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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정치사(50)> 1949년 소련·중국에 남침 허락나선 김일성...성시백 사건

성시백, 김일성 직계로 북한 공작 영웅 1호 체포된 뒤 6.25 발발한뒤 처형....평양에 가묘
무역상, 이발소 운영등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 총책임자로 후원금지급 국회내 좌익 침투시도
오제도 검사통해 성시백.김명룡등 112명 대거 검거
정치권 인사들을 비롯 관공서. 교언.농민등 대거 포섭 시도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선거와 정치는 이제 참된 백성(民)이 군주(主)의 시대, 민의의 시대를 만든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1945년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을 함께 했다. <본지>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 <편집자 주>

1950년 수사비로 1000천만이라는 거금을 들여 해결한 대사건이 있었다.

그해 '5·30  제2대 국회의원' 등에서 합법을 가장하여 남한의 국회를 비롯  북한의 정치적 침투교두보를 확보하려던 이른바 '성시백 간첩사건(成始伯間諜事件)이다.

이는 곧 발발할 6.25한국동란을 앞두고 이어진 사건중의 대사건이었다.

그해는 6.25 동란으로 한반도내 좌.우익 전쟁으로 집약되지만, 그중에 김약수 국회부의장등이 연루된 '국회 프락치사건','이주하.김삼룡사건','한국 마타하리 김수임사건'등에 이어 터진 것이었다.

더구나 개성 송악산등 서부전선과, 중부전선, 강원도 양구등 3.8 도상에서 남북충돌이 잦았던 만큼 동족 상잔의 전조증이 있었다.

불행하게 미국 애치슨 라인이 그해 1월 한반도를 제외하고 공표되는 바람에 이미 소련식 군(軍) 조직과, 전투훈련, 전술을 익히고, 소련의 첨단무기를 들여온 북한의 남침야욕이 극심했던 터다.

◇…소련의 지원과 북조선의 남침야욕의 준비

잇달고 있는 북한의 남한내 침투와 충돌, 암살, 소요등 남침야욕은 해방과 함께 준비됐다.

그런 뒤 때를 기다려 6.25 동란이 발발하기까지 철저히 계획됐다.
 
유엔및 국내 기록들을 통해 살펴본 시대적 배경은 이를 입증한다.

1945년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함께 한국인은 광복을 맞아, 한반도는 새 나라를 세울 희망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신탁통치라는 강대국만의 합의로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진주했다.

제2차세계대전기에 협조적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전승노획물에 욕심을 내며 대립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정치가들 사이에도 이념적 대립이 생겼다.
 
평양에 진주한 소련은 먼저 북한에서 토지개혁, 지주와 자산가의 숙청, 중요산업국유화 등을 추진했다. 

연합국이 통일 국가를 수립할 방안으로 마련한 미소공동위원회는 신탁통치 문제 등을 둘러싼 좌우의 대립 끝에 결렬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두봉, 허헌등의 중심으로 결성한 공산당 주도 아래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북조선인민위원회 등을 거쳐 정부 수립이 추진되었다.

남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주도로 유엔 결의에 따라 이승만등 우익진영을 중심으로 5.10 총선을 통해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이 추진되었다.
 
한반도는 결국 1948년 8월과 9월 한반도에는 두 개의 체제가 들어섰다.


하나는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쪽의 공산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

이는 단일민족이  무려 1000여년 넘게 통일국가를 유지해 왔던 겨레에게 이는 극히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두 체제가 한반도에서 충돌과 증오없이 사이좋게 양립하기는 어려웠다.
 
그무렵, 무력을 써서라도 남한을 공산화하길 원한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무력 침공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북한은 일제로부터 거대한 중공업 지대를 물려받은 데다 일찌감치 공산당이라는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여기에다, 소련이 북한의 남한 공산화계획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그렇다면  남한 이승만 정부는 어떤 가.

정부가 수립되기 까지 새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것만도 벅차서, 그 북진통일 주장은 헛 구호에 그쳤다.

이런 배경을 봐서도 전쟁을 벌인다면 그것은 북한일 것이었다.
 
김일성은 1948년 9월 북한정권 수립 직후부터 무력 남침을 꾀하였다.

◇…김일성의 1949년 ‘국토완정’(國土完整)주장...무력 남침 시사

김일성은 1949년 신년사에서 ‘국토완정’(國土完整)이라는 용어를 무려 13회나 사용했다.

그의 국토완정주장은 무력 남침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승만등 우리정부에서는 김일성의 이  ‘국토완정’주장과 북한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했다.

김일성은 '국토완정'주장에 이어 1949년 3월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 스탈린에게 무력 남침 계획을 설명하고 지원여부를 타진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아직 북한의 전력이 압도적이지 않다고 하여, 남침 계획을 만류하고 더 철저한 준비를 독려하였다.


스탈린은 '소련의 입장은 미국 처럼 원자탄을 보유하지 않은 상황이다. 네(김일성)가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면 미국의 원자탄을 사용할지 모른다. 그러니  49년 3월은 절대 안 된다. 네가 전쟁 일으키면 미국과 소련 전쟁이 되는데 우리는 아직 미국이랑 전쟁을 할 상황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런 스탈린은 북한에 소총 1만5000 정, 각종 포 139 문, T-34전차 87대, 항공기 94대 등 무기를 지원하였다.

스탈린은 덧붙여 김일성에게 남침 전쟁 문제를 중국의 마오쩌둥과도 협의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1949년 4월 말에 북한 대표가 중국을 방문하여 스탈린과의 협의 결과를 알렸다.

북한 대표들을 접견한  마오쩌둥 역시 잠시 전쟁을 유보할 것을 권하고, 남침 준비차 중국인민해방군 내 조선인 2개 사단을 넘겨주었다.
 
북한.소련.중국의 남침계획을 놓고 긴박하게 돌아갔다.

그런상황에서 1949년 6월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자 김일성은 8월 재차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락받고자 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여전히 전면전은 시기상조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일성은 강원도 삼척 등 일부 지역만이라도 점령하고 싶다고 청했다.

스탈린은 북한의 무력 남침보다는 남한 내 빨치산의 무장봉기에 의해 공산화를 꾀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남로당은 9월에 남한 각 도시의 경찰서와 관공서, 군사령부에 대한 공격과 같은 전면 공세에 나섰다.

당시 개성, 옹진 등 38선 주변 지역에서는 빈번히 남북간 전투가 벌어졌다.

우발적인 소규모 전투가 대규모 전면전으로 커질 수도 있었으므로, 스탈린은 1949년 10월 김일성에게 38선 전투를 하지 말라고 지령을 내렸다.

이후 38선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간첩'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6.25전 2400명 남파

당시 순진한 국민들에게 '프락치', '간첩','스파이'란 용어가 난무한 것이 이 무렵이다. 

사전적 의미로 '적국·가상적국·적대집단 등에 들어가 몰래 또는 공인되지 않은 방법으로 정보를 수집하거나 전복활동 등을 하는 자'를 이른다.

김약수 등 국회 '프락치' 사건, '여간첩 김수임'사건, '성시백 간첩' 사건 등이 당시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다.

한민족 문화백과사전 등 문헌들에서 간첩활동이 적대국가와 집단의 능력, 또는 그 의도와 약점을 때에 맞추어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적의 기습에 대한 방어뿐만 아니라 선제공격에도 유리한 조건을 준다. 

상대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간첩활동이다.

이는 자기 나라의 안전과 발전에 영향을 주는 다른 나라의 비밀을 입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필요성과 이러한 비밀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며 이를 은폐하고 있다는 데에서 주체측은 그 행위의 정당성을 찾고 있다.

그러나 간첩은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조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북한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로 묘사되는 것은 바로 미제의 간첩이었는데, 심지어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 지도자였던 박헌영마저 미제의 간첩 혐의로 처형당하기도 하였다. 

남한지역에서도 숱한 간첩사건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조작되거나 이용되었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진보당의 조봉암 간첩사건이 불거졌고 박정희 정권 당시 간첩사건으로 발표된 사건은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간첩은 실제로 국가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때로는 정권 안보나 정치적 목적으로 과장, 조작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즉 내부 감시망을 강화하고 통제하는데 간첩은 매우 적절한 수단이 되었다. 

국민 대다수를 잠재적 간첩으로 상정함으로써 국가권력은 사회통제의 유력한 수단을 확보한 셈이었다. 특히 반공이데올로기와 결합된 간첩은 정치적 반대와 사회적 저항운동을 봉쇄하는 효율적 장치로 이용되었다.

간첩활동이 학문적으로 체계화된 것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완성된 '손자병법' 제13편 용간(用間)에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간자(間者: 간첩)의 종류와 활용원리가 서술되어 있으며, 이것이 세계 최초의 정보수집 및 공작원리로 인정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삼국시대부터 정보활동으로 인정될 수 있는 역사적 사례가 있다. 

고구려 태무신왕 때 낙랑을 침범하기 위한 왕자 호동(好童)의 자명고 파괴작전, 신라 눌지왕 때에 일본에 억류된 왕자 구출을 위한 박제상(朴堤上)의 파견, 고구려 영양왕 때 살수대첩을 이끈 을지문덕의 적정탐지 등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정보활동으로 인정될 수 있는 사실들이 있었으나 규모와 내용면에서 미미하여 특기할만한 것이 못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정보활동의 조직과 규모, 그리고 기술면에서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보부상의 활동을 들 수 있다.

물론 보부상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국가기관이 이들을 정보활동에 활용한 것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부터이다.

보부상은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시장을 지배하고 국가 유사시에는 양곡과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관계로, 자연 세상물정과 개개인의 비밀도 소상히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정보를 수집하고 전파시키며 사발통문(沙鉢通文: 누가 주모자인지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맨처음이 없이 관계자의 이름을 사발 모양으로 삥 돌려가며 적은 통문) 등의 통신임무까지도 수행하게 되었다. 

이들은 신의와 충성을 바탕으로 한 정신적 결합과 영리적 실권, 그리고 조직확장으로 세력화되어 임진왜란·정유재란, 그리고 병자호란 때에 관군을 돕는 한편, 정탐과 연락을 맡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광복군과 미국 전략첩보국(OSS)과의 연합작전 등이 대표적 사례였다. 

그러나 간첩활동이 본격화된 것은 해방 이후로, 이는 남북한이 분단된 시대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1948년 정부 수립 이전에도 남북한 간에는 치열한 정보·첩보활동이 이루어졌다. 

남한 지역에서 유명했던 조직으로는 백의사가 있었다. 

중국 국민당 정권의 남의사 출신으로 후일 일본의 밀정으로 전향한 염동진이 만든 백의사는 대북 공작과 테러는 물론 남한 지역의 테러와도 연관되었다.

즉 1946년 김일성(金日成), 강양욱(康良煜), 김책(金策) 암살 미수사건을 비롯해 1947년 여운형, 장덕수 암살과 1949년 김구 암살에도 깊숙하게 개입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또한 정부수립 전에 성시백을 통한 정치공작 활동을 전개했는가 하면 1948년 초에는 강동정치학원(江東政治學院)을 설치하고, 한국전쟁 직전까지 2,400여 명의 공작원을 남파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정치공작 보다 군사 작전과 연계된 첩보활동이 대세를 이루었다. 남북 모두 군사정보를 확보하고 후방 교란 활동을 위해 대규모의 첩보 및 비정규전 부대를 운용하였다. 남한 지역에서는 각지에서 빨치산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켈로부대(KLO) 등이 북파되어 대북 첩보 및 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휴전이 성립한 이후에도 남북 간의 첩보활동, 정치공작, 무장게릴라 활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남한에서는 명칭과 조직이 바뀌어가면서 공작원들을 대거 북한지역에 침투시키는 첩보부대가 운용되었고 북한 또한 1968년 1·21사태를 주도한 124군 부대를 비롯해 특수 8군단 등 수많은 첩보 및 공작부대가 운용되었다.

1960년대 말을 기점으로 남북 간의 무장 게릴라 활동이 정점에 다달았으나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군사 공작원 파견 활동은 중지된 것으로 알려졌다.

휴전 이후 1972년까지 북파공작원으로 파견된 인원은 1만여 명에 달했으며 그 중 7,700여 명이 미귀환 실종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 성시백 간첩사건

성시백이라는 인물이 있다.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동에 본거를  활동했다.

그는 25세 때 중국 상해로 건너가 서안, 중경(中慶), 무안등을 떠돌아 다니다가 1945년 해방되자 1946년 12월 부산항을 통해 입국했다.

그는 서울에서 여러가지를 준비한 뒤 월북하여 김일성, 김두봉을 만나 5일간 밀의한 뒤 대남특수지령을 받아 1947년 5월 다시 서울에 잠입한 무명당 수괴였다.

서울에서 그는 자금을 획득하는 방법으로 1948년 남북교역이 끊길 때까지 무려 56차례에 걸쳐 명태와 카바이트등 1억원이 넘는 물자를 반입하여 충당했다.

이어 1949년 6월 중국 청도에 주둔한 북로당 직영 조선상사로부터 미화 6100달러를 반입해 그해 12월 밀수선 금비라호(金比羅號)로 당시 중공과 밀무역을 하여 미화 2백달러와 수백만원어치의 비단을 들여왔다.

그는 1950년 3월에 다시 미화 1만2000천달러를 들여와 총액 3만8500달러를 공작비로 썼다.

그의 막대한 공작비는 3년간 상당히 광범위하게 활동을 확대했다.

합법과 비합법의 양면작전으로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하던 남북의 노동당은  소위 유격전을 강화했다.


그는 대한민국 각 기관에 프락치를 교묘히 심어 여러가지 정보. 첩보를 수집하여 무력투쟁의 계획을 수집해 자료로 삼은 것이다.

그들의 원칙밑에는  김일성은 직접 성시백으로 하여금 정치, 경제,문화등 각분야에 걸쳐 대한민국 각 기관의 기밀을 수집하여 서울시내에 장치한 발전 송수신기로써 해주.평양에 첩보를 제공하게 하였던 것이다.

경제협조처의 경제 원조내용과 그 사업 계획서를 세밀히 탐지하여 이에 근거하여 수립된 정책으로서 부단히 미국의 대한 경제원조를 저해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대외 선전도구로 언론사업에도 손을 댔다.

'조선 중앙일보'와 '우리신문'등의 언론기관을 경영하여 합법적으로 그들의 주의 주장을 암암리에 선전했다.
 
뿐만 아니었다.

중요한 국군의 기밀을 탐지하여 북한군의 남침및 유격작전에 이바지 하게 했다.

유엔 한국위원회및 재경 외국공관에 프락치를 침입시켜 부식시키러나 또한 탐색한 정보를 근거로 대한민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킨다는 기도밑에 암약했다.

기타관공서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기밀사항을 수집하여, 교묘히 관공서 내부의 혼란과  관민사이를  유리시킬 온갖 책동을 했다.

성시백은 이처럼 1847년 6월부터 계속하여 활동해, 1948년에 실시된 5.10 총선거에 대해  합법.비합법의 양면공세를 취하기로한 북로당 노선에 따라 그는 합법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5.10 총선이 확정된  1948년 4월부터 성시백은 위장된 합법적인 선거운동에 동참해 국회침투를 기도했다.

성시백은 국회침투를 달성하기 위해 첫째 당원으로 하여금 적극 입후보하게 하고 둘째는 5.10총선을 거부한 남북협상파를 포섭, 선거비용을 지급하여 입후보하게 했다.

특히 우익 민족주의자중에서  능히 포섭할수 있는 자까지 포섭해 출마하게 했다.

성시백에게는 이런 포섭 공작비는 충분하였다.

성시백은 야당인 민주국민당 소속 충남보령출신인 김승원(金升元)출마자에게 65만원을 지급했고, 남북협상파인 박건웅(朴健雄.서울용산을구). 장건상(張健相.부산병구).김성숙(金星淑.경기도 고양),김붕준(金朋濬.서울 성동 갑구), 윤기섭(尹琦燮.서울 서대문 2구), 조소앙(趙素昻. 서울 성북구), 원세훈(元世勳.서울 중구 갑구)등을 포섭대상자로 삼았다.

그러면서 김승원에게 1만4800달러를 맡겨 포섭공작을 하던 중에, 체포됐다.

◇…성시백의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 결성'

남한내 노동당(남로당)인  박헌영세력이 좌익을 좌지우지하는데 대해 성시백이 북로당과의 연계에 역할했다.

그는 북한의 ‘권위있는 선’을 대변하면서 남로당 내 반박헌영 세력과 북로당을 연결했다.

아울러 남한 내 우익 및 중간 정당·단체들, 미군정청·경찰·군부 등에까지 산하조직을 만들어 활동했다.

그런 성시백이 왜 검거 됐나.

오제도 (吳制道) 검사는 1949년부터 소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김일성 직접지령으로 막대한 자금과 함께 주요 각기관에 비밀 공작대원을 잠입시켜 매국적 행위를 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오 검사는 그간 부분적으로 일부 좌익이 적발되어 처단되오던 가운데 그핵심체가 성시백이 촉책인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라는 사실을 탐지했다.

이어 1949년 2월  쯤부터 내사에 착수한 오 검사는 그해 5월10일에 이르러 드디어 그의 근거지를 찾아냈다.

성시백의 비서격인 그 조직의 부책임자인 김명용(金明用)을 체포하는 동시에 문건 일부를 위히해 산하공무원들로부터 받은  각종 기관의 관련 서류, 이북과 통신연락으로 주고받은 무전보고한 암호문건 전부, 그리고 매일 같이 이북과 통신으로 보고한 무전기 2대, 공작비를 비롯 금괴 80돈등  많은 증거품을 압수했다.

이후 서울 지방경찰청은 5월 12일 이태희(李太熙)검사장, 장재갑(張載甲)차장검사, 김태선(金太善)치안국장,장영복(張永福) 치안국 사찰과장.최운하(崔雲霞)시경 부국장, 장도영(張都映)육본정보국장등 수뇌부와 오제도 검사등이 비밀 연석회의를 열어 수사방침을 결정하고 합동수사총지휘를 오검사가 맡기로 했다.

이들은 각 수사분과를 편성해 사찰경찰을 총동원했다.

오검사는 병원에서 김명용부부를 치료했다는 보고를 치안국 사찰과장 이한영 총경에게서 보고받고 병원으로 향했다.

이들은 단신하는 동시에 심문에 대한 답변을 일체 거부했다.


병고에 지친 김명용부부를 입원시켜 극진한 대우를 하여 대접했다.

담당한 홍만표 경감은  '죽으면 무엇하오, 어디까지나 살아야 되지 않소'라고 달랬다.

드디어 이들의 노력은 적중했다.

김명용 부인으로부터 성시백의 행방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1950년 5월15일 총잭인 성시백을 체포했고, 그가 조직한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란 어마어마한  조직을 캐낼수 있었다.

◇…이들의 충격적인 수법

당시 기록을 보면 성시백을 위시로 검거자만 모두 112명이었다.

직업으로 보면 당원 60명, 상업 8명, 교원 7명, 학생 4명,회사원3명, 농업 9명, 직공2명, 광업 1명, 의사 1명, 외국공관 직원 1명, 무직 7명이었다.

압수물품도 상당했다.

순금 80돈과 전치 100개, 무전기 2대, 보증수표 30만원, 권총 2정, 미화 1만4800달러, 승용자동차 1대, 가옥 15채, 선박 3척, 이발소 2개, 현금 60만원, 조직 문건 200쪽, 정보문건 900쪽, 저금 통장 2개등이다.

이들의 자금 소비 내용도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공작비 430달러, 아지트 구입비용 6000달러, 자동차 구입비용 83달러, 대인 공작비 800달러,이발소 경영비 600달러, 선박구입비 5000달러,  교환중 압수한 미화 3500달러, 국회의원 입후보 후원비 670달러 등 미화 총액 1만4800달러였다.

수사당국은 이들 압수품과 증거를 통해 총잭임자인 성시백의 남한 내 범죄활동내역과 수사경위 및 동조인물, 물적관계를 명백히하는 데 주력했다.

오제도 검사는 이를 무명당이라고 했다.

그는 이 사건을 종래의 사건과 다른, 좌익에서 볼수 없었던 새로운 전술이라고 규정했다.

당시 좌익의 원칙적인 조직을 본다면, 입당당원으로서 활동하는 게 통례였다.

그러나 성시백은 이 원칙의 예외로서 결코 당을 내세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떤 대상자에게도 입당을 권유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혀 당적이 없는 듯 하고 다만 그 목적을 수행하기위해서 대상자로 하여금 그야말로 자유스럽게 활동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하여 프락치로서 활동은 했지만, 자기 자신이 당원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그러한 범행을 하지 않았다는 피의자가 대다수 였다.

이를 볼때 성시백의 전술은 한 발 진보된  교묘한 방법으로서 추진된 것이라고 볼수 있다.

당적을 가졌다는 티끌만한 눈치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때를 따라, 장소에 따라, 무역업자로, 이발소 경영주로,또는 모리배로 전전하며 변장하는 교묘한 수법을 썼다.

수사과정에서 부책임자인 김명용도 훗날 체포됐다.

6.25 동란 중 9.18 수복직후  그는 체포됐다.

김명용은 체포되자 마자 오제도 검사의 면담을 요구했다.

오 검사는 '성시백 사건 때 그렇게 함구불언하며 공산 치하에서 날 뛰었던 당신이 왜 나를 찾았느냐'고 물었다.

김명용은 "오 검사님, 참 할말이 많습니다. 아시다 시피 그 때만해도 난 얼마나 충성했습니까? 성시백이 잡힌 것은 문헌이 압수되는 바람에 독안에 든 쥐가 아닙니까"

이어 "그런데 오 검사님, 당은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날 쫒아 내버리더군요. 생명과 재산을 바쳐가며, 소처럼 일했는데 불구하고 헌신짝처럼 내버렸어요. 그러니 낸들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내가 그들에게 복수를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단물, 쓴 물 다 빨아먹고 실컷 이용하다가 인정도 의리도 없이 가래침을 밷아 버리듯이 그들은 인면수심입니다. 어디 참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복수를 하지 않고는 말입니다"

김명룡은 전향해 6.25 동란기간과 전후에 공산주의 타도에 앞장서기도 했다.

성시백은 김일성 마누라 김정숙이 손수 차려준 밥상을 받고, 김일성이 '공화국 영웅1호' 칭호를 붙여준 거물위장간첩이다 

그의 가명은 '정향명'이었고, 1946년 11월 서울의 한 신문에 "20년 동안 독립운동한 정향명 선생 일행 서울 착"이라는 기사가 났을 정도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원으로 국민당 치하에서 공작활동을 하던 성시백을 끌여 들였고, 그의 역할은 남조선공산당(박헌영외) 감시와 대남공작이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 및 군조직과 정부조직에 비밀공작원 잠입시켜 정보 탈취하는 등, 6.25전까지 대부분의 좌익시국사건에 직,간접적인 공작에 관여하였습니다.

1950년 5월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 받았고, 6.25발발 후 6월 27일에 처형 당했다.

평양신미리 애국열사릉에 가묘가 있다고 전해진다.
▶▶참고자료 문헌 = 기자가 본 역사현장(한국편집기자협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참고문헌 및 인용자료 :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한국야당사(이기택지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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