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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정치사(41)> 이승만과 다른 노선 김구, 성금 들여 백범학원·창암학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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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민주국민당 창당하고 반공 앞세운 일민주의로 체제 굳혀
김구, "서울서 남북 영수 만나 통일 조국 위해 남북협상 기대"
이승만, 김구의 '영수', '남북협상 발언'과 표현에 즉각 반박 담화문
김구, 굶주리고 배우지 못한 딱한 처지 위해 모친부의금과 아들 축의금으로 학교 세워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물론 지난 2020년은 4.15 총선을 또 2021년 4월7일은 서울부산시장등 재보 선을 치른다. 이처럼 선거와 정치는 이제 참된 백성(民)이 군주(主)의 시대를 정착시킬 기회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 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이승만의 반공정신을 모체로한 초대 정권을 뒷받침할 작업은 분주했다. 

그래서 만든 민주국민당 창당대회가,  1949년 2월10일 오후에 시공관(市公館)에서 각계 내빈들과 많은 당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여기서 시공관의 역사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보면 서울시 중구 명동에  일본인 이시바시〔石橋良祐〕가 1936년에 세운 극장으로, 광복 전까지의 명칭은 메이지자〔明治座〕였다. 

이 극장은 1930년대 일본인들의 위락시설로 지어졌기 때문에 주로 일본영화를 상영하였다.

◇… 김성수, 신익희, 백남훈, 지대형중심의 이승만 정당만들어

광복 후에도 한 동안은 일본의 소유로써 국제극장(國際劇場)으로 불리었고 서울시가 접수하여 시공관으로 개칭하였다.


이 극장은 대지 505평, 건평 749평, 객석 1,180석의 3층건물로서 설립 당시에 시내 중심지에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공연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1959년 뒤늦게 환도한 중앙국립극장(극장장 서항석)이 본거지를 물색하던 중 시공관을 공동 사용하기로 결정하고서 같은 해 6월 1일에 ‘국립극장’으로 간판을 달아 사용하였다.

5.16 이후인 1961년 11월 ‘정부조직법’이 개정되고 국립극장이 공보부(公報部)로 이관됨에 따라 시공관은 국립극장 전용공연장이 되었으며, 자연 시공관의 명칭도 없어졌다

이는 정부수립후 갑작스럽게 터진 여수.순천 군인반란사건을 계기로 반공을 당시(黨是.또는 당의 지향점)로 채택한 일민주의( 一民主義)를 지원하기위한 정파모임이다.

이 시공관에서 이승만 정파가 모여 민주국민당 창당을 했다.

창당행사는 지금의 창당행사와 달리 국내외 정치정세 특강식 연설과 국제정세의 특강등이 주를 이뤘다. 

국회의원 서정희(徐廷禧)의 개회사에 이어 최규설(崔圭卨)의 경과 보고, 조병옥(趙炳玉)의 국제정치정세 보고, 김우평(金佑枰)의 국제경제정세 보고, 이종근(李琮根)의 국내정세 보고 등의 순이었다.

이후 곽상훈(전 국회의장)이 낭독한 ‘선언’과 이정규(李晶奎)가 낭독한 ‘정강 정책’이 채택되었다. 

이어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김성수, 신익희, 백남훈, 지대형의 취임사가 있은 다음 이시영 부통령과 오세창의 축사 대독이 있었다. 

그런데도  이승만의 축사는 없었다. 그 대신 ‘선언’에서 일민주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민국당을 결성한다고 안팎에 천명했다.
  
 “우리 민족은 피가 같고 전통이 같고 국민적 이해가 공통되는 단일공동체이므로 절대로 분열되어서는 존립할 수 없으니, 민족적 통일국가를 반대하고 방해하는 여하한 상상도 용허하지 아니한다.
  
 전 국민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자유롭고 행복스럽고 안태하게 하기 위해서는 진선한 민주주의를 실행해야 하는 것이니, 국민의 권리와 복리를 무시하는 여하한 성격의 독재정치도 이를 부인한다.
  
 단일민족의 통일국가를 완성하여 철저한 민주정치의 실시를 이상으로 하는 일민주의를 실천함으로써 건국의 대업을 완성하고 민족만대의 번영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이에 민주국민당을 결성한다.”
  
 ‘정강’은 (1)특수계급의 독재를 부인하고 만민평등의 민주정치의 실현을 기함, (1)경제적 기회균등을 원칙으로 민족자주경제의 수립을 기함 등 5개항이었다.

 ‘정책’은 (1)중요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1)토지 분배의 조속 실시, (1)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등 10개항에 이르렇다.

 ‘정강정책’과 함께 ‘정책세목’으로 정치 외교, 재정 경제, 산업, 노동, 문화와 사회, 교육, 국방의 7개 분야에 걸쳐 43개의 세목도 발표됐다.

그 가운데는 배심제도 실시, 세제 개혁과 누진율 강화, 광공업의 계획 경제 확립,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 확립, 농민본위 토지 분배의 조속 실시, 국민교육비의 국고부담, 의무병역제 실시 등 사회주의적인 정책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인촌 김성수'의 전기에 따르면, 김성수는 대한국민당과의 합당 작업을 추진할 때부터 이미 적당한 인사에게 당을 맡기고 자기는 인선에서 물러날 생각이었다. 

그가 민국당의 최고위원이 된 것은 합당 초기의 융화 단합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성수는 그 단계가 지나면 국회의장으로서 정치 일선에서 활동하는 신익희에게 당을 전적으로 맡기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정당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최고위원제와 같은 집단지도체제는 옳지 않다고 김성수는 생각했다
  
◇…칩거하던 김구. 김규식의 1949년 1월 정치 행보
  
 1948년 연말과 1949년 당시 3영수 합작설이 신년 화두가 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49년 1월1일 오후에 오랫동안 두문불출하던 김규식(金奎植)이 경무대를 방문했다.

 세배 손님도 모두 다녀가고 난 오후 4시가 지난 뒤여서 경무대는 고즈넉했다.

 김성수, 신익희, 조소앙 등 5거두의 대표자 회합이 거듭되고 있었다.


이들은 신년을 맞게 되자 거치장스런 정치적 화합보다 우선 자연스럽게 신년 인사 모임부터 개시되기를 바랐다.

이같은 얘기가 신문에 오르내려 김구와 김규식에게 전해졌다.

그러자 김규식은 “신년 회합은 예상사”라고 가볍게 수긍하고 경무대를 찾은 것이었다.

 이승만과 김규식의 회동은 정부수립 이후 처음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날  독립신문 1월 6일자를 보면 김구는 이날 정릉리에 있는 모친 산소에 성묘하러 갔다가 동네 노인들이 저녁상을 준비하고 만류하는 바람에 붙들려서 참석하지 못했다. 김구 쪽에서는 “의례적인 회합보다는 정치협의라도 하는 것이 옳지 않으냐”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한성일보 1949년 1월5일자, '김박사 이대통령 방문'기사를  이승만과 김규식은 안재홍과 명제세가 합석한 가운데 한 시간가량 환담을 나누었다.
  
 김규식은 1월3일에는 경교장으로 김구를 방문했다. 

이에 대하여 한독당 선전부장 엄도해는 “김 박사의 경교장 방문은 신년 인사에 불과하다. 3영수 합작설은 원칙적으로 찬동하는 바이며, 다만 구체적 방안의 작성이 필요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안재홍도 1월2일에 명제세와 김구를 방문하고 조건없는 3영수 합작을 권유했다.

이보다 앞서 김구는 1948년 12월22일 오전에 오랜만에 삼청장으로 김규식을 방문했었다.
  
그러나 유엔한국위원단의 방한을 앞두고 위원단의 역할에 대하여 서로 다른 기대를 하고 있는 이승만과 김구는 두 사람 다 3영수 합작설에 부정적이었다.
  
이무렵 김구는 한독당 임시중앙집행위원회에서 비장한 연설을 한다. 
 
 그해  1월16일에 호국역경원에서 소집된 한독당 임시 중앙집행위원회에서다.


 김구의 연설에는 한독당의 존립에 대한 김구의 위기의식이 배어 있었다. 

그는 조만간 서울에서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이 열릴 것을 믿으며, 결코 공염불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김구는 “일부 인사들은 남북협상이라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그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런 뒤 " 제1차 남북협상에서의 굳은 맹약을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파괴하고 인민공화국을 세웠다.이것을 보고 낙심하는 것도 비난할 수 없다"고 남한내 보수 우익정당의 비판을 받아들였다.

이어 " 그러나 북한에도 남한같이 절대다수의 민중이 우리와 공명함으로 우리와 함께 분투하려고 하고 있다. 또 공산주의자 자체 내에도 세계적 신조류와 삼천만 동포의 욕구에 순응해 우리와 협상하고자 하는 진보적 애국분자가 날로 증가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조금이라도 비관할 필요가 없다."고 전망했다.

김구의 이날 연설중에 '북한 공산주의자가 아닌 공산주의자 가운데서 자신들과 협상하고자 하는 진보적 애국분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는 대목은 매우 주목된다.
  
  김구는 이어 자신의 주장을 ‘공염불’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이 있을 것을 희망하며 또 믿고 있다.

 혹자는 이것은 한 개의 좋은 이론이라고 하야 공염불같이 코웃음 치지만, 좋은 이론이 없이 좋은 실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자고로 위대한 혁명가, 학자, 발명가들이 얼마나 많은 공염불로부터 자기의 이상을 성공하였던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처럼 이상주의의 힘을 강조하고 나서 김구는 다음과 같이 강변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우리의 걸어온 길은 정확하였다. 앞으로 갈 길도 이 길뿐이다. 우리가 아직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환경의 불우와 노력의 부족에 기인한 것뿐이요, 노선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길에서 최후 승리를 얻을 것을 확인하는 바이니 앞만 보고 용왕매진(勇往邁進)하자. 어떠한 고난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그 시간은 머지 아니하였다. 모든 어려운 것은 인내하고 계속 분투하자.”
  
  김구는 끝으로 당면 과제로 첫째, 자주민주의 통일 독립노선의 재확인, 둘째 북한을 통한 대중적 계몽 실시, 셋째 약소국가 민족의 단결, 넷째 국제친선 도모, 다섯째 조난 또는 순직하는 동지들의 구호를 들었다. 그러고는 이것을 위하여는 당을 정비하며 강화하는 동시에 용감하고 열렬한 애국민중을 한독당 산하로 집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우리 동지들은 다 각각 힘과 돈을 당에 바치자” 하고 당원들의 당에 대한 충성과 헌금을 요망했다.
  
◇…이승만, "김구의  ‘영수’나 ‘남북협상’은 적확한 용어 아니다"...김구의 통일론
  
  이승만은 김구의 연설을 신문에서 읽고 매우 불쾌해 했다.

이승만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에 김구의 이러한 주장은 유엔총회의 한국정부 승인결의로 흥분해 있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김구와의 합작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승만은 ‘3영수(領袖)’, '남북협상((南北協商)'라는 말 자체가 못마땅했다. 



이승만은 정부대변인에게 반박 담화문을 내도록 지시한다.

정부 대변인은 1월18일에 이례적으로 신문기사의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최근 모 신문지상에 발표되는 기사에 3영수회담이니 남북협상이니 하는 것이 있어서 일반 민심을 현혹케 하는 일이 왕왕 있음을 유감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영수 운운은 결국 우리의 독립국가가 수립되기 전에 항일투쟁으로 전 민족을 영도하고 나갈 때에는 영수라는 말이 성립되어도 오늘과 같이 우리의 자유독립국가가 수립되어 있는 이 마당에, 이 대통령은 우리의 유일한 최고 원수요 또 대통령이라는 신성한 직위를 가지고 있는 이상 세칭 영수와는 따로이 국가적 최고 지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수 운운함은 큰 불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따라서 합작이라고 함도 부당한 말이니, 영수가 아닌 대통령과 무엇을 합작하는가를 생각할 때에 3영수 합작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신문에서는 이 취급에 각별한 주의를 해주기 바란다.” 
  
  남북협상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비판했다.
  
  “그리고 아직도 남북협상을 주장하고 이북정권이 말하는 관념유희에 가까운 진부한 언사를 쓰고 있음은 이 또한 모순당착이 아닐 수 없다. 

남북통일의 위대한 의안은 유엔의 신한국위원단이 내한하여 우리 한국정부와 협의하여 모든 절차를 작정할 것이요, 또 유엔위원단은 우리 한국정부 외무부를 통해서만 모든 교섭이 진행될 것은 정한 이치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 대한민국 정부가 남북을 통치하는 통일한 정부이므로 북한이라는 말이나 이북의 정권이 유엔에서 승인되지 못하는 이상 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남북협상이니 이북정권이니 하는 것을 기사취급에서 주의해 주기 바란다.”
  
 이렇게 하여 3영수 합작설은 일단 일부 정파와 그 성사를 기대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김구는 그간 여러달을 경교장에 칩거하면서도 중국이나 북한 지역에 비밀공작단을 파견해 놓고 있었다  
  
'1949년 김구의 마지막 노선에 대한 검토(도진순)을 살펴보면 1948년 여름에 북한 지역으로 보낸 것으로 보이는 한 공작단의 대표 강현홍(康賢洪) 명의로 1월15일에 김구에게 보낸 편지가 보존되어 있어서 이때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편지는 김구를 ‘각하’라고 호칭하면서 먼저 보고가 늦어진 이유부터 설명했다.
  
  “김구 수석(首席) 각하.  
  
각하시여 반개년이나 아룁지 못하와 죄송하도소이다. 이유로서는 첫째 선생님이 서울 떠나셨다는 공공연히 발표하는 방송을 들은 것, 둘째 정세(政勢)의 변천으로 기회를 기다리자는 것, 셋째 정계(靜界)를 선언하신 각하의 심정을 상해드릴까 염려한 것, 넷째 정세가 이롭지 못한 형편이므로 혹시 저자들의 눈에 뜨이면 재미롭지 못한 사건이 생길까 염려하야 본 단의 결의로 각하의 지시를 계속 이행하되 후일 기회를 보아 보고하자는 것, 이상 열거한 조건으로 당분간 보고를 유보했던 것입니다.”
  
  편지는 이어 김구의 노선을 지침으로 삼고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나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각하의 노선을 절대 지지 찬동하는 동시에 남북통일이 없이는 인생문제 해결이 없다는 각하의 선언을 목표의 지침으로 삼고 공작을 계속 전진 중이오며, 전번에 하교하신 사항은 만시지감이 있으나 조사 보유하고 있사오니 후일 보고하겠사오며, 공작 사항을 하교하시면 절대 복종하야 준수하겠삽나이다.
  
  본 단은 바람에 불리는 갈대 모양으로 정세를 따라 이리 붙고 저리 붙는 본 단이 아니오니, 각하께옵서 혹시 의심하셨을는지 모르오나, 죽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각하께 한번 서약한 바를 망각 배반하겠나이까. 믿어주십시오.”
  
  강현홍의 편지는 38선 접경지대의 상황 등을 비교적 정확하게 보고했다.  

  “현재 38 접경에는 인민군 이동이 주야로 있사와 일촉일발(一燭一發)의 위기에 당면하고 있습니다. 금번 북선 최고인민회의는 38선 문제를 가지고 토의 중인 것 같으며, 승부를 결하라는 ○○으로 심혈을 경주하는 것 같습니다.  
  
근일부터는 전량(電量)을 공장이나 가정을 막론하고 시간별로, 혹은 킬로별로 분배전(分配電)하니, 또 한가지 참기 어려운 조작으로 인민은 고로(苦勞)되는 형편입니다. 여분 전량은 소련과 만주로 송전한다는 것입니다.”
  
  편지는 끝으로 김구에게 거듭 충성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끝맺었다.  
  
“본 단은 시종여일하게 각하를 수석으로 받드는 동시에, 후일을 기대코 굳게 단결되어 맹활동 중이니, 안심하시고 사업을 하교해 주옵시기를 바라고 기대하는 바입니다. 이상.
  
  1949년 1월25일     공작단 대표 강현홍”
  
  김구의 남북협상과 미군철수에 대한 일관된 주장은 열혈 추종자들의 그에 대한 이러한 추앙과 신뢰감이 큰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 김구, "미국.영국과 타협하지 않는 정권이 중국에서 오래가지 못해"
  
  김구는 그해 1월22일에 경교장에서 신년기자회견을 가졌다.

당시 기록을 보면  미국과 중국의 새로운 정세에 대한 그의 견해를 진솔하게 표명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김구는 매우 낙관주의자였다.
  
  기자들은 먼저 1월16일의 임시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서울을 회담장소로 하는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했는데 그 방책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김구는   “이것은 조국의 통일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희망하는 것으로서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것이 실현되기 위하여는 북쪽에서도 유엔위원단의 입경을 동의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소련의 한반도정책이 전환되기 전에는 실제로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어 그는 트루먼 대통령의 재취임에 따른 미국의 금후의 대외정책에 대해서는 전망했다.
  
  “대소(對蘇) 국교를 조정하고 전 인류를 평화의 세계로 인도하는 주동권을 미국이 장악하였다고 본다

. 미국의 시민은 물론이거니와 지금 전 세계의 인류는 20세기의 위대한 정치가 트루만 씨에게 (관심이) 집중된 감이 있다. 

나는 트루만 대통령의 대내외 정책을 가장 진보적이라고 찬양하고 싶다.”
  
  그리고 중국의 앞으로의 정세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는 매우 주목할 만한 전망을 했다.
  
  “나는 장 총통에 대한 우정으로서는 척연(戚然: 근심스럽고 슬픔)한 감을 불금한다. 그러나 중국의 인민들은 장개석 장군을 다시 찾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택동(毛澤東) 정권의 신정책은 전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이는 아시아의 티토(Josip Broz Tito)로 될 가능성이 농후한 것 같다. 여하간 미-영과 타협하지 않는 정권이 목하 중국에서 장구히 존립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모택동 신정권이 성공하게 된다면 한국의 좌익에게도 새로운 세력과 새로운 노선이 대두할 수 있는 만큼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미국과 중국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미군철수 주장과는 관계없이 김구의 국제정치 인식이 기본적으로 보수적이었음을 말해준다.

 미군철수 주장은 그의 강렬한 민족주의 감성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김구,  부의금과 축의금으로 백범(白凡)학원과 창암(昌巖)학교 열어

김구는 동포를 향한 여러 미담을 남겼다.

그중에도 부의금이나 축의금등 성금으로 학교를 세웠다.

김구는 1945년 11월23일 환국을 하면서 한 연설에 이런 대목이 있다.

27년만에 조국에 돌아와서 본 첫인상이다.

"책보를 매고 줄지어 돌아가는 학생의 활발명랑한 기상을 보니, 우리 민족의 장래가 유망시 되었다" 

김구는 특별한 감격을 이렇데 토로했다.

김구가 정치적으로 가장 어려웠을 때도 그는 서울시내 굶주리고, 못배우는 이들을 생각했다.



때문에 1948년 12월31일에 서울  염리동 이재민촌, 용산 이촌동, 금호동, 숭인동, 장충단, 청계천의 집 없이 굶주림에 떨고 있던 동포들에게 모두 금액 90만원을 희사하여 세모의 뉴스가 되었다.

이 돈은 김구의 모친과 아내와 장남을 중국에서 이장했을 때에 들어온 조의금과 차남 신(信)의 결혼 때의 축의금을 모은 것이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그 돈은 서대문 감옥에 갇힌 죄수복 차림의 김구를 보며 기쁘다고 용기를 주었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유해환국 봉안식에 들어온 부의금과 둘째 아들 김신의 결혼식 축의금이었다" 고 보도됐다.


김구는 "이돈은 내것이 아니라,내가 중간에 서서 나를 사랑하는 여러 친구의 심부름을 한 것 뿐"이라고 밝혔다. 

성동구 금호동의 600여호 이재민 부락은 김구가 희사한 25만원으로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하여 초등학교급 학원을 건설, 1949년 1월27일에 개원식을 가졌다.

 학원이름도 김구의 호를 따서 ‘백범학원’이라고 했다.

백범학원이 세워진 성동구 금호동 일대는 일제 강점기 때 적산( 敵産)가옥이 대부분으로 전재민(戰災民) 아동이 많았다.

김구는 일본인들이 살던 주택들을 전쟁 이재민들이 머물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금호동 주민들은 당시 전쟁 이재민 주택을 ‘김구주택’이라고 명명했다. 

염리동 천막촌의 이재민들도 금호동 이재민들을 본받아 김구가 희사한 25만원으로 아이들 3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천막공민학교를 지었다. 

학교 이름은 김구의 아명인 창암(昌巖)을 따서 ‘창암공민학교’라고 했다. 

김구는 창암학원 운동회에도 참석하여 손수 상품을 수여하고 아이들과 즐거운 날을 보내기도 했다.


김구는 그 뒤에도 시가 5만원가량의 유리와 그 밖의 건축 재료를 이 학교에 기증했다.

교원까지 한 사람 파견하여 그 급료를 부담했다.

창암공민학교는 그해 3월14일에 문을 열었다. 

교사는 여교사 한 사람까지 서너 사람 있었다.

안타깝게도 지금 백범학원 건물은 6.25전쟁 당시 사라지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서울시 성동구는 훗날 사진 한 장으로만 남아있던 금호동의 백범학원 위치를 지역주민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조사한 끝에 지금의 위치(금호동 4가 548-1)에 백범학원이 있었음을 밝혀냈다.

지난 2013년 8월 29일 백범 선생 탄생일, 당시 김구주택 중심 터에 '백범학원과 김구주택 기념비'가 건립되어 김구의 동포애와 교육철학을 기리고 있다. 

기념비에는 '나의 소원' 중 일부가 적혀 있다. 


앞으로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김구.이승만 접촉한 김규식간의 균열과 김구, 유엔에 메시지 보내

정부수립후   1월30일에는 유엔한국위원단 제1진이 서울에 도착했다.

 유엔위원단 사무국 대표는 이날 제 1차 발표를 통해 위원단의 행동과 업무에 대한 소개했다.

'서울신문'1949년 2월1일자인  한국통일 간시와 점령군 철퇴 감시' 기사를 보면 위원단은 앞서 1947년 11월14일의 결의에 의하여 총회가 인정한 원칙에 의하여 한국의 통일과 전 한국 보안군의 통합을 실현하는 데 알선을 행할 것 등 네 가지를 천명했다

  김구는 2월10일에 유엔한국위원단에 메시지를 보냈다.

김구는  “유엔의 꾸준한 노력과 활동으로 인하여 1947년 11월14일에 유엔총회에서 가결된 통일 독립에 대한 결의안이 기필코 실현될 것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또한  “자주통일을 갈망하는 남북한인의 절대다수는 귀 위원단의 과업을 적극 지지하고 협조”하며, “제3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한 역사적 사실”을 명기될 것으로 남북통일이 조속히 실현되기를 기원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유엔한국위원단과의 교섭은 외무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정부 대변인의 성명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메시지가 김규식과의 공동명의가 아닌 점이 이 무렵 남북협상에 대한 두 김의 입장 차이를 짐작하게 한다.
  
  같은 날 경교장에서 통일독립촉진회 상무위원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그동안 참석하지 않았던 김구. 김규식도 참석하여 정국의 새로운 변화를 느끼게 했다.

 몇 번이나 유회를 거쳤고 또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이 각각 임시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나서 처음 열리는 회의였던 만큼 큰 관심을 모았다.

 두 김과 김학규(金學奎), 엄항섭, 설의식(薛義植), 김붕준(金朋濬), 배성룡(裵成龍), 송남헌(宋南憲), 권태양(權泰陽) 등 양쪽의 핵심 간부 10여명이 모인 회의였다.

 회의에서는 2월1일부터 업무를 개시한 유엔한국위원단에 대한 대책과 앞으로의 노선에 대한 토의가 진행됐다.

이어 2월12일에는 회의와 관련한  성명서가 나왔다.
  
  “국토의 통일이 없는 곳에 국가의 독립이 있을 수 없는 것은 재론할 필요도 없거니와 국토의 통일은 민심의 통일에서만 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남북통일을 목이 터지도록 부르짖되 아직 그 일보도 전진되지 못한 것은 필경 민심이 통일되지 못한 까닭이다. 현하 남한에 있어서도 유엔한국위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남북의 화평통일을 부르짖는 한편 민족진영 자체의 합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듯하다. 그러나 확고한 원칙이 없이 다만 강개한 열정에서만 우러나오는 합작운동으로서는 일시 민중에게 충동을 줄지언정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곤란할 것이다.… 이에 우리는 느낀 바 있어 5개항의 원칙을 제시하는 바이니, 국가와 민족을 위하야 각자의 의견이 활발하게 전개되기를 바란다.”
  

  5개항의 원칙이란 (1)자주적인 완전독립의 지표를 확립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고취할 것, (2)평화적 남북통일을 조속히 완성할 것, (3)평등 호혜의 입장에서 국제친선을 촉진할 것, (4)유엔한국위원단의 업무 추진에 협력하고 민의의 창달을 촉성할 것, (5) 정치력의 질량을 급속히 앙진(昻進)시킬 것이었다.

 성명서는 각 항목마다 구체적 내용을 부연했는데, (5)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반민법의 철저한 발동으로써 민족정기를 확립하는 것도 그것의 하나이며, 토지개혁을 시급히 실시하여 농촌에 활기를 주는 것도 그것의 하나다. 통화개혁, 동력조정, 기타 국가적 계획경제로서의 산업재편성 등 요컨대 진보적 시책을 양심적으로 강행하는 한편 권력의 민주화, 이도의 숙청 등 명랑하고 폭넓은 정치로써 생산력과 인화력을 증강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이승만 정부의 시책과는 간극이 있는 주장이었다.  
  
유엔한국위원단은 2월12일 오전에 덕수궁 석조전 회의실에서 일반 공개리에 첫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한국정부를 대표하여 이승만을 비롯한 각 국무위원과 국회의장 신익희가 참석했다.


김구를 비롯하여 김성수, 안재홍, 조소앙, 여운홍(呂運弘) 등 정계요인들이 다수 참석했다.
  
▶▶참고문헌 및 인용자료 :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이기택의 한국야당사, 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협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신수용 사건반세기, 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 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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