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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서천 문산면 은곡리 대곡서당 문화유적의 역사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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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천군 문산면 은곡리(한실)에 400여 년 전에 대곡서당을 설치, 지역인재를 육성하였고 구한말 민종식이 홍주의병 창의로 봉기하였을 때 구암 구병대 선생께서 의병에 참여하고 군수품 조달에 앞장서며, 대곡서당을 제공하여 의병의 숙영지로서 역할을 제공하였던 대곡서당에 대하여 역사적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서천군 문산면 은곡리 마을회관에서 대곡(大谷-한실)마을 뒷산 450m 지점 원통산(遠通山) 중턱에 옛 대곡서당 자리에 1954년에 복원된 운포서당(雲圃書堂)이 자리하고 있다.

 

은곡리(한실)은 평해구씨 구맹전(丘孟傳)이 1506년 중종사화를 피해 서천으로 낙향 세거하면서 살았던 서천 평해구씨의 입향조의 제2의 고향이기도 하다.

 

1507년(중종 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당시 어지러운 시기에 사화를 피해 이곳으로 정착하여 세거하여 하면서 후손들이 번성하였다.

 

 

이곳에 400여 년 전부터 설치 운영되었던 대곡서당(大谷書堂)이 각종 역사 자료에 기록이 없어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곡서당의 설치와 운영과정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창건역사(創建歷史)

 

가. 창건자(創建者) : 양촌(陽村) 구희로(丘希魯1514~1574)

 

대곡서당(大谷書堂)의 최초 창건은 평해구씨(平海丘氏) 안장공 구종직(丘從直1404〜1477) 후손 양촌(陽村) 구희로(丘希魯1514〜1574) 선생의 강학장소로 사용하였다.

 

구희로 선생이 졸한 지 300여 년이 지난 1939년도 양주조씨(楊州趙氏) 송암(松庵) 조익순(趙翊淳)이 찬(撰)한 구희로 선생의 묘지명에 대곡서당에 인근 사방에서 배움을 청하는 자가 참으로 많았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선생의 서재뿐만 아니라 후학들에게도 학문을 강학하였던 서당으로 것으로 여겨진다.

 

57세의 나이로 졸한 후에는 강학서당으로써의 기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 중수자(重修者) : 운포(雲圃) 구경천(丘擎天1783~1854)

 

구경천은 약관의 나이(20세) 1803년 낙향 당시의 혼탁한 세상을 개탄하고 세상을 등지고 고향 집에서 두문불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왕래하는 것을 하지 않고, 병풍을 두르고 학문에 전념하며 뜻을 두고 구경천은 을해년(乙亥年 1815년) 봄에 대곡서당을 건축하고 후학을 가르쳐 온 지 50년을 운영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1875년 장태현(張台鉉)의 대곡서당기(大谷書堂記)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후 학자 장태현의 대곡서당기의 기록을 보면 본인도 본 대곡서당을 왕래하면서 운포(雲圃) 구경천 선생으로부터 수년간의 학업을 받아 다소 학문을 익힐 수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대곡서당이 운영된 지도 50년이 지난 을해년(1875년)에 훼손되어 대곡서당을 운영할 수 없어서 운포 구경천 선생의 뜻을 이어 갈 수 있도록 당초의 서당 규모보다 더 확장하여 다시 세웠다고 기술하였다.

 

그 후 운포(雲圃) 선생께서 서당을 이어가면서 자신의 호(號)를 따서 운포서당(雲圃書堂)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2. 구한말 대곡서당은 민종식 홍주의병 숙영지로 제공

 

의병장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1860〜1924)이 1917년 찬(撰)한 구암(龜巖) 구병대(丘秉大 1858~1916) 선생 묘지명의 기록과 조선환여승람(朝鮮寰與勝覽)에 조부(祖父)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구석붕(丘錫朋)이고, 구병대는 진사에 합격하였다.

 

 

1906년 민종식이 창의한 제2차 홍주의병 군사(軍師)책임을 맡았던 위관(韋觀) 김상덕(金商悳 1852~1924)의 찬장(撰狀)에서 말하길, 구병대의 행실을 보면 근면하고 부모에 대한 효(孝)뿐만 아니라, 아랫사람에게도 자애로우며 의로운 일을 위하여 일어나는 용기가 있는 자이며, 또한 후학을 강학(講學)하는 교사(敎師)로 활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병대(丘秉大) 선생은 일찍이 순국지사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선생이 우리 고장 풍옥헌 조수륜 선생이 사시던 구택(舊宅)에서 뵙고 가르침을 청하여 송병선의 문하생이 되었고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이 찬(撰)한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묘비명에 1906년 4월 19일 민종식(閔宗植) 의병대장이 봉기한 홍주의병 창의 때 민종식이 이끄는 의병에 들어가 군수품을 모집하는 일을 앞장섰다.

 

 

100명의 의병이 홍산현을 함락한 후 문산면 구변동(九邊洞)에서 숙영할 때 대곡서당(大谷書堂)의 강학교사로 있었기에 대곡서당을 숙영지로 제공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것들은 구병대가 민종식의 의병에 가담한 사실을 비추어 볼 때 가능하다. 대곡서당에서 야숙하면서 스승인 구병대를 따르는 백성을 규합하였을 것이다.

 

홍주의병실록을 보면 구변동에서 300여 명, 그리고 문장리(文章里)에서 1박 하면서 300명을 더하여 다음날 1,000여 명의 의병이 서천읍성을 함락하고 서천군수 이종석(李種奭)을 감금하고 인장과 관청의 돈, 모슬포총, 탄환 등 무기를 탈취하고 여세를 몰아 비인, 판교, 남포를 거처 홍주성을 함락한 사실을 홍주의병록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대곡서당(大谷書堂)은 민종식이 이끄는 제2차 홍주의병의 숙영지로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학교사(講學敎師)를 비롯하여 주변의 백성들이 의병에 가담하는 용기를 일으키게 할 수 있도록 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대곡서당이 아닐 수 없다.

 

구암 구병대 묘지는 시초면 신곡리에 있고 묘지명은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이 짓고, 윤용구(尹用求) 썼다.

 

3. 일제 강점기 대곡서당(大谷書堂)

 

1910년 일제가 강제 병합하고 강점기 이후에는 대곡서당(大谷書堂)에서 지역선각자들이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청년들에 대한 계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문산면 은곡리 평해구씨 종중에서 간직하고 있던 대곡서당(大谷書堂)에서 소화 17년(1942) 9월 26일 문산면 대곡부락(大谷部落) 국어강습회(國語講習會) 기념 촬영을 한 사진이 최근에 발견되었다.

 

 

강습대상자들은 대부분 젊은 여성들과 일부 남성 청년들이 함께 기념 촬영하였다.

 

강습 대상 조직은 영흥회(永興會) 조직 단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영흥회(永興會)는 동아일보 1927년 10월 4일 자 기사에, 신간영흥지회설치대회(新幹永興設置大會)를 개최하였다고 보도하였다.

 

1927년 11월 1일에 설치한 신간회 소속으로 신간영흥회(新幹永興會)가 각 지역에 지부를 두고 운영하였던 계몽단체일 것이라 생각된다.

 

 

신간회(新幹會)는 1927년 2월 15일에 서울YMCA 회관에서 창립한 단체로 초대 회장에 조선일보 사장 우리 고장 한산 출신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이 선출되었다.

 

신간회는 1931년 5월 15일 전국대회를 끝으로 해산되었다. 대곡부락에 영흥회(永興會) 단체가 조직된 것은 아마 월남 이상재 선생이 신간 회장으로 연관성도 있지 아니할까 여겨진다.

 

4. 현재의 건물 운포당(雲圃堂)

 

현재의 건축물(운포당)은 1875년에 확장하여 중수한 대곡서당이 70년이 지난 1954년 2월 7일에 재건축하여(현 건물 상량문 甲午년 2월 7일) 현손(玄孫) 구병도(丘秉度1883〜1958) 선생께서 정해년(丁亥年 1947) 11월에 대곡서당기(大谷書堂記) 현판의 글씨를 썼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5. 향후 문화유산 보존관리

 

현재의 건물은 당시 대곡서당의 위치에 그대로 복원하였으나 운영 내지는 관리가 되지 않고 무성한 잡초만 자라고 있어 옛 선각자들이 뜻을 두고 설치하여 인재를 길러냈고 나라가 어려울 때 분연히 일어났던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대곡서당의 문화유적이 방치되어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늦게나마 다시 역사적 가치를 재인식하고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일이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당연한 책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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