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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정치사(44)> 6.25 전조증인 송악산5·4전투...'육탄 10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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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전 1년 전인 1949년 5월 4일 송악산 국지전
서부덕, 박창근 등 육탄 10용사 박격포에 폭발물 설치하고 적 토치카 자폭
채명신 장군등도 우리 전사중에 '육탄10용사'사건이 가장 기억남아.
육탄 10용사 소재로한 노래와 영화 제작...하사관 교육생이 참전
김익렬 대령 등은 당시 최경록 11연대장이 날조할 것...10용사 평양서 산다고 주장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그전에 2021년 4월7일 재보선도 있다. 선거와 정치는 이제 참된 백성(民)이 군주(主)의 시대, 민의의 시대를 만든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1945년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을 함께 했다.
<본지>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유차영예비역 육군대령( 한국콜마홀딩스 전무)은 지난해 '육탄십용사가'라는 대중가요를 소개했다.

유 예비역대령은 작년 4월6일자 국방일보에 '한국전쟁 70주년, 대중가요로 본 6.25'에서 '맨몸으로 폭탄 안고 적진으로… 10인 특별공격조의 용맹 기리다'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육탄 십용사가'는 전사(warrior)의 정신과 실제 작전의 푯대를 음유한 노래라고 설명했다. 

그의 육탄 십용사가(유엔고지 용전가)또는 '용전가'로 불린다.

노래 제목은 육탄십용사가(UN고지 용전가)다. 이영순 선생이 작사를 곡 박시춘 선생이 작곡을, 노래 현인 선생이 불렀다.

십용사가는 1950년 6.25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꼭 1년전에 있었던 실화다.

<1절>
비둘기 고지에는 초목도 운다
적탄이 비 오던 날 아군의 용전
들었나 포연 속에 적군의 얼굴
서상사는 원합니다 특별공격을
부대장을 울려주던 애원의 소리
장하다 우리용사 아~ 십용사

<2절>
유엔 고지에는 적구도 운다
토치카 파괴하던 십삼시 이십분
붉고 검은 얼굴위에 방긋 웃었소
내 한 젊은 장한다짐 최후의 부탁
지축을 흔드는 폭발의 소리
장하다 우리용사 아~ 십용사

◇… 육탄 10용사의 피끓는  애국심의 전모

유차영 예비역 대령의 육탄 10용사에 대한 글은 이렇다.

'지나간 유행가는 살아있던 역사를 가사로 얽고 가락으로 읊조린 유물이다.

흔히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를 읽는 것은 승리의 결과를 읽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과정과 패배한 과정을 읽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1945년 광복과 동시에 그어진 미국과 소련의 정치적 이념 분계선인 38선은 옹진반도-개성 송악산-의정부-인제 신남-양양군 현북면 잔교리를 연결하는 선이다.

이 선을 중심으로 남한과 북한은나뉘었고, 물리적인 충돌이 잦았다. 

그중에 대표적인 무력충돌이 1949년 5월 3~4일 개성 송악산에서 벌어진 국지전이다. 

이 전투를 육탄전(肉彈戰)으로 수행하고 현장에서 산화한 10명의 용사를 기린 유행가가 '육탄십용사가(UN고지 용전가)'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 남북한 간의 물리적 충돌이었다.

가사 속의 서 상사는 서부덕 이등상사(육군소위 추서 진급), 10명의 특별공격조를 지휘한 조장이었다. 

1949년 북한군은 1950년 무력남침을 앞두고 국군의 경계태세와 전투력을 탐색하고 남한 사회에 불안감을 조성하기 위해 불법 도발을 자행했다. 

인민군(북한군)들은 옹진반도~개성~의정부 정면에 중대~연대 규모로 집중 공격을 펼쳤고, 그 일련의 연장선의 충돌이 송악산 전투다.

1949년 5월 3~4일 새벽 3시, 개성지구 정면 38선 경비를 맡고 있던 조선인민군 약 1000명은 송악산 동쪽 고지로 아군을 공격해 왔다. 

이로 인해 송악산(295고지)과 155고지·144고지 등은 북한군에 빼앗기고 고지는 포위되었다. 

그날 국군 1사단은 정상공격으로는 북한군의 토치카(동굴 진지)를 격파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육탄공격을 계획한다. 

이때 수많은 전우가 특별공격조에 자원했었다. 

하지만 장손(長孫), 부모 고령자, 편부모인 자, 독자(獨子) 등을 제외한 이들이 10용사다.

1949년 5월 4일 낮 12시경 박창근 이등중사가 수류탄 7발을 들고 먼저 단독으로 돌진을 시도한다. 그는 분대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격 도중에 북한군 단도화기(斷屠火器·기관총 등 자동화기로 측후방에서 갑자기 공격하는 북한군 전술) 저격수에게 사살되고 만다. 

이어서 14시~15시경 서부덕 이등상사 등 9명이 육탄으로 토치카 공격을 시도해 송악산과 UN고지를 탈취한다.

그 당시 국군 1사단장은 김석원 준장, 제11연대장은 최경록 대령, 하사관교육대장은 김영목 대위, 소대장은 김성훈 소위다. 

10명의 육탄용사는 서부덕 이등상사, 김종해·박평서·양용순·오제룡·윤승원·윤옥춘·이희복·황금재 등이다. 중화기소대 분대장은 박창근이다.

1949년 5월 21일 자 동아일보는 개성 송악산 전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개성 송악산전투에서 산화한 육탄10용사의 공훈'이라는 제목으로 '육탄십용사' 작전의 전모를 소개하고 있다.

이후 서부덕 이등상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전북 익산의 육군부사관학교 내 복지회관 이름을 부덕회관이라 명명했다.

1990년대 후반까지 부사관학교 경례구호로 ‘육탄! 할 수 있다’를 사용했었다.

육탄10용사는 1976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낙동강은 흐르는가’로 환생했었다.

영화 속에서 17세의 나이로 자진 출전한 천 이병은 생사가 뒤얽힌 전장에서 불타는 애국충정으로 적의 마지막 탱크를 향해 폭탄을 끌어안고 뛰어들어 적을 완전히 섬멸하고 만다.

이 밖에도 육탄용사는 6·25전쟁 당시 철원 북방 백마고지(395m)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육탄3용사도 있다. 

10일 동안 국군 9사단과 중공군 38군이 24차례나 치열한 전투를 벌여 고지의 주인이 24차례나 뒤바뀐 전투였다.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 무렵인 1952년 10월 12일 13시20분경 국군 9사단 30연대 1대대 1중대 육탄3용사(강승우 소위·오규봉 하사·안영권 하사)의 11차 돌격으로 백마고지 주봉(395m)을 탈환한 후에 야간방어를 성공적으로 함으로써, 낙타 능선을 제외하고 백마고지 확보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백마고지전투는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하게 고지전이 전개됐던 곳이다.

‘철원 북방 395고지/ 철원-평강-김화, 철의 삼각지/ 역곡천이 북녘으로 휘감도는 봉우리/ 철원평야를 한 눈으로 부라리는 좌견부 감제요충지/ 휴전회담이 진행 중이던/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 동안 12번의 공방전을 치르면서/ 스물네 번이나 주인이 바뀐 고지공방전의 푯대/ 중공군은 1만여 명이 전상되고/ 국군은 3천4백 명이 사상당한 곳/ 세계전사상 유례가 없는 포격전 백병전/ 철원군 묘장면 신명리… 하늘에서 내려다본 미군 전투기 조종사의 눈에 비친 하얀 말이 누워서 신음하는 형상.’ <아, 백마고지>라는 이 시는 필자가 발간한 시집 『끝나지 않은 전쟁』(2014. 21세기군사연구소)에 실렸다.

목숨이 오가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지대, 그 치열했던 전투 현장도 세월이 지나면 아름다운 선율을 품은 유행가로 탄생하게 된다.

주월파병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존칭생략)은 당시 개성 송악산 5.4지구 전투때 그 부대 중대장이었다.

그는 그의 회고록에서  6.25 전쟁이 일어나기 2,3년 전부터 남북의 충돌을 기억해냈다.

채명신은 6.25발발 1년 전인 5.4 개성송악산 전투, 즉 육탄 10용사 얘기를   가장기억에 남는 일이라고 전하고 있다.  

채명신은 '내가 격은 전쟁'에서 몸소 겪은 전란등을 상세히 적고 있다.


내용중에 개성송악산 5.4전투를 소개한 내용은 이렇다.

채명신과  공산주의와의 전쟁은 6·25가 일어나기 2년 전인 1948년 시작됐다.

그는 1951년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역시 개성 송악산의 '육탄 10용사' 전투다.

이어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와 조우, 닭 한 마리 때문에 부대원 전원이 몰살당할 뻔한 일이라고 술회했다.

채명신은 '5.4송악산 전투'가 발발한 1949년 같은 부대 11연대 4중대장으로 송악산 주봉을 경계로 인민군 1사단과 대치했다.

5월 3일 인민군이 기습을 해왔다. 

아군은 다음 날 새벽 즉각 반격했다. 

채명신 중대는  송악산 좌측, 김영직 대위의 하사관교육대는 우측 비둘기고지가 목표였다.

비둘기고지에선 격전이 벌어졌다. 

적이 쏴댄 기관포에 소대장과 분대장이 전사했다. 

지휘관을 잃은 병사들의 눈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그들은 육탄 공격을 결심했다.

분개한 1소대 1분대장 서부덕 상사, 박창근 하사, 윤옥춘·황금재·오제용·박평서·이희복·김종해·윤승원·양용순 상병이 자진해서 나섰다.

이들은 81㎜ 박격포탄을 안고 적 토치카로 돌입했다. 자폭 작전이었다. 이들이 그 유명한 '육탄(肉彈) 10용사'다.

이 전투에서 채명신이 네 살 위인, 형처럼 생각했던 김영직 대위를 잃었다. 

호국(護國)의 표본, 군인정신의 정화(精華)인 그들은 경기도 파주 육탄 10용사 충용탑에 동상이 돼 서 있다. 

송악산전투 후 나는 경북 안동 25연대로 전속됐다.

1950년 6·25가 터지고 영천 방어전에 임하던 내게 9월 16일 북진 명령이 내렸다. 

죽령터널~충북단양~황해도곡산~평남덕천까지 파죽지세로 올라가면서 점점 '너무 빨리 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처럼 적들도 무슨 작전을 쓸 것 같았다.
 
우리 군은 극비리에 게릴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민간인 300명을 선발한 배경엔 미군의 힐난이 있었다. 

그들은 신성모 국방부장관을 비꼬았다. 

"북한은 게릴라전에 능한데 남한은 대체 뭐 하는 거요?" 그 말을 듣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 6.25전쟁까지 생생하게 전하는 채명신

유격부대가 전멸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인사국장에게 조건을 달아 지휘를 수락했다.

"숫자는 50명입니다. 전과를 올리면 GO(민간인 게릴라 군번)를 정규 군번으로 바꿔주십시오."

정일권 참모총장도, 신 장관도 "OK"라고 했다.

인민군 복장, 소련제 AK소총, 북한 지폐를 지닌 유격결사 11연대가 마침내 51년 1월 말 강원도 영월 북방 적진에 잠입했다. 


그런데 뒤이어 유격12연대(160명), 13연대(120명)가 따라왔다. 계획과 달리 유격대는 500명의 부대가 됐다.

내키지 않았지만 부대명을 백골병단(白骨兵團)으로 바꿨다. 

2월 하순 대위가 포함된 적 연락병 5명을 만났다.

그들은 인민군 중좌 차림의 내가 반가운 듯했다. "동무, 어딜 가오?" "전 2군단 예하 69여단 사령부 연락장교입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나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렇소? (주위를 둘러보며) 이놈들 무장해제시키시오!" 그들은 진짜 월척이었다. 

69여단장이 인민군 최현 2군단장에게 보내는 극비문서와 부대 배치가 표시된 지도를 갖고 있었다.

정보를 아군에게 보내 2군단을 폭격한 뒤 후퇴 도중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기린리 군량밭이란 마을에 인민군 거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는 조선공산당 제2서기이자 현역 중장이며 대남유격대 총사령관 길원팔이었다.

그가 거처하는 곳에 잠입했다. 

의외로 일행은 외팔이 참모장 강칠성 대좌를 포함해 15명과 무장 자위대원 30명뿐이었다.

나는 200명을 선발해 그들을 완전히 포위했다.

일단 무장 자위대원부터 처치하기로 하고 대장에게 접근했다.

여기서도 인민군복과 '당 직속 정찰대장'이라는 거짓말이 통했다.

영문도 모른 채 모인 자위대원을 무장해제한 뒤 길원팔이 사는 세포위원장 집을 포위했다.

그는 돌연한 국군의 출현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죽기 전까지 "썩어빠진 이승만 괴뢰도당 중에 여기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는 말을 수십번 했다. 

길원팔은 거물이었다. 남으로 끌려가기보다 자결을 원했다. 

그에게 김일성이 선물했다는 권총에 총알 한 발을 넣어줬다.

2군단이 폭격당하고 길원팔이 살해됐으니 이젠 우리가 도망칠 차례였다.

예상대로 적의 부대가 끈질기게 쫓아왔다.

우리는 설악산 능선에서 죽을 고비를 맞았다. 

적에게 쫓기다 절벽 아래로 뛰었는데 2m 넘는 눈 덕에 살아나 강릉 9사단에 인계됐다.

당시 9사단 참모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대령)이었다. 그는 유격대의 활약상을 흥미있게 들었다.

어느 날 박 대령이 날 불고깃집으로 초대했다. 

그러면서 적군의 핏자국이 얼룩진 누더기 점퍼를 자기 고급 점퍼와 바꾸자는 것이었다.

"이봐, 그거 역사적인 점퍼잖아"라면서 자기 깨끗한 옷을 내게 선물하려고 배려했던 것이다

◇…6.25 전쟁발발 1년전  5.4 개성송악산 전투

얄타회담과 모스크바 삼국 외무상회의를 통해 한반도는 비운에 처했다. 

한반도는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신탁통치란 구실로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 진주하면서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단됐다.


미군과 소련군은 주요 도로를 중심으로 초소를 만들어 38선의 통행을 관리했다.

그러나 평양은 소련군정아래 김일성, 김두봉을 중심으로 군인을 육성하고 전투훈련을 강화하는데 주력했다.
 
남한에서는 미군정에다, 5.10 총선찬반,제주4.3사태, 여수순천 일부군인 폭동등으로 어수선할 때 북조선은 전쟁준비에 광분했다. 

그 실례로 1948년 2월 소련의 지원을 받아 조선인민군을 창설한 북한이 38선 인근에 군사력을 집중 배치했다.

이로 인해  38선 인근 지역의 남북 군사적 긴장과 무력충돌이 점차 높아졌다.

이러한 무력 충돌은 남북이 정식으로 국가를 수립한 1948년 후반기부터 보다 더 격화됐다.

그중에도 황해도 개성도 이러한 충돌이 격화된 곳들 중 한 곳이었다.

그런데도 남한은 1948년 8월 정부를 수립한 뒤에야 국군의 효시인 '국방경비대'를 기반으로 대한민국 국군을 창설했다.

여기에다, 민족주의자들과 일부 제헌국회의원들의 '외국군 철수'를 주장하는 바람에 미군정치 철수하고,미군도 물러갔다.

때문에  미군에게서 38선 경비 업무도 한국정부가 넘겨받았으나, 엉성했다.

북한은 모스크바에 석탄을 제공하는 대신 소련제 다연발 기관총과 대포, 탱크, 개인화기 모두 최첨단 중화학무기를 들여다가 훈련을 마친 상태였다.

우리는 기껏 카빈소총이나,  1,2차대전당시 연합군이 쓴 M1등으로 무장하는게 고작이었다.

그러면서 대통령 이승만과  친일부역자, 민족반역자 처단에 국회와 갈등을 빚거나 좌,우익대립에 세월을 보냈다.


그중에  서부전선의 요충지인 개성은 38선에 걸쳐 있었다.

개성 송악산의 정상인 488고지는 38선 북조선이 점령했지만,  475고지는 38선 남쪽인 남한이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다. 개성 시내는 명백히 38선 이남에 위치해 남한이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개성 송악산은 38선 이북에 있었다.

즉, 북한군은 그냥 송악산 고지에 앉아서 개성 시내를 마음껏 감제할 수 있었고 한국군 입장에서 송악산은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1948년부터 이런 지리적 사정때문에 남한에서는 대통령 이승만까지 나서서 송악산을 점령하라고 성화였다.

그렇다고 대놓고 38선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한국군이지만 송악산의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송악산으로 올라가는 길목마다 진지를 구축했다.

1948년 11월부터 황해도 청단군(靑丹郡)에서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고랑포(高浪浦)에 이르는 지역의 38선 경비를 맡은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개성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는데 주력했다.

북조선도 1949년 4월 남천점(南川店)에 주둔하던 조선인민군 경비여단 제3연대의 3개 중대 병력 1000명을 송악산 후방에 주둔시켰다.

우리 군은 군사무기에 취약한 상태지만 정신력이 강했다.

하지만 호시탐탐 남침을 엿보던 북한은 이미 남침을 위한 전쟁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이를 계기로 한반도를 가로 지르는 38선을  놓고 서부전선, 중부전선, 동부전선 곳곳에서 크고 작은 남북군인들끼리 마찰이 빈번했고, 국지적으로 충돌했다.
 

1949년 5월 3일 수요일 새벽3시, 개성지구 정면 38경비 인민군 대대 약 2000여명이 개성 송악산 연봉 동방으로부터 292고지, 155고지, 유엔고지,비둘기고지까지 약 5km에  걸친 토치카를 축조한 것을 기화로 중화기로 무장한 채 개성시내에 몰려왔다.

그리하여 이날 4시30분쯤 개성시내 신관지사후방에서 전투가 벌어져  155고지와 144고지가 적에게 빼았겼다.

이 무렵 아군 제1사단 제11연대에서는 적 진지인 송악산 488고지의 바로 앞의 전술적 요충지인 292고지에 진지공사를 해왔다. 

당시 국군 제1사단장인 김석원 준장과 제11연대장 최경록(崔慶祿)  대령은 수원에서 문산으로 이동, 미군으로부터 인계받은 고랑포에서 청단에 이르는 38선 경비 구역을 담당했다.

이를 위해 우선 제2대대의 병력을 동원해 송악산의 292고지·유엔고지·비둘기고지 등에 진지를 쌓았다.

인민군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국군의 진지 공사를 방해했다. 

상대인 북조선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인민군 38선 경비여단장 최현이 38선 송악산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성시내는  38선이남에 속해 남한이 지켜왔다. 그러나 개성 인근 송악산부터 38선 이북에 속했다.

인민군은 아군의 진지공사 방해를 저지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기습점령을 탰했다.

인민군은 38선 경비여단장인 최현이 중심이 되어 1949년 5월 3일 새벽에 인민군 제1사단 제3연대의 3개 중대 1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아군 진지등을 빼았았다.

인민군은 이날 새벽 한국군의 전투력을 시험하기 위해 개성의 송악산을 기습침공(奇襲侵攻)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1949년 5월 3일, 조선인민군은 이러한 국군의 여러 진지를 기습하여 함락했다. 

당시 전사(戰史)를 보면 이날  아군의 292고지· 155고지· 유엔고지·비둘기고지 등을 점령했다.

최경록 연대장의 지휘로  기습 당한 육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즉시 반격했으나 실패했다. 

고지에 북한 육군이 방어 시설로 구축한 토치카를 제압하지 않고는 반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다음날 5.4 개성송악산 전투는 빼앗긴 고지탈환하려는 국군과 빼앗은 고지를 사수하려는 인민군측이 이런 배경속에 발발했다.

이때가  한국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5월 3일 인민군의 개성 송악산 기습 공격한 뒤  4일에 정면 충돌했다.

1949년 5월 3일의 경우, 조선인민군은 이러한 대한민국 육군의 여러 진지를 기습하여 함락했다. 

◇…개성 송악산의 아군들

이날 오전 10시40분  아군 전투사령부에서 명령이 하달됐다.

104고지와 비둘기 고지에 있는 적군을 격퇴시키고 개성 빙고동부근의 적군부대와 응원부대를 무찌르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정방에 있는 적의 토치카는 길이 6m에 직경 20cm의 콘크리트가 3중으로 덮여 도저히 박격포나 소총으로는 불가능했다.

인민군은 쉴새없이 토치카로부터 중화기로 집중공격을 해왔다.


이대로 뒀다가는 몇시간 뒤에는 개성송악산부근 만이아니라, 남한 전체가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를 안 제1분대장 서부덕 이등하사와 9명의 용사는 소대장인 김OO 소위에게 특공대를 편성해 적을 무찌르고 말겠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부하를 사랑하던 김OO 소위는 자신이 혼자갈 것을 결심하고 이를 강행하려고 했다.

이를 본 서부덕 이등하사등은  남은 병력은 누가 지휘할 것이냐며 김소위를 말렸다.
 
하는 수없이 김소위는 이들에게 57파운드 폭탄하나씩을 주면서 굳은 악수를 나눴다.

이미 각오가 되어 있는 10용사의 눈에서는 광채가 빚났다.

이들은 한걸음 한 걸음씩 적진을 향해 접근했다.

공격이 계속되는 적진을 향해 엎드려쏴 자세로 기어갔다.

포복은 한참동안 계속되고, 그위로 적탄이 빗발치듯 했다.

그러나 목숨을 내건 용사들은 연달아 불을 뿜는 토치카에 당도했다.
 
오후 2시 5분 쯤, 갑자기 유엔고지는 '펑', '펑'하는 폭음과 함께 파편들이 튀었다.

◇…국군 1사단11연대의 10명의 특공조...수류탄·박격포들고 적진에 몸 던져

사건을 구체적으로 돌려보면 인민군의 공격 소식이 전해지자, 제11연대장인 최경록 중령은 문산에 주둔하던 제1대대의 병력을 송악산으로 증파했다.

또, 연안에서 훈련 중이던 하사관교육대도 전투에 참여시켰다. 

결론적으로 개성 송악산(松岳山)에서 38선 남쪽의 고지를 되찾기 위해 한국군 제1사단 제11연대가 북한군 제1사단 제3연대의 병력과 벌인 국지적 전투이다.

육탄 10용사 사건이 펼쳐진 송악산5.4전투 작전을 수행한 11연대장인 최경록 중령은 격전 중인 일선부대로 박격포탄을 보급하기 위해 공병소대장 박OO 소위에게 지시한다.

박 소위에게 10명을 공동 지휘하여 박격포탄을 짊어지고 송악산으로 출발시켰다. 

그러나 박OO 소위는 지형을 숙지하지 못하여 이동도중 적과 불의에 조우하여 부하들을 수습 지휘하지 못하고 혼자 탈출했다는 기록과 그렇 않다는 기록이 같이 남았다.

여기에다 대원 10명은 박격포탄을 진채 모조리 적의 포로가 되었다. 

정보주임 장교는 계통을 따라 사단 G-2에 보고하였고, 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대노하여 당장 박소위를 총살하라고 명령하였다.

정식보고에서 11연대장 최경록은 김석원 사단장에게 '사실은 참모보고는 사실이 아니고, 대원 10명이 모조리 포탄을 안고 적진에서 자폭한 것'이라고 정정보고 하게 되었다.

당시 연대장인 최경록 중령과 공병소대장인 박 소위는 사실상 친구지간이었다.

따라서 박 소위를 총살에서 구출하기 위하여서는 사단장에게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군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따라 국군은 4일 새벽부터 반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고지에 설치된 토치카에서 기총사격을 가해오는 인민군의 공격 때문에 아군의 공격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토치카(tochka )란 두꺼운 철근 콘크리트와 같은 것으로 공고하게 구축된 구축물이다.


토치카에는 기관총 1정과 하나의 총안(銃眼)만을 갖춘 것과 2~3층 높이로 만들어 그 안에 대포·대전차포·기관총 등의 각종 화기를 비치한 견고한 진지다.

그러자 하사관교육대의 교육대장인 김영목(金泳穆) 대위는 우선 인민군의 토치카를 파괴하는 것이 제1목표로 세웠다.

그래서 토치카에  접근해 그것을 파괴할 특공대를 구성했다.

정오 무렵 하사관교육대 중화기소대의 분대장이던 박창근(朴昌根) 하사가 김막동(金莫同) 일등병·김부태(金富泰) 이등중사 등과 함께 특공대로 나서 292고지에 설치된 인민군의 토치카로 접근했다.

박창근 하사의 경우 인민군의 퇴치카내 공격 때문에 아군의 접근이 막히자 홀로 수류탄을 지니고 적의 토치카로 돌진해 육탄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인민군의 집중사격을 받아 전사하면서 그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그의 장렬한 죽음을 본 국군 병사들의 사기는 더 높아졌다.

제1소대 제1분대의 분대장인 서부덕(徐富德) 이등상사도 8명의 분대원들과 함께 특공대로 나섰다. 

특공대에게는 국군 1사단 시설장교 박후준 소위가 고안으로 81개의 박격포탄과 폭약을 장치한 무기가 주어졌다.

이 임무를 수행할 장병은 김성훈 소위의 제1소대 서부덕 이등상사와 김종해, 윤승원, 이희복, 박평서, 황금재,  양용순, 윤옥춘, 오제룡 등 9명의 용사가 차출됐다.

이들 9명은 적진 300m까지 진격했다.

81mm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장착해서 만든 폭발물을 안고 유엔고지에 설치된 인민군의 토치카로 돌진, 폭파하고 동시에 전사했다.

10용사의 산화로 인민군의 토치카는 모두 파괴되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송악산일대의 진지는 1주일만에 다시 아군에게 돌아오게 된 것이다.

국군은 인민군에 빼앗겼던 292고지·유엔고지·비둘기고지 등을 차례로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이들이 바로 제1사단의 서부덕 상사 등 10명의 특공대다.


이에 앞서 낮 12시경 소대 분대장 박창근 하사가 단독으로 수류탄 7개를 들고 조선인민군의 토치카를 파괴해 박창근과 9명 용사를 합해 육탄 10용사라 부른다.

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11연대장의 정식보고 자리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일본군에는 육탄 3용사가 있었지만 우리에겐 육탄 10용사가 나왔다'라고 이 사실을 대통령 이승만에게까지 보고하였다.

사단장은 상부에 건의하여 대대적인 장례식 행사준비를 했고, 당시 사단장 김석원과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있던 채병덕 참모총장은 하루 전 불승인했다.

그러나 이종찬, 이용문 대령 등이 '육탄 10용사는 국군의 전통과 사기진작에도 좋으니 행사를 하자'라고 권고하여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연대장 최경록과 육탄 10용사의 면면

최경록(崔慶祿, 1920년 9월 21일 ~ 2002년 9월 3일)은 대한민국의 중장출신 군인, 외교관, 정치가로 더 잘알려진 인물이다.

충북도 음성에서 출생, 일본 도요하시 중학교와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와 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와 대한민국 조선경비보병학교를 거쳐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과 대한민국 국방대학원 행정학 석사 학위 취득했다.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를 정치학 석사 학위 취득하였다.  

1949년 송악산 5·4 전투 당시, 유명한 육탄10용사를 배출한 육군 제11연대의 연대장이었다.  한국 전쟁 초기에 육군 제11연대를 이끌고 고랑포 전투(1950년 6월 25~26일)에 참여하였다. 1951년 거창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을 처리한 헌병사령관이었다.

1950년 민주국민당 의원이었던 서민호가 기생집에서 현역 육군 대위를 사살하자 이승만은 사형을 선고한 뒤 자비를 베풀어 사형을 면제시키는 것처럼 하려 하였으나 육군 준장 최경록을 비롯한 군관과 법관들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이승만은 이들에 대한 인사보복으로 대응하였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계엄사령관 송요찬의 발포 명령에 대하여 최경록은 발포를 중단하도록 만류하였다.

4.19 후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군의 숙정과 관련한 미국 측의 간섭을 일언지하에 거부해서 "파머 사건"을 겪었다.

1960년 5월 2일, 허정(許政)은 최경록을 육군 참모총장에 채용하려 했다.

그러나 장면 민주당 대표최고위원과 인연이 있던 최경록은 허정의 참모총장직 제의를 사양했다.

1960년 8월 23일 장면은 국군 인사를 단행하면서 육군참모총장에 최경록을 임명하였다.


이듬해 1961년 5월 22일 육군 제2야전군사령관 최경록은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최경록, 강문봉, 전규홍, 이철승, 양일동 및 전 주미 대사관 참사관 부인들은 1963년 3월 21일, 미국 대통령 관저 앞에서 "군대는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 "박정희 군사독재 타도", "한국인은 군부정치를 원치 않는다", "한국인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박정희 장군의 군정 연장 제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1967년 10월 7일 상오, 박정희 대통령은 최경록 멕시코 대사 등 8명의 신임대사에게 신임장을 각각 수여했다.

1974년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재직 시 발생한 이리역 폭발 사고(1977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1980년 9월 국무회의에서 주일 대사로 임명되자, 8월 13일 국회사무처에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1987년 9월 17일 부터 1988년 4월 28일 까지 제24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오랜 군, 관생활을 통해 강직과 청렴이 그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전사에 기록된 육탄 10용사의 장렬한 전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부덕( 徐富德. 22)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 서봉리 출신. 1949년 5월 4일, 제1사단 11연대 하사관 교육대 1소대 1분대장(이등상사)으로 개성지구전투(송악산 292고지)에서 산화했다.

이 무렵 아군 제1사단 제11연대에서는 적 진지인 송악산 488고지의 바로 앞의 전술적 요충지인 292고지에 진지공사를 실시했다.

1949년 5월3일 새벽 이를 저지하기 위해 북한은 292고지·유엔고지·비둘기 고지를 무단 점령하였다.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1949년 5월 4일 14:00경, 하사관 교육대의 육탄 10용사는 박격포탄을 안고 각자 지정된 적의 토치카로 뛰어들어 진지를 폭파하고 동시에 전사하였다.


10용사의 활약으로 송악산일대의 진지는 1주일만에 다시 아군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서부덕 이등상사는 소위로 추서되는 한편 1950년 12월 30일에는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박창근( 朴昌根.24) 전라남도 완도군 노화면 동천리 출신. 1949년 5월 4일, 제1사단 11연대 하사관 교육대의 피교육생으로 개성지구전투(송악산 292고지)에서 전사하였다.

이 무렵 아군 제1사단 제11연대에서는 적 진지인 송악산 488고지의 바로 앞에 위치한 전술적 요충지인 292고지에 진지공사를 실시하였다.

그러자 북한은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292고지·유엔고지·비둘기 고지를 무단 점령하였다. 

1949년 5월 4일 14:00경, 북한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하사관 교육대의 육탄 10용사는 박격포탄을 안고 각자 지정된 적의 토치카로 뛰어들어 진지를 폭파하고 동시에 전사하였다.

이들의 활약으로 송악산일대의 진지는 1주일만에 다시 아군에게 돌아오게 되었고, 박창근 하사에게는 특무상사가 추서되는 한편 1950년 12월 30일에는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이희복( 李熙福.22)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속달리(지금의 군포시 속달동) 출신. 1949년 5월 4일 진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특공대를 자원하여 박격포탄을 안고 적 토치카로 뛰어들어 적진지를 파괴하고 산화하였다. 육탄 10용사의 일원.

1사단 11연대에서는 적진지인 송악산 488고지의 바로 눈밑의 코와 같은 전술적 요지인 292고지에 진지공사를 했다.

북한군 1사단 3연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불법 공격을 가하고 292고지·유엔고지·비둘기고지를 무단점령하고 특화점진지(特火點陣地)를 구축하였다.

이에 아군 최경록 1사단11연대장은 반격을 가했으나 적이 구축한 특화점 자진지의 사격으로 희생만 컸다. 

적의 10개의 특화점 토치카를 파괴하고 진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특공대를 편성하였다.

이희복하사는 제1사단 11연대 하사관 교육대의 피교육생으로서 특공대에 지원하였다.

이희복하사는 1949년 5월 4일 14:00경 박격포탄을 안고 지정된 적토치카로 뛰어들어 특화점진지를 파괴하고 전사하였다. 

이로써 송악산 일대의 전투는 1주일만에 원상태로 회복할 수 있었다. 

전사후 특무상사로 추서되었으며, 1950년 12월 30일에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박평서( 朴平緖.20) 전라남도 나주군 공산면 남창리 출신. 1949년 5월 4일, 제1사단 11연대 하사관 교육대의 피교육생으로 개성지구전투(송악산 292고지)에서 전사하였다.

이무렵 아군 제1사단 제11연대에서는 적 진지인 송악산 488고지의 바로 앞의 전술적 요충지인 292고지에 진지공사를 실시하였는데, 북한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292고지·유엔고지·비둘기 고지를 무단 점령하였다.

그러자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1949년 5월 4일 14:00경, 하사관 교육대의 육탄 10용사는 박격포탄을 안고 각자 지정된 적의 토치카로 뛰어들어 진지를 폭파하고 동시에 전사하였다.

이들의 활약으로 송악산일대의 진지는 1주일만에 다시 아군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박평서 상등병에게는 특무상사가 추서되는 한편 1950년 12월 30일에는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황금재(黃金載.21) 군번 1204571. 전라북도 익산군 용안면 법성리에서 출생. 6·25전쟁 발발시 하사관 교육대의 피교육생으로 참전하여 1949년 5월 4일 제1소대 제1분대장과 분대원 10명과 함께 특공대를 자원하여 적의 진지를 파괴하고 전사하였다.

당시 제7사단으로부터 진지를 인수한 제1사단 제11연대장 최경록중령은 전선을 시찰하고 전술적 요지(要地)에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38선을 경계로 송악산에 진지를 점령한 인민군은 바로 눈밑에 있는 292고지에 아군이 진지공사를 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북한군 제1사단 제3연대는 불법 공격을 가하고 292고지·유엔고지·비둘기고지를 무단 점령하였다.

이에 제11연대장은 반격을 가했으나 적이 구축한 특화점 진지의 사격으로 희생만 강요당하고 있어 10개의 특화점 토치카(진지의 중요한 부분을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구축하고, 안에 강력한 중화기를 갖춘 방어 진지. 특화점)를 파괴하고 진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특공대를 편성하였다.

제1사단 제 11연대 하사관교육대의 피교육생으로 교육을 받던 중 1949년 5월 4일 오후 2시경 제1소대 제1분대장 서부덕 이등상사를 비롯하여 김종해·윤승원·이희복·박평서·오제룡·윤옥춘·양용순·박창근 등의 분대원들과 함께 특공대에 자원하였다.


10명으로 구성된 특공대는 박격포탄을 안고 각자에게 선정된 적의 토치카로 뛰어들어 특화점진지(特火點陣地)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 

그 뒤 개성의 송악산 일대의 전투는 1주일 만에 원상태를 회복되었다. 전사 후 1950년 12월 30일 특무상사로 특진되었으며, 을지무공훈장이 함께 추서되었다.

김종해( 金鍾海.20)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반송리(구 수원군 동탄면 반송리) 출신. 1949년 5월 4일, 제1사단 11연대 하사관 교육대의 피교육생으로 개성지구전투(송악산 292고지)에서 전사하였다. 이 무렵 아군 제1사단 제11연대에서는 적 진지인 송악산 488고지의 바로 앞의 전술적 요충지인 292고지에 진지공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북한은 292고지·유엔고지·비둘기 고지를 무단 점령하였다.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1949년 5월 4일 14:00경, 하사관 교육대의 육탄 10용사는 박격포탄을 안고 각자 지정된 적의 토치카로 뛰어들어 진지를 폭파하고 동시에 전사하였다.

이들의 활약으로 송악산일대의 진지는 1주일만에 다시 아군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김종해 하사에게는 특무상사가 추서되는 한편 1950년 12월 30일에는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윤승원(尹承遠.21)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출신. 1949년 5월 4일, 제1사단 11연대 하사관 교육대의 피교육생으로 개성지구전투(송악산 292고지)에서 전사하였다.

이 무렵 아군 제1사단 제11연대에서는 적 진지인 송악산 488고지 바로 앞의 전술적 요충지인 292고지에 진지공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북한은 292고지·유엔고지·비둘기 고지를 무단 점령하였다.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1949년 5월 4일 14:00경, 하사관 교육대의 육탄 10용사는 박격포탄을 안고 각자 지정된 적의 토치카로 뛰어들어 진지를 폭파하고 동시에 전사하였다.

이들의 활약으로 송악산일대의 진지는 1주일만에 다시 아군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윤승원 하사는 특무상사에 추서되는 한편 1950년 12월 30일에는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윤옥춘( 尹玉春.22) 충청남도 대전시 덕진동 출신. 1949년 5월 4일, 제1사단 11연대 하사관 교육대의 피교육생으로 개성지구전투(송악산 292고지)에서 전사하였다.

이 무렵 아군 제1사단 제11연대에서는 적 진지인 송악산 488고지의 바로 앞의 전술적 요충지인 292고지에 진지공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북한은 292고지·유엔고지·비둘기 고지를 무단 점령하였다.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1949년 5월 4일 14:00경, 하사관 교육대의 육탄 10용사는 박격포탄을 안고 각자 지정된 적의 토치카로 뛰어들어 진지를 폭파하고 동시에 전사하였다.

이들의 활약으로 송악산일대의 진지는 1주일만에 다시 아군에게 돌아오게 되었고 윤옥춘 하사는 특무상사에 추서되는 한편 1950년 12월 30일에는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양용순( 梁用順.22)함경북도 경원군 출생. 1949년 5월 4일, 제1사단 11연대 하사관 교육대의 피교육생으로 개성지구전투(송악산 292고지)에서 전사하였다.

아군 제1사단 제11연대에서는 적 진지인 송악산 488고지의 바로 앞의 전술적 요충지인 292고지에 진지공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북한은 292고지·유엔고지·비둘기 고지를 무단 점령하였다.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1949년 5월 4일 14:00경, 하사관 교육대의 육탄 10용사는 박격포탄을 안고 각자 지정된 적의 토치카로 뛰어들어 진지를 폭파하고 동시에 전사하였다.

이들의 활약으로 송악산일대의 진지는 1주일만에 다시 아군에게 돌아오게 됐다.

양용순 하사에게는 특무상사가 추서되는 한편 1950년 12월 30일에는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오제룡( 吳濟龍.22)전라북도 전주시 덕진동 1가 449 출생. 1949년 5월 4일, 제1사단 11연대 하사관 교육대의 피교육생으로 개성지구전투(송악산 292고지)에서 전사하였다.

이 무렵 아군 제1사단 제11연대에서는 적 진지인 송악산 488고지의 바로 앞의 전술적 요충지인 292고지에 진지공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북한은 292고지·유엔고지·비둘기 고지를 무단 점령하였다.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1949년 5월 4일 14:00경, 하사관 교육대의 육탄 10용사는 박격포탄을 안고 각자 지정된 적의 토치카로 뛰어들어 진지를 폭파하고 동시에 전사하였다.

이들의 활약으로 송악산일대의 진지는 1주일만에 다시 아군에게 돌아오게 되었고, 오제룡 상등병에게는 특무상사가 추서되는 한편 1950년 12월 30일에는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육탄 10용사의 소속 보병 1사단과 육탄 10용사 추모

제1보병사단은  전진부대란 별칭을 갖고 있다.

육군의 보병사단으로서 한국전쟁 이전에 창설된 부대이다.


49년 송악산 전투에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육탄 10용사가 속한 부대이다.

6.25 한국전쟁 때 다부동 전투, 평양선봉입성, 베티고지 전투 등 단 한번도 북한군에게 진 적이 없는(북한군에게 밀려 후퇴를 한 적은 있다) 부대다.

1950년 10월 19일 국군 최초 평양선봉입성을 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진 휘호를 받아 전진부대가 되었다.

그래서 이 사단은 일반적인 경례구호인 "충성" 대신 "전진"을 붙인다.

현재 1보병사단은 동쪽으로 임진강서쪽 지역부터 남북경협의 상징인 개성공단 출입로, 도라산역, 도라전망대, 자유의 마을, JSA 등과 같은 가장 중요한 위치의 경계를 맡고 있다.

또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군재직시절 한 때 이 부대의 지휘관이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전두환 사단장 시절인 1978년에 북한군이 침투를 위해 파놓은 제3땅굴을 발견하였다.

제1보병여단(초대 여단장 송호성 준장)이 1947년 12월 1일 창설되었다. 

제1보병여단은 1948년 1월 초순부터 38선에 대한 경비대를 파견하였다.


이 무렵 소수의 미군만이 배치되었던 문산 북쪽 임진강나루에는 경비의 소흘함을 틈타서 북조선군의 침범이 잦았던 때문에, 1여단장은 경계강화책으로 보병 1개중대를 출동시켜 미군과 합동근무케 하였다.

1948년 5월 4일 송악산 전투에서는 적의 토치카를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들고 육탄으로 파괴하고 장렬히 순국한 육탄 10용사가 있다.

제1보병여단은 지속적으로 병력을 증강하여 1949년 5월 12일에 사단으로 승격되었다.

한국전쟁 전 사단사령부는 수색에 두었고, 경기도 문산 및 개성 방어를 담당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인원 규모는 다음과 같다. 11연대 2,527명, 12연대 2,728명, 13연대 2,578명 - 총원 9,715명(공병, 포병대대 등 직할부대 포함) 다른 국군 사단들처럼 1 보병사단도 한국전쟁 초기 북조선군의 T-34를 앞세운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다른 고위 장교들과 함께 전날 있었던 파티에 참석하여 자리를 비운 상태였으며, 사단은 처음 접하는 전차에 큰 피해를 당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단장의 복귀 후 전열을 재정비하여 봉일천에서 밀려오는 적군에 대해 필사적으로 반격작전을 감행하였지만 전력의 차이는 컸다.

결국 예하 포병대대의 포탄마저 바닥난 상태에서 우측방의 7사단이 방어하던 의정부전선이 무너져 북한군의 일부가 서울에 침입하고, 이 여파로 육상 철수수단이었던 한강교의 조기 폭파로 퇴로가 차단된 1사단은 뗏목, 나룻배 등의 수단을 통하여 한강을 건너 시흥군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중화기를 상실하였고, 많은 병력도 잃은 상태였다. 이때 부대재편을 통하여 기존 13연대와 새롭게 편입된 지원부대인 5사단 15연대를 통합하여(15연대로의 명칭변경은 낙동강 방어전시 변경), 예하부대는 11연대, 12연대, 15연대로 재편되었다.

1사단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고,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대구와, 낙동강 이남을 적으로부터 지켜냈다. 

그 후 미국 1군단의 미국 24보병 사단, 미국 1기병 사단과 함께 배속되어 인천 상륙 작전이후 반격전에 참가하여, 1950년 10월 19일 평양에 선봉으로 입성하여 이를 완전 정복하는 쾌거를 올리게 된다.

그 후 10월 20일 평양선봉입성 공적으로 1사단 전 장병은 1계급 특진하게 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1보병사단에 대통령 표창과 더불어 전진 휘호를 내리게 된다.

그 후 이 부대는 전진부대로 불리게 되었다.

1953년 휴전 협정조약이 체결되던 당시, 현재는 파주쪽의 비무장 지대내에 있는 베티 고지를 점거하고 있던 1사단 11연대 김만술 상사가 이끄는 1개 소대가 중공군 두 개 대대를 맞서싸워 이기는 대승을 거뒀다. 

그 결과로 김만술 상사는 소위로 1계급 특진[출처 필요](김만술 소위는 특무상사에서 현지 임관 되었고, 소위 임관 후 소대장으로 임지에 도착한 날 베티고지 전투를 시작했음.)에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생존자들은 베티고지의 영웅들로 추앙받았다.

1사단은 미군으로 부터 155mm 야포와 M36잭슨 구축전차를 지원받아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한 2001년부터 육탄 10용사 상이 제정되어 시상되고 있다.

군인 정신의 표상으로서 추앙받은 이 군인들은 1950년 12월 30일에 을지무공훈장을 추서 받으며 서부덕 이등상사는 중위로, 나머지 9명은 일등상사로 특진했다. 

전후에도 국군에서 육해공군 안 가리고 정훈·정신 교육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존재가 되었다. 이 군인들이 소속된 제11연대의 부대명은 아예 '육탄부대'가 되었다.

이 군인들을 다루는 영화 낙동강은 흐르는가가 제작되기도 했고 육탄 10용사를 기리는 군가가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매년 이 군인들을 기리는 추모 행사도 열리며 이 군인들의 출신지에는 충혼탑이 세워지기도 했다.

지금도 1사단 예하 부대 상당수는 부대 입구에 육탄10용사 관련 문구를 써 넣는다.

병점역과 동탄신도시 일대를 잇는 도로 중 하나는 이름부터 '10용사로'이다.

물론 이것은 도로가 지나가는 반송동에 있는 육탄10용사기념공원에서 따온 것이지만, 용사 중 한 명인 김종해가 동탄 출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이 군인들이 자폭 공격한 송악산 일대는 휴전 후 북한령으로 넘어가면서 현재는 미수복 지역이다.

현재 매년 5월 4일마다 파주 통일 공원에서 육탄10용사 추도식이 열린다

◇…1사단 13연대장 김익열 "서부덕·오제룡 평양에 살아있다" 주장 논란

육탄10용사가 생존하여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 육탄 10용사 중 단독으로 돌입해 자폭한 박창근 하사만이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서부덕 이등상사 등 나중에 돌입한 9명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9명도 폭연이 확인된 것은 4개이므로 최소한 5명은 자폭에 실패했다.

이 군인들은 접근 중 전사했을 수 있지만 포로로 잡혔을 개연성도 있는 데다가 육탄 10용사 중 특공대장인 서부덕 이등상사와 오제룡 상등병을 자칭하는 자들이 '평양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다. 

이 군인들은 북괴에 귀순해서 잘 산다는 것과 자신들의 교우·친척·인척 관계를 자세히 말했고 목소리도 실제와 비슷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나무위키를 보면 십용사 사건때 같은 보병 1사단 13연대장이었던 대령 김익렬이 대표적인 주장이다.

1949년 5월 4일. 1사단 13연대 김익열 대령은 사단의 예비연대로 교전중인 최경록 중령이 맡은 11연대의 상황에 따라 투입하도록 대기상태에 있었다.

대령 김익렬은 1964년 5월 4일 전 국방부장관인 박병권 장군의 자택에서 국방부 전사편찬위와 대담에서 '10용사의 평양 생존설'을 주장해 큰 논란이 됐다.

김익렬의 증언은 2003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된 '6.25전쟁 참전자 증언록'에 실렸다.

북한군의 포로가 된 육탄 10용사는 평양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살아 있다는 방송을 하고, 가족들에게 편지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13연대장이었던 김익렬 본인이 "6.25 전쟁에서 평양에 입성했을 때 육탄 10용사가 꽃다발을 받고 있는 사진을 보고 놀랬다"고 하면서 이는 순전히 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의 조작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사단장이었던 김석원 장군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증언자인 김익렬은 제주 4.3 사건에서 진상에 접근할 수 있는 핵심에 있었던 인물로 '4.3의 진실'이라는 회고록을 집필했다.

이를 사후 공개하라는 부탁을 남겼고, 회고록 말미에 '개인적으로는 고인의 죄상을 덮어두는 것이 인간적 예의라고 생각하나 침묵을 지키기에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나의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컸다'라는 내용을 남기기도 했다.

이 사건에 비해 '육탄10용사'는 가벼워 보일 수 있지만,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는 또 다른 무거운 주제이기도 하다.

김익렬은 자신이 경험한 제주 4.3사건처럼 송악산 전투를 지근거리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내부 사정과 배경에 대해서 소상히 알 수 있는 객관적 위치에 있었다. 


그런 그가 15년이 지난 동월 동일인 1964년 5월 4일, 전 국방부장관인 박병권 장군의 자택에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전신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와 대담했다면 그 자체만으로 진실을 밝히기 위한 김익렬 장군의 숨겨진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증언록에 대하여 국방부 민원으로 2011년 삭제되었다는 주장의 글이 지만원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 게시되었다.

이 내용은 지만원이 연재한 뉴스타운 기사에 '1964년 김익렬이 육탄 10용사에 대해 거짓말을 하여 2011년에야 뻥이었음이 들통났다'라고 작성되었다. 

그는 장군의 제주 4.3사건 회고록 역시 필체를 빌려 창작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국방부에서 발간한 증언록이기에 녹음이나 수기 원고와 같은 기본 자료 없이 증언록에 포함될 가능성은 없다. 

예나 지금이나 큰 논란이 되기에 4.3제주 사건의 회고록처럼 김익렬이 차후 공개해 달라는 당부를 남겼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 모든 문제 해결을 위해 국방부는 증언록 기본 자료와 증언록에서 언급된 북한 방송을 녹음한 자료, 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지금이라도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

증언록에서 언급된 '박모 소위는 박OO 소위의 행적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국방일보 기사에서 '사단 시설장교 박OO 소위의 고안으로 81㎜ 박격포탄과 폭약을 장치해 이를 들고 육탄 공격을 감행하는 작전을 세웠다'라고 되어있는데 시설장교는 공병소대장의 직책이기도 하다. 

증언록 편집자는 '박모 소위는 대령으로 승진하여 예편하였는데 이름이 불명하다.'라는 주석을 남겼는데 인물을 특정했지만 밝히지 않았을 수 있다.

▶▶참고문헌 및 인용자료 : 기자가 본 역사현장(한국편집기자협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한국야당사(이기택 지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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