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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직재의 옥으로 희생된 풍옥헌 조수륜과 인조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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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건암서원에 풍옥헌 조수륜과 그의 아들 창강 조속이 배향되어 있다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후 복설되지 않고 있다. 풍옥헌과 창강 선생의 서원배향과정과 광해군의 폭정으로 희생된 풍옥헌 선생에 대한 훗날 인조반정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 서원창건과 사액

 

우리 고장 문산면 지원리(鳴谷-명곡)에 명곡서원(鳴谷書院)이 있었다. 건암리로 이전하기 전에는 사액되지 못한 명곡서원은 현종 3년(1662년)에 사당의 형태로 창건되어 명곡 이산보(李山甫1539~1594)와 중봉 조헌(趙憲1544~1592)을 배향면서 1709년에 풍옥헌 조수륜과 창강 조속 부자를 추가 배향하였다.

 

그 후 문산면 건암리로 이건하고 1713년 10월 24일 사액서원(賜額書院-조정의 인가서원)인 건암서원(建巖書院)이 되었다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후 현재까지 복설되지 못하였다.

 

2. 풍옥헌의 낙향의 생활

 

풍옥헌 조수륜(趙守倫)은 경기도 과천(果川)에서 태어났고 서천 문조향(文照鄕-서지골 현 문장교회 옆 서쪽 마을) 즉 문장리(화리) 마을에 낙향하여 5~6년간 살았다.

 

그곳에서 창강 조속(趙涑)을 낳았다. 풍옥헌 사후에 옛집에 후학을 강학하였던 곳으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문산면 은곡리(한실)에서 대곡서당(大谷서당 훗날 雲圃堂)에서 강학하였던 평해구씨 구암(龜巖) 구병대(丘秉大1858~1916) 선생께서 일찍이 순국지사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 선생께서 우리 고장 풍옥헌 조수륜 선생께 사시던 구택(舊宅)에서 뵙고 가르침을 청하여 송병선의 문하생이 되었다고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이 찬(撰)한 구병대(丘秉大)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풍옥헌 구택(舊宅)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문산면 건암리에 있던 건암서원이 훼철된 후 이곳으로 강학의 장소로 이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3. 풍옥헌 구택은 홍주의병의 숙영지

 

홍주의병실록을 보면, 1906년 4월 19일 의병이 문산면 구변동(九邊洞)과 문장리(文章里)에서 숙영하면서 구변동에서 300여 명, 문장리(文章里)에서 300명을 더하여 다음날 1,000여 명의 의병이 서천읍성(舒川邑城)을 함락하고 서천군수 이종석(李種奭)을 감금하고 인장과 관청의 돈, 모슬포총, 탄환 등 무기를 탈취하고 여세를 몰아 비인, 판교, 남포를 거처 홍주성을 함락한 사실을 홍주의병록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풍옥헌 구택(舊宅)은 강학(講學)과 홍주의병의 숙영지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4. 둔덕리(용학동) 풍옥헌 별장의 은거와 관직 생활

 

풍옥헌은 서쪽으로 서천읍 둔덕리(용학동)에 풍옥헌(風玉軒) 별장(別莊)을 짓고 3년간을 거처하였다.

 

조수륜은 선조 38년(1605년) 50세에 대흥 현감(大興 縣監)으로 제수되었다가 2년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광해 3년(1611년) 56세에 평택 현감으로 제수되었다가 다음 해 1612년 김직재(金直哉 1554~1612) 옥사(獄事)의 무고로 형신(刑訊-죄를 심문하며 고문의 형벌)을 받다가 감옥에서 57세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622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여 복권되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다.

 

 

또한 아들 창강 조속(趙涑)은 인조반정의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인조반정 참여 공신)에 올랐으나 억울하게 죽은 부친의 원한을 갚기 위해 참여하였기에 공신등록을 거절하였으며, 또한 병조참판(兵曹參判) 추증되었다.

 

5. 김직재(金直哉)의 옥(獄)사건

 

풍옥헌 조수륜(趙守倫)의 억울한 죽음은 광해군 때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하던 소북파(小北派)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옥사(獄事)로 광해군 4년(1612년) 2월 황해도 봉산군수 신율(申慄)이 어보(御寶)와 관인을 위조해 군역을 피하려고 했던 김경립(金景立, 일명 濟世)을 체포한 뒤, 유팽석(柳彭錫)을 시켜 무옥(誣獄-무고한 죄목)을 꾸미게 한 데서 발단이 되었다.

 

신율(申慄)은 체포된 김경립의 동생 김익진(金翼辰)에게는 8도(八道)에 각각 대장(大將), 별장(別將)을 정해 불시에 서울을 함락시키고자 하였으며, 김경립 자신도 여기에 가담하였다고 허위진술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또, 김경립의 동생 김익진(金翼辰)에게는 8도도대장(八道都大將)이 김백함(金白緘)이며, 김백함은 아버지 김직재(金直哉)의 실직(失職-직업을 잃음)에 대한 불만을 품고 모역하였다고 진술하게 하였다.

 

봉산군수 신률(申慄1572∽1613))은 김직재와 그의 아들 김백함을 역모의 주모자로 몰았다.

 

황해병사 유공량(柳公亮)과 감사 윤훤(尹暄)은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고 김직재를 체포하여 조정으로 보냈다.

 

김직재를 국문하였고, 아들 김백함, 김직재의 사위 황보신(皇甫信) 등이 모진 고문을 받고, 김백함은 자기가 역모의 주모자이며 그들이 왕으로 추대한 인물은 진릉군(晉陵君)이라고 인정했다.

 

또한 이들은 고문에 못 이겨 황혁(黃赫 1551~1612) 등과 함께 음모를 꾸며 왕의 형인 순화군(順和君-선조의 6남)의 양자인 진릉군(晉陵君)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라고 진술했다.

 

 

황혁(黃赫-순화군의 장인)은 곤장을 맞고 옥사하였다.

 

광해군의 형 임해군(臨海君)과 조카인 진릉군(晉陵君)도 역모죄를 가하여 죽였다.

 

황혁(黃赫)은 당시 신천(信川-황해도)에 유배되어 있었기에 진릉군이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의심했다.

 

풍옥헌 조수륜은 황혁(黃赫)의 처남이기도 하다.

 

6. 궁류시와 권필의 죽음

 

권필(權韠-지족당 權讓의 종조부)은 광해군의 비 유씨의 동생 등 외척들의 방종을 비난하는 궁류시(宮柳詩)를 남겼다.

 

“宮柳靑靑 花亂飛 /궁궐의 버들푸릇푸릇하고 꾀꼬리는 요란하게 나는구나/滿城冠蓋 媚春暉/성에 가득찬 벼슬아치들은 봄볕에 상긋기리네/朝家共賀 昇平樂/조정에서는 함께 태평의 즐거움을 하례하는 차에/誰遣危言 出布衣/누가 시켜 위태한 말이 선비의 입에서 나오게 하였나.”라고 지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그가 지었음이 발각되어 친국 받을 때 백사 이항복(李恒福)은 울며 임금 광해에게 말했다.

 

“경솔한 선비의 한 때 망년된 시로서 어찌 형장(刑杖)질 하는데 이를 것이며, 이 일이 역옥(逆獄)과 관계가 없는데, 만약 중한 형을 시행하여 죽음에 이르면, 어찌 성상의 덕에 누(累)가 되지 않겠습니까. 대개 이 시(詩)가 무심하게 지은 것은 아니고 비록 지적한 뜻이 있으나 또한 어찌 중형을 할 정도에 이르겠습니까?”하고 재삼 울면서 간청하였으나 광해가 듣지 않았다.

 

뒤 해남으로 유배되는 귀양길에 올라 동대문 밖에 다다랐을 때 행인들이 주는 동정의 술을 폭음한 다음 날 장독으로 죽었다.

 

그 뒤 이 사건이 무고임이 밝혀져서 최유해, 정호선, 정경세, 등 26명은 석방되었다. 권필(權韠)은 1623년 인조반정 뒤, 복권되어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

 

7. 김직재의 옥사(獄事)의 배경

 

 

조수륜의 매형인 황혁(黃赫)은 봉산군수 신률(申慄)과의 과거 집안 간에 다툼으로 원한을 갖고 있었다. 광해군 일기를 보면, 광해 4년(1612) 신률의 집안과 황혁의 집안 간의 원한을 논한 기사가 보인다.

 

“살펴보건대 신률의 조부 신점(申點)이 황혁의 부친 황정욱(黃廷彧)과 집이 서로 이웃해 있었는데 기축년 여름 황정욱(黃廷彧)이 퇴근하는 길에 화살이 그의 수레에 맞았다. 도졸(導卒-하인)이 달려 따라가서 화살을 쏜 사람과 따지다가 그와 싸움하여 상처를 입었다. 화살을 쏜 사람은 신률(申慄)의 형 신열(申悅)이었다. 그 소행을 형조에 보고하여 잡아다 다스리려 했으나 숨어버려 잡지 못하였다. 그 뒤 황정욱(黃廷彧)의 집에서 고용 노비 한 사람을 얻어 집에서 일을 시켰는데 그 노비가 몰래 황정욱의 침실에다 뼈를 묻어놓고 저주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신문하니, 노비가 말하길 본래 신열(申悅)의 부친의 노비인데 형 신순일(申純一)이 전의 일로 원망을 품고 저로 하여금 거짓 고용 노비 노릇을 하면서 흉측한 짓을 행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정욱은 그 노비를 형조에 송치하였는데, 옥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임진왜란을 만나 풀어주었다. 이와 같은 집안의 원한으로 인하여 황혁(黃赫)을 역모를 가담하였다는 무옥을 논하고 있다.

 

8. 권필의 형 권도 귀양

 

권필의 형 권도(權導)도 죄를 입고 해남(海南)으로 귀양 갔는데 떠날 때에 시를 짓기를, “신의 죄 산 같으니 죽음도 달게 받겠는데/ 임금의 은혜 너그럽게 용사하여 강남으로 귀양가오/갈림길 이르러 특별히 무궁한 한(恨)이 있음은/ 자애로운 부모님의 연세가 여든셋이기 때문이라네.”라 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이 듣고 슬퍼하였다는 <속잡록>에 실려 있다.

 

<공사문건>의 기록에 권필이 일찍이 족인의 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취해서 누웠을 때 광해군(임금)의 처남인 유희분(柳希奮)이 마침 왔다.

 

주인이 권필을 발로 차면서 말하기를, “문창(文昌)대감이 왔소” 하니, 권필이 눈을 부릅뜨고 한참 보다가, “네가 유희분인가? 네가 부귀를 누리면서 국사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는냐? 나라가 망하면 네 집도 망할 것이니 도끼가 네 목에는 이르지 않겠느냐.?” 하였다.

 

유희분은 말을 못하고 기가 막혀서 가벼렸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권필(權韠)의 화는 순전히 궁류 시 때문이 아니라고 하였다.

 

9. 풍옥헌 사위 이덕수(李德洙) 연좌죄에서 구해 주다.

 

조수륜의 사위 이덕수(李德洙 1577〜1645)도 역모로 형신을 하려 하자, 이덕형(李德泂-어성 신담 사위), 이항복(李恒福), 최유원 등이 적극 변호하여 사위 이덕수를 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조수륜은 신원이 되었다. 인조가 즉위하여 조수륜을 좌승지에 추증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사제(賜祭:임금이 죽은 신하에 대한 제사)하였다.

 

또 귀양 가 있었던 사위 이덕수(李德洙)가 조정에 돌아와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이덕형(李德泂)의 장인 어성 신담(申湛) 선생은 고향이 화양면 활동리(은골)이다

 

10. 창강 조속(趙涑)의 인조반정 참여와 공신녹권 사양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에 인조는 권필, 조수륜, 황혁(黃赫 : 조수륜의 매형)등에게 치제(致祭)하고 그 자손을 녹용(錄用-관직에 임용)하도록 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수륜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남아 있다.

 

“조수륜은 풍양인으로 응교 조정기(趙廷機)의 아들인데, 기묘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어려서 성혼(成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에 힘쓰고 절조를 굳게 지켰으며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안빈낙도(安貧樂道-가난을 낙으로 삼다)하였으며 후생을 가르쳤다. 일찍이 대신의 천거를 받아 늦게야 음관(蔭官)으로 벼슬에 나아가 두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그가 떠난 뒤에까지 고을 백성들이 그를 흠모하였다. 그러다가 임자년 김직재 옥사 때 서찰 문제로 체포되어 죽었다.”라고 하였다.

 

 

조수륜의 셋째 아들 창강 조속(趙涑)이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올랐으나 극구 사양하여 제외되었다.

 

조수륜의 첫째 아들 조척(趙滌)은 부친이 옥사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자 땅을 두드리며 통곡하고 호소하였는데, 열 손가락 손톱이 모두 빠졌다.

 

조수륜이 죽자 3년을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탈상 뒤에도 묘 옆에 기거하면서 애통해 하다가 사망하였다.

 

이에 인조반정으로 조척도 증직하고 정려(旌閭)하였다.

 

11. 인조반정 후 고향에서 청빈하게 삶을 마감

 

창강 조속(趙涑)은 장령과 김제군수, 임피현감 등을 지냈다. 인조반정이 이루어진 뒤 즉시 관직에서 물러나 시골로 돌아가 서울에 발길을 끊었다.

 

만년에는 눈병을 앓아 시력을 잃었는데도 운명에 편안하여서 애당초 병을 앓지 않았던 사람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혹 병을 칭탁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였다.

 

조속이 74세로 사망하자 왕조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장령 조속(趙涑)이 죽었다. 아비는 현감 조수륜(趙守倫)인데, 광해군 때에 억울하게 죽었다. 조속이 아비가 비명에 죽은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여, 인조반정할 때 참여한 공이 많았는데, 일이 이루어진 뒤에 단연코 공훈록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것으로 그의 뜻을 고결하게 여겼다. 효종 때에 사헌부 사간원에 발탁되었는데,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 어려웠는데도 태연하였다. 글씨와 그림에 솜씨가 있어 필법이 세상에 전해진다.”하였다.

 

조수륜의 동생 조수익(趙守翼)의 7대 후손 영의정을 지낸 조만영(趙萬永)의 딸인 익종(翼宗)의 대왕대비(신정왕후) 조대비(헌종 모친)로 한때 수령첨정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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