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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정치사(45)> 김삼룡·이주하 체포, 그리고 조만식과 교환 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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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후임맡은 남로당 총책임 김삼룡·고문 이주하 체포
김삼룡 서울시내 가정집에서 살며 곳곳에 소실둬 생활
김삼룡·이주하 체포로 남한내 공산주의자들 소멸
북측, 6.25 보름전 고당 조만식과 맞교환 제안...무산되고 6.25직후 총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그전에 2021년 4월7일 재보선도 있다. 선거와 정치는 이제 참된 백성(民)이 군주(主)의 시대, 민의의 시대를 만든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1945년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을 함께 했다.  <본지>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1950년 한반도는  좌.우노선 충돌로 격랑을 만났다.

미국과 소련이 임의로 그어 놓은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라진데다, 북조선은 소련의 지원으로 첨예 무기와 인민군 조직을 갖춘 상태였다.

여기에 그해 1월 10일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이 ' 한국은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太平洋防衛線) 밖'이라고 공개선언을 했다.

이른바 '애치슨 선언', '애치슨 라인'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일본. 필리핀, 대만,괌등은 포함시키되 한국은 애치슨라인내 포함됐으나, 한국은 빠졌다.

일설에는 이승만의 독자적인 반공주의와 고집이 미국 트루만 정부와의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라는 관측도 있다.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는 북조선. 그리고 남로당

북한은 중공(현재 중국)과 소련의 위성국을 자처했다.

대신 군조직과 전략은  물론 신식병기를 들여왔다.

김일성등은 1945년 '조소군사동맹'을 맺고, 소련에 최신식 탱크와 자주포, 전술비행기등을 석탄과 맞바꿔 사왔다.

소련의 군사고문단이 평양에 배치되어 공격훈련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대남 홍보전과, 특히 38선인근에 게릴라부대와 특수전 부대까지 다 갖춰놨던 것이다.

6.25 직전 황해도 개성 송악산 10용사 육탄전도 그래서 생겼다.  

남한은 1948년 5.10 총선과 단일정부수립을 계기로 좌.우 갈등이 심각했다.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은 북한평양의 김일성.김두봉등 북한공산주의자들과 남한내 김구.김규식은  5.10 총선과 단일정부수립을 반대해왔다.

1948년 4.3제주사태나 그해 10월 19일 여수순천 좌익군인들의 폭동등 갖가지 사건과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 이승만 정부는 '반공(反共)'을 앞세워 법에 따른 수사와 재판도 없이 제주와 여수.순천등의 무고한 양민까지 대거 학살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승만의 용공조작앞에는 정의와 법이 통하지 않았다.

그런가운데 비교적 자유럽게 정부를 감시하던 국회도 마찬가지였다.

도 1948년 정부수립 후 제헌국회에서는 이승만에게 등돌린 야당이 이윤영 총리 후보자 부결등 곳곳에서 충돌했다.

구실을 찾던 차에 야당 소장파의 친일청산.민족반역자 청산을 외치고  미군정청 해산과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그들이 대다수는 용공 프레임이 씌워져 무지무지한 탄압과 희생을 강요받았다.

사회주의자임을 알고 농지개혁을 맡기면서 발탁한 죽산조봉암 초대 농림부장관도, 훗날 형장에 이슬로 사라졌다.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는 음습한 남로당이 지하로 숨어들어 때론 무력으로, 때론 군중집회로 이승만 정부에 맞섰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승만 정권은 친일경찰과 서북청년단등 극우 청년단체를 내세워 무자피한 폭력과 권력을 행사했다.


경찰의 힘이 얼마나 셌느냐면 반민특위를 지지하는 권승렬 초대검찰총장이 반민특위사무실 습격현장에 나갔다가, 몸수색과 권총을 뺏기는 일까지 생겼다.

이승만 정권대 남한내 공산주의자들의 쫒고 쫓기는 싸움은 서울은 물론 대전. 부산.대구.광주.전주등 곳곳에서 일어났다.

평양의 지령에 의해 남로당은 시.군.읍면동 단위에 책임자까지 두고 운영됐다.

심지어는 미군 간부의 첩(妾)으로 들어가 미인계를 써서 군사기밀까지 빼내는 일도 허다했다.

때문에 이승만의 '빨갱이 색출' 호령에 내각은 벌벌 떨었다.

국회내에에도 김약수 국회부의장등 13명의 소장파의원들이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희생됐다.

이범석 국무총리와 이인법무장관등은 이승만의 불호령에 경찰.검찰.여당당원을 앞세워 남로당의 비밀과 조직을 캐기위해 나섰으나 허사였다.

당시  남로당이 벌벌 떨던 김창룡 국방부특무대장이나, 오제도 검사등은 유명했다.

오제도 검사는 자신의 일본 동경법대 동기생으로 동거동락을 했던 김옥주라는 제헌국회의원을 고문해 자백을 받아낸 것으로 더 알려졌다.

그럴수록 지하에 숨어든 남로당 패거리는 경찰서 사찰계 박일원 정보주임이나, 남로당 당원등을 수백명씩 체포한 김호익총경을 사살했다.

심지어 대통령 이승만이 친 아들처럼 대한 김창룡 국방부 특무대장까지 그해 피살되기도 했다.

◇…남로당 총책 김삼룡의  가명 쓴 정체

1950년 3월. 서울 종로6가 6통6반 어느 골목에는 '이성희'라는 문패가 붙어있었다.

기와 집인데 허구헌날 대문은 닫혀있었다. 대문이 열린 것은 봤다는 주민이 없었다.

대문 옆 문간방에는 야채와 술을 파는 아기자기한 잡화상이 있었다.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주인인 그는 이세범(李世範.26)이라고 불렸다.


잡화상 손님이 가끔씩 늘 굳게 단혀있는 집주인을 물으면 그도 집주인에 대해 잘모르겠다고 말한다.

"글쎄요. 저도 셋방살이 신세라서 자세히 모릅니다. 듣기로는 이북에서 온 전재민이라는 얘기가 돌기는 합디다만..."

그는 집주인과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닌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사실  그게 아니었다.

하루에 몇차례 씩 이세범은 40세안팎으로 보이는 이성희라는 남자와 집안에서 만나 수군 대곤했다.

너 댓평 쯤 되어보이는 집 안마당에는 정성을 들여 가꾼 꽃밭이며,기르는 토끼도 몇마리가 뛰어 다녔다.

주민들은  이성희라는 사람을 부러워했다.

"저 집 남자는 외출도 않하고  빈둥빈둥 놀고 먹으니, 얼마나 좋을 까. 상팔자다. 상팔자야. 언제 우리도 저 사람처럼 풍족한 생활을 누리며 할 수 있지?..."

관할등기부 등본에 기재된 내용에는 세칸 짜리 온돌방, 한칸의 사랑방, 부엌, 두칸의 마루로 되어있다.

동거인은 5사람. 주인부부와 딸 둘, 하녀 1명정도 였다. 그리고 약 3년 전에 이사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의문의 남자는 밤에만 외출을 하고 낮에는 일체 눈에 띠지 않았다.

갈수록 소문이 나빠지자 그는 극우 보수단체인 대한 청년단에 참조금을 내고, 특별회원으로 등록되었다.

그 뒤 동내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뭐라고 , 그 집주인이 남로당 총책이라고? 그 절름발이는 남로당 핵심당원이구? 세상이 놀랍네. 담을 두고 사는 사이에 금쪽 같이 속아서 살았네.'
      
주민들의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오면서 이세범과 이성희라는 사람의 신변이 위태로워졌다.

'같은 동네에 3년이나 함께 살면서 온갖 흉계를 다꾸며온 남로당 총책이라니'

일찍이 대문밖에 외출한 번 안한 그가 바로 남로당 총책 김삼룡이었다.

그리고 잡화상을 하던 그는 바로 김삼룡의  심복이자 연락원이었다.

지난날 은행원으로 남로당 세포로 김삼룡에게 충성을 다해왔다.

그의 임무는 외부와의 연락을 전담하는 자였다

김삼룡은 일찍이 사진이라는 것은 찍어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아는 이는 고작 당원들 뿐이다.

그는 변장술에 뛰어났다.

하루에도 몇 사람의 얼굴로 변신, 행세해도 모를 지경이었다.

엿장수로 가장한 그가 서울 서대문 아현동에서 체포되었을  때 몸수색을 해보니 선글라스가 7개 나왔다.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잡화상을 하고, 한편에서는 새와 토끼를 길렀으며, 극우단체 대한청년단에 잔조하는 수십개의 얼굴로 살았다.

◇…선우종원·오제도 검사 지휘로 남로당 총책 김삼룡 체포 막후

당시 서울지검 선우종원(鮮于宗源.1918.2. 17 ~ 2014. 3. 8)검사가 남로당 총잭 김삼룡을 체보했다.

훗날 변호사를 지낸  선우종원) 선생이  쓴 '나의 법조회고록(2003년 4월14일.법률신문게재)에 당시 상황이 자세히 나와 있다.


선우 전 검사는 1918년 2월 17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평화의 댐 건설에 참여하였으며 서울대학교 총장과 광주과학기술원 총장을 지낸 아들 선우중호님이 아들이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41년 12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3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8.15 광복 후부터 6.25 전쟁 때까지 오제도 검사 등과 함께 활동했다. 이후에는 이승만 정부와 거리를 두고 장면 국무총리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1960년 한국조폐공사 사장에이어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뒤 1966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1971년부터 197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특히 사무총장 때 여의도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신축에 관여했고, 1981년부터 1997년까지는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을 지낸뒤 변호사로 활동했다.

선우 선생(전 검사)이 쓴 '남로당 총책 김삼룡, 정치고문 이주하 체포'가 구체적으로 언급됐다.

선우 선생은 회고록에서 이런 내용을 술회했다.

'나(선우종원)는 일본 출장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남로당 총책인 김삼룡과 정치고문인 이주 하의 행방을 찾던 중, 1950년 3월초 당시 김삼룡의 비서인 김형륙을 체 포했다.

 주 1회 접선하기로 되어 있는 서울 필동 '가두연락선'에서 잡혀 우리 손으로 넘어 온 김형륙은'모든 일이 끝났다' 는 듯  알고 있던 비밀을 하 나 둘씩 털어 놓기 시작했다. 

김형륙의 진술로 드러난 김삼룡의 아지트는 수사진의 습격을 받았던 효제동 반찬가게를 비롯해서 이태원, 공덕동 등 일곱군데나 됐다. 

수사진은 낮에는 농림모에 수염 을 붙이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는 김삼룡의 생활을 보고 아연실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아지트를 지키고 있는 주인은 모두 여인으로서 다시 말해 김삼룡의 소실 노릇 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매 일밤 지하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여러 여인의 품속에서 즐기는 호화판 생활을 하고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효제동 아지트 관리자인 여인이 대한부인 회효제동분회의 부회장이었다. 

그러니 그 누가 남로당의 총수인 김삼룡 이 그 곳에 숨어있으리라고 상상 이나 했겠는가? 

마침내 3월24일을 거사일로 잡고 신중하게 체포작전을 폈다. 

나는 잠복해 있던 형사로부터 김삼룡이 자전거를 끌고 효제동 아지트에 들어간 사실을 확인했다 는 보고를 받았다. 

검찰과 서울시경수뇌부는 김삼룡을 체포하기 위해 재빨리 병력배치를 하고 3월15일 자정을 기하여 출동명령을 내렸다. 

효제동 아지트 근처 요소마다 형사들을 배치하고 오제도 검사와 홍민표 경위에게 진두지휘를 맡겼다.

또 집주위 뒷담은 동원된 경찰학교 학생들에게 맡겼다. 

이렇게 철통같은 태세를 갖추 고 출동한 수사대가 효제동 집을 덮치고 보니 김삼룡의 행방이 묘연했다.

방이라곤 2개 밖에 없고 블록으로 쌓은 뒷담은 높이가 한 길 반에 위에는 철조망까지 둘러 있어 어디도 도망갈 곳이라곤 없는 상황이었다. 

뒤꼍으로 달려간 수사대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절대 도 망칠 수 없는 곳처럼 보였던 뒷담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아닌가. 요란한 대문소리에 놀란 김삼룡은 잠옷바람에 뒷담을 힘껏 발로 차고 뚫어진 구멍으로 빠져 달아나버린 것이었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허점이었다. 뒷담 경비를 맡았던 경찰학교 학생들은 담이 무너지는 줄 알고 놀라서 모두 도망쳐버렸으니 더욱 기막힌 노릇이었다. 

밖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골목길을 자세히 살펴보니 핏자국이 보였다. 용기를 얻은 수사진은 핏자국을 따라 추격에 박차를 가했지만 동숭동 뒷산인 낙산에서 핏자국은 이미 빗물에 씻겨 흔적도 찾기 힘들었다. 

◇…검.경, 김삼룡 수배작전중에 남로당 거물 이주하도 체포

'기자가 본 역사현장(한국신문편집기자협회)에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수사진은 서울시경 사찰과분실로 연 행한 김삼룡의 처와 절름발이 청년(가명. 이세범) 에게 김삼룡의 행방을 채근했다.

그 절름발이 청년은 김삼룡이 자주 간다는 예지동 집을 알려줬고, 수사진은 지체없이 그 집을 덮쳤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거물을 잡게 됐다.

 바로 우리가 그처럼 찾았던 이주하를 잡은 것이었다.

이주하는 일본 와세다대학을 나 온 지식인으로서 남로당에서는 드물게 보는 인텔리였다. 

이렇게 이주하를 체포해 사찰 과분실로 연행하는 도중 차 안에 서의 그의 행동이 수상했다. 

얼굴을 찡그리고 몸을 비틀었다. 


수사관들은 육감으로'아차 독(毒)을 먹었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한뒤 즉각 의사를 불러 강제로 위(胃)세척을 했다.

순간 이물이 쏟아져 나왔다. 

"차라리 죽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이주하의 독백이었다. 

이런 소란속에서도 수사진의 초점은 김삼룡의 행방을 쫓는데 집중됐다. 

당시 치안국 수사진에는 큰박이 란 별명을 가진 송영달이란 전향자가 있었는데 "이제 부상당한 김 룡이 갈만한 곳은 북아현동 모의사집 밖에 없다"고 추리했다.

그의 추리는 그대로 들어 맞았다. 

치안국 수사대는 3월15일 마침 내 이한영 경감 지휘아래 북아현 동 모의사집을 덮쳐 남로당 당수 격인 김삼룡을 체포했다.

체포된 김삼룡은 1908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1939년 박헌영(朴憲永)·이현상(李鉉相)·이관술(李觀述) 등과 비밀 공산주의운동단체인 ‘경성콤그룹’을 조직, 조직부장 겸 노동부장으로 활동했다.

그 단체는 제1차 조선공산당의 노선을 계승하여 공장·지방·학생층에도 조직을 구성하였다. 

1940년 일제에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됐으나, 8·15해방 다음날 출감했다. 

당시 광주에 피신해 있던 박헌영은 이순금(李順今:뒤에 김삼룡과 결혼함)을 전주로보내 연락한 뒤 18일 전주에서 김삼룡을 만나 19일 함께 서울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8월 21일 옛 경성콤그룹 동지들을 모아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5년 9월 11일 재건준비위원회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박헌영을 총비서로 하여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다. 

이후 조선공산당은이영(李英)·정백(鄭伯)·최창익(崔昌益) 등의 연안파를 흡수하였고 김삼룡은이현상·김형선(金炯善) 등과 함께 핵심적인 조직국 간부를 맡았다.

1946년 2월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민족주의민족전선 대의원을 지냈으며, 그해 11월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1946년 9월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박헌영이 월북하자 남조선노동당을 책임 지도하다가 1950년 3월 27일 서울 아현동 은신처에서 체포 된 것이다. 

조직원들이 거의 체포된 상태에서 끝까지 전향하지 않은 그의 체포는 사실상 남한에산재해 있던 남로당의 붕괴를 의미했다. 

6·25전쟁 개시 직전 북한은김삼룡·이주하와 조만식(曺晩植)을 교환하자고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성사되지않았다. 

체포 당시 김삼룡은 그의 웃저고리에서 약봉지가 나왔다.

이상하게 여긴 오제도 검사가 '무슨 약이냐?, 왜 가지고 다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김삼룡은 길게 답한다.

"당의 생명이란 대중이 지지하는 토대위에서 설수 있는 조직이라야 강력한  조직으로서 유지되는 것인데,이제 어쩔수 없게 되었소. 

강력한 조직을 가졌을 때는 나도  나도 내로라 하고 맘놓고 대로를 확보했던 것이지만 이제 따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당의 조직을 통하여 우리를 쫓는 수사망에 대한 정보같은 것은 밤낮을 통하여 보고되어 왔소.

위급할 때는 당의 조직을 통한 아지트를 이용하면  얼마든지 호신(護身)이 되었습니다"

김삼룡은 말을 이어 갔다.

"허나 그동안 동지들이 체포되는 동안에 국민보도연맹이라는 것이 생기고, 또 차츰차츰 이에 따라 조직ㅇ로부터 일반 대중이 이탈하기 시작하니 당조직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나는 그리하여 길잃은 나그네처럼 되어버리니 신세라는 것을 알고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소. 이미 손발이 잘려나간 병신이나 다름 없으니, 움질 수 없게 된 것이오.


모든 정보의 손발이 그 조직의 와해와 함께 맞아들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 낸들 어떻게 하겠소. 그래서 이런 만일의 경우 , 체포에 대비해 음독이라도 하여 자살로써 최후를 마칠까하여 갖고 다녔소."

오제도 검사가 김삼룡에게 '잡힐 줄 알면서 이북으로 도망치지 않았느냐' 다시 묻는다.

김삼룡은 답한다.

"도망? 탈출? 그것은 안될 말씀입니다. 당이 송도리째 뿌리가 뽑히도록 제처두고 나서 나만이 무습 면목으로 월북할 수 있겠소. 가명 도리어 욕을 보게 되어, 더욱 박헌영선생이 지금 이북에서 얼마나 설움을 받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오 검사는 김삼룡에게 '당신은 조직만들기의 권위자라는데, 그 자신있는 조직이 파괴됐다는 것이냐' 묻는다.

"낸들 알수 없소. 지금의 심경을 말하자면 패전지장이라 날수 있소이다. 패전지장이 자위변호를 해본들  이제 뭤하겠소"

오제도 검사는 '당신이 본 대한민국을 말해보라'고 물었다.

김삼룡이 입을 연다.

"글쎄요. 다른 것은 그만두고, 우리를 일망타진하는 당국의 솜씨가 놀랍구려. 전향포섭에도 퍽 신경쓰시는 모양인데 탄복을 금치 못하겠소. 아까 검사님이  조직의 권위자라는데 나는 패배한 셈이요. 사실 나로선 처음에 상당히 자신을 갖고 일했소.

그러나 갈수록 조직의 이구석 저구석이 자꾸 무너지고, 허물어질 때마다 거점을 상실하고 말 았소. 우리들으 조직은 강하고 교묘하여 감히 허물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를 쫒는 수사망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산 증거로는 무엇보다도 내 스스로가 이렇게 체포되었다는 사실이오"

◇…김삼룡은 끝끝내 묵비권, 이주하는 쉽게 진술

김삼룡은  곧바로 서울 남창동에 있는 치안국사찰과 중앙분실로 연행됐다.

거기서 옛 동지인 전 남로당 서울시당 부책임자였던 홍민표 경위와 대면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미안합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 는 홍 경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전복을 위해 힘을 합쳤던 동지가 이젠 정반대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었으니 그들의 심정은 착잡하였을 것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김삼룡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홍경위가 먼저 입을열었다.

"이젠 서로 입장이 다르게 되었으니 여러 가지로 이해해 줘야 하겠습니다" 

"알겠소..."이 말은 김삼룡이 체포된 후 말한 첫마디이자 유일 한 말이었다. 

잡혀온 직후부터 김 삼룡은 수사관의 어떠한 물음에도 그저 '픽'하고 웃을 뿐 철저하게 묵비권을 행사했었다. 

취조의 방향은 대남유격대와 남로당의 비상연락선을 알아내는데 있었다.

그러나 김삼룡의 굳게 닫힌 입은 끝끝내 열리지 않았다.

수사 진은 마지막 방법으로 효제동에 있는 3살난 아들과 처를 시켜 전 향해서 함께 살도록 권유도 했으나 그의 입을 여는데는 허사였다. 

이에비해 김삼룡 체포단계에서 우연히 잡히게 된 남로당 정치고문 이주하는 검거된 후 심경의 변 화를 일으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순순히 털어놓았다. 

이주하는  함경남도 북청(北靑) 출생으로, 조선공산당 서기국원과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을지낸 좌익세력의 중심인물이다.

1913년 원산 광성학교(光成學校)에 입학하고 3년 뒤 보광학교(保光學校)로 옮겨 3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발각되어 갑산(甲山)으로 피신했다.  이후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정치학과를 다니면서 지방공산청년동맹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 

1928년 원산총파업사건 이후 노동운동 조직을 재건하고, 1931년 정재헌(鄭在憲) 등과 함께 평양노동연맹 좌익화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조선공산당 원산시 당책임자, 태평양노동조합 함경남도 책임위원을 지내던 중 1932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5년간복역했다.

출옥 후 1937년 원산철도국 사건에 연루되어 진남포로 피신하여 숨어지내다가, 1945년 8·15광복 이후  활동을 재개, 조선공산당 함경남도지구인민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월남하여 박헌영(朴憲永)·이강국(李康國) 등과 함께 재건조선공산당정치국에서 활동하면서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지냈다.

1946년 12월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에 뽑혔다. 박헌영이 월북한 뒤 총책을 맡은 김삼룡(金三龍)을 보좌하여 활동하던 중 1950년 3월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이주하 역시 자시 사진을 남긴 적이 없기 때문에 수사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검사가 이주하에게 '당신이 신봉하는 공산주의는 무엇이기에 신봉하나'라고 물었다.

이주하는 검사에게 답변한다.

"계급이 없는 사회, 평등한 사회, 자유로운 사회가 왜 좋지 않소?. 우리들이 참으로 노동자. 농민을 토대로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싸우고 있소"

검사는 '그렇게 평등하고 자유로운데 매일 수백명씩 남하하고 있소. 진실 민주주의를 실시한데는데 왜 노동자와 농민이 남하한단 말인가'라고 되물었다.

이주하는 "그것은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의 소행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렇게 친일파 민족자가 많단 말이냐'고 물었다.
 
검사의 말에 화를 벌컥 낸 이주하는 엉뚱한 답변을 한다.

"당신과 같은 검사는 반동 검사니까, 그렇게만 해석하는 거요"

검사와 이주하의 문답은 계속된다.

'당신들은 걸핏하면 인민을 위한다고 상투적인 선전을하는데 그토록 인민을 위한다면 양민들이 무수히 죽는 이유가 뭔가.아무 죄없는 양민들을 죽인다는 말인가'

이주하는 고개를 여러번 흔들더니 '난 그런 것 모르오. 그것은 반동진영에서 위조한 것이겠지요"

검사는 '여보시오. 이혁(李革)가족살해사건도 누구보다 당신이 더잘 알고 있지 않소'라고 추궁했다.

이주하는 계속해서 모른다고 잡아뗐다.

◇…이주하의 전향 움직임과 북한의 조만식과 맞교환 제의

한달 후 쯤 지나서  오제도 검사가 이주하를 만났다.

"오 선생 안녕하십니까?. 잠깐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오'


"나는 여러가지를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난 공산주의에 대해여 일종에 환멸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지지하겠다는 겁니까'

"글쎄요, 아니 그럴지도 모릅니다"

오 검사는 '그렇다면 이제부터 공산당을 어떻게 하겠소?'라고 물었다.

이주하는 "그야 쳐부셔야 합니다. 당연한 귀결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주하의 이같은 생각은 기적에 가까운 사상전향의사였다.

김삼룡과 이주하게 체포됐다는 소식은 남한내  공산주의자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들은 김삼룡과 이주하의 체포는 곧 남한 내있어서  공산주의 활동의 완전 차단됐음을 의미한다.

김삼룡과 이주하가 특경대에 붙잡힌 것은 50년 3월 27일이었고 곧 정태식까지 붙잡혀 남로당 지도부가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평양 근교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에는 남로당 핵심 가운데 단 두 사람 이름만 있다고한다.

김삼룡과 이현상. 50년 5월 17일 특별군사재판 법정에서 하였다는 김삼룡 마지막 말은 딱 한마디였다. 
 
“아무런 할 말이 없으니 나를 더 이상 욕보이지 말고 죽여주시오.”

북한은 감금한 고당 조만식 (古堂 曺晩植(1883. 2. 1일~ 1950. 10.13) 선생을 김삼룡. 이주하와 맞교환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더니 6.25발발 보름전인 1950년 6월 11일 북한측은 이인규(李寅奎). 김재창(金在昌).김태홍(金泰弘)에게 평화호소문을 소지한 특사를 파견했다.

이에 대통령 이승만은 "조만식 선생을 먼저 보내주면 김삼룡과 이주하를  보내주겠다"는 회신을 그해 6월23일 방송으로 보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6월25일 새벽 일제히 38선을 넘어 남침을 했다. 

김삼룡과 이주하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6·25전쟁 개시 직후인 그 달 28일 오후 3시 남산 숲속에서 총살당했다.
 
▶▶참고문헌 및 인용자료: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한국야당사(이기택 지음 등) 기자가 본 역사현장(한국편집기자협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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