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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서천군의 진산 천방산이 남긴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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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서천군의 진산은 천방산이다. 백제 때 서천군의 치소는 천방산 자락 문산면 신농리(왜멀)로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고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처 조선시대에는 남산에서 금년도 신청사로 이전하기까지 서천읍 군사리에 500여년의 치소로 자리하여 왔다. 천방산이 남기 문화유산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고장 천방산은 서천군의 명산으로 백제시대 때 서천군(설림군-舌林郡)의 진산(鎭山)이었다.

 

진산이란? 난리를 진압하고 국가(고을)를 지킨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래서 그 고을의 주된 산을 진산이라 한다. 또는 진호(鎭護)라고 하였다.

 

진산을 배경으로 그 고을에서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고 고을이 발전하면서 문화가 형성되며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을 남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문헌에는 천방사(千方寺)로, 현재는 천방사(千房寺)로 표기하고 있다.

 

서천군 판교면, 문산면, 시초면 등 3개 면에 걸칠 만큼 산자락이 넓고 큰 서천 제일의 산이다.

 

천방산은 동·서·남 방향으로 7개의 봉우리가 둘러쳐 있고 동·남·북 방향이 훤히 트여 시원한 풍광을 자랑하는 영산(靈山)이다.

 

 

좌청룡 우백호인 듯 천방산 정상을 중심으로 좌우로 서 있는 봉우리들은 남으로 가면서 5개의 봉우리가 마치 병풍인 듯 둘러쳐진 모습이 있어 아늑한 천방산은 서북에 동북 방향으로 펼쳐진 시원한 풍광이 함께하고 있어 좋은 곳이다.

 

그렇다면 우리 고장 명산이며 옛 서천군의 진산인 천방산은 오늘에 무엇을 남겨 놓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 천방산에 천 칸의 큰 사찰인 천방사(千房寺)를 짓고 하늘에 제사 지냈다.

 

천방사(千房寺)는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사비성을 향하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흐린 날씨와 풍랑으로 인해 사비성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발이 묶이게 되었을 때, 그 앞을 지나던 도승이 “이 산에 천 칸의 집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군사들이 무사할 것”이라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에 따라 소정방은 산에 천 칸의 집을 짓고 날씨가 맑아져 사비성으로 진격해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한다. 

 

그 뒤에 소정방은 천 칸의 사찰을 짓고 천방사라 하였고, 산 이름 또한 그에 따라 ‘천방산’이 되었다고 한다.

 

2. 천방산 신농리(왜멀-옛 왕야리)는 백제시대 때 서천군의 옛 고을 치소(治所-다스리던 곳)

 

천방산 아래 음적사(陰寂寺)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신농리는 백제시대 때 설림군(舌林郡)의 치소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야리(旺野里)로 불렀고. 그곳은 설림군의 치소로, 뒷산이 바로 설림군의 진산(鎭山)이 천방산이다.

 

660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통일신라시대 때 설림군의 치소는 오늘날 문산면 문장리 화리(禾里) 마을로 이전하고 서림군(西林郡)으로 치소를 이전하기도 하였다.

 

 

3. 천방산 옛 대둔사(大芚寺)에서 목은 이색(李穡) 선생이 공부하던 곳

 

천방산 자락 음적사(陰寂寺)는 대둔산(大芚山)으로 불렀다.

 

목은 이색(李穡) 선생의 독서처가서(讀書處歌書)에 고려 충목왕 원년(1345년) 선생의 나이 18세 때 대둔사(大芚寺)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가정 이곡(李穀)의 가정집(稼亭集)의 기록을 보면, 목은 이색(李穡) 선생의 부친이신 가정 이곡 선생께서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아들인 목은 이색(李穡) 선생한테 글 읽기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는 시(詩)를 보내왔다.

 

시(詩)에 이르기를, “남아가 벼슬을 하려면 제왕도에서 해야 될 것이고/ 출세를 하려면 두루 노력 해야만 할 것이다/ 네가 공자님 말씀에 천하가 적다함을 알겠느냐/ 오직 몸은 태산같이 높은데 있어야 함을 말함이다/ 30세 전에 글 읽기를 게을리 하여 / 늙은 뒤에 탄식한들 무엇하랴/ 너는 이제 분초를 아껴 공부해야 하느니/ 그렇지 않으면 부귀는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함과 같으니라” 했다.

 

이로 인하여 부친의 뜻을 받들어 글 읽는데 부지런히 하였다.

 

 

4. 서림 이씨 중시조 이언충(李彦忠)의 묘소가 자리한 천방산

 

서림 이씨의 중시조 이언충(李彦忠)의 묘소는 음적사(陰寂寺) 바로 뒷산에 자리하고 있다.

 

서림 이씨(西林李氏)의 시조는 문충공(文忠公) 이익존(李益存)이다.

 

시조로부터 20세손인 이언충(李彦忠)이 서림 이씨 중시조(中始祖) 이다.

 

이언충(李彦忠)은 서림(西林-옛 서천군) 사람으로 충선왕(忠宣王)이 원나라에 인질로 있는 동안 국정에 공이 있어 당시 서림군(西林郡-옛 서천군)을 지서주사(知西州事)로 지명을 승격시킨 인물이다.

 

또한 충숙왕(忠肅王)도 한때 원나라에 불모로 5년간 볼모로 잡혀갔지만, 조정을 안정시키고 원(元)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풀고 충숙왕(忠肅王)을 환국시키는 공로가 있어 공신에 오르면서 서림군(西林君)으로 봉했다.

 

 

5. 천방산의 봉림산은 혹심한 가뭄이 있을 때 기우제를 지낸 영험(靈驗)의 산

 

옛날에는 혹심한 가뭄으로 농작물관리 등 전반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는 서천군수가 천방산(봉림) 아래 용좌암(龍座岩)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곳이다.

 

몇 년 전에도 문산면에서는 천방산에서 비를 내려줄 것 염원하는 기우제를 지낸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곧바로 잠시나마 많은 비를 내려주었다.

 

 

6. 천방산 아래 북산리는 송석후(宋錫後)를 모신 향현사가 있었다.

 

북산리는 진천송씨(鎭川宋氏)가 대대로 세거하는 마을이다. 명산을 배경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한 마을이다.

 

송석후(宋錫後)는 지방에서 후학을 길러내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향선생(鄕先生-지역의 선생)이라 부르면서 향현사(鄕賢祠)를 세워 배향하였으나 나라에서 금지해 훼철되었다.

 

송석후(宋錫後)의 5명의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5자등과(5子登科) 집안으로 널리 알려졌다.

 

송석후의 선조 묘소가 북산리 뒷산 봉림산 아래에 있는데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집안의 일화로 5명의 아들이 과거시험을 보면 소식이 오기 전에 미리 산소가 소리를 내어 울어 합격 소식을 전해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송석후(宋錫後)의 장남인 송도함(宋道涵)이 병조좌랑(兵曹佐郎)으로 있을 때 장희빈으로 인하여 인현왕후가 폐위가 되던 날 교문(敎文-교지의글) 작성을 명하자 붓을 던지고 경색하며 말하길 “내 손을 끊을지언정 글을 쓸 수 없다”하고 조의를 찢고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 이곳 천방산 아래 북산리로 돌아왔다.

 

7. 천방산의 천방사(千房寺)는 국가의 왕족들이 운영하던 사찰

 

천방사의 유래는 백제 때 당나라 소정방의 전설로 내려오지만 언제 창건되었는지 정확한 문헌이나 기록은 없다, 조선시대는 유교 국가로 불교를 배척하는 억불정책을 하였다.

 

 

그러나 일부 왕족들의 궁가(宮家)에서는 별도로 원당(願堂)인 사찰을 운영하였다.

 

우리 지방 서천군 지역 천방산에 있는 천방사(千房寺)도 궁가의 원당(願堂)인 사찰로 운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궁가의 원당의 사찰은 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지방을 다스리는데 어려운 대상이었다.

 

조선 효종 3년(1652) 12월 7일 서천군수 이무(李袤)의 조정에 올린 상소를 보면, “궁가에서 떼어 받은 땅은 일찍이 임자가 있던 땅이니, 어리석은 백성이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략) 또 고을 경내에 천방사(千方寺)가 있는데 이 또한 궁가의 원당(願堂)이 되었으므로 승려들이 기세를 부려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니, 밝은 세상에서 어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생략)”라고 당시 천방사 중들의 피폐상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천방사에 승려들의 변란 사건이 발생하였다.

 

현종 5년(1664) 12월 13일 서천 천방사(千方寺)의 승려들이 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충청감사(忠淸監司) 이익한이 한산군수 신숭구로 하여금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들이게 하자, 승려 수백 명이 조총을 갖거나 활을 지니고서 지형이 험한 곳에 웅거하여 저항하였다.

 

또한, 화약으로 천방사를 불태우고 또 침노한 벼슬아치의 집을 불 질러 그 분을 풀기도 하였다.

 

영장 양일한은 승려 3명을 잡아 혹독히 형문을 가하여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게 하였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 문제가 되자 조정에서는 병사를 동원하는데 조정에 보고하지도 않고 병사를 징발한 죄를 물어 감사와 영장을 잡아들이고 한산군수 신숭구는 파직하였다.

 

천방사가 빈대가 많아 중들이 사찰을 떠났다는 구전의 일화들은 당시 서천 사람들이 이 사건을 보는 민중 의식이었고, 그것이 전설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고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의미 있는 역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천방사는 승려들의 변란이라는 이러한 사건의 계기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8. 복설되지 못한 건암서원

 

우리 고장 문산면 건암리(建巖里)에 명곡(鳴谷) 이산보(李山甫), 중봉(重峯) 조헌(趙憲), 그리고 풍옥헌(風玉軒) 조수륜(趙守倫), 그의 아들 창강(滄江) 조속(趙涑)을 배향하기 위해 세웠던 건암서원이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과 함께 강제로 훼철되었으나 한산의 문헌서원은 1969년 복설되었고 건암서원은 아직까지 복설되지 못했다.

 

 

건암서원의 현종 3년(1662년)에 지방의 유림의 공의로 명곡 이산보, 의병대장 중봉 조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금의 문산면 명곡리(鳴谷里)에 창건되었다.

 

서원은 공식적인 사액서원(賜額書院-인가된 서원)은 아닌 사우(祠宇)성격인 서원이었다.

 

이러한 관계로 건암서원(建巖書院) 또는 명곡서원(鳴谷書院)이라는 두 개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건암서원은 문산면 건암리로 이건하고 국왕으로부터 사액된 이후에는 건암서원이란 서원명이 따랐다.

 

명곡리에 자리 잡았던 사당인 명곡서원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는 명곡정사(鳴谷精舍)로 기록하고 있다.

 

명곡정사 즉 명곡서원(사당)이 자리하게 된 것은 이곳은 명곡(鳴谷) 이산보(李山甫)가 양모(養母)조씨(趙氏)가 1578년 12월 19일 사망하자 여막(廬幕)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 하였던 장소였다.

 

그 여막의 자리 옆에 명곡 이산보 양모(養母) 조씨와 양부(養父) 이지영(李之英)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1579년에 세워진 양부모(養父母) 묘비의 기록을 보면, 양모 조씨가 선조 11년(1578년) 사망하자 당시 벼슬이 정랑(正郞)이었던 이산보(李山甫)가 상복(喪服)을 입고 서천 문산 명곡으로 돌아가서 묘 곁에 여막을 짓고 시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19년(1586년) 기록을 보면 중봉(重峯) 조헌(趙憲)은 붕당의 시비와 학정의 폐단을 논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신(臣-조헌)의 관하인 공주(公州)에 공암정사(孔巖精舍)가 있고, 서천에는 명곡정사가 있습니다. 공암정사에는 양인 서기(徐起)라는 자가 있는데 후학들을 가르쳐 생원, 진사에 합격한 사람이 많습니다… (중략) … 그러나 서천의 명곡정사는 특별히 주장하는 스승이 없는데 지난해 신(臣-조헌)이 한번 지나다가 그곳 생도들이 매우 영특하여 가르칠만한 자들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신(臣)의 생각으로 대학자인 송익필(宋翼弼)을 찾아 명곡정사 산장(鳴谷精舍 山長)으로 삼았으면 합니다”라고 하고 있다.

 

송익필은 서인으로 정치가이자 예학, 성리학에 능하였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신독제(愼獨齋) 김집(金集) 등을 문하에서 길러냈다. 또한 조헌과 동연배로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였다.

 

이를 보면 명곡정사에서도 대학자를 모셔와 지방의 자제를 교육하려 한 곳이였음을 알 수 있다.

 

명곡정사 즉 명곡서원은 미인가 상태에서도 교육을 담당하였기에 서원이라고도 불렀다.

 

고종 1년(1864년)에 제작된 대동지지(大東地誌)의 기록을 보면, 일명 명곡서원은 이산보가 거쳐하던 여막(廬幕)자리에 현종 3년(1662년)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후에 조헌이 일찍이 명곡정사에 왕래하며 강의 하였기에 함께 종향(從享)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조수륜 그의 아들 조속을 함께 배향하고 숙종 39년(1713년)에 건암리로 이건하면서 공식적인 조정의 인가서원인 건암서원(建巖書院)이 되었다.

 

서천의 인재를 육성하였던 학문의 도장인 우리 고장 문화유산 건암서원을 다시 복원하게 되면 서천의 역사적 가치의 보존과 우리 군민 모두가 자긍심과 역사의식을 한층 높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러하니 우리 군의 문화유산인 건암서원(建巖書院)의 복원 사업(復元 事業)은 당연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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