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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서천 한산군의 진산 건지산이 남긴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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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옛 한산군의 진산인 건지산을 중심으로 조상들이 살아가면서 어떠한 문화유산을 남겼으며, 우리는 조상들이 물려준 역사적 문화유산의 가치를 보존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책무이다. 자료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한산 건지산은 서천군 동부지역의 대표적인 명산이며 한산군의 고을의 상징인 진산이다.

 

옛사람들은 고을의 진산은 삶을 살아가는데 위안을 얻고 수호신으로 믿으며 삶의 풍요와 평안을 가져다주는 곳으로 여겼다.

 

이러한 한산의 진산인 건지산을 배경으로 옛 선조들이 살아온 한산지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살다가 남겨 놓은 것 들은 무엇이 있나 살펴보자.

 

1. 한산지역의 역사

 

한산지역은 고대 원삼국인 마한시대에는 54개국 중 소국으로 치리국국(致利鞠國)으로 오늘날 한산면, 마산면, 기산면, 화양면의 지역으로 한 부족국가 시대였다.

 

 

백제가 마한을 정복한 후 마산현(馬山縣), 또는 마읍(馬邑)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건지산(乾止山)은 우두산(牛頭山)으로 불렀다.

 

백제 동성왕 8년-486년에 산성을 쌓고 우두산성(牛頭山城)이라 하였고, 동성왕은 이곳으로 자주 사냥을 나오기도 하였다.

 

동성왕 23년(501년) 11월 이곳 건지산성에 사냥을 나왔다가 큰 눈이 내려 길이 막혀 도읍지 공주왕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마포촌(馬浦村-당시의 치소) 즉 지금의 마산면 벽오리에서 유숙하다가 부여 임천, 당시 가림성(현 성흥산성) 성주인 제자백가는 인사의 불만을 품고 마포촌에서 유숙하던 동성왕을 자객을 보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다음 해(502년)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은 군사를 이끌고 우두산성(지금의 건지산성)에 진을 치고 장수 해명(解明)을 보내 백가를 잡아 오도록 하여 건지산성에서 목을 베어 白江(백강), 지금의 금강(錦江)에 버린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출처:대동지지-1865년 사례 편]

 

 

건지산의 옛 지명은 또 한 차례 바뀌었다, 백제 무왕 30년(629년)에 고쳐서 마산성(馬山城)이라고 하였으며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 15년(655년)까지도 마산성을 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지산은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였으나 이곳 건지산성(즉 마산성), 고려 때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주류성이라고 하였고 3년간의 백제의 부흥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백제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시대를 걸쳐 고려시대에는 한산현(韓山縣), 또는 아성(鵝城)이라고도 하였다. 한산군의 읍성은 지금도 문화유적으로 남아있다.

 

2. 한산이 낳은 인물

 

고을의 진산인 건지산을 배경으로 살아오면서 많은 인재가 태어나 명성을 낳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한산 이씨(韓山 李氏), 안동 권씨(安東 權氏), 고령 신씨(高靈 申氏) 등이 있다.

 

 

한산이씨 시조(始祖)는 고려 숙종 때 호족으로서 권지호장직(權知戶長職)에 오른 이윤경(李允卿)이다.

 

건지산맥을 따라 안장된 시조 이윤경의 묘지는 전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금닭이 알을 품는 형국)이다.

 

그러나 시조라 할 중시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다.

 

이곡은 당대의 대 문장가이며, 우탁 역동(易東),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으며 고려 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벼슬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이색이 1362년 홍건적의 난에 왕을 호종하여 공을 세워 한산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하였다.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을 비롯하여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 대문장가 이산해(李山海) 등으로써 이름난 한산 이씨는 조선시대 상신(相臣)이 4명, 대제학(大提學)이 2명, 청백리(淸白吏) 5명, 공신 12명과 문과 급제자 195명을 배출했다.

 

이종선(李種善)은 명문으로서 여흥부사 등을 지내고 1417년 풍해도와 충청도의 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이어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냈다.

 

이맹균은 1385년 문과에 급제, 성균직학(成均直學)을 거쳐 조선 개국 후 1418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부윤을 지냈다.

 

1425년 진위사(陳尉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와 병조의 판서,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고려말의 석학(碩學)이요, 대유(大儒)로서 조선조 성리학 발전에 공헌한 이색은 원나라 제과에 급제,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하자 여주, 장흥 등지로 유배되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가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간신들에 의해 배안에서 운명하였다.

 

건지산 자락인 한산면 고촌리 이곡과 이색의 옛 집터에 1610년 문헌서원을 창건하고 1611년에 사액을 받고 많은 인재를 양성해 오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도에 훼철되었다가 1969년도에 이색의 묘역 옛 효정사 경내에 서원을 복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한산팔경을 노래하다.

 

한산의 진산인 건지산을 중심으로 한산팔경을 낳기도 하였다. 숭정사는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숭정산에 있던 사찰이였다.

 

이곳 崇井山(숭정산)은 옛 고려시대에 사찰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폐사된 사찰지만, 확인이 가능하다. 그 당시 사찰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는 숭정사 불리오다가 폐찰 되었다.

 

팔영시의 기록을 보면 사찰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목은 이색 선생은 1335년 8세 때 이곳 사찰에서 거처하며 공부하였다. <출처:독서처가서(讀書處歌序)>

 

목은 이색이 지은 한산팔경을 읊은 팔영(八詠)의 내용을 살펴보자.

 

 

1) 숭정암송(崇井巖松)

 

“8.9세 때를 생각하니/ 학당에서 놀았는데/ 환하게 아는 것도 같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하나/ 쉬지 않고 이치를 찾아 외우기만 하였네.”

 

이곳 숭정산 정상에는 흰색의 차돌 바위가 솟아 있고 틈사에 분재 같은 소나무가 자랐음 50년 전 산림이 욱어지지 않았을 때는 인근 초등학교에서 소풍장소로 즐기던 곳이다.

 

2) 일광석벽(日光石壁)

 

이곳 일광산(日光山)은 동·서로 두 봉우리로 자리하고 동쪽 봉오리는 중턱에는 일광사란 사찰이 자리하였던 곳으로 먼 곳에서 보면 벼슬아치의 관모 같아 일명. 관두봉(감투봉)이라는 별칭이 있다.

 

이곳 관두봉 서쪽 편에는 이색 선생이 독서하던 독서당의 자리가 있다. - 독서처가서

 

3) 고석심동(孤石深洞)

 

마산면 마명리 마을 안쪽으로 일명 고석굴(골)이라 하였다. 이곳 마을 입구에는 자연석 미륵불(彌勒佛)을 모신 보호각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하고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당시는 고석사(孤石寺)라는 사찰이 있었고 아마도 사찰에서 모셨던 미륵불로 폐찰 된 후 마을에서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일화로는 일제강점기 때 술 취한 공사 인부가 곡괭이로 미륵을 내려찍은 뒤 급사하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영험이 있는 미륵불로 여기고 있다.

 

 

4) 회사고봉(回寺高峰)

 

마산면 안민리 마을 뒷산으로 회사(回寺)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이곳의 의미를 팔영에서 설명하듯이 한산군의 사적으로 앞산 건지산은 국방의 중요시설인 건지산성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백제 동성왕 8년(486년)에 쌓은 고대 우두산성(牛頭山城)으로 백제 의자왕 때 마산성(馬山城)으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5) 원산수고(圓山戍鼓)

 

화양면사무소 뒷산 금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작고 둥근 산이 원산(圓山)이다. 고려 때부터 봉화를 올리던 곳. 산 아래 강변포구에는 군사 주둔지인 수자리 있었다.

 

이곳 원산은 조선시대 한산군지(韓山郡誌)의 기록을 보면 기이(奇異)한 산으로 신령스러운 조짐이 있어 나무꾼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다고 한다.

 

6) 진포귀범(鎭浦歸帆)

 

진포(鎭浦)는 오늘날 금강으로 백제 때는 기벌포(伎伐浦) 또는 백강(白江), 고려시대에는 진강(鎭江). 진포(鎭浦), 장암포(長巖浦), 이곳 금강은 백제 의자왕 때 충신 성충, 흥수가 유배지에서 백제를 지키려면 백제의 관문인 금강 입구 즉 기벌포를 막아야 한다고 간언하였다.

 

백제 부흥운동의 과정인 백강전투, 백제부흥군, 왜의 연합군과 나·당 연합군과의 전투 장소로 나·당 연합군의 승리로 부흥운동이 실패하였다.

 

 

고려 우왕 6년(1380년)에 나세(羅世) 장군이 왜구 500척의 선단을 수장시킨 진포대첩(鎭浦大捷)의 장소는 장암진성(長巖鎭城)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천포(舒川浦), 금강(錦江)이라 하여오고 있다.

 

옛 어부들은 만선의 기쁨을 채우고 포구로 돌아오는 모습이 장관이었을 것이다.

 

7) 압야권농(鴨野勸農)

 

이곳은 한산 건지산에서 동쪽 들판을 지칭하는 곳이다.

 

조선시대 고지도에 나타는 지명으로 한산면 동산리, 단상리, 송곡리. 성외리(오라리 들) 앞 들판으로 풍요로운 곳으로 백성의 생활 터전을 정립한 곳이다.

 

건지산 정상에 주변을 바라보면 서해와 남쪽으로 금강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멀리 부여 임천(林川-가림)의 성흥산성(옛 가림성)이 보인다.

 

8) 웅진관조(熊津觀釣)

 

지금 신성리 갈대밭인 금강변에 자리한 옛 나루터로, 전북 익산시 웅포면과 충남 서천군 한산면 신성리와 왕래하던 중요교통로인 나루터로 활용하였던 곳이다.

 

 

전라도 남쪽 지방에서 한양 도성으로 가려면 이곳 나루터를 이용하고 한산-마산-홍산-외산-청양-공주-유구-천안삼거리로 이어지는 중요교통로 활용하였다.

 

1894년 전북 지역동학군이 이곳 신성포 나루를 건너서 한산군청과 서천군청을 함락시키기 위해 이용하던 교통로 금강하구둑이 막히기 전에 바닷물의 조수가 들어오던 시기에는 이곳 나루터 주변에서 일명 황색 조기잡이 배들이 많은 조업하던 곳으로 젓갈 배들이 드나들던 포구였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지자 들판에 새로운 마을이 들어섬 따라서 마을 이름이 새로 생겼다 하여 신성리(新城里)라 부른다.

 

4, 효자 맹사성이의 고향 축동리

 

한산면 축동리 마을의 옛 지명은 축산리(杻山里)였는데. 일제가 행정지명을 바꿔 축동리로 하였다.

 

축동리에는 고불 맹사성(孟思誠)의 옛 고향이다 맹씨 3대가 이곳에서 살았으나 묘지는 실전되고 단을 설치하였다.

 

축동리는 맹씨가 살았다 하여 맹동(孟洞)이라 부른다.

 

 

맹사성이 10살 때 모친이 돌아가시니 묘역을 매일 살펴보고 주변에 잣나무를 심었는데 멧돼지가 나무를 훼손한 것으로 보고 슬피 울었다. 그 후 그 멧돼지는 호랑이한테 물려 죽었다. 그는 효심이 지극하였고 하였다.

 

그 소식이 조정에 알려져 최고의 효자로 칭송하고 효자정려가 내려지고 마을 입구에 효자리(孝子里)라는 표석을 세워주었다.

 

또한 그의 부친도 효성이 지극하여 함께 효자리(孝子里) 표석이 나란히 서 있다.

 

이러한 내용을 정리한 세종 때 만든 삼강행실(三綱行實圖)에 실려 있다.

 

모친을 따라 아산 신창으로 이사 갔다. 그러나 축동리는 맹사성이를 낳은 고향이기도 하다.

 

5. 학자를 낳은 어성산(漁城山)과 일광산(日光山)

 

건지산의 자락이 흘러 남쪽으로 내려오면 한산모시관 앞산이 높이 솟아있다.

 

 

이산은 화양면 활동리 마을의 터를 잡은 어성산(漁城山)이다.

 

고령 신씨(高靈 申氏)가 세거하고 있다.

 

신담(申湛)의 부친 신영원(申永源)이 이곳에 자리하면서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이기에 숭문동(崇文洞)이라고도 한다.

 

신담을 비롯하여 석북 신광수와 그의 아우들 그리고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숭문8문장이 배출되었다.

이곳 어성산은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한 신담의 호(號)가 어성(漁城)이기에 관련된 것으로 본다.

 

어성 신담의 외손자는 과묵당 홍미, 복천 강학년(姜鶴年)으로 한산지역의 4군자의 한사람으로 칭송하였다.

또한 한산이씨 죽창한화(竹窓閑話)의 저자인 이덕형(李德泂)을 사위로 삼았다.

 

이와 같이 이곳 어성산 자락에 자리를 잡은 고령신씨들은 한산지역의 쟁쟁한 가문들과 인맥, 혼맥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문이 번성하였다. 어성산의 맥이 동쪽으로 이어지면서 또 하나의 큰 산을 만들었다. 즉 주산인 일광산이다.

 

 

일광산은 관두봉(官頭峰)을 두고 있다. 관두봉은 고려 때 일광사(日光寺)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광사 아래에는 목은 이색이 독서를 하던 독서당(讀書堂)이 있었다. 지금도 그 사찰 터와 독서당의 자리가 있다.

 

이곳 일광산은 한산8경인 일광석벽(日光石壁) 하나이다.

 

또한 일광산 관두봉 아래 구동리에는 1908년 기독교 구동교회(基督敎 九洞敎會) 교인들이 신학문의 도장인 사립숭광의숙(私立崇光義塾)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일광산을 주산으로 바로 아래 마을은 안동 권씨(安東 權氏)가 세거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고장이다.

 

일광산 관두봉 아래에는 수초당 권변(權忭)과 아우 제월재 권성을 배향하였던 향현사(鄕賢祠)가 있었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에 의하여 훼철되어 그 자리만 남아있다.

 

권변은 기산면 화산리의 화산사(華山祠)에 복설 배향된 우리 고장 인물로 효종 2년(1651년)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에서 태어났다.

 

 

숙종 15년(1689년) 4월 증광전시에 급제하였으나 그 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후궁인 장소의(張昭儀-장희빈)를 중전으로 봉하면서 이를 축하하는 과거였음을 알고 수차례에 걸쳐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국모(國母-중전)를 폐출하는 날에 과거를 응시하였음을 부끄러워하여 절의를 지키고 끝내 관직에 나가지 아니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권성(1653∼173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제월재(霽月齋). 아버지는 양(讓)이며, 어머니는 한극겸(韓克謙)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알성문과에 장원급제, 지평·장령·집의·헌납·사간 등을 지냈다.

 

그 후 평안·황해·강원·함경·경상·충청도 등의 관찰사를 역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명관으로 이름이 났다.

 

1721년(경종1) 한성부판윤으로 신임사화를 맞아 사직 되었다가, 1725년(영조1) 노론이 집권하자 부총관·판윤·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물러났다가 형조판서·참찬 등에 여러 차례 기용되었으나, 사퇴하고 전원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한산지역은 인물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으로 한산모시와 한산소곡주로 그 명성을 낳고 있다.

 

한산지역은 신교육의 발상지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교육에 남다른 고장으로 일찍이 교육으로 인재를 배출하였다.

 

구한말 우리 고장 화양면 와초리에 일제강점기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장을 지낸 김인전 선생이 가르치던 한영학교가 1906년 설립(1909년 인가)해 운영되었고 그곳 출신들이 마산 3.1운동을 주도 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한산지역은 면 단위로서 초·중·고등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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