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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계변무를 관철시킨 광국일등공신 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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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비인면 남당리 청절사에 송당 유홍 선생이 배향되어 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씨조선의 종계(宗系)의 역사가 명나라에 잘못 전달로 명나라 법전이 잘못되어 200여 년간 고쳐지지 않고 있어 조정에서 유홍을 사은사(謝恩使)로 삼아 종계변무를 관철시켰다. 이로 인해 광국일등공신에 책록된 유홍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비인면 남당리(통박골) 청절사(淸節祠)에 배향된 인물 중에 종계변무(宗系辨誣) 일등공신인 유홍(俞泓)이 있다.

 

유홍은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와 충청, 전라, 경상, 함경,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우의정 등을 지냈다.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자는 지숙(止叔)이고, 호는 송당(松塘) 또는 퇴우당(退憂堂)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아버지는 생원 유관(兪綰)이며, 어머니 의령남씨(宜寧南氏)는 사복시(司僕寺) 정(正)으로 추증된 남충세(南忠世)의 딸이다.

 

 

비인 남당리 입향조(入鄕祖)인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유기창(兪起昌)의 증손자이고, 예조 판서(判書) 유여림(兪汝霖)의 손자이다.

 

유홍(俞泓)은 조부 경안공 유여림(俞汝霖)이 김안로(金安老)의 탄액을 받고 부친 유관(兪綰)과 함께 비인(庇仁) 남당리(통박골)8세때 이사를 와서 가난한 삶을 살았다.

 

유홍(俞泓) 둘째 부인 김광열(金光烈)의 강릉김씨의 딸을 신독재 김집(金集)이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후사가 없어 율곡 이이(李珥)의 서녀(庶女)를 둘째 부인으로 하여금 후사를 이었다.

 

둘째 부인은 김익형(金益炯)과 김익련(金益鍊)을 두었는데, 김익련은 서녀의 자녀로 과거를 볼 수 없었기에 음직으로 찰방을 역임했다.

 

 

또한 둘째 부인의 부친 율곡 이이(李珥)는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는데도 젊은 시절 한때 사찰에서 참선(參禪)의 공부를 하였던 사실을 거론하며 문제를 제시하였으나, 고시관(考試官) 유홍(俞泓)은 “처음 배우는 과정에서 과오를 범했던 것은 주자(朱子)도 면하지 못했던 일이다. 지금은 이미 유학으로 돌아왔는데 문제 삼을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하며 논의를 거쳐 장원으로 합격 선발한 사례를 두고 많은 사람이 이 일을 옳게 여겼다고 하였다.

 

신독재 김집은 율곡 이이(李珥)의 부친 사계 김장생(金長生)과 아들 신독재 김집(金集)으로 학문이 이어진 제자이기도 하다.

 

유홍(俞泓)과 율곡 이이(李珥)는 과거시험장에서의 인연과 또한 두 사람의 딸로 인하여 사위 신독재 김집(金集)을 사위를 두게 되는 인연으로도 이어졌다.

 

1673년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김집(金集)의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다.

 

 

종계변무(宗系辨誣)란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명나라 대명회전(大明會典-명나라 종합법전)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세계(世系)를 시정해 달라고 주청했던 사건이다.

 

고려 말 1390년(공양왕2) 이성계의 정적이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가서 이성계를 타도하려는 목적으로, 공양왕이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고 이성계의 인척이라 한 적이 있다.

 

이때 윤이 등은 이들이 공모해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면서, 이성계의 가계에 관해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명나라는 이 이야기를 믿고, 그 내용을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 大明會典’에 그대로 기록하였다.

 

조선에서 이러한 종계(宗系)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394년(태조 3) 4월이었다.

 

 

건국 직후의 조선으로서는 왕통의 합법성이나 왕권 확립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종계 문제를 계기로 이성계를 무시하고 의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종계오기를 빌미로 조선을 복속시키려고까지 하였다.

 

더구나 이인임은 우왕 때의 권신으로 이성계의 정적이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그의 후사라는 것은 가장 모욕적인 말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이후 양국 간에 매우 심각한 외교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유홍(俞泓)은 1587년(선조20) 10월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는데, 이때 조선에서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잘못된 종계(宗系)를 시정해달라는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요청하였다.

 

이전부터 조선에서는 13차례에 사신을 보내 명나라에 종계변무를 요청하였으나, 명나라에서는 명나라 태조의 유훈(遺訓)이라며 정정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결국 사은사 유홍(俞泓)은 종계를 바로 잡아주겠다는 명나라의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명회전(大明會典)’이 아직 반사(頒賜-황제가 내려줌)되지 않고 있었으므로 선조는 유홍에게 명나라 조정에 청해서 거의 완성된 ‘대명회전’을 얻어오게 하였다.

 

유홍(俞泓)이 예부(禮部)를 찾아가 이를 청하였는데, 예부에서는 아직 황제의 어람(御覽)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주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홍(俞泓)은 머리를 땅에 쪼아 피를 흘리며 간청해 명나라를 감동시켰다.

 

유홍(俞泓)이 거듭 요청한 끝에 예부 상서(尙書) 심이(沈鯉)가 그 정성에 감동하여 제본(題本)을 갖춰 순부(順付-내려줌)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허락하여 대명회전(大明會典)이 특별히 하사되고 칙서까지 내려졌다.

 

1588년(선조21) 조선의 숙원 사업이었던 종계변무를 이루고 ‘대명회전’을 가지고 돌아온 유홍(俞泓)은 종계변무(宗系辨誣)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가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진하였으며, 의금부 판사(判事)를 겸직하였다.

 

당시 ‘대명회전’의 한 질을 받아온 유홍의 소식에 대해 선조가 얼마나 기뻐하였는가는 ‘선조실록’ 선조21년 3월 28일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수백 년 마음 아팠던 응어리가 깨끗이 씻기어, 조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가 없다가 아버지가 있게 되었고, 임금이 없다가 임금이 있게 함으로써, 우리나라 수천리가 비로소 인류(人類)를 되찾았다. 나는 이제야 할 말이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당시 국왕 선조(宣祖)는 1587년 9월 13일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조공품(朝貢品)인 방물(方物)을 도둑맞고, 자금성 동남쪽으로 흐르는 개울인 옥하에 지었던 사신들의 전용 객관인 옥하관(玉河館)이 불에 탄 것 때문에 이유(理由)를 말하고 사죄(謝罪)하는 진사사(陳謝使)로 배삼익(裵三益)을 차임하여 북경에 보냈는데, 명국(明國) 황제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가 우리나라에서 지성으로 사대(事大)한다 하여 귀국하는 유홍(俞泓)에게 칙서를 내려 표창하고, 또 망룡의(蟒龍衣)를 하사하였다.”

 

 

1588년 5월 2일 선조는 모화관(慕華館)에 나가 칙서와 망룡의(蟒龍衣) 받았다.

 

선조는 사은사 유홍(兪泓)에게는 차례를 건너뛰어 오르는 가자(加資)인 초자(超資)에 전(田) 30결(結)과 노비(奴婢) 5구(口)와 가사(家舍), 무명베인 정목(正木) 30동(同)을 하사하였다.

 

그 후 1592년(선조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선조가 관서방면으로 파천(播遷-도성을 떠남)하려고 하니, 유홍(俞泓)이 서울을 고수하여 사직(社稷)과 함께 죽을 것을 상소하였다.

 

그해 5월에 우의정에 임명되어 신성군(信成君)과 정원군(定遠君)을 모시고 평안도로 갔으며, 선조가 평양을 떠나 영변부로 향할 때 선조를 수행하였다.

 

그런 가운데 그해 6월 유홍(俞泓)은 선조에게 자신은 노쇠하여 요동으로 갈 수 없으니 세자에게 보내달라고 청하였고, 선조의 재가를 받았다.

 

이후 서울에 거주하며 우의정(右議政)의 업무를 보던 유홍(俞泓)은 수성대장(守城大將)이 되어 불타 버린 도성을 소제(掃除)하고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런 가운데 선조가 서울로 돌아온 후 사헌부에서는 유홍(俞泓)이 도체찰사를 역임하던 당시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며 탄핵하였고, 선조는 어려운 시기를 함께 헤쳐나간 신하라며 그를 옹호하였다.

 

이듬해인 1594년(선조27) 1월 유홍(俞泓)은 해주(海州)에서 중전(中殿)을 모셨으며, 그해 11월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사헌부로부터 정승의 지위에 오르고는 자신의 재산을 증식하는 것에만 급급할 뿐 백성들을 돌보지 않는다며 체차 해달라는 논핵을 받았다.

 

선조는 대신을 가볍게 체차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으나, 사간원과 홍문관 등에서도 거듭 탄핵을 하는 바람에 유홍(俞泓)은 좌의정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해 12월 25일 해주 우사(寓舍-임시거처하는집)에서 병으로 졸하니, 향년(享年) 71세였다.

 

원래의 묘소는 임진왜란 중인 1595년(선조28) 2월 고양에 임시로 조성하였으나 전쟁이 끝난 후 1612년(광해군4) 12월 현재의 경기도 하남시 하산곡동 261번지로 이장하였다. 두 명의 부인과 합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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