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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21)> “조선 건국, UN이 나설 테니 미·소군 나가라”...유엔 첫 상정과 결의·첫 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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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동위 결렬되자, 미국이 유엔총회에 한국정부수립안 상정.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 유엔한국위원회 구성등 가결...1월8일 내한.
-메논의장의 큰역할과 소련과 북조선측 북한 입경거부로 난항.
-메논이 1948년 2월 유엔소총회에서 남한내 총선거실시 통과와 이승만소개.
-백범김구선생 "38선베고라도 통일정부이뤄야...남한단독정부수립반대"
-메논과 모윤숙과 이승만의 친분이 만들어낸 한국의 현대사

제21대 국회 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1948년 맹추위 속에 새해가 열렸다. 한국근대사의 변곡점이 될 그런 해다.  


그러나 3000만 겨레는 오직 독립국가 수립에 대한 염원이 열망이 넘쳐  맹추위를 녹일만큼 강렬했다.


앞서 1946년부터 1947년까지 남북이 하나되는 독립국가수립을 위해 1. 2차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와 20여차례의 예비, 준비회담을 가졌지만 끝내 결렬된 터다.



미소공동위가 결렬된 주요 쟁점은 임시정부수립을 위해  정파와 단체간의 참여범위로 맞섰다.


소련은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남북 정치세력과 단체만을 넣자는 것이었고, 미국은 모든 정파와 세력을 모두 참여시켜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이게 양국공동위원회 회의가 결렬된 핵심이었다.


미.소 양국이 보다 유연성있는 자세로 임했다면 분단이라는 비극이라는 민족사의 엄청난 과오를 낳지 않았던 것이다.


◇…남북 통일된 독립정부수립, 유엔으로 공이 넘어가


일제식민지를 막 벗어난 민족이지만  겨레가 하다되지 못한 채 남북한이또다시 미군과 소련의 군정을 받는 현실이라 남북한 정치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미소공동위가 결렬되자 미.소 간의 대결은 첨예하게 대립됐고, 남북의 좌.우익 단체와 정파들은 백가쟁명의 목소리만 가득했다.


한반도와 한민족에게는 그래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고, 그럴 수록 남북한 정치인들은 예민해 있었다


앞서 1946년 10월부터 미군정의 지원을 받은 민족주의자인 김규식.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 합작'으로 통일국가수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좌.우 합작에 여운형 중심의 좌익은 참여의사를 보였으나 미군정과 갈등을 빚어온 우익의 김구, 이승만 등이 불참을 선언했다.


또한 남한 내 박헌영 중심이 진보적인 좌익 조선공산당도 불참을 선언했고, 여운형이 피살되면서 미군정 역시 이를 철회에 좌우합작은 역시 실패로 끝났다.



그 무렵 이승만은 전국을 순회하다가 전북 정읍에서 남북통일국가 수립해야 한다던 종전의 입장과 달리 남한만의 임시정부수립론을 언급해 큰 파문을 던졌다. 
 
이런 와중에 미소공동위원회가 흐지부지 설전만 벌이다가 결렬을 선언히며 3.8선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자 미국은 한국문제는 미소양국이 더이상 해결이 어럽다며 1947년 9월 유엔에 상정했다.


한국문제가 유엔이라는 국제사회에 처음 상정인 셈이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공식적인 입장은 나오지 않았으나, 내부에서 크게 당황하며 유엔총회에서 반대의사를 시사하기도 했다.
 
그해 11월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 1차 본회의가 열려 한반도문제를 다뤘다.


역시 한반도문제가 유엔총회에서 공식의제로 다뤄진 것도 처음이다.


이 자리에는 한국 측 대표로 정부수립 후 초대 주미대사와 외무부장관을 지낸 충남 부여군 초촌면 출신인 소죽 임병직 박사와 루이스임이 참석했다.


임병직 대사 또는 임병직 장관은 김구, 이승만, 신익희 선생 등과 1급 독립운동가로 인정된 31분가운데 한 분이다. 


임 장관의 비서를 지낸 임덕규 박사(전 국회의원. 월간 디플러머시 회장)에 의하면 "그분은 젊은 시절 미국에서 공부하면서부터 독립운동을 시작, 일제의 한국 강점을 폭로하면서 세계에 독립 지원을 호소하며 열정을 불태웠다"고 말했다.


임 박사는 "임병직 장관, 변영태 외교장관 등은 해방조국의 외교무대들 이끈 분들로 한국의 유일한 합법정부승인, 6.25 동란당시 유엔회원국의 참전을 이뤄낸 애국자 중에 애국자"라면서 "그분의 평생의 뜻처럼 오직 대한민국발전을 이뤄내는데 동참해온데 감사하다"고 설명했다.



충남도가 제공한 자료에의하면 임병직 장관은 고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했다"라며 "그 뒤 이승만의 비서로서 있으면서 일왕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했다"고 했다.


유엔 총회에서는 소련 등 공산국가 7개 나라가 한편이 되어 반대 입장을 였다.

 
하지만 당시 유엔기록 등을 보면 여기에서 유엔 감시 하의 총선거를 통해 남북 통일정부를 세운다는 미국 안을 43대0으로 가결시켰다.


또한 이를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United Nations Commission on Korea)을 구성하며, 독립정부가 수립된 후 7월 1일까지 미국과 소련 양국 군대를 철수시킨다는 결의를 했다.
 
결의문의 주요 조항은 다음과 같다.
 
  (1) 선거에 의한 한국민의 대표들이 한국문제를 심의하는 데 참여하도록 초청되어야 한다. 또한 그러한 참여를 용이하게 하고 촉진하기 위하여, 그리고 한국 대표들이 한국국민에 의하여 실제로 공정하게 선출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 한국 전역에 걸친 여행, 감시, 협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 UNCOK)을 설치한다. 
  
  (2) 위원단이 한국국민의 자유와 독립을 조속히 달성시키는 문제를 협의할 수 있고, 국회(National Assembly)를 구성하여, 한국중앙정부(National Government of Korea)를 수립할 대표들을 선출하는 선거가 늦어도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실시되어야 한다.
  
  (3) 선거 이후에 가능한 한 빨리 국회를 소집하여, 중앙정부를 수립하고, 그 사실을 위원단에 통보한다.
  
  (4) 중앙정부가 수립되는 대로 그 정부는 위원단과 협의하여 자체의 국방군을 건설하고, 이에 편입되지 않은 모든 군사단체 및 준군사단체를 해산시키며, 남북한의 군사령부와 민간기관으로부터 정부의 기능을 인수하고,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가능하다면 90일 이내에 점령군을 완전히 철수시키도록 점령국과 조정한다.
  
  (5) 위원단은 상황의 진전에 따라 유엔총회의 임시위원회〔소총회〕와 협의할 수 있다.
  
  (6) 회원국들은 위원단이 책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원조와 편의를 제공하여야 한다.
  

그리고 유엔총회는 이 결의문에 명시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우크라이나의 9개국으로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소연방의 하나인 우크라이나는 수락을 거부했다.


이같은 유엔총회 결의안이 국내외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국내 관심은 모두 유엔에 쏠렸다.


유엔이라는 이름은 생소했어도, 자주독립국가 수립이란 국민의 열기는 매우 뜨거웠다.



그런데도 유엔이 총회에서 한국임시위원단구성과 파견이 결의됐는데도 한동안 꾸물댔다.


뒷날 기록을 보니, 유엔의 핵심의 한축인 소련이 유엔 결의에 반대하면서 한국임시위원단의 한국입국을 거부해서다.

 
유엔은 1948년 새해 다음날인 1월2일  유엔한국임시위원들을 임명했다.


거기에는 당시 세계 주요국가 대표들이 망라됐다. 


결국, 1948년 1월 8일 오후 6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김포공항을 통해  방한(訪韓)했다.


◇…유엔이 한국임시위원단의 소련 거부속에 방한


김포와 서울에는 이날 오후 6시 영하 10도의 강주위와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9개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단장에 중국의 호세택(胡世澤)박사등 위원단 34명등 모두 60여 명이나 됐다.


참여국가는  호주.캐나다,중국,프랑스,엘살바도르,인도, 필리핀,시리아,소련,우크라이나 등이다. 


여기에는 미국의 GK루커스, 캇츠, 그랜스, 스피렙을 비롯 중국의 호세택, 오스트레일리아 SH 잭슨, 시리아의 잭슨, 프랑스의 마네이, 인도의 메논, 필리핀의 아란즈등 당대 쟁쟁한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 호단장을 비롯해 위원단이 트랩을 밟고 비행기에서 내리자  주한 중국공사 유어만(劉馭萬)의 소개로 미군정청장 하지중장, 이승만,김성수등과 내외요인들과 나눴다. 이어  모윤숙, 고황경등이 위원단 개개인에게 꽃다발을 전했다.


이들이 미군정청에서 제공한 특별자동차편으로 서울로 향하자, 서해바다 겨울바람속에도 연도에  늘어선 수십만명의 시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곳곳에서 "위원단 만세", "조선완전자주독립만세"라는 함성의 도가니였다.


거리에는 '세계 평화는 조선의 독립으로부터 '라는 현수막 표어등이 나부꼈다.


유엔 각국대표인 위원단들도 김포에서 서울까지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의 환영에 답례하기 바빴다.


우리 민족이 얼마나 국권회복과 완전독립을 열망하는 지를 보여주는  눈물과 감격으로 얼룩진 장면들이다.   


위원단은 서울 회현동의 국제호텔을 숙소로 정해 여장을 풀었다.


위원단을 호텔 도착 즉시 기다리던 우리측 대표들과 면담을 가진 뒤,  방한 다음날인 1월9일 제 1호 성명을 냈다.



'조선은 반드시 독립이 되어야한다. 조선을 점령한 군대(미군.소련군)는 가능한 한 단시일내 철수하여야한다. 유엔총회의결에 따라 우리는 조선인과의 협의를 통해 조선의 독립방법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위원단은 이와관련해 '3 가지의 조선 완전 독립방법'을 제시했다.


 (1)1948년 3월31일 이내에 총선거를 실시한다. 또 비밀투표로 조선의 대표를 선출한다.


 (2)총선거로 선출된 대표자는 조선 국민의 정부를 수립할 국민회의를 구성한다.


 (3)국민의 정부는 유엔위원단과 협의하에 군정당국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한다.  가급적이면 조선에서 90일 이내 점령군은 완전철거를 위해 점령군과 타협한다.


이같은 성명과 3가지 완전 독립국 수립방안이 나오자, 3000만 겨레는 환호했다.


일부언론은 우리민족의 독립문제를 우리 대표들과 협의한다는 대목 등에 대해 '구세주'란 제목을 달아 보도할 정도였다.


위원단은 1월 12일 오후 5시 서울 덕수궁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부터 소련이 회의불참을 보이콧에 들어갔다. 각국이 설득했으나 소련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위원단은 우여곡절속에 첫회의에서 인도 대표인 메논 박사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메논박사는 이런 인연으로 친한파가 됐고, 이후 유엔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는 일이나6.26동란시 유엔군 참전 등 한국편이 되어 활동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


문제는 또 생겼다. 소련의 보이콧에 이어 북조선도 방북을 거부했다.


소련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던 북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김일성위원장은 9일 평양에서 열린 민중대회에서 '유엔조선위원단이 38선을 넘는 것을 불허한다'고 밝혔다.


이어 우크라이나도 위원단으로서 파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위원단은 1차성명에서 밝혔듯이 우리 측 대표들과 1차회의를 열었다.


회의 진행과정은 신문기자들에게 만 공개했다.



우리측 대표로 김규식 입법회의 의장,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장택상 수도청장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사무국장을 맡은 중국의 호세택 박사는 유엔총회에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설립 배경 등에 대한 설명과 한국에 대한 결정개의를 서술한 내용을 공개했다.


이어 아란 필리핀대표의 요청에 따라 우리에 대한 유엔결정서에 대한 수석서기 슈미트가 낭독한 뒤 각국 대표 소개순으로 진행됐다.


13일은 유엔한국위원단 대표이면서 불참한 소련과 우쿠라이나 대표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고, 비공개로 한국 측 대표와 한국의 자주독립국가 수립을 위한 구체적 회의를 가졌다,


◇…서울운동장에서 가진 유엔한국위원회 환영시민대회


국내외 언론들은 이를 대서 특필했고, 우리 겨레뿐 아니라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월 14일 서울운동장에서 무려 20만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위원단 시민환영대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시민들은 해방된 나라지만, 아직까지 민족의 숙원인 자주독립을 이루지 못한 서러움을 안고 행사장에 몰려들었다.


당시 동아일보 등은 '3000만 온 겨례가 반드시 독립통일국가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유엔한국위원회에 전하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고 보도했다.


민족 대표 33분 중의 한분인 오세창이 개회사를 했다.


'거룩한 사도 여러분이 성취시켜주실 독립을 위하여, 우리는 한데 뭉쳤고 여러분을 향한 감격이 넘쳐서 이 환영회를 기쁨과 희망으로 여러분에게 드리는 바이다'


그의 개회사는 감격어린 부르짖음이었다. 이 나라의 독립국가는 위원단의 힘으로 비로소 실현이 가능하다는 절절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어 유석 조병옥박사가  환영사를 했다.



'현 단계에서 한국의 건설은 거의 초인적인 일과 같은 것이오. 우리 3000만은 오직 독립 달성과 통일 실현만을 갈망하며, 따라서 위원단은 성스런 사명 완수를 해주시기를 당부합니다. 자유 없이는 죽움뿐..."


이는 절규에 가까웠다.
 
이에 대해 유엔 한국위원회를 대표한 메논 의장은 이렇게 답했다.
 
'조선은 단일된 민좁입니다. 동일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니, 이는 신이 합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조선은 분단될 수없습니다. 우리 위원회 일동은 충심으로 독립달성에 노력하려하는 바입니다'
 
메논 의장은 이처럼 우리의 완전독립과 통일실현에 확신을 피력했다.


이후 연일 한국 정계지도자인 이승만, 김규식, 김성수 등을 만나 대책을 논의하는데 매우 분주했다
 
하지만 소련의 공식적인 유엔한국위원회에 대한 북한방문에 거부입장이 나왔다.
 
1월 22일 유엔에서 소련 외상대리인 주유엔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소련 점령 하의 북조선 입경을 거부한다”는 발표했다.


소련은 한국위원단의 노력을 남한만으로 제한한다는 방침을 굳힌 터라 거부 입장은 완강했다.


그로미코는 그래놓도 이날자로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 리의 보좌관 앤드류 크리치에게 서한을 보냈다.
 
'북조선 소련군 사령관 방문의 희망을 표명한 유엔 한국위원단 임시의장으로부터 서한 원문을 전달한 1948년 1월18일부의 서한에 관해서 언급하려고 한다. 우리는 귀하에게 1947년의 제2차 유엔총회 석상에서의 유엔한국감시위원단 구성에 대해 이미 소련 정부에 의하여 표명된 부정적 태도를 상기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다'


이렇게 되다보니 서울에 체류하다, 평양으로 가려던 유엔 한국위원회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당시 소련의 태도에 대해 미국의 W오스틴 대표는 소련의 입장여하에도, 남한에 한해 유엔한국위원단 업무를 계속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통일실현과 독립국가 수립을 기대했던 국민들의 그 기대감이 무너지자 실망은 매우 컸다.


당시 언론들은 '공허한 소식이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야하는 것이냐. 소련의 태도는 생각하면 할수록 뼈아픈 일이다'라고 사설 등에서 적고있다.



이를 계기로 유엔 감시하에 남한만이라도 총선거가 실시되고, 반쪽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안타까운 현실은 소련의 유엔총회결의 거부와 북한입경 반대로 빚어진 것이다.  


◇…김구 "통일조국을 위해 38선을 베고 쓰러져도, 단독정부 협력 안 해"


이렇게 되자 남한내  정치인들은 혼란해졌다.


손세일의 비교 평전(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유형-이승만·김구편과,  김용삼 선생은 최근 시사주간지인 '미래한국 편집장의 현대사 파일'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을 도와준 고마운 인도인 K. P. S. 메논'이란 글에서 이를 기록하고 있다.


이들의 글을 인용하면 남한 내 정치인들은 시종일관 남한 내 단독 정부론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고 적고 있다.


이를 보면 남한 내 단독 정부수립에 대해 정치인의 입장이 두 갈래로 갈렸다고 했다.


이승만은 시종일관 유엔한국 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 내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중앙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뜻에 공감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반해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1월 25일까지는 “유엔 감시 하에 수립되는 정부가 중앙정부라면 38선 이남에 한하여 실시되는 선거라도 참가할 용의가 있다”고 해왔다. 그러나 이후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김구는 그해 2월 10일 성명을 냈다. 


성명에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협력하지 않겠다”라며 남한 내 총선거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때문에 한국 내 통일된 의견을 기대했던 유엔한국위원단역시 국가대표별로 의견이 서로 달라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캐나다와 호주대표는 중립을 표방했고, 시리아 대표는 공개적으로 남북협상을 지지하며 소련과 북조선 지도부 측에 유리한 입장을 표명했다.


반면 미국, 중국, 엘살바드로, 인도의 대표 등은 남한내 총선거를 표방했다.


분분한 의견에 난처한 메논 의장은 미국 뉴욕으로 가서 유엔총회의 의견을 듣기로 결정했다. 


메논 의장은 비롯한 인도의 입장은 ‘한국의 부자연스러운 분단을 영구 고착화할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다. 분단된 나라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취지였다.


앞서 메논 의장은 앞서 같은 달 14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에서 “북한에도 애국적인 지도자가 있으며, 독립도 중요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단합하여 남북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연설했을 정도다.


손세일 평전에 의하면, 매논의장의 애매한 내용의 연설이 계속되자 이승만과 김구는 그 자리를 박차고 퇴장했을 정도였다. 


메논 의장이 유엔총회의 의견을 듣기 위해 뉴욕으로 떠나기 전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나라는 세워질 것이며 어떤 지도자든 국민의 지지를 받는 분이 유엔 소총회에 소개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것이 곧 유엔한국위원단의 입장이었다. 


메논 의장의 통일국가 수립의 의지는 처음과 끝이 똑같았다,


손세일 선생의 글을 더 보자. 


메논 의장은 유엔이 '남한만이라도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실시'와, 미군정청장인 하지 사령관이 '좌우합작이 가능한 중도파 김규식을 한국의 지도자로 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메논 의장은 이런 사실을 간파하고, 같은해 2월 19일 유엔 소총회에 유엔한국위원단 의장자격으로  참석했다.


메논 의장은 이자리에서 한국 사정을 설명한뒤,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유엔은 빈손으로 조선을 떠날 수 없다.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는 별개 정부가 총회의 결의에서 규정된 바와 같은 중앙정부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보다 의견이 일치한다. 이승만은 전설적인 국민적 지도자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메논의장은 한국내 이승만이 주장했던 ‘통일된 독립국가가 어려우면 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승인해애한다'고 촉구했다.


특히 그는 김규식이 아닌 이승만을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적 지도자로 소개한 점이 논에 띤다.



매논의장의 입장을 청취한 유엔소총회는 1948년 2월 14일  유엔 소총회 제14차 전체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캐나다 대표 패터슨(G. S. Patterson)의 제의에 따라 유엔소총회는  유엔위원단에 대해 남한에서 총선거를 추진하도록 지시하는 경우 그 선거는 유엔총회가 협의 대상으로 초청할 대표들을 선출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 등 세 가지 사항의 결의 문제를 두고 토의했다.


그러나 소련 등 7개국의 반대하면서 난항을 겪었다. 그러자 모든 것은 메논 의장에게 위임하기로 했다. 메논은 토요일인 이튿날 오전에 김포공항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는 5·10 총선거가 치뤄지고, 최종적으로 남한에서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북한에서는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출범했다.  


구체적으로 이게 바로 1948년 2월 유엔감시하에 남한 내 총선거 실시 결의인 것이다.


역사적인 제헌의회 의원 선출을 위한 5.10 총선거로 이어졌고, 제헌 의원 구성을 통해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게 된다.


메논 의장이 유엔소총회에서 ‘남한지역에서의 총선 실시’라는 대업(大業)을 성사시키고 한국으로 돌아오자 이승만은 그를 얼싸안고 목메어 울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메논과 모윤숙, 그리고 이승만이 친분으로 만든 한국 역사
 
메논 의장이 인도 본국 정부의 의견을 거슬러가면서까지 자신의 입장을 바꾸는 과정의 배후에는 문필가 모윤숙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김용삼 선생은 적고 있다.


메논 의장과 모윤숙 선생(이하 존대어생략)의 인연은 그해 1월8일 유엔 한국감시위원단이 김포공항 도착했을 당시 모윤숙과 고황경이 대표로 환영 꽃다발 전달했었다.


모윤숙은 1934년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만난 안호상 박사(당시 보성전문학교 교수)와 결혼하여 딸을 하나 두었는데, 그 후 남편과 결별하고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모윤숙은 메논과 만남의 전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고 손세일, 김용삼 선생 등은 기록에서 전하고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서울에 온 유엔한국위원단의 숙소인 서울 회현동 국제호텔과 가까운 곳에 모윤숙이 살고 있었다.


손세일 선생의 '손세일의 비교 평전. 한국 민족주의의 두 유형-이승만과 김구'에 대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였다.


유엔한국위원단 환영 파티에서 모윤숙과 대면한 메논 의장은 첫눈에 모윤숙의 문학적 재능과 인품에 반하여 파티가 끝나고 그녀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고, 다시 비서를 통해 호텔로 모윤숙을 초대했다.


이후 두 사람은 수시로 만나 시와 인생을 논했고, 서로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사이가 되었다.


모윤숙은 기록에서 “김활란, 조병옥, 김성수, 장택상 같은 어른들의 지시를 받으면서 중립적인 인도 정부의 두뇌를 한국적인 입장으로 돌리는 데 적잖이 땀을 흘려야 했다”고 술회했다.


메논이 유엔소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나기 며칠 전,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저녁 메논을 이화장 만찬에 초대하라”고 엄명을 내렸을 정도다.


마침 메논은 하지 사령관과 이날 저녁 선약이 있었는데 모윤숙으로부터 이화장 만찬 연락을 받자 “선약이 있으니 차나 한 잔 마시고 나오겠다”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이화장을 방문했다.


모윤숙은 메논을 이화장으로 안내하는 과정에서 그가 김규식이 주장하는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구성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윤숙은 그것이 이상적인 통일론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이승만이 주장하는 남한만의 총선거론이 한국의 장래를 위해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이날 저녁 이승만과의 만남이 이승만과 남한을 위한 중대 고비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 모윤숙은 메논에게는 비밀로 하고 하지 장군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메논 박사의 비서를 사칭하고 “오늘 저녁 메논 씨가 급한 일이 생겨 저녁식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약속을 다음으로 미뤄 달라”고 거짓말을 했다.


덕분에 메논은 꼼짝없이 이화장에 붙들려 이승만과 식사를 해야 했다. 만찬이 끝난 후 이승만은 눈물을 흘리다시피 하며 한국 정세를 간절하게 호소했다.


메논이 유엔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도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전화를 걸어 “이봐 윤숙이, 밤이 좀 늦었지만 메논 씨를 좀 데려와. 중요한 일이야”하고 명을 내렸다.


모윤숙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여자가 그런 청을 할 수 있어요” 하며 완곡하게 거절하자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고비에 밤이고 아침이고가 어디 있나. 전화 좀 걸어 봐. 제발, 마지막 청이야” 하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모윤숙은 메논에게 금곡릉 산책을 가자고 불러낸 다음 체면 불구하고 이화장으로 안내했다. 이승만이 뛰어나와 메논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이 거실에서 인삼차를 마시고 있는 사이 프란체스카 여사가 모윤숙을 부엌으로 불러내어 한지에 붓글씨로 쓴 두루마리를 주었다. 


이승만을 지지한다는 저명인사들의 서명이었다.


당시 한국위원단은 자신들이 협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정당 사회단체의 인물들을 공식으로 인정하는 요식행위로 최소한 200명 이상의 지지자 서명을 받은 연서 명부를 요구했다.


김규식이나 김구는 지지자 서명을 이미 제출했으나, 이화장은 이기붕이 깜박 잊고 제출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타이프를 쳐서 사인을 하거나 도장을 찍은 서명은 무게가 없다고 하여 모두 한지에 붓으로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도록 했다.


그런데 그날 밤 프란체스카 여사가 모윤숙에게 전달한 서명은 대부분 가짜였다.


이승만의 비서 윤치영이 꼬박 하루에 걸쳐 서로 다른 필적으로 이름을 쓰고 도장을 파느라 땀을 흘린 것이다.


후에 모윤숙이 이 문제로 항의하자 이승만은 “정치라는 게 그런 거야. 모르면 가만 있어”라고 말했다.



모윤숙은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화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메논 씨의 코트 주머니에 이 두루마리를 가만히 넣었다. 이것만을 기억해 달라는 듯이…’


“죽을 죄를 지었어요. 실은 금곡릉이 목적이 아니라 이 두루마리가 목적이었습니다. 이 박사를 이해해 주시고 좀 비사무적으로 된 일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서류는 사무국을 통해 나에게 와야 유엔에 도달하는 거예요. 이런 비공식적인 일을 이 박사는 왜 미스 모에게 시킬까요. 그는 포기한 줄 알고 있었어요.”


그의 목소리는 잔인하리만큼 냉엄했다. 


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모든 이유는 시일이 지난 후에 역사가 의장님께 일러 줄 겁니다. 이 서류를 만약 의장님이 성공시키신다면 말이죠. 저는 의장님을 믿습니다. 온 한국민과 함께 이 서류에 쓰인 대로 이런 지도자를 한국 사람은 지금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가만히 내 손에 악수를 청했다. 


모든 것을 이해하겠다는 암시였다. 


메논 씨는 하지 중장의 의도나 중립노선을 걷고 있는 인도 정부의 훈령을 묵살하고, 아니 그 자신의 애당초 생각과도 어긋나게 유엔총회에서 이 박사의 노선을 채택하도록 역설, 이 박사를 전설적인 국민적 지도자라고 찬양하고 2주일 후에 다시 김포공항에 내렸다.


유엔한국위원단의 임무가 끝나 영영 인도로 돌아가기 며칠 전, 우리는 이화여대에서 두 번째 강연을 끝내고 이번에는 이화장이 아닌 진짜 금곡릉으로 마지막 산책을 갔다.


<22편에는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편을 이어갑니다>


▶▶참고문헌및 인용자료 :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현대사 파일, 이기택의 한국야당사·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역사의현장(한국편집기자회), 신수용 사건반세기, 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 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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