본 회와 대한국민당과는 별반의 특수관계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타 정당과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 독촉국민회의 국민운동은 다름 아닌 반공(反共)운동.
  
  그러면서 성명서는 독촉국민회의 국민운동은 다름 아닌 반공운동이라고 못 박았다.
  
  “세계정세와 아울러 우리나라의 긴급한 과제는 어떻게 하면 공산주의를 초극하고 공산당의 반동을 극복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 이 문제는 여러 정당이 분립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민족적으로 국민의 총단결로써 해결할 문제이다. 

여기에 바로 국민운동의 과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7월 대회에서 작정한 ‘대강’은 이 과제에 답하고자 한 것이다.

 반공사상 전개, 반공국민 조직, 반공사회 실천 이것이 민족공동의 과업이요, 이것이 국민운동의 내용이요 목적인 것이다.

 우리의 소신에 의하면 국민운동으로서야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 이상적 국가를 건설하고 국가공안의 완비를 급속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권 전취를 목적하는 정당의 일을 돌볼 여유가 없다. 1에도 국민운동, 2에도 국민운동, 3에도 국민운동이다.…
  
  우리는 피로 물든 국민회의 이름을 버려서는 안 된다. 동지들이여! 저간의 동요와 해이와 낙망을 극복하자. 

우리는 우리의 바라는 완전 자주독립국가를 실현하고 현 우리의 이상하는 사회를 건설하자.”
  
  7월대회에서 작성한 ‘국민운동대강’은 사상통일운동으로 (가)민족의식 앙양, (다)신인간운동 전개, (라)공산주의 극복, (바)독점자본주의 배제, (차)노동입국정신 강조 등 열 가지를 들었다.18)
  
  독촉국민회는 명칭도 앞의 ‘대한독립촉성’을 떼고 그냥 ‘국민회’로 바꾸었다.
  
  이승만과 독촉국민회의 태도가 이처럼 달라진 것은 10월19일에 발생한 여순군인반란사건 때문이었다.

 여순사건은 이승만으로 하여금 반공태세 강화의 일환으로 반공사상의 강화를 초미의 과제로 인식하게 했기 때문이다. 

11월13일에 거행된 대한국민당의 결당대회에 대하여 도하 신문들이 1, 2단짜리 기사로밖에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  "쌍놈을 양반과 같이, 빈자(貧者)를 부자(富者)와 같이..."
  
  대한국민당의 결당식은 11월13일 오후 2시에 서울시공관에서 방청객을 포함하여 2000여명이 참집한 가운데 열렸다.

국민의례가 끝나자 바로 이승만의 축사가 이어졌다. 이승만은 새로 창당하는 정당은 ‘평민정당’이 될 것임을 강조했다.
  
  “나는 이 당에서 나 자신이 항상 제창한 주의를 당시로 하였다고 하니 관심을 가지고 참석한 것이다.

 이 정당이 출발할 때부터 세간에서는 내가 여당을 조직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대체로 보아 여당이라는 것은 그 정부를 지지하는 것이요 야당이라는 것은 그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 자신이 정당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말하는 바이다.
  
 정당이라는 것은 결코 방화 살인 등을 하든지 혹은 정권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쌍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빈자를 부자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정당이다. 

이 세상 사람을 신이 공평히 살도록 창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귀천부빈(貴賤富貧)의 차가 있으니 이 모순을 수정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도 자유 평등을 부르짖고 있으나 공산주의 혁명은 부자를 없애는 평등을 주장하며 살인 방화 등을 하고 있다.

반면 우리는 부자는 살려두고 빈자가 부자를 따라 올라가서 평등하게 살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나는 이 정당을 평민당이라고 보고 싶으며 평민이 평민을 벗어나기를 노력하려는 사람들이 일민주의 기치하에 모였다고 본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기 주의를 버리고 전 민족을 위하여 노력하여 주기 바란다.”
  
  이승만은 끝으로 당원의 각오도 강조했다.
  
  “정부 수립 후에도 국민운동이 중요하나 파쟁을 버리고 민족을 통일하여 우리의 지위를 높여 국민당주의하의 정부에 와야 살겠다(고 하게) 되도록 노력하자. 

이같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도록 만드는 것이 정당이니, 여러분은 민족의 복리와 민주정치의 기초가 될 확고한 주의들을 앞세우고 이를 신봉하고 그 정신을 실천하는 당원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면 나의 힘껏 애호하고 육성할 것이며, 내가 50년간 희구하던 것을 실현하여 주면 민족의 복리가 될 것이다.”
  
  대회는 선언문 낭독에 이어 이종영(李鍾榮)과 진헌식(陳憲植)의 축사후 임원선출에 들어가 신익희, 배은희, 우덕순 세 사람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또한 중앙집행위원과 중앙감찰위원을 선정하여 발표했다.
  
◇…  이승만,청년단체 대표들 직접 면담...이후 대한청년단 발족.
  
  여순반란사건에 이어 11월2일에는 대구 주둔 제6연대 군인들과 광주 제4연대 소속 나주지구 주둔군의 일부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강원도 오대산에서는 유격대의 활동이 계속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은 정당운동보다도 청년단체들의 통합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국회는 10월30일의 제92차 본회의에서 서상일(徐相日)을 위원장으로 하는 시국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11월5일의 제96차 본회의에 8개항으로 된 ‘시국수습에 관한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 가운데는 (3)국내 모든 청년단체를 해체하고 애국청년으로서 향위단(鄕衛團)(가칭)을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할 것과 (4)군사유사단체를 해체하고 호국군을 조직할 것이라는 항목이 들어 있었다.
  
  한편 이승만은 11월17일에 국민회청년단(국청), 조선청년동맹(청총), 서북청년회(서청), 대동청년단(대청), 대한독립청년단(독청), 민족청년단(족청), 학생총연맹(학련), 대한노동총연맹(대한노총), 육해군동지회, 대한창의단의 10개 단체 대표와 한 시간가량 면담했다.

 각 청년단체 대표들은 이 자리에서 비상시국에 대비하기 위하여 각 단체 대표 1명씩으로 ‘민병단(民兵團) 조직위원회(가칭)’를 구성하고, 이 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각 단체에서 행동을 취하며, 12월 말까지 훈련을 완료한다는 결의를 표명했다.
  
  이승만의 설명에 따르면, 전국 청년단체를 통합하는 목적은 “첫째로 국내 국외의 반역분자들의 파괴운동을 억제하여 국군과 경찰을 도와 치안을 보호하자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전국적 조직으로 민병대를 세워서 군인자격의 훈련을 받아 국가에 일이 있을 때에 국군의 후원이 되어 국권과 강토를 보호하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무렵 청년단체 대표들은 국방부 간부들과도 만나고 있었다. 

11월4일에는 국방부 참모총부의 초청으로 대동청년단, 조선청년총연맹, 서북청년회, 민족청년단의 대표들이 참모총장실에서 참모부 관계자들과 두 시간 동안 회담했다.

회담 내용은 남한의 현재 추진 중인 국군편성 예정수에 부족한 1만5000명의 충원을 각 청년단체에서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회의는 11월9일에 다시 열렸다.
  
  청년단체들의 통합은 이승만의 이러한 심사원려(深思遠慮) 끝에 단행된 것이었다. 

통합된 청년단체는 대한청년단이라고 명명했다.
    
◇…  서울운동장에서 대한청년단 발대와 이범석의 족청 해산

대한청년단의 발단식은 한 달 뒤인 12월17일 오후에 서울운동장에서 유진산(柳珍山)의 사회로 거행되었다. 

대회는 총재로 추대된 이승만을 비롯하여 국무총리 이범석, 대동청년단 단장 이청천, 법무부 장관 이인(李仁), 외무부 장관 장택상, 사회부 장관 전진한(錢鎭漢), 서울시장 윤보선(尹潽善) 등 많은 정부요인과 각 청년단체 대표 및 단원 등 많은 군중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먼저 서북청년회 단장 문봉제(文鳳濟)가 열렬한 개회사를 했다.

이성주(李成株)의 경과보고에 이어 서상대(徐相大)가 낭독한 선언문과 강령이 채택되었다. 

‘선언문’은 “(1)우리는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을 절대 복종한다”라고 하여 이승만에게 절대 복종을 맹세하고, (1)민족과 국가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의 주구배를 남김없이 말살하여 버리기를 맹세한다고 철저한 반공주의를 천명하는 등 4개항이었다

‘강령’은 (1)우리는 청년이다. 심신을 연마하여 국가의 간성이 되자, (1)우리는 청년이다. 이북동포와 합심하여 통일을 완성하자, (1)우리는 청년이다. 파괴분자를 숙청하고 세계평화를 보장하자의 3개항이었다.
  
  이어 강낙원(姜樂遠)에 의하여 임원이 발표됐다.

참석자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한달 보름전인 11월2일에 영국에서 귀국한 설화적인 선장 신성모(申性模)가 대한청년단의 단장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부단장으로는 문봉제와 이성주, 그리고 최고지도위원으로 이청천, 유진산, 전진한, 장택상, 서상천(徐相天), 강낙원 6명이 선임되었다.
  
  이승만은 “소아를 버리고 이처럼 단합한 데 감격해 마지않는다. 국가의 수호를 위하여 청년들은 자기의 직책을 다할 것이요, 국가 유사시에는 최후까지 헌신 노력으로 싸워 쾌활한 장부가 돼라”는 요지의 취임사를 했다.
  
  이어 각 청년단체의 사연 어린 단기의 봉환과 대한청년단기 수여가 있었고, 이청천, 윤재욱(尹在旭), 백남훈(白南薰) 등 내빈의 축사가 이어졌다.
  

  대회는 끝으로 북한동포, 국회, 정부, 유엔 등에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한 다음 전진한의 선창으로 만세 3창을 부르고 폐회했다.
  
 청년단 활동이 강화된 반면 대한애국당 창당은 답보상태였다.

 이승만의 엉거주춤한 태도 때문이었다.

이후 대한국민당은 청년단체 통합을 계기로 대동청년단 단장 이청천이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다시 활기를 띠었다.

 이청천은 12월21일에 대동청년단 중앙위원회의 마지막 결정이라면서 25세 이하의 단원은 무조건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하고 장년층 이상은 대한국민당과 합동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대한국민당의 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이청천은 이날부터 본명인 지대형(池大亨)으로 환원했다.
  
  신익희, 지대형(이청천), 배은희, 우덕순 네 최고위원은 연일 구수회의를 열어 대한국민당의 부서편성에 관한 토의를 계속했다.

12월23일에는 중앙당부 부차장들을 선임했다.
  
  그런데 대한청년단이 결성된 뒤에도 국무총리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이 합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1949년 1월5일에 민족청년단이 자진 해산하지 않으면 해산령을 발동하여 해산시키겠다는 강경한 담화를 까지 내놨다.

그러나 이러한 이승만의 경고에도 족청 대변인은 이튿날 “1월20일의 전국대회를 거쳐 합동에 관한 구체적 제 문제를 결정한 뒤에 합동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승만은 1월7일의 내외 기자회견에서 “만일 민족청년단이 반대하는 경우에는 의법해체시킬 작정이다”하고 강경해졌다.

이승만은 또 이범석에게는 민족청년단을 해산하고 국무총리로 남든지 총리직을 내놓고 족청 단장 일에 전념하든지 하라고 위협했다고 한다.
  
  당황한 이범석은 1월20일에 족청의 전국 이사 및 각도단장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단을 해산하고 대한청년단과 통합하기로 결의했다.

그러고 나서 이범석은 서울방송국 마이크 앞에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130만 단원들에게 족청의 해산을 호소했다.
  
  민족청년단에 대한 해산령에 대해서는 1월28일에 가진 정례 내외기자회견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족청의 해산을 명령하고 대한국민당과의 통합을 종용한 사실은 헌법에 명시된 결사의 자유에 위배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승만은 “족청은 군정 당시에 군정부에서 경비를 주어서 하던 것이므로 해산시킨다 하더라도 결사의 자유와는 다르다”라고 받아넘겼다.
    
◇…   사회당 창당하자  대한애국당, 한민당과 합당논의.
  
  10월2일의 신당연락준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한민당과의 합작문제가 무산되면서 교착상태에 빠진 사회당 결당 작업도 적극 추진됐다.

사회당은 조소앙과 명제세를 중심으로 몇 차례의 준비위원회를 통하여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기본으로 한 정강과 정책 등을 결정했다.

이후  12월10일과 11일 이틀 동안 서울 YMCA 강당에서 발기대회와 결당식을 가졌다.

발기대회는 전국의 발기인 823명이 참석한 가운데 10일 오전 11시부터 백홍균(白泓均)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임시집행부 선거로 들어가 조소앙을 의장으로, 백홍균과 배헌우(裵憲雨)를 부의장으로 선출하고, 이어 선언, 당의, 당강, 당책, 당헌 등을 채택했다.
  
  이튿날 11시부터 거행된 결당식에는 내빈과 당원 등 1000여명이 참석했다.

 회의는 국회의원 오기열(吳基烈)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사회당에는 국회의원 20여명이 참여하고 있었다.
  
  조소앙 특유의 열변의 개회사에 이어 조소앙을 의장으로, 오기열과 정형택(鄭亨澤)을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대회에서는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의 축사가 낭독되어 이채를 띠었다. 

이에 반해 김구는 물론 축사를 보내지 않았다.
  
 대회는 이승만과 각국 원수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했다.

메시지의 요지는 “우리 민족은 무산계급 독재도, 자본주의 특권계급의 사이비적 민주주의 정치도 원하는 바가 아니요, 오직 대한민국의 헌법에 규정된 균등사회의 실현만을 요구할 뿐이다”라는 내용이다.

대회에서는 '사회당의 강령’도 채택됐다.
  
  (1)우리나라의 인민, 주권, 영토를 통일하고 민족자주의 독립국가 조직을 완성한다.  
(2)국비교육과 전민정치와 계획경제를 실시하여 균지(均智), 균권(均權), 균부(均富)의 사회를 건설한다.  
(3)개인 대 개인, 민족 대 민족, 국가 대 국가의 평등과 호혜를 원칙으로 한 세계일가를 실시한다.
  
  결당식에 앞서 조소앙은 12월7일에 이승만을 방문했다. 

조소앙은 그동안의 애매한 입장에서 이승만 정부의 지지를 천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항간에는 그의 입각설이 나돌기도 했다.
  
  조소앙은 12월15일의 기자회견에서 대통령과의 회견내용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흥미로운 대답을 했다.
  
  “오랫동안 그립던 이 대통령의 얼굴을 뵈옵자는 것과 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으로 찾게 된 것은 국내 국제 변동 많았던 정세에 대하여 위로를 드린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입각설에 대해서는 “풍설로 돌리고 싶다”라고 여운을 남겼다
  
   유엔총회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은 여순사건의 여파로 길항을 빚고 있는 정계에 새로운 지각변동을 몰고 왔다. 

환상적인 18거두 합동운동 구상이 보도되는가 하면, 5인합작론이 거론되기도 했다. 

18인 거두 합동운동이란 이승만을 중심으로 김구와 김규식의 삼위일체 아래 이시영과 오세창(吳世昌)을 국로(國老)로 모시고 조소앙, 이청천, 신익희, 신흥우, 안재홍, 김성수, 이범석, 명제세, 배은희, 이훈구(李勳求), 신석우, 이윤영(李允榮) 등이 제휴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지지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5인합작운동이란 그 첩경으로 우선 김성수, 신익희, 이청천, 조소앙, 안재홍 5인이 주동이 되어 3영수 합작을 추진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한민당과 결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한국민당의 합당 움직임이었다. 

두 당의 합당 논의는 지대형이 대한국민당의 최고위원에 취임하면서부터 시작되어 1949년 새해에 들면서 급진전되었다.

 한민당 위원장 김성수, 부위원장 백남훈(白南薰)과 국민당의 신익희, 지대형, 배은희, 우덕순 네 최고위원 사이에 개별 접촉을 비밀리에 추진한 결과 당명은 한국민주당의 ‘민주’와 대한국민당의 ‘국민’을 합쳐 민주국민당으로 하여 1대 1로 합당하기로 합의한 다음 구체적인 것은 대표를 선정하여 일임했다

1월 21일에 열린 한민당의 중앙집행위원회는 국민당과의 합당을 정식으로 결의했다.
  
그러나 대한국민당과 국민회 인사들, 특히 대한국민당 소속 국회의원들 가운데는 합당 반대자가 많았다.

 이승만은 올리버에게 한 편지에서 보듯이 반민특위에 적극 나선 신익희를 유능한 정치지도자라면서도 강하게 견제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시기다.

 이승만은 그래서 신익희의 합당 작업이 미덥지 않았던 것 같다.

 이승만은 1월21일에 국민회의 임시 전국대표자대회를 소집했다. .
  
  
◇…  이승만의 경쟁상대인  신익희  본격 견제.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그의 속내를 드러냈다.

  “여러분은 정부가 수립되면 국민회 간부들이 정권을 잡거나 또는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을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긴급한 문제는 파당성을 떠나서 일치단결하여 통일을 완성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견지하에서 국민회 간부들이 정부의 고관지위에 앉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희생하려는 정신 밑에서 자손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 노력할진대 이는 우리의 희생이 아니라 후세의 자손들의 권리를 위함이 목적이다.
  
  한편 오늘날 정당이 많은 데 따른 폐단이 적지 않으니, 정당이란 특별한 주의 주장이 없으면 존재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같은 주의의 정당이 둘 셋씩 있다면 곧 이것이 파당적 존재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문을 연 이승만은 한민당과의 합당에 앞서 명심할 것도 주문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파당적 생각을 타파하고 일민주의하에 통일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정당도 두세 개 정도로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일민주의 정당을 만들고 이 정당으로서 장차는 선거 때에 승리하여 그다음에 정권을 잡는다는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바였다.

 이에 여러분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바는 국민회원들이 일민주의를 흡수해서 이것을 믿음으로 국민당과 합류해서 전국에 철저히 알려가지고 과연 정당 제도를 바로 세우기를 바라는 바다.

 국민당이 국민회에 합치든지 국민회가 국민당에 합치든지 그 방법은 여러분이 이 자리에서 생각할 문제다.

 그런데 항간에서는 국민당과 다른 정당 간에 합동설이 있으니,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합치는 것은 별문제다.

그렇지만 먼저 그 정당의 주의 주장을 잘 알고 해야 할 것이지 일시적 정치적 공작이라면 기대할 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국민회가 서울에서는 각 정당 간부 정객들의 파당싸움에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있으니, 중앙과 지방을 통해서 긴밀한 연결을 하여 국민운동 전개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몇몇 지도자를 최고간부로 하고 단순한 조직체로 만들어 남북통일 문제와 국권회복을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서 이를 단행하여 전국이 동일한 보조로 목적을 달성하여야 할 것이니, 이 말을 하고자 이번 대회를 소집한 것이다.”
  
 이는 신익희에 대한 은근한 견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기 위하여 국민회의 임시회의를 소집한 것은 합당문제와 관련하여 이승만이 여러 가지 개연성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합당 작업은 예정대로 진행되어 1월26일에는 한민당의 김성수, 백남훈과 대한국민당의 신익희, 지대형, 배은희, 우덕순의 공동명의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자주는 국제적 승인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니 우리는 우리의 앞에 놓여 있는 국토의 통일, 민심의 통일, 민생문제의 해결 등 더욱 중대한 과업을 완전히 달성하여야 비로소 국가의 독립을 태산반석같이 완고(完固)케 하고, 민족의 번영을 자손만대에 누리게 할 것이며, 아울러 세계만방의 후의에 보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왜적이 물러가고 신탁문제가 해결됨으로 인해서 밖으로 향해서 일치단결하는 마음은 해이하고 안으로 분열과 파쟁이 더해질 조짐이 없지 않으니 이 얼마나 우려할 일이랴. 원래 우리 민족은 피가 같고 전통이 같고 언어가 같고 습성이 같고 생활방식이 같은 단일민족이다.

단일민족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통일된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만민공영의 사회생활을 영위하려는 일민주의는 전 민족이 같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대한국민당과 한국민주당은 이 민족적 진로와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정책에 있어서 합치됨을 깨닫고 국민의 절대적 요망이요 민족적 지상 명령인 통일과 단결을 실행하기 위하여 합당을 결정하고, 이에 천하에 성명하는 바이다. 뜻을 같이하는 단체는 다 같이 와서 힘을 합하기를 바란다.”
  
  이 공동성명서에서도 일민주의를 강조한 것은 두 당 간부들 모두가 이 시점에서 이승만의 비위를 맞출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주국민당의 결당을 하루 앞둔 1949년 2월9일 오후에 소집된 대한국민당의 중앙집행위원회는 국민당의 사위스러운 운명을 예감케 했다.

 총무부장 명의로 소집된 회의에는 중앙집행위원 400명 가운데 93명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참석자 가운데 20여명은 합당 찬성파인 대동청년단계 사람들이었다. 

회의는 회의소집의 법적 근거와 성원미달에 따른 개회 성립문제를 둘러싸고 격론을 벌인 끝에 비공식회의로 진행하기로 하고 합당문제를 토론했다.

 합당 반대파의 발언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 남송학(南松鶴): “대동청년단과의 합동에서나 이번 한민당과의 합동에서 문제가 복잡해진 것은 최고위원의 독재와 무책임한 데서 기인한다. 곧 모든 절차를 합법적으로 순서를 밟지 않고 독단적으로 해놓고서는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 이유선(李裕善) 국회의원: “국민당계 의원으로는 한 사람도 합당에 참가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1월23일에서야 23명이 입당원서를 가지고 배은희씨를 찾았더니 합당설을 운위하기에 다음 이유로 전원이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유선은 반대 이유를 다음 네 가지로 설명했다.
  
  “(1)48개국이 승인한 지금 대동단결 운운하여 합당한다는 것은 통일 단결이 못 되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노출하게 되니 모순이다.  
    (2)각 지방에서 합당 반대 진정이 다수인데, 그 이유는 모당은 과도정부 3년 동안 민중에게 과오가 많다는 것이다.  
  (3)청년단체 합동문제만 하여도 도리어 알력이 심하다는 지방보고가 다수이다.
  (4)이남에서나 이북에서나 민중은 특수계급당인 모당을 지지하지 않고 있는 듯하니, 우리가 의원이 된 것도 민중의 지지로 된 것인 만큼 38선을 철폐해도 민중이 지지 않는다면 투쟁 대상이 되고 말 것이므로, 이북에서도 지적받는 정당과는 합당할 수 없다. 
그리고 그 후 20여명의 의원이 신익희, 지대형, 배은희씨 등으로부터 누차 합동 종용을 받았으나 한 사람도 찬성하지 않았건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합당추진설이 보도되어 우리는 재회합하고 드디어 대한국민당에서 활동하기로 하여 입당원서를 전부 철회하고 입당을 취소하였다.”
  
  ○ 진헌식(陳憲植) 국회의원: “국회세력이나 지방조직 세력을 무시하고 합당한다는 것은 부당하다. 지도자라도 민중의 의사를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진헌식은 전북, 경북, 충남, 황해도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러한 국민당의 분열조짐에 대하여 합당을 추진했던 최고위원 세 사람은 각각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대형은 합당절차에 하자가 있었음을 시인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강변했다.
  
  “현 단계에 이르러 민족진영이 대동단결해야 하겠거늘 대한국민당을 유지 존속 운운은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법리적으로는 중앙집행위원회를 거쳤어야 옳으나 최고위원, 부차장 회의, 상무집행 회의를 거쳐 합당하게 된 것인데 일부에서 반대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동당이 존속하여도 잘 안 될 것이다. 본인은 기정방침대로 민주국민당을 추진할 것이니 동당 존속에는 관련이 없다.”
  
  국민당 결당을 주동했던 배은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인이 국민당 유지에 관련된 것같이 전해지고 있어 당분간 정당생활에서 떠나겠다. 그리고 국민당이 존속한다는 데 대해서는 민주원칙에 의거해서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여하간에 이번 합당은 최고위원이 조급히 하여 중앙집행위원회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은 큰 실수로서 책임을 느낀다.”
  
  그리고 신익희는 “지대형씨 주장에 동감”이라고만 말하고 말을 아꼈다.
  
  ◇…  여당인 민주국민당 결성하면서도 이승만의 일민주의 공표.
  
  민주국민당의 결당대회는 1949년 2월10일 오후에 서울 시공관에서 각계 내빈들과 많은 당원이 참석한 가운데 가졌다.

국회의원 서정희(徐廷禧)의 개회사에 이어 최규설(崔圭卨)의 경과 보고, 조병옥(趙炳玉)의 국제정치정세 보고, 김우평(金佑枰)의 국제경제정세 보고, 이종근(李琮根)의 국내정세 보고 등의 순으로 시작됐다.

이어  곽상훈이 낭독한 ‘선언’과 이정규(李晶奎)가 낭독한 ‘정강 정책’이 채택되었다. 

이어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김성수, 신익희, 백남훈, 지대형의 취임사가 있은 다음 이시영 부통령과 오세창의 축사 대독이 있었다. 

기이하게도 이승만의 축사는 없었다. 그 대신 ‘선언’에서 이승만의 일민주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민국당을 결성한다고 천명했다.
  
  “우리 민족은 피가 같고 전통이 같고 국민적 이해가 공통되는 단일공동체이므로 절대로 분열되어서는 존립할 수 없으니, 민족적 통일국가를 반대하고 방해하는 여하한 상상도 용허하지 아니한다.
  
  전 국민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자유롭고 행복스럽고 안태하게 하기 위해서는 진선한 민주주의를 실행해야 하는 것이니, 국민의 권리와 복리를 무시하는 여하한 성격의 독재정치도 이를 부인한다.
  

  단일민족의 통일국가를 완성하여 철저한 민주정치의 실시를 이상으로 하는 일민주의를 실천함으로써 건국의 대업을 완성하고 민족만대의 번영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이에 민주국민당을 결성한다.”
  
  ‘정강’은 (1)특수계급의 독재를 부인하고 만민평등의 민주정치의 실현을 기함, (1)경제적 기회균등을 원칙으로 민족자주경제의 수립을 기함 등 5개항이었고, ‘정책’은 (1)중요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1)토지 분배의 조속 실시, (1)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등 10개항이었다.

‘정강정책’과 함께 ‘정책세목’으로 정치 외교, 재정 경제, 산업, 노동, 문화와 사회, 교육, 국방의 7개 분야에 걸쳐 43개의 세목도 발표했다.

 그 가운데는 배심제도 실시, 세제 개혁과 누진율 강화, 광공업의 계획 경제 확립,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 확립, 농민본위 토지 분배의 조속 실시, 국민교육비의 국고부담, 의무병역제 실시 등 사회주의적인 정책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김성수의 전기에 따르면, 김성수는 대한국민당과의 합당 작업을 추진할 때부터 이미 적당한 인사에게 당을 맡기고 자기는 인선에서 물러날 생각이었다.

 그가 민국당의 최고위원이 된 것은 합당 초기의 융화 단합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단계가 지나면 국회의장으로서 정치 일선에서 활동하는 신익희에게 당을 전적으로 맡기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정당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최고위원제와 같은 집단지도체제는 옳지 않다고 김성수는 생각했다.
  
   3영수 합작설이 1949년 신년 화두였다.

이런 가운데 1949년 1월1일 오후에 오랫동안 두문불출하던 김규식(金奎植)이 경무대를 방문했다. 

세배 손님도 모두 다녀가고 난 오후 4시가 지난 뒤여서 경무대는 고즈넉했다. 

김성수, 신익희, 조소앙 등 5거두의 대표자 회합이 거듭되는 가운데 신년을 맞게 되자 관계자들은 거북살스러운 정치적 화합보다 우선 자연스럽게 신년 인사 모임부터 개시되기를 바랐다.

이 이야기가 김구와 김규식에게 전해지자 김규식은 “신년 회합은 예상사”라고 가볍게 수긍하고 경무대를 찾은 것이었다.

이승만과 김규식의 회동은 정부수립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나 김구는 이날 정릉리에 있는 모친 산소에 성묘하러 갔다가 동네 노인들이 저녁상을 준비하고 만류하는 바람에 붙들려서 참석하지 못했다.

김구 쪽에서는 “의례적인 회합보다는 정치협의라도 하는 것이 옳지 않으냐”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이승만과 김규식은 안재홍과 명제세가 합석한 가운데 한 시간가량 환담을 나누었다.
  
  김규식은 1월3일에는 경교장으로 김구를 방문했다. 

이에 대해 한독당 선전부장 엄도해는 “김 박사의 경교장 방문은 신년 인사에 불과하다. 3영수 합작설은 원칙적으로 찬동하는 바이며, 다만 구체적 방안의 작성이 필요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안재홍도 1월2일에 명제세와 김구를 방문하고 조건없는 3영수 합작을 권유했다.

 이보다 앞서 김구는 1948년 12월22일 오전에 오랜만에 삼청장으로 김규식을 방문했었다.
  
  그러나 유엔한국위원단의 방한을 앞두고 위원단의 역할에 대하여 서로 다른 기대를 하고 있는 이승만과 김구는 두 사람 다 3영수 합작설에 부정적이었다.
  
  그무렵 김구는 한국독립당 임시 중앙집행위원에서 비장한 입장을 피력했다.  
 
 1월16일에 호국역경원에서 소집된 한독당 임시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김구는 한독당의 존립에 대한 위기의식의 일단을 피력했다.

김구는 머지않아 서울에서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이 열릴 것을 믿으며, 그것은 결코 공염불이 아니라고 했다.
  
  “일부 인사들은 남북협상이라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그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제1차 남북협상에서의 굳은 맹약을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파괴하고 인민공화국을 세웠으니, 이것을 보고 낙심하는 것도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북한에도 남한같이 절대다수의 민중이 우리와 공명함으로 우리와 함께 분투하려고 하고 있다.

 또 공산주의자 자체 내에도 세계적 신조류와 삼천만 동포의 욕구에 순응하야 우리와 협상하고자 하는 진보적 애국분자가 날로 증가되고 있으니, 우리는 조금이라도 비관할 필요가 없다.…”
  
북한 공산주의자가 아닌 공산주의자 가운데서 자신들과 협상하고자 하는 진보적 애국분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는 말이 어떤 상황을 지칭하는 것인지 주목된다.
  
  김구는 이어 자신의 주장을 ‘공염불’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이를 반박했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이 있을 것을 희망하며 또 믿고 있다. 

혹자는 이것은 한 개의 좋은 이론이라고 하야 공염불같이 코웃음 치지만은 좋은 이론이 없이 좋은 실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자고로 위대한 혁명가, 학자, 발명가들이 얼마나 많은 공염불로부터 자기의 이상을 성공하였던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처럼 이상주의의 힘을 강조하고 나서 김구는 이를 강변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우리의 걸어온 길은 정확하였다. 앞으로 갈 길도 이 길뿐이다. 

우리가 아직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환경의 불우와 노력의 부족에 기인한 것뿐이요, 노선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길에서 최후 승리를 얻을 것을 확인하는 바이니 앞만 보고 용왕매진(勇往邁進)하자. 

어떠한 고난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그 시간은 머지 아니하였다. 모든 어려운 것은 인내하고 계속 분투하자.”
   

김구는 끝으로 당면 과제로 첫째, 자주민주의 통일 독립노선의 재확인, 둘째 북한을 통한 대중적 계몽 실시, 셋째 약소국가 민족의 단결, 넷째 국제친선 도모, 다섯째 조난 또는 순직하는 동지들의 구호를 들었다.

 그러고는 이것을 위하여는 당을 정비하며 강화하는 동시에 용감하고 열렬한 애국민중을 한독당 산하로 집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뒤 “우리 동지들은 다 각각 힘과 돈을 당에 바치자” 하고 당원들의 당에 대한 충성과 헌금을 요망했다.

이처럼 1948년 정부수립후 반공을 앞세워 체제 굳히기와 국회길들이기에 나선 이승만과, 친일부역자와 민족반역자청산및 3권분립을 지키려는 김구, 신익희, 지대형등을 중심으로 정계개편으로 수면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참고문헌및 인용자료: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이기택의 한국야당사, 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협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신수용 사건반세기,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 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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