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이후의 각종 사회 혼란과 조선정부의 부패로 민심이 동요하던 가운데 1894년 2월 15일 탐학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군의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집단으로 무장 시위를 벌였다. 또한 한산, 서천지역에서도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우리고장 동학 농민전쟁의 진압과 그 후의 동학잔당의 보복 등에 대하여 2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동학 농민혁명(東學 農民革命), 동학 혁명(東學 革命), 동학 운동(東學 運動), 동학 농민운동(東學 農民運動) 또는 동학 농민전쟁(東學 農民戰爭)으로 불리기 시작한 동학 난(東學 亂)은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백성의 무장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3차)로 나뉜다. 초기에는 동학난, 동비의 난(亂)으로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 농민혁명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 농민운동(甲午 農民運動), 갑오 농민전쟁(甲午 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농민운동 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 고부군 동학 농민 봉기 배경 1892년 전봉준이 살던 고부군에 조병갑(趙秉甲 1844∽1912)이 고부군수로 영전하여 왔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이 형별을 가하였다.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한 조병갑은 농민들을 괴롭혔다. 전라도 고부는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가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한 다음 물 값을 받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여러 죄명을 씌어 벌금을 받아 냈고, 태인군수를 지낸 아버지 조규순(趙奎淳)의 비석을 만든다는 핑계로 돈을 걷기도 하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 고부군수 조병갑의 선정비 또는 신도비를 세우는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임지인 고부군 군민들에게 세금 액수를 인상하여 거둬들였다. 또 주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씌워 2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했다.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이자 당시 훈장이던 전창혁(全彰赫)은 농민들의 요청에 따라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로 인해 심하게 매를 맞고는 귀가한 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었다. 이에 분격한 농민들은 훈장인 전봉준을 선두로 1893년(고종 30) 음력 12월과 이듬해 음력 1월, 2회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체포 또는 축출되었다. 이후 농민의 일부가 동학교도들과 함께 동학 농민 봉기가 시작되었다. 2. 봉기 창의와 사발통문 살포 첫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새벽 1천여 명의 농민군은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삼아 말목장터에 집결하였다. 마침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농민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사발통문의 내용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주 감영까지 함락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농민군은 가장 먼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한 후 그동안 억울하게 빼앗겼던 세곡들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3. 동학도 남접과 북접 갈등 동학 활동에서는 북접과 남접의 내부 갈등이 격심하였다. 북접의 지도자가 최시형(崔時亨)이었고, 남접의 지도자는 전봉준(全琫準)으로 북접의 최시형은 남접을 경계하면서 시간을 끌었고 심지어 최시형은 전북 삼례에 모여 있는 남접군을 토벌하라는 ‘고절문’을 써 붙이기도 하였다. 또한 최시형은 충주에 주둔한 일본군 ‘벌창소’에 남접을 토벌해 달라는 건의서를 두 번이나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남접과 북접의 갈등으로 인하여 서천군 전역에 대한 급진적인 동학 농민 봉기는 일어나지 않고 한산, 서천 동학 농민봉기가 지연되어 조직을 규합하는데 10개월 정도가 지연되었다. 특히 비인군 지역은 북접 최시형을 따르는 종천 도만리 도집강(都執綱) 조영구(趙英九)와 유회군(儒會軍)을 조직한 유회장(儒會長) 종천 지석리 윤자혁(尹滋爀)과 함께 서천읍성의 수비와 비인읍성(庇仁邑城)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하였다. “남접의 무리는 망령되어 척화라 일컫고 무지한 교도들으리 선동하여---생략—우리 북접을 끼고 봉기하려 했으나—중략— 북접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남접이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우리 북접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장차 우리는 남접을 성토하려고 합니다.”라고 【시천교역서 626쪽】에서 밝히고 있다. 이렇듯 서천과 비인지역의 도집강 조영구는 북접의 교단 지시를 적극적으로 따른 것이다. 4. 한산·서천지역 동학 농민 봉기 한산·서천지역 동학 농민 봉기는 전북지역 고부 동학농민 봉기가 일어났을 때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한산군은 교통과 경제적 활동은 금강을 끼고 전북지역과의 교통은 3개의 금강에 나루(신성, 죽산, 와초)가 운영되었다. 전북지역과 왕래하면서 인적교류가 이루어져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 동학의 영향을 끼쳤다. 당시 한산지역의 동학 농민 봉기에 대하여 한산면 야인리에 거주하면서 1894년 3월부터 12월까지 동학 농민봉기 활동 내용을 최덕기(崔德基 1874〜1929) 일기인 갑오기사【甲午記事】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산지역의 동학 농민봉기는 독자적으로 봉기한 전쟁보다는 봉기 이전에 조직된 동학 접주들이 전북지역 함열(咸悅), 웅포(熊浦) 동학도와 부여의 임천, 양화지역의 수백의 동학도들의 지원을 받아 지역의 농민들을 동학에 가입시키고 세력을 확장한 후 1894년 11월 12일 한산읍성(韓山邑城)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당시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이 이끄는 토벌 별군관(別軍官) 유석용(柳錫用)의 첩보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5. 전북지역 동학농민군 한산 신성나루 건너와 갑오기사에 따르면 전북지역 동학농민군은 웅포나루에서 한산면 신성리의 나루를 이용하여 건너왔다. 한산군과 군계인 부여군 양화면 수원리 윤동(允洞)의 동학 접주 김시형(金時亨)의 접주를 중심으로 3월부터 11월까지 야인, 원산, 나교, 마산요곡 등에서 동학 입도 포교 활동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갔다. 특히 지역을 순회하면서 강압적으로 위협을 가하며 동학 입도에 가입을 요구하고, 물자와 재물을 약탈하며 동학에 가담하지 않는 자는 폭행과 납치는 물론 살해까지 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보면 한산지역의 접주와 동학도들은 전북지역 남접 동학의 영향을 받아 조직된 동학도였다. 6. 한산·서천지역의 동학 접주와 활동 인물 한산군지역의 접주는 김약선(金若善), 한산면 호암리 전한규(田漢圭), 김태윤(金太雲), 김희만(金熙萬-최덕기 일기에 允洞접주), 지우범(池右凡), 마산면 요곡리 대접주 이종필(李鍾弼) 등이 있었고, 서천군은 추용성(秋鏞聲), 형제 오경옥(吳敬玉), 오명삼(吳明三)이 있었다.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의 11월 중 한산군수의 보고서를 보면, 형제 오씨(吳氏)는 서천에서 모인 동학군으로 한산경내를 침입하여 우마와 전곡을 약탈하였으나, 수성장이 병사를 이끌고 협공하여 물리치고 일부는 생포하였다고 한다. 또한 12월 11일에는 최기현(崔寄賢)이 운량관(運糧官)을 자처하면서 세곡(稅穀)을 농민들에게 분할 징수하다가 체포되었는데, 농민군에게 살해당한 아전 나종인(羅鍾寅)의 아들에게 보복 차원에서 살해되었다. 비인군은 최재홍(崔載洪)이 있었다, 더 많은 지역별 접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문헌 자료상으로는 남아 있지 않아 확인되지 않는다. 특히 부여군 지역은 양화면 수원리 윤동(允洞) 김시형(金時亨)이 접주로 확인되고 있다. 1894년 11월 12일 한산읍성(韓山邑城)을 점령할 때 동학농민군을 인도하여 안내뿐만 아니라 관청에 불을 지를 때 앞장을 섰던 인물은 최득용(崔得用)이 있었다. 1894년 12월 8일 동학농민군의 진압군을 이끄는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과 진참모관 권종석(權鍾奭)과 별군관 유석용(柳錫用)의 보고서에, ‘참모관과 별군관은 선봉본진(先鋒本陣)으로 복귀하려고 서천(舒川) 송동(松洞-현 신송리)지역에서 길을 나누어 떠나가면서 잔당이 이따금 길을 막고 있으므로, 서산군수 성하용과 상의하고 병정 20명을 나누어 거느리고 오후 5∽7시쯤 한산읍(韓山邑)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유숙하고 읍촌(邑村)의 백성을 불러 모아서 일일이 효칙(曉飭-타일음)하고 위무하였습니다. 다음날 3일 부대 진(陣)을 옮겨 금강나루를 건너려고 한산 죽산진(竹山津-현 용산과 화양죽산 경계포구)에 이르렀는데, 한산의 백성 수백 명이 함열(咸悅), 웅포(熊浦)의 동학도가 와서 한산읍성(韓山邑城)을 함락시키고 읍촌(邑村)을 불태운즉슨 부득불 이 경군(京軍)의 뒤를 따라가서 그 곡절을 알아야겠다고 앞을 다투어 배를 타려고 하기에 일일이 금지 시켜 나루를 건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어 웅포(熊浦)의 앞 강에 이르렀더니 웅포의 백성들이 이 배가 정박한 것을 엿보고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피하였습니다. 그래서 곧 나룻가에 이러러 정박하고 여러 백성을 불러 효유하여 안도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뒤따르던 한산의 보부상과 웅포의 백성들이 협력하여 한산읍성에서 불 놓을 때 앞에서 인도하여 변란을 일으킨 최득용(崔得用)을 잡아들여 조사해서 정확 사실을 확인 다음 현장에서 처치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당시의 관군과 함께 읍성을 지킨 조직은 홍산의 유회장(儒會長) 최학래(崔鶴來)가 이끄는 보부상(褓負商)조직과 향교유생인 지식인들이 조직한 유회군(儒會軍)이 읍성을 방어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선 조직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지역 어르신들의 국외 선진문화 탐방 지원사업비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어르신들의 국외 선진문화 탐방 관련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서천군의회가 이번에는 해당 사업 예산을 거의 절반가량 삭감해 일부 지역 시민단체, 군민까지 반발하는 등 지역사회에 파란이 일고 있다. 군의회에는 지난 14일 군 집행부가 승인을 요구한 지역 내 사회적 약자인 어르신 90명을 선발해 선진지 견학을 보내는 ‘국외 선진문화 탐방’ 지원사업비 5,700만 원 예산안 중 2,700만 원을 삭감 의결했다. 결국, 절반가량이 삭감돼 해외문화탐방 지원비는 3,000만 원으로 결정이 났다. 이를 지켜본 지역 일부 시민단체 등 군민은 말도 안 되는 군의회의 횡포라며 반발하는 한편 삭감된 해외문화탐방 지원사업비를 마련하자는 성금 운동까지 대두되었다. 지역의 한 시민단체는 “해외 선진문화 탐방 대상자 90명 중 50명만 보내라는 것인지. 90명이 일본에 가서 식사하지 말고 굶으면서 여행하라는 것”이라며 비판하면서 “평생을 국가경제발전에 허리 한번 제대로 펴보시지 못하시고 살아오신 어르신분들께 살아생전 외국 여행 한번 시켜드리겠다는 정책이 도대체 뭐가 포퓰리즘 행정인지 묻고 싶다”라고 일갈했다. 또 한 군민은 군청 자유게시판을 통해 “서로 돕고, 소통하고, 어르신을 존경하고, 아이들을 걱정해도 발전에 더딘 서천군을 군민이 정성을 다해 고향을 지키려 힘쓰는데 도대체 군의회는 군민에게 무엇을 안겨주고 있는지 실망감, 회의감이 든다”라며 “어르신들 효 선진지 견학 성금 모금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겠다”라고 밝혔다. 반면 서천군노인회 측은 이를 정중히 사양하고 나섰다. 노인회 측은 어르신들의 국외 선진문화 탐방 지원사업비가 당초 사업비에서 절반가량 삭감돼 아쉬움이 남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경제 사정 속에 사는 군민의 성금으로 이를 충당한다는 것은 도리상 더더욱 아닌 것 같다고 전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보령·서천/사진) 의원은 항소기록 접수의 통지를 받은 날부터 1개월(최대 2개월) 이내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지 아니하면 각하 결정하도록 하는 민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고 27일 밝혔다. 형사소송법에는 항소이유서 제도가 있으나, 현행 민사소송법에는 항소이유서 제도가 없어 1심 판결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다툴 의사가 없음에도 판결 확정을 지연시킬 의도로 항소를 제기하는 것을 예방할 수단이 없는 현실이다. 특히, 민사 항소심에서 소송대리인 교체를 이유로 준비서면 제출 없이 변론기일 변경 신청을 하거나, 제1회 변론기일에 임박하여 항소이유를 기재한 준비서면을 제출하는 경우 등이 다수 발생하여 판결의 조속한 확정으로 권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피항소인 측에서 항소인 측의 고의 소송 지연에 대하여 항의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실제로 법원행정처에서 민사항소심 접수 시부터 첫 준비서면이 제출될 때까지의 평균 소요기간을 조사한 결과 2018년 102.6일 소요되던 기간이 2021년 136.6일까지 계속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또 민사항소심 접수 시부터 첫 기일까지 소요되는 기간도 2018년 138.4일에서 2021년 189.6일로 늘어나는 것으로 드러나 항소심에서의 늦은 준비서면 제출이 승소 당사자의 권리 구제를 지연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장 의원은 “민사 항소심 재판이 지연될 경우, 국민의 헌법상 권리 중 하나인 신속한 권리 실현에 장애가 된다는 지적이 있는 만큼, 민사소송법을 개정하여 형사소송과 마찬가지로 민사소송에 있어서도 법정 기간 내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하도록 함으로써 남항소를 방지하고,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지 않는 등 실질적으로 다툴 의사가 없는 사건들이 조기에 종결되도록 함으로써, 국민의 조속한 권리 실현에 이바지하고, 한정된 법원의 자원을 다툼이 있는 사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최선의 입법적 노력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서천군 서천읍 소재 서천중학교 34명 학생의 소소한 제안이지만, 이 제안들이 학생에게는 참여하는 민주주의 실현과 미래를 준비하는 지역사회의 나아갈 방향 등이 어우러져 지역 활성화는 물론 거대하고 멋진 미래도시를 만들어 가는 힘찬 걸음이자 도약이 될 것을 기대하며 이들의 제안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군 서천중학교(교장 김유집) 1학년 34명의 학생이 지난 3월부터 7월까지 ‘슬기로운 미디어 생활’ 수업을 통해 ‘서천군을 알리는 방안’을 제안했다. 학생들은 서천 출신의 옛 문화예술인을 소개하고 교류하는 문예의 전당을 구축하는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총 다섯 가지의 의견을 제안했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차박(車泊) 캠핑 제안하기 최시호·순백호 학생은 몇 년 사이에 갑자기 캠핑을 취미로 하는 흐름과 더불어, 차에서 캠핑하는 차박이 유행하기 시작했음에 주목했다. 이들은 서천의 경우, 그리 유명한 관광 도시도 아니며 도시의 특성과는 거리가 있음을 지적했다. 다만, 이는 사람이 북적이지 않는 명상 및 힐링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현재 서천의 홍보 영상 등을 보면 먹거리 혹은 문화 관광, 자연 휴양의 느낌을 주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차박 캠핑의 환경으로 적합함을 드러내고 있지 않음에 아쉬움을 표했다. 서천 관내의 차박 캠핑하기 좋은 장소를 선별하여 SNS에 홍보하는 것뿐 아닌 홍보 영상을 이를 위주로 제작한다면, 캠핑족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갈 것임을 발표했다. ◇예술·미디어 복합 공간 및 인적 자원 활용하기 이동원·이선우 학생은 미디어문화센터와 문화예술창작공간 등을 선셋재즈페스티벌 등을 활용, 상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들은 이를 확장해 예술인 및 인근 대학의 학과 혹은 동아리, 관내 청소년들의 장기적인 협력을 통해 상시 전시 프로그램, 지역 새 단장 프로그램 및 매년 이루어지는 예술 미디어 학술제 혹은 축제를 마련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특히 이를 통해 예술, 미디어계와 서천군의 청소년들 사이의 멘토-멘티 관계를 구축하여 인적 자원을 활용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지자체에 활력을 더하는 장기 프로젝트로 자리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레트로 감성의 디자인과 향수 자극하기 박예찬·이서진 학생은 시골스러움을 레트로함으로 생각했다. 장항도시탐험역의 철길과 곳곳에 남아있는 70~8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건물 구조와 간판 등에 착안해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을 서천군 전체로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장항읍은 개화기를 배경으로, 서천읍은 70~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식으로 구획 별로 시기의 특징을 담는 것도 좋을 것이란 의견을 덧붙였다. 특히 홍콩 등의 국가에서 트램을 발견하고, 선로를 활용하여 개화기 시대에 영감을 받은 트램을 제작하여 운행하는 것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들은 서천군이 레트로함을 정비한다면, 다양한 드라마 및 영화 촬영지로도 입소문을 탈 것을 예견했다. ◇전사의 도시 이미지 구축하기 노관규·이승환 학생은 서천의 건물들이 높지 않으며, 지붕 없는 옥상들이 꽤 많고, 건물 사이의 간격이 그리 좁지도 넓지도 않음에 집중했다. 이들은 안전장치 없이 주위 지형이나 건물, 사물을 이용하여 이동하는 곡예 활동이자 개인 훈련 활동인 ‘파쿠르(Parkour)’에 서천군이 적합할 수 있음을 말했다. 공터 등을 활용하여 파쿠르를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면, 각지에서 몰려올 것임을 발표하였다. 덧붙여 서천군에서 다양한 체육 행사가 빈번히 열리는 것을 활용하여, 체육인 혹은 전사의 이미지를 구축하기도 좋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문예의 전당 이미지 구축하기 김대황·함형준 학생은 서천 출신의 문화예술인을 내세워 문예의 전당을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서구적 기법과 동양적 사상을 결합해 시를 쓴 ‘신석초’(서천 출생), 고종황제 어전에서 판소리를 불러 통정대부가 된 ‘이동백’(비인 출생), 초야와 함께 그린 고사인물도 ‘금궤도’의 창작자 ‘조속’(문산 기거), 원나라에서까지 문명을 떨친 학자 이곡과 유교의 입장에서 역사적 소산인 불교를 이해 하려고 한 학자 이색(한산 본관)을 소개했다. 이를 통해 문학, 그림, 소리, 논술 등으로 네 분야를 나누어 전국 규모의 문예 한마당을 개최할 것을 발표했다. 또한 전국적으로 유명한 한산모시문화제 시기를 활용하여, 문화예술의 학문적, 사회적 확장을 제시했다. 이 수업을 기획한 강소산 선생은 “군민 혹은 서천중 학생으로서 직접 서천을 디자인하는 경험을 쌓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실제적 배움으로 연결될 것”이라며 “아이들이 서천다움을 유지하며 매력도를 높일 방안을 다양하게 제시, 이를 공공연히 알려 사회적 효능감을 높이는 기회를 얻고자 마련했다”라며 수업 운영 동기를 설명했다.
충남 서천군의회가 제2차 추경예산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서천군이 편성한 어르신 국외선진문화 탐방 예산을 약 절반 가량을 삭감한 것은 유감이다. 서천군이 어르신 국외 선진문화탐방사업은 그동안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어르신 세대에 대한 공경과 ‘효’의 정신을 후대에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업이라고 누차 강조했었지만, 그동안 군의회는 포퓰리즘 사업이라며 이 예산을 전액 삭감해 왔다. 하지만, 군의회의 김기웅 군수 포퓰리즘 사업이라는 주장은 정치적 변명에 불과하다. 서천군은 그동안 참전유공자 해외 전적지 순례 행사, 초등학생 국제 우호 도시 문화탐방, 중학생 나라 사랑 역사 탐방 해외캠프 등 명목으로 약 3억 2,000만 원의 예산을 지원한 전례가 있다. 지원 대상이 어린이와 청소년에서 어르신으로 변경되었을 뿐 큰 틀에서 보는 사업의 목적은 유사하다. 또한 서천군의회는 지난 6월 노인복지 증진 사례 발굴 및 장수문화 체험을 위한 노인 국내외 선진문화 탐방 사업을 지원할 수 있도록 서천군 노인복지에 관한 조례를 개정했으면서도 정작 예산은 반 토막을 낸 것은 정책추진의 일관성마저 잃은 졸속사감이며 의회 본연의 사명을 벗어난 의회의 독단으로밖에는 평가할 수 없다. 특히 이 예산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모 의원은 장난 섞인 표정과 음성으로 30%만 주지 뭐라며 조롱했다는 소리가 의회 밖에서 들리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이 예산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예결위원도 아닌 군의회 의장이 예산삭감을 좌지우지했다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닌 것 같다. 지난 군의회 행정사무감사특별위원회에서도 정회 시간을 이용하여 행감특별위원들을 모두 모이게 하여 큰소리로 위원들을 호통치는 사태가 일어 일부 위원이 반발한 사례도 있었다. 아무튼 군의회가 어르신 국외 선진문화탐방 사업 예산을 반 토막으로 칼질한 사건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초래하자 서천군의회는 어르신들의 안전을 고려하여 인원을 줄이고자 했다는 둥 변명 아닌 변명으로 군의회의 결정을 합리화하려 하고 있다. 서천군에서 추진하고자 하는 어르신 국외 선진문화탐방사업과 유사한 사업들이 타 지자체에서는 벌써 오래전부터 노인복지 차원에서 시행되고 있다. 또한 이 사업은 어르신에 대한 공경과 효 문화 증진을 위한 사업이라는 차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군의회가 집행부를 견제하고 집행부에서 승인 요청한 예산안을 심의 의결할 권한이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동안 서천군의회의 행보에 견주어 볼 때 이번 예산 칼질이 명분이 있었는지를 의아해 보인다.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집행부에 대한 딴지걸기 예산심의의 전형적인 전횡이라는 의혹의 눈길이 이는 이유는 그동안 군의회나 군의원들의 행실을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아무튼 이번 군의회의 어르신 국외 선진문화탐방사업 예산삭감과 관련하여 서천군 곳곳에서 서천군의회가 서천군의 효 문화에 상처를 냈다고 평가하며 어르신들의 국외 선진문화탐방 사업이 정상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삭감된 예산만큼 군민 성금이라도 걷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군민 성금 모금을 통하여 군의회가 군민의 뜻을 의정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독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이번 군의회의 독선적인 예산 칼질을 주도한 군의원들이나 이에 들러리를 서서 손을 든 군의원들에 대한 질책의 목소리도 높다. 일각에서는 버릇없는 망나니를 뜻하는 격앙된 표현으로 군의원들을 질타하고 나서기도 한다. 군의원을 잘못 뽑은 군민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가 군민 성금 모금 운동 전개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군의회의 권한은 군의원들의 고유권한이 아니다. 군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라는 점을 군의회가 망각하고 있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군의회의 결정은 군민의 의사에 반해서는 안 된다. 군의회 의장이 예결위에 들어가 의회의 결정을 좌지우지하고, 군의원들을 거수기로 전락시켜 끝내 군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내려 군민에게 실망감을 안겨준 이번 군의회 예산삭감 사태로 기초의회 무용론이 다시 거론되고 있어 유감이다.
[sbn뉴스=서천] 나종학 기자 = 충남 김경제 서천군의회 의장 의정활동에 문제점이 많다는 지적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게다가 부패방지법 위반에 대한 의혹으로 경찰에 고발되고 예산안 심의에서도 부적절한 행태를 보이는 등의 의정활동을 문제 삼아 지역의 시민단체가 주민소환을 추진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서천주민자치참여연대는 지난 15일 시민단체 게시판에 ‘김경제 군의원 주민소환 투표 청구 준비와 관련한 안내의 말씀’이라는 제목 아래 김 의장의 주민소환 추진을 예고했다. 이 시민단체는 게시판을 통해 “주민소환투표 청구 준비위원회 구성과 대표자 선임, 청구인 서명 등 법적 절차 이행을 위해 법률대리인을 선임해 현재 절차를 선거관리위원회와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주민소환투표는 투표의 성격상 투표율이 저조해 대한민국 역사상 주민소환투표율 33.33%를 넘기지 못해 개표하지 못했던 점과 모든 주민소환투표 비용을 서천군이 부담해야 하는 점을 고려, 내년 국회의원 선거일에 맞추어 병합(동시)투표가 이뤄질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라고 전했다. 앞서 이 단체는 김 의장이 민간보조금을 받는 사회단체에 자신 소유의 상가를 월 임차액 55만 원씩 받고 부동산임대차 계약을 체결하고, 월 임차액을 지속해서 받아온 행위 관련해 경찰에 고발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군의회 추경 예산안 심의에서도 부적절한 의정활동을 보여 빈축을 샀다. 지난 14일 군의회가 군 집행부의 추경 예산안을 심의하는 회의 석상에 김 의장이 끼어들어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결과를 종용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보자에 따르면 김 의장은 이날 추경 예산안 심의 회의장에 들어와 어르신 국외 선진문화탐방 지원사업비 편성 예산안의 절반가량을 권했다. 앞서 이 사업비 심의 과정에서 이강선 의원이 약 20분 정도 해당 부서장에게 사업비 타당성에 대해 질의했고 이어 김아진 의원이 예산 중 약 30%만 남겨놓기를 제안했지만, 이지혜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은 원안 처리를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군은 어르신 중 사회적 약자 90명을 선발, 3박 4일 일본 후쿠오카 등의 선진지 견학 프로그램을 기획, 경비는 1인당 약 79만 원(자부담 20%)이 소요되는 국외 문화탐방 지원비용 5,700만 원의 예산안을 편성, 의회에 승인을 요청한 바 있다.
누구든 고향을 떠올리면, 가슴이 애틋해질 것이다. 자랑스러운 애틋함인지, 안타까운 애틋함인지의 차이는 있을 테지만 말이다. 서천에서 나고 자라며 교사라는 꿈을 꾸고 이룰 수 있었다. 그런 나에게 있어, 서천이란 고향은 정서적 안정감의 토대이다. 서천의 교육 현장에 오기 직전까지도, 자랑스러운 애틋함이 지배적인 감정이었다. 서천의 교육 현장에 와, 나와 같이 서천이 고향인 아이들을 만나보니 안타까운 애틋함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서천을 과연 자랑스러운 고향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였다. 어떻게 하면 서천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서천에 터를 잡고 살고 싶은 마음을 선물할 수 있을까. 현재도 이 고민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과정에 있다. 다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임을 알기에 동료 지역민과 연대하기 위하여 부족하게나마 칼럼을 통해 고민을 나누고자 한다. 공간은 물리적인 실체를 의미한다면, 장소는 물리적인 실체를 넘어 정서가 반영된, 의미를 지니는 곳을 의미한다. 캐나다의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는 ‘장소와 장소 상실’이라는 저서를 통해 ‘장소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생활 세계이자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토대’임을 밝혔다. 그렇기에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자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임을 말했다. 현대 산업사회의 직격탄 속에서 장소는 잃어지고 있다. 하지만, 서천은 여전히 장소로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누구는 이를 시골의 정취라고 할 것이며, 또 누구는 여전히 발전되지 못했다고 평할 것이다. 필자는 이를 장소성을 지닐 수 있는 공간으로 파악했다. ‘자연경관’과 ‘서천을 서천답게 했던 것’(미곡창고, 장항선 등)들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면 어떨까. 자연과 서천다움을 유지하되, 아이들의 생각을 반영하여 물리적 공간에 정서를 한껏 투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1학기 자유학기제 수업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서천이란 공간에 매력을 느낄까’를 주제로 숱한 논의를 나누었다. 아이들이 생각하기에 매력적인 서천의 공간은 무엇인지, 서천다움을 살리면서도 현대인(정확히는 아이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공간을 창출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상상하고, 말하고, 글로 쓰기를 반복했다. 물론 상상이 실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지만, 이 과정 자체에 지역에 대한, 구체적으로 지역의 한 공간에 대한 학습적 경험과 그에 깃든 정서만으로도 장소화될 수 있을 것이라 낙관했다. 서천 출신의 교사가 서천의 공간에 대한 자신의 장소 경험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수 있을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이번에 서해신문에서 아이들의 서천 공간의 장소화하는 방식에 대한 기사를 게재한 덕분에 아이들의 서천이란 공간을 장소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경험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서천 지역민들은 분명, 다양한 공간을 장소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서천을 걱정하고, 여전히 서천에 발을 붙이고 삶을 영위하는 것 아니겠는가. 어떻게 하면 서천의 아이들이 단순한 공간이 아닌 장소로서 서천을 기억하게 될까. 고향을 생각하고, 자랑스러운 애틋함을 느낄 수 있게 될까. 서천의 공간들로 하여금 나는 얻은 것이 많아, 서천이라는 지역 자체가 내게는 장소화되었다. 얼굴을 알든 모르든 어른들께 인사하면 칭찬으로 화답받던 신부락 시장, 친구들과 짧은 보폭으로 몇 시간을 우왕좌왕 걸어 도착하여 나름의 뿌듯함을 느낀 송림욕장, 언니와 함께 배를 타고 군산을 오가며 독립심을 장착해가던 도선장, 주말 아침이면 가족과 함께 들러 깨죽을 먹으며 안락함을 느낀 닐다방! 벌써 9월의 중순이다. 가을의 초입이라고 말하기엔 여전히 날이 더워, 끝 여름이란 호칭을 붙이고 싶다. 끝 여름을 배웅하기에 이 서천이 얼마나 다정다감한가. 짠 내 나는 바다에서 뛰놀다 보면, 끈질기게 달라붙는 옷자락들과 그 사이로 소록 바람이 들어와 바다 향을 묻히는! 낮은 건물과 그 위로 차곡히 널어둔 빨래에 일몰의 노을로 색을 입히는! 환경에 대한 감상을 내뱉고는, 역시 서천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지길 소망한다. 또, 그 생각으로 하여금 서천의 삶을 영위하려 마음먹는 이들이 생겨나길 소망한다. 나의 고민과 감상, 소망은 이제 시작이다. 아직 만날 아이들이 많고, 어떤 깨달음을 줘야만 하는 사명이 있고, 무엇보다 서천을 잊히는 고향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1. 최고의 법은 무엇인가? 법이라고 모두가 똑같은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도 있고 덜 중요한 것도 있다. 이 말은 어떤 법은 지키고 어떤 법은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법에도 경중이 있다는 것이다. 범법자도 하나는 중범자로, 하나는 경범자로 취급된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법의 불공평성도 있다. 권세 있고 힘 있고 돈이 있으면 법을 뚫고 나가기도 하고 특별대접을 받으려고 하고 특별대접을 하기도 한다. 힘없고 약한 자들은 억누르고 무시하고 쉽게 체포도 하고 구속도 한다. 만민이 법 앞에는 평등해야 법의 질서가 서고 법치국가가 되는 것이다. 힘깨나 쓴다고 법을 초월하는 자들에게 따끔한 경고가 필요 할 때이다. 법 중에 최고의 법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섬기는 법이 최고의 법이고 여기에 금할 법이 없는 것이다. 나의 조국, 나의 민족, 내 가족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최고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법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약2:8) 2. 행동하는 지성(知性), 행동하는 양심(良心)을 가지라. 행동하는 지성, 양심은 이론이나 지식으로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이성이나 합리적인 방법에 따른 선별 의지를 전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이다. 행동하는 지성과 양심은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한다. 행동하는 양심이 없으면 그 양심은 화인 맞은 양심이요 죽은 양심이다. 죽었다는 것은 활동이 정지된 상태를 말한다. 행동하는 지성과 양심만이 능력이 역사한다. 죽은 지성 죽은 양심 죽은 신앙은 부패와 죄악이 관영할 따름이다. 요즈음 정치인이나 성직자나 권세 자 중에 행동하는 지성과 행동하는 양심가들이 많지 않다. 중범죄자와 도둑들이 많다. 내로남불이다. 자기 자신을 볼 줄 모른다. 상대방의 티는 보고 내 눈에 들어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중환자가 많다. (마7:3-4) 빨리 병원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한다. 조물주(造物主)가 주신 지성과 양심을 회복(回復)하는 길만이 살길이다. 나 자신과 가정, 지역사회, 그리고 국가를 위해서이다. 3. 혀를 바르게 사용(使用)하라 서양 격언에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속담도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고 하였다. 요즘의 국회의 대정부 질의나 답변을 보면 피파 망신 주기, 설전이 벌어진다. 국민과 시청자들은 짜증이 난다.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진정성 있는 질의·답변을 통해서 국민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정치인과 관료들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말의 실수가 없다면 그는 온전한 사람이고 완전한 사람이다. 성경 야고보 3장 2절은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수했으면 실수로 인정하고 사과(謝過)하는 미덕을 갖고 사과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사과하면 오히려 큰 죄인으로 정죄(定罪)하는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 영사해주고 그 인격이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무리 큰 배라도 키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인생에 있어서 혀는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지체이므로 혀를 바르게 사용하자.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의 언어는 매우 중요하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그 나라를 움직인다. 국회의원들의 말과 행동은 악한 법이든 선한 법이든 입법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민과 국가발전을 위해서 언행 심사를 바르게 해야 한다. 혀를 조장하고 잘 다스리는 수준 높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국민은 지켜보고 있다. 거짓말과 사기 치는 입술을 절제하라. 샘이 한 구멍에서 어찌 쓴물과 단물이 나오랴? (약3:11) 서로 중상모략하는 언쟁을 중지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혀의 사용 용어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 우리 모두 덕 있는 말, 긍정적인 말, 위로의 말을 사용합시다. 정직과 진실한 말로 믿음을 주고 신뢰를 회복합시다. 최고의 법(法)인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행동하는 지성과 양심으로 사회의 빛과 등불이 되고 혀를 바르게 사용하는 언행(言行) 심사를 통해 화목하고 화평한 지역과 이 나라 이 민족을 만들어 가는 데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봅시다.
지난 9월 5일, 서천 문예의전당에서 몽골국립예술단의 공연이 있었다. 공연의 제목이 특이하게도 ‘서천아리랑’이었다. 호기심에 내용을 살펴보니, 전통예술단 혼과 몽골국립예술단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만든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라 한다. 몽골과의 협연인데 어째서 ‘서천아리랑’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어쩌면 몽골 예술의 근본은 노마드(Nomad)에서 비롯되고 우리의 예술은 그 뿌리가 아리랑에 닿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방향은 다르지만 떠남이라는 공통점을 갖고있는 그 둘을 융합한 작품을 서천에서 첫선을 보이는 것이라면 ‘서천아리랑’이라는 이름이 썩 어울려 보인다. 절로 정감이 가고 입에 착 붙는다. 몽골국립예술단의 공연은 매우 흥미로웠다. 대초원의 창공을 날아가는 독수리를 연상시키는, ‘흐미’라 불리우는 독특한 발성법과 유목민족 특유의 활달한 춤사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마두금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악기들도 다채로웠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몇몇 악기는 현대적으로 상당히 개량된 것으로 보였고 합주에 필요한 좋은 음색을 갖고 있었다. 역시나 국가를 대표하는 예술단답게 격조 높은 무대였다. 이날 무대에는 또 하나의 보석이 숨어 있었다. 서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고 웅장한 연주로 ‘서천별곡’이라는 곡을 들려주었다. 권해경 지휘자가 작곡했다는 그 곡을 들으며 서천의 예술이 풍성해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서천의 예술가들이 저마다의 감성으로 서천을 표현하는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더 많은 서천아리랑과 서천별곡이 태어날수록, 더 많은 서천의 시와 노래와 그림과 춤이 태어날수록 서천은 누구나 살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고장이 되어갈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 서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밑그림을 그리고, 몽골국립예술단이 색칠을 했다면,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전통예술단 혼이었다. 그들이 날렵한 몸짓으로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몽골 초원에 봄이 오고 화사한 꽃들이 피어났다. 특히, 혼의 무용수가 들고 춤추는 공작선 부채와 몽골 무용수의 모자에 꽂혀있는 공작 깃털의 공통점을 발견하고는 그 예상치 못한 이어짐에 짜릿한 동질감을 느꼈다. 공작선과 공작모가 한 몸처럼 어우러져 마치 공작새가 춤추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서천과 몽골의 특별한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우연은 노력에 의해 필연이 된다. 서천의 공작부채와 몽골의 공작모자를 어떤 이는 우연의 일치로 여기겠지만 나는 필연이라 생각한다. 그 필연은 십 여년 전 한 기업가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몽골로 사업을 넓히면서 알게 된 몽골 예술인들을 서천의 예술인들과 연결시켜준 서천기업인협의회 장현기 회장이 아니었다면 서천과 몽골의 인연은 시작되지 않았고 이번 공연도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장현기 회장의 후원 아래 몽골국립예술단과 서천의 전통예술단 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2015년에 몽골에서 혼의 첫 공연이 성사된 이후 해마다 서로를 방문하며 공연을 이어왔다. 서천의 문화유산을 활용하기 위해 애쓰던 혼은 한산면에 전래되어온 공작선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드는 등의 노력으로 충남을 대표하는 무용단으로 성장했고, 몽골과의 협연도 결실을 거두어 ‘서천아리랑’이라는 작품에 이르게 되었다. 예술을 통해 문을 연 서천과 몽골의 인연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지난 7월에 김기웅 서천군수가 몽골을 방문해서 몽골정부와 우호증진협약을 맺었다. 이는 지금까지의 교류가 한 단계 더 성장하여 다방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몽골국립예술단도 서천을 교두보 삼아 한국에서의 입지를 넓히고 있다. 이번 방한에는 서천 뿐만 아니라 충남도청을 비롯해 부여, 청주, 아산, 대전, 계룡 등을 혼과 함께 순회하며 합동공연을 펼쳐 그들의 명성을 높였다. 기회는 노력하는 자에게 미래가 된다. 전국 228개 기초 자치단체 중에서도 인구 수로 172위인 작디 작은 서천이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의 15배가 넘는 나라를 상대로 이러한 인연을 이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0여 년간 몇몇 사람이 보이지 않게 기울여온 노력이 이제 조금씩 빛을 보고 있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그들을 돕고 우리가 힘을 더해준다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침 가을이다. 새삼 풍요롭고 아름다운 서천의 가을이다.
우리고장 화양면 활동리(숭문동)는 고령 신씨가 세거하면서 17세기 당대의 8문자가를 배출한 고장이다. 특히 숭문동은 조선의 대표적 3대 여류시인으로 신사임당, 임벽당 김씨,와 함께 명성 떨친 여류시인 부용당 신씨의 고향이다. 진택 신광하의 여동생 부용당 신씨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조선의 대표 3대 여류시인(女流詩人)을 말한다면 신사임당(申師任堂), 임벽당 김씨(林碧堂 金氏), 그리고 부용당 신씨(芙蓉堂 申氏 1732∽1791)를 말한다. 임벽당 김씨와 부용당 신씨는 서천이 낳은 여류시인이다. 비인 남당리 임벽당은 15세기, 신부용당은 17세기의 여류시인이다. 대표적 3대 여류시인 중 2명이 서천 인물이다. 부용당 신씨는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숭문동)에서 석북 신광수(申光洙 1712∽1775) 첨추공 부친 신호(申皓 1687∽1767)의 딸로 태어났다. 부용당 신씨의 가문은 큰오빠 석북 신광수(申光洙 1712∽1775)를 비롯하여, 기록 신광연(申光淵 1715∽1778), 진택 신광하(申光河 1729∽1796)의 오빠들은 당대 문장가로 널리 명성을 날렸다. 부용당 신씨도 오빠들처럼 여류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또한 후손들도 문장가를 낳아, 숭문동(崇文洞)에서 배출된 문장가들이 명성을 남겼다. 부용당 신씨는 석북 신광수의 이복동생이다. 부친 신호(申澔)와 모친 성산 이씨(星山 李氏)는 석북 신광수와 신광연을 낳았고,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둘째 부인으로 보령 청라 이천령(李千齡) 따님 전주 이씨(全州 李氏)와 결혼하여 신광하와 부용당 신씨를 낳았다. 부용당 신씨는 3명의 오빠로 하여금 수업을 받았기에 문학가문의 시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 석북 신광수 막내 여동생 문인이 되다. 조선시대에는 남성 사대부가 문학을 주도하고 있었다. 여성으로써 문인으로써 작품을 남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부용당 신씨 이전에는 허난설헌(許蘭雪軒), 신사임당(申師任堂), 우리 고장 비인 남당리 임벽당 김씨 등 몇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석북 신광수 4남매의 막내였던 부용당 신씨는 별호를 산효각(山曉閣)라고 하였다. 나이가 비슷한 조카들과 어울려 오빠들에게 시문을 배웠다. 그동안 부용당 신씨의 삶과 문학에 관한 연구가 없었다. 부용당 신씨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75년 석북 신광수 서거 200주년을 맞아 한국한문학연구회에서 간행한 ‘숭문연방집(崇文聯芳集)’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숭문연방집은 우리 고장 한산(韓山) 숭문동(숭문동-현 화양면 활동리)에 세거한 석북 신광수, 기록 신광연, 진택 신광하, 부용당 신씨의 문집을 모아 간행한 것으로 숭문연방집의 해제는 당시 1975년 한국한문학연구회 회장 이가원(李家源 1917∽2000) 선생이 해제를 썼다. 특히 진택집(震澤集)은 진택공의 종7대손 신완식(申完植)과 이가원 회장이 부족한 부분을 보완 필사본으로 영인발간 하였다. 조카 신석상(申奭相)이 ‘부용당집(芙蓉堂集)이라고 한 것이 여러 권이 있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부용당신씨는 많은 작품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나 소수만 남아있다. 2. 결혼 전 조카들과 함께 공부하다. 석북 신광수의 4남매는 숭문북동(숭문북동-현 화양면 대등리)로 새 집터를 마련하고 새집을 짓고 1750년 새해를 맞아 신년의 감회와 다짐을 하는 시(詩) 신제춘사(新第春詞)에 4남매와 아들딸들이 함께 새집에서 글공부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새집이 이미 새로 이루어졌고/새해가 새로 왔네./영화스러운 빛이 초목에 피어나고/물건들이 모두 절로 이루네./봄 술도 또 새로 익었으니/당(堂)에 올라 부모님께 헌수를 하네./형제와 누이들이 문장으로 서로 우애하고/아손(兒孫:자기 아들과 손자)들이 다시 열을 지어/모두 시와 글을 외우네./가다가 부로(父老:나이 많은 어른)들을 만나면/들 사람 모습이 조금도 꾸밈이 없네./관장(官長:군수)의 일은 말하지 않고/다만 농사일만 이야기 하네/풍년들어 의식이 족하고/구실 돈은 기한을 어기지 않으니/이 밖에 더 무엇을 바라리오./맑은 마음으로 스승을 삼으려 하네./【新舍旣新成。新年復新至。榮光發卉木。物物咸自遂。春酒亦新熟。上堂壽父母。兄弟及少妹。文章自相友。兒孫復成列。詩書誦在口。時遇近父老。野態無餙辭。不言官長事。但道桑麻時。豐年足衣食。租賦無愆期。此外何所求。淸心以爲師】 석북집 <신석초 역> 큰오빠 석북 신광수와 부용당 신씨는 이복(異腹: 어머니가 다른) 남매로 나이 차이가 20여 세나 되고, 부용당신씨 큰오빠 아들인 조카들과 나이가 비슷하였다. 부용당 신씨는 또래이자 나이 어린 조카들과 함께 벗처럼 자랐다. 부용당 신씨의 넷째 조카인 신석상(申奭相 1737∽1816)이 지은 ‘제고모윤부인문(祭姑母尹夫人文)’을 통해 부용당의 생전 모습을 알 수 있다. “숙질간으로 나이가 서로 같고 도(道)가 서로 같다면 숙질이면서 친구이니, 어찌 남녀 간이라 하여 차이가 있겠는가?--생략-- 소자의 형제 다섯 명은 고모와 나이가 들쑥날쑥 차이가 났지만, 위아래로 서로 돕고 함께 책을 배우고 글을 짓고 음식을 먹고 장난을 치며 함께 즐겼다. 그 후 부인은 나이가 더욱 들어가니, 배운 것을 버리고 거의 글자를 잊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부용당 신씨와 조카들과 어떠한 생활을 하였는지 알 수 있다. 석북 신광수는 직접 아들들을 가르쳤는데 아들 신석상은 고모와 함께 공부하고 글을 지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부용당 신씨도 함께 공부한 것으로 여류시인으로 작품을 남기는데 세 오빠의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한다. 3. 궁핍한 생활고로 친정 숭문동과 외가인 보령으로 이사 가다. 부용당 신씨는 1750년 19살 나이로 해남윤씨 공제 윤두서(尹斗緖)의 손자 윤운(尹惲)에게 시집을 갔다. 남편 윤운(尹惲)은 큰오빠 석북 신광수 처조카이기도 하다. 큰오빠 석북 신광수(申光洙)의 부인은 해남윤씨 공재 윤두서(尹斗緖)의 딸이다. 또한 신광수 부인은 친정에서는 올케가 되며, 시댁에서는 시고모가 된다. 부용당 신씨는 결혼 초에는 해남에서 살다가 친정인 숭문동으로 이사를 와서 당분간 살았다. 1759년에 보령 외가에 농토를 얻어 한산 숭문동을 떠나 부용당 신씨는 큰아들 윤규영(尹奎永)과 둘째 윤규응(尹奎應-초명:尹持訥)을 데리고 보령 신성(현재 주포면 보령리)로 이사 갔다. 오빠 신광수는 동생 부용당 신씨가 외가로 떠나는 모습을 시로 남겼다. 그리고 큰오빠 신광수와 신광하는 보령을 자주 찾아갔다. 보령 청라의 외삼촌 이제암(李齊嵒)과 외사촌 이우경(李羽慶)의 도움으로 곤궁한 생활을 견디며 살아갔다. ‘보령 외가에 논을 빌려 농사지으러 가는 여동생을 이별하며’의 시에, “5월 신성(新城) 가는 길에서 너를 이별하자니/총총히 떠나는 네 모습이 가련하구나./가을걷이 끝나면 다시 만날 줄 알지만/병중이라 만사가 흩어지는 일이 많고/먼 길이라 편지도 때에 맞추기 어려우리/문까지 따라가 제일 우는 녀석은 누간가?/어미 없이 졸졸 따랐던 내 셋째 아이놈일세./”라고 한 것으로 친정과 외가댁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4. 결혼 23년 만에 남편 잃어 부용당 신씨는 결혼 23년(1773년) 만에 남편을 잃었다. 남편 윤운(尹惲)은 윤선도(尹善道)의 5대손이고 공제 윤두서(尹斗緖)의 손자이니 부용당 신씨로서는 명가에 시집을 간 셈이었다. 당시 43세인 부용당 신씨는 두 아들을 두었고 또 다른 아이를 뱃속에 기르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죽자 부용당 신씨는 순절하기로 결심을 세웠다. 보령으로 조문을 갔던 조카 신석상(申奭相)이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이 의(義)이겠으나, 뱃속에 있는 유복자를 가지고 따라 죽는 것은 의(義)가 아님이다”라고 하니, 부용당 신씨는 흐느끼면서 “내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또한 그리하려는 것이었느니라, 이제 너의 말을 듣고 내 어찌 차마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부용당 신씨는 남편을 따라 자살하려 하였으나, 신광수의 아들인 조카 신석상(申奭相)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당시 큰아들 윤규영과 12살 둘째 아들 윤지눌(윤지눌-개명 윤규응)을 두었고 그 후 유복자 딸을 낳았고, 딸은 여주 이씨(呂州 李氏) 이치범(李治範)에게 시집을 갔다. 5. 둘째 아들 윤규응 진천군수 제수와 모친 삶의 마감 신부용당은 2남을 두었었는데 큰아들 윤규영(尹奎永), 둘째는 초명에 윤지눌(尹持訥)로 쓰다가, 순조 1년(1801년) 윤규응(尹奎應)으로 개명하였다. 개명하게 된 사연은 천주교 박해 시절 윤지눌(尹持訥)의 6촌인 윤지충(尹持忠)이 천주교에 입교하면서 조상 위패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사건인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전주 감영에서 순교하여 역적의 항렬을 사용할 수 없음을 이유로 조정에 개명을 요구, 허락받아 개명하게 되었다. 신부용당은 아들 윤지눌(尹持訥)은 정조 14년(1790년) 29세 나이로 문과 병과 1등으로 뽑혔다. 정조 임금의 특별한 배려로 최단기에 승진하니 주변 사람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평양 상원군수(祥原郡守)를 거쳐, 진천군수(鎭川郡守)로 부임하게 되어 부용당 신씨는 아들을 따라가 그곳에서 살다가 삶을 마쳤다. 윤지눌(尹持訥)은 아들이 없어 당숙 윤지경(尹持敬)의 셋째아들 윤종구를 양자로 입양하였다. 아들 윤지눌(尹持訥)은 정조 19년(1795년) 정조가 주서(注書)를 천거하도록 하였는데, 정조는 다른 유모씨(柳某氏)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윤지눌(尹持訥)은 외사촌 정약전(丁若銓)을 천거하였다. 정조는 다시 다른 사람을 천거하도록 하였으나 그래도 바꾸지 않았다. 정조는 진노하고 철월부(鐵原府)로 귀양을 보냈다. 외사촌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귀양가는 윤지눌(尹持訥)을 전송하며, “첫 번째 쇠북소리에 혜화문이 열리더니/ 산 넘고 물을 건너 북으로 가는 길 겹겹이로세/ 산이 대신 일산을 펴 외로운 말을 맞고/얼음발을 안개가 내려 구룡을 숨겨주리/다행히도 잠시나마 청쇄달에서 놀아지만/ 우리 함께 백운봉을 오를 때만 같겠는가/ 듣자하니 신진 축에 뛰어난 인물 많아/ 검은 머리 붉은 얼굴에 감정 자태 다 좋다네./”라고 위로하였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공재 윤두서(尹斗緖)의 손녀딸 윤소온(尹小溫 1728-1770년)이다. 부용당 신씨는 다산 정약용의 외숙모가 된다. 신부용당 아들 윤지늘(尹持訥)은 귀양을 마치고 외가인 당시 한산군 활동리(숭문동)에서 살다가 가세가 기울면서 서천군(舒川郡)지역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 후 부친과 모친 부용당신씨, 아들 윤지눌의 묘는 본가인 전남 해남군 화산면 신리로 이장하였다. 申芙蓉堂 詩 ‘늦가을’ “가을 산의 나무여, 비단 장막이 되었고(山木秋兮錦帳)/내려앉는 기러기여, 내 낀 물가로구나(下鴻羽兮烟汀)/산 빛이여, 찬란히 붉고(山光兮粲)/강 빛이여! 푸르고 푸르도다(江色兮蒼蒼)/”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군 서면에 있는 한국중부발전 신서천화력발전소 본관 5층 보일러실 배관에서 밸브가 폭발해 1명이 숨지고 3명이 중화상 등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게다가 장항국가산업단지 내 있는 선진뷰티사이언스 신축 공사 현장에서도 2명이 도장작업 중 쓰러져 병원 후송 후 치료받는 등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해 기업의 안전 부주의와 안전불감증이 도마 위에 올랐다. 경찰과 소방 당국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 39분경 일상점검 중 보일러실 배관 밸브가 터지면서 1명이 사망했으며, 3명은 중상을 입는 등 총 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경찰과 소방 및 고용노동부 보령지청 근로감독관 등이 사고 현장을 수습하는 한편 보일러 밸브의 압력을 낮추고 수증기를 빼내는 작업을 진행하는 등 사고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에 나섰다. 경찰·소방 당국·노동 당국은 발전소를 대상으로 자세한 사고 경위와 안전 조처 위반 여부, 중대재해처벌법·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여부를 각각 조사할 예정이다. 또 사고 발생 사실을 인지한 즉시 현장에 도착한 근로감독관은 사고 내용 확인 후 근로자 안전 확보를 위해 작업 중지 명령을 내렸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상시근로자 50인 이상 또는 공사금액 50억 원 이상인 사업장에서 노동자가 사망하는 중대 사고가 발생할 시 사업주나 경영책임자 등을 처벌하도록 정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한 경우 ▲동일한 사고로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 발생한 경우 ▲동일한 유해 요인으로 급성중독 등 직업성 질병자가 1년 이내에 3명 이상 발생한 경우 등이 적용된다. 또한, 이날 오전 9시 24분경 선진뷰티사이언스 신축건물 지하 주차장에서도 도장 작업 중이던 2명의 근로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인근 병원에서 치료받고 귀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소방 당국은 사고 현장인 선진뷰티사이언스 신축건물 지하 주차장에서 에폭시 도장 작업을 하던 중 질식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 중이다. 이번 사고는 안전 부주의와 안전불감증에 비롯된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지역의 한 시민단체는 “준공 2년밖에 안 된 신서천화력발전소의 설비에서 발생한 만큼 안전사고에 대한 대처가 부실했던 것 아니냐”라며 “뷰티사이언스 공장 역시 지난해 분쇄·혼합기 청소작업 중 오작동으로 근로자 1명이 오른팔을 잃는 사고가 발생하는 등 입주 이래 잦은 사고 발생은 안전불감증에서 나온 결과”라고 지적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지금 우리 사회에 제일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충남 서처군 화양면에 거주하는 정규호(74) 씨가 sbn뉴스와 인터뷰 자리에서 첫 번째로 전한 이야기다. 서천군청 홈페이지 ‘칭찬합시다’에 지난 5년간 총 27회의 글을 올린 그는 남을 칭찬해야 나 자신 역시 칭찬받을 수 있는 등 서로 칭찬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지난 2018년 1월 ‘컴퓨터 기초 제대로 배워 실력 다지기 윈도우7 강사님을 칭찬합니다’라는 제목 아래 첫 ‘칭찬합시다’의 글을 올린 그는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도움을 준 것에 대해 칭찬했다. 현재 그의 ‘칭찬합시다’ 글의 조회 수는 무려 4,000여 개 넘었고 이와 비슷한 조회 수를 기록한 글은 같은 해 2월에 올린 ‘서천교육청 소속 기관 서천도서관의 컴퓨터 교육 강사를 칭찬합니다’의 글이다. 부인과의 결혼이 펜팔로 이뤄졌다고 하는 그는 문헌서원에서 시를 쓰며 남은 삶 동안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살겠다고 전했다. ‘칭찬합시다’에 올린 글 중 가장 기억이 남는 글에 대해 그는 지난해 6월 ‘서천소방서 전종원 소방관 칭찬합니다’라는 글이라며 지방 일간지에도 보도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글을 통해 ‘제32회 한산모시문화제 행사장 서천소방서에서 어린이 화재 예방 캠페인 차 안에 설치된 동영상 보고 싶어 소방관에게 문의했는데 친절하게 안내해 줬다’라고 전했다. 이날 그는 아파트 화재 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안 되고 반드시 계단을 통해 피신하는 방법과 심폐소생술, 소화기를 직접 분사 등의 체험 학습으로 용기를 갖고 자신 있게 화재를 진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그의 신념은 고스란히 아들 정강진 박사(건양대학교 의과대학원)에게 전달돼 암세포 기전을 규명하는 논문 발표로 제10차 대한암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우수논문상을 받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서천군청 홍보지에 예전에 있었던 ‘칭찬합시다’라는 보도 창을 만들어 지역 내 많은 군민이 참여할 수 있게 하면 더욱 아름다운 지역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건의했다. 또 착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멸시하고 짓밟는 대신 그들을 격려하며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05년 대통령 훈장을 받고 퇴직한 공무원으로 현재 배움터지킴이를 하는 그는 마지막으로 책 한 권을 소개했다. 그는 미국의 소설가 마거릿 미첼이 쓴 유일한 장편소설이자 대표작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를 소개하며 이 책은 우리가 결코 잊지 못하는 것 중 하나라고 꼭 읽어 보기를 권했다.
충남 서천지역 내 산업현장의 안전불감증이 심각하다. 최근 장항국가산업단지에 입주기업인 선진뷰티 사이언스 공사 현장 지하에서 에폭시 도장작업 중 작업 인부 2명이 가스에 질식되어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는 안전사고가 발생했다. 이 회사에서는 지난해에도 공장 2층 분쇄 작업실에서 분쇄·혼합기 청소작업 도중 갑작스러운 혼합기 오작동으로 생산직원 1명의 오른팔이 절단되는 인사사고가 발생했었다. 이 회사는 화장품 원료 제조회사로 2019년 6월 장항국가산업단지에 스마트팩토리 제조시설을 갖춘 신공장을 준공하여 입주한 이래 매년 크고 작은 안전사고가 발생해 지역사회의 우려를 낳고 있다. 같은 날 서면 마량리 소재 신서천화력 발전본부 5층 보일러실에서는 배관 파손으로 누출된 증기로 인해 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산업재해 발생 때 산업안전사고 발생의 원인에 따라 책임자를 처벌해 왔다. 하지만, 산업과 건설 현장에서 지속해서 안전사고에 따른 사망사고가 잇따르면서 정부는 2022년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시행하여, 1명 이상의 사망사고가 발생하는 중대 재해의 경우 사업주나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강력한 법 규정을 마련했다. 이 법이 시행된 지 2년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산업현장에서의 재해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1명 이상의 사망사고 발생 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경영주 등 책임자를 형사 처벌하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산업현장에서의 안전불감증은 여전하다. 법률 시행 후 이 법 위반 제1호는 2022년 5월 연세 나을 암 요양병원 증축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와 관련하여 대표이사가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현장소장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제2호는 2023년 3월 한국제강 방열판 보수작업 중에 발생한 사망사고로 대표이사가 징역 1년의 실형을, 하청 업체 대표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번 신서천화력 발전본부에서 발생한 산업재해 사고도 근로자 사망사고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엄정한 수사와 함께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의 혐의 사실이 입증되면 대표이사를 포함한 경영주와 관리책임자 모두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산업안전 예방조치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엄중해도 항상 모자란다. 또한, 산업현장에서 사업장의 특성에 따른 유해·위험 요인을 확인하여 개선하고, 안전보건관리책임자, 관리감독자, 안전보건 총괄책임자 등을 선임하여 산업현장에 상근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책임은 전적으로 경영주에게 있다. 선진 뷰티 사이언스 공장신축 현장에서 발생한 안전사고도, 비록 근로자가 사망에는 이르지 않아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저촉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매년 지속해서 안전사고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영주의 대오각성이 촉구된다. 특히 공사 현장에서 불법 하도급 과정에서 발생하는 안전사고의 경우, 안전 관리의 사각지대에서 발생하는 사고로 원천적으로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우리 서천의 수산업 분야 노동력부족을 해소하기 위하여 몽골에서 계절근로자로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안전 관리 감독에도 철저히 해야 한다. 지리적 특성으로 대륙 국가인 몽골 출신 계절근로자를 낯선 바다로 내보내 김 양식장 등에서 노동해야 하는 특수성 때문에 안전사고의 위험은 늘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지속적인 안전사고 예방 교육 및 안전관리자 상근 등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지방정부의 노력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안전불감증은 늘 예기치 못한 재해를 불러온다고 하지만, 안전 부주의와 안전불감증은 산업재해를 불러오는 신호수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안전사고는 사고 발생 후 살펴보면 예견되어 있었고, 안전불감증은 늘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이제 우리도 산업현장에서 안전보건과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주의를 우선시해야 한다. 순간의 방심이 대형 사고를 유발한다. 우선 산업현장에서 근로자들이 안전관리를 위하여 방심은 금물이라는 태도로 임해야 한다. 경영주 또한 안전보건을 위한 사전점검과 산업환경 개선 및 관리·감독을 강화하여 산업안전 재해로부터 귀중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경영철학에 담아야 한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지역 내 부족한 인력공급을 위해 투입된 외국 근로자들의 근로환경 및 인권 문제 해결에 대한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몽골 근로자들의 4대 사회보험 가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지병으로 인한 병원 치료가 무방비 상태로 놓이는 등 외국 근로자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요구되고 있다. 군에 따르면 몽골 옥탈채담군에서 1차 입국한 계절근로자 122명이 지난 7월 29일 서천군에 도착, 8월부터 12월까지 5개월간 지역 내 19개 멸치 가공공장에서 근무한다. 하지만, 일부 멸치 가공공장에 마련된 몽골 근로자의 근로 고충 등 인권 문제가 발생하고 숙식 환경이 열악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지난 9일 한 멸치 가공공장에서 식사 중이던 한 몽골 계절근로자가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쓰러져 원광대학병원으로 후송돼 ‘뇌출혈’ 증세로 치료 중이다. 평소 고혈압을 앓고 있었던 이 근로자의 치료비는 약 5~600만 원이 소요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제는 수백만 원에 달하는 치료비다. 이는 이 근로자가 4대 사회보험에서 산업재해보험만이 가입돼 국민건강보험에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수백만 원에 달하는 진료비는 현재 치료받는 몽골 근로자가 부담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부닥쳤다. 이에 몽골 근로자에 대한 인권 존중과 고용주의 배려가 요구되고 있다. 거기에 몽골 계절근로자의 숙식 등 근로환경이 열악하다는 지적이 나와 김 양식장에 투입될 200여 명의 계절근로자 입국에 차질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한 군민은 “그동안 김기웅 군수의 몽골 방문과 협약 등의 업적 홍보에만 열을 올렸던 민간관계자들도 이들 계절근로자의 근로환경과 인권에는 무관심해 왔다”라며 “근로 현장에 대한 철저한 관리 감독이 필요하다”라고 촉구했다. 100여 명의 몽골 근로자의 고충을 해소할 통역사가 1명이라 점도 문제다. 서면 지역 한 군민은 “한국어에 능통한 몽골 유학생 출신 통역사 1명이 몽골 근로자 122명의 고충을 해결할 수 있느냐”라며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방관한 서천군의 행정이 답답하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군 관계자는 “현재 치료 중인 몽골 계절근로자에 대한 치료비는 지역의 복지단체를 통해 해결 책을 마련하고 있다”라며 “몽골 계절근로자에 대한 근로환경 및 인권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모색해 서천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가슴에 새기고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관리 감독에 나서겠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오는 10월 김 양식 어가에 투입될 200여 명의 몽골 근로자의 숙소 환경 및 음식 문제 해결, 인권유린 등을 위한 방안 등을 마련하는 서천군의 적극적인 행정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잃기 전에는 가지고 있던 게 뭔지 모른다.’ 즉, 우리의 옛말 중에도 구관이 명관(名官)이라는 뜻이다. 프랑스 정치지도자 클레망소도 이를 이처럼 말했다. ‘나쁜 정치인 X을 바꾸려고, 새로 뽑았더니 그보다 더 나쁜 정치인 X이 뽑히더라’ 지난 20대 국회에 진저리가 나, 이를 바꾸자며 치른 게 지난 2020년 4.15 제21대 총선이다. 무려 55% 이상의 초선, 새 얼굴로 바뀌어 정치 문화변화를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처럼 초선의 구태정치 청산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21대 국회 개회부터 초선의원들이 싸움닭이 되어 분탕질과 온갖 편 가르기에 떼쓰기, 보이콧으로 얼룩지게 했다. 터지는 사건마다 들춰보면 국회의원이 개입되지 않은 곳이 없고, 이권과 유착된 금배지들이 수두룩하게 연루되어있다. 상임위원회 회의장에서 코인 투자를 하지 않나, 자신의 사무실 여성 보좌관에게 몹쓸 짓을 하지 않나, 지방 선거때 공천헌금을 받지 않나, 특정사안에 후원을 가장해 금품을 받고 검찰 수사를 받지 않나, 거짓 루머를 제보로 포장해 해당 장관에게 의혹을 제기하지 않나. 이는 이전 20대 국회보다도 더 저질이다. 심지어 지난해 5월 문재인 정부가 물러나고,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 공수가 교대되면서 생기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곳곳에 벌어진다.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사업을 밀어붙이던 의원들이, 야당이 된 날부터는 안된다고 싹 돌아섰다. 또 안 된다고 하던 국민의힘 역시, 여당이 되고 보니 더불어민주당이 외치던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자신이 검사일 때 검사 수사권 강화가 먼저라고 외쳐대던 국회의원이,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총대를 멘 사실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금배지들이 ‘카메라 앞에 힘을 주는’ 말장난의 모습들은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이런 21대의 정치혐오와 정치증오를 거둬낼 내년 4.10 제22대 총선이 오는 9일이면 7개월 앞으로 다가와정치인들은 분주해졌다. 책을 내고, 조직을 갖추고. 총선 출마 예상자는 지인들에게 후원금을 약속하고 다닌다는 얘기도 있다. 특정 광역단체장의 이름을 팔고 다니면서, ‘광역단체장이 자신을 밀고 있다’라는 소문이 파다해 선관위가 내사 중인 곳도 있다. 내년 총선 자료를 보면 대전·세종·충남·충북지역 28개 선거구에 예상되는 인물은 100여 명 안팎이지만, 국회의원 감이 없다. 지금의 제21대 현역 국회의원보다 인물이 출중하거나 자질이 빼어난 이가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다. 이 당 저 당 옮겨 다니면서 필요에 따라 진보를 자처하며 촛불집회에 참여했다가, 또 시대가 바뀌니 보수집회에 나선 이도 여럿이다. 이런 가운데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내년 4.10 총선에 적용할 선거제 개정과 관련,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만지작거린다. 사표 방지와 소수 정당의 원내 진출을 쉬워지라는 기존의 준연동형제를 병립형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그들은 지난 21대 총선에서 위성정당이라는 꼼수로 준연동형제 취지를 무력화시켰다. 그래 놓고 기득권 사수를 위해 정치적 퇴행의 길을 가려는 모습이 불쌍해 보인다. 그들은 최근 물밑 협상에서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되,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방안으로 가닥을 잡았다. 권역은 크게 수도권과 중부권, 남부권으로 나누기로 했다. 충청권은 중부권이다. 그러나 비례제 의석수 배분 방식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2020년 총선에서 여야는 정당 득표율과 지역구 의석을 연동하는 대신 초과 의석 문제를 방지하는 준연동형제로 공직선거법을 바꿨다. 정당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을 나누기 때문에, 소수 정당의 원내 진입이 쉬워진다. 양당 극단으로 치닫는 정치보다 최소한의 제도적 보완 장치였다. 그렇지만 양당은 지난 총선에서 위성정당이라는 꼼수로 애초의 취지를 퇴색시켰다. 양당을 그래 놓고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을 별도로 계산하는 병립형으로 검토 중인 것이다. 이는 야합이다. 내 손으로 우리를 대변할 금배지를 뽑는 지금의 제도적 장치가 먼저다. 여야 정당이 자신에게 유리한 제도를 만들어 밀어붙이는 것은 꼼수다. 꼼수정치에는 감이 안되는 금배지들이 나와 기대되는 정치개혁은 물 건너간다. 대화와 타협이 사라진 지 오래인 국회, 7개월 남은 총선은 서글픈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