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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숭문동 8문장가 시인 진택 신광하의 살아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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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화양면 활동리와 대등리(숭문동)에 8 문장가 중 시인 진택 신광하와 그 형제들이 살았다. 당대에 문장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관계의 진출이 너무 늦어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삶을 살아갔다 숭문동 시인 진택 신광하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숭문동(崇文洞)은 우리고장 화양면 활동리와 대등리의 옛 마을이름의 별칭이다.

 

고령신씨(高靈申氏) 석북 신광수(申光洙)의 가계는 6대조 참판공 신영원(申永源1496∽1572)께서 한산이씨 목은 이색(李穡1328∽1396)선생의 후손인 이윤수(李允秀)공의 따님과 결혼하여 처가인 활동리(은골, 어은동)에 정착 세거하여 입향조가 되었다.

 

장남 신담(申湛-호 어성-1519∽1595)은 충청도관찰사와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을 역임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첨추공 신호(申澔1687∽1767)의 첫째부인 성산이씨는 석북신광수(申光洙1712-1775)와 기록 신광연(신광연1715∽1778)을 낳으시고, 둘째부인 전주이씨는 진택 신광하(申光河1729-1796)와부용당신씨(申氏1732-1791)를부용당신씨(申氏1732-1791)를 낳으셨다.

 

석북 신광수는 아들5명을 두었으나, 동생 신광연과 신광하는 후사가 없어 신광수 아둘 중 4째 신석상(申奭相1737-1816)은 신광연(申光淵)에게, 5째 신보상(申甫相1743-1806)은 신광하(申光河)에게 각각 출계하여 후사를 이었다.

 

 

진택 신광하(申光河)는 영조5년(1729년)7월4일 한산군 남하면 활동리(숭문동)에서 태어났다.

 

그 후 석북 신광수(申光洙)와 3명의 동생 아들과 함께 숭문북동(현 대등리)에 새로운 집터를 마련 신축 세거하면서 숭문동 8문장가를 배출하였다.

 

1, 숭문북동에 새집 마련

 

1749년도2월15일자 숭문동에 신광수의 새집을 짓는 토지축문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집의 위치와 방향 주변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때는 1749년2월15일에 고령 신광하(申光河)는 감히 토지의 신령께 고하나이다. 집터는 뒤로 큰 산이 등지고 동북방향입니다. 집터의 자리는 신비스럽게 빛나며, 드높고 충만합니다, 좌우에 청룡과 백호가 자리하고 그 원기는 극에 달았습니다. 실로 이러함에 나의집터로 열고자하나니 새로 짓는 집이 후손들로 하여금 선조(석북 신광수)의 집이라 하게 하소서”--이하생략--【維太歲己巳二月己卯朔十五日癸巳。高靈申光河。敢昭告于土地之神。維嶽艮位。赫靈磅礴。爲虎爲龍。元氣所極。實開我基。先祖是宅--】집의 방향은 뒷산 어성산(漁城山)의 높은 산을 동북방향을 등지고 남서쪽을 향하고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을 갖춘 명당임을 밝히고 있다.

 

토지신축문은 석북 신광수가 짓고 동생 광하가 고하였다. 토지축문을 볼 때 진택 신광수의 형님들과 조카들이 함께 이웃 숭문북동(대등리)로 새집을 짓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2. 시 창작에 몰두하며 산천 유람

 

진택 신광하는 시인으로 주목받던 1756년 사마시(司馬試-생원지사 과시)에 응시하여 합격했지만,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진택 신광하의 집안은 남인으로 노론이 집권하던 정치 상황에서 형님 석북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후원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진택 신광하는 과거시험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시(詩)창작에 몰두하며 시인으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자연히 과거장(科擧場)나가는 것은 일종의 요식행위로 여기고 과거로 출세하는 것을 접었다. 보령 청라 외사촌 이우경(1724∽1813)와 과거장에서 보여준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다.

 

1778년 음력8월20일 과거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진택 신광하는 과시장을 뒤로하고 56일간 2천여리의 금강산여행을 떠나버렸다.

 

그날 조카 신위상, 신석상과 이별의 시를 지었다.

 

 

“동쪽 성문 시냇물 우는 다리 지나/남녁 나그네가 이제 막 성문을 나서네/ 맑은 새벽, 안개와 서리는 축축하고/가을하늘, 나뭇잎과 풀은 성글어졌네./창공은 막힌 데 없어 전신이 홀로 활개치고/들판이 펼쳐지니 마음이 점차 가뿐해지네./떠나자!, 내가 좋아하는 것 쫒아서/아련하구나! 내 가고 싶은 데로 가리라./” 이렇듯 진택 신광하는 산수를 유람하며 즐겼다.

 

시인 진택 신광하는 세상과 천지가 가두지 못한 진정한 유랑자였다. 백두산 대택(大澤, 곧 천지)를 진동시킨다는 호를 가진 진택(震澤)은 몸과 영혼의 거리가 끝이 없는 긴 사람이다.

 

진택 자신도 기꺼이 청광(淸狂:마음은 깨끗하지만, 상식과 맞지 않음)을 주체할 수 없어 진정한 노님을 꿈꾸는 사람이라 자처했다.

 

18세기 조선이 허락한 국토의 끝과 끝인 남쪽 강진과 해남으로부터 북쪽 백두산 절정까지 평생을 걸어 다닌 사람인 진택 신광하의 새로운 인간 탄생을 알림이 아닌가?

 

“동방에 기이한 선비가 있어, 스스로를 진택(震澤)이라 불렀네(東方有奇士, 自號曰震澤)/세상 바깥에서 노닐었으나 마음은 담박(淡泊:욕심이 없고 깨끗한 마음)한 데 두었네/필마로 삼천리를 돌아다니고,/ 바람처럼 백두산에 올랐네/천지(天池)에서 갓끈을 씻고/대각봉(大角峰)에 기대 휘파람을 불었네/세상을 굽어보며 개미굴로 여겼고/하늘의 별들을 손으로 만졌네/ 바람에 맞서 호쾌하게 노래 부르니/ 그 소리가 산과 골짝을 진동시켰네/ --대제학 홍량호(洪良浩)는 만사(輓詞)로 진택 신광하를 애도하였다.

 

 

3. 생애 시 작품 2천수 남김

 

진택 신광하는 진택집(震澤集)에 2,000여수의 시를 남겼다. 진택집의 구성은시(詩)ㆍ서(書)ㆍ제문(祭文)ㆍ묘지(墓誌)ㆍ묘지명(墓誌銘)ㆍ잡저(雜著)ㆍ부록(附綠) 등으로 구성(構成)되어 있다.

 

이 중에서 시는 저자가 옮겨 다닌 고장을 중심(中心)으로 엮어져 있는데, 남유록(南遊錄)ㆍ월중록(越中錄)ㆍ동해록(東海錄)ㆍ사군록(四郡錄)ㆍ동유록(東遊錄)ㆍ북유록(北遊錄)ㆍ백두록(白頭錄)ㆍ풍악록(楓岳錄)ㆍ서유록(西遊錄) 등의 편명(篇名)이 붙어 있다. 진택집(震澤集)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진택 큰형 석북 신광수 서거 200주년을 맞아 한국한문학연구원에서 1906년 석북 신광수 후손 신관휴(申觀休1838〜1908)가 간행한 활자본 창사본(滄蓑本)과 자료를 보충하여 신광수, 신광연, 신광하, 신부용당 신씨의 문집을 모아 【숭문연방집(崇文聯芳集)】을 1975년도 간행하게 됨에 따라 알려졌다.

 

숭문연방집의 해제는 당시 1975년 한국한문학연구회 회장 이가원(李家源1917∽2000) 선생께서 해제를 썼다.

 

특히 진택집(震澤集)은 진택공의 종7대손 신완식(申完植)과 이가원 회장이 부족한 부분을 보완 필사본으로 영인발간 하였다.

 

진택 신광하는 영조32년(1756)진사(進士)에 합격하고 남쪽으로 지방을 유람하며 남긴 시가 진택집(震澤集) 남유록(南遊錄)에 잘 나타나 있다.

 

 

남유록에 대한 설명을 보면, “【公得司馬 南遊威鳳金山 仍爲踰嶺 轉至康海而歸】” 진택공께서 진사과시에 합격하고 남쪽으로 유람하셨는데 남쪽지방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威鳳마을)과 김제시 금산사(金山寺)을 유람하고 이어서 노령(蘆嶺)고개를 넘고 전남 강진(康津)과 해남(海南)을 돌아서 집에 도착하였다고 설명하였다.

 

4. 고향을 떠나며 빈곤한 생활의 연속

 

신광하의 형제들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해 빈곤한 생활을 하며 살았다.

 

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1695∽1728)의 반란 사건에 관련하여 충청도 청주에 사는 먼 친족 신천영(申天永)이 반란군에 가담하였던 까닭(석북17세 때)에 한때 고령신씨 전체가 정거(停擧-과거시험 금지)처분으로 과거응시 자체가 정지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으나, 한산지역 고령신씨들은 격쟁과 상소를 통해 한산지역 고령신씨 가문에 한하여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얻기도 하였다.

 

1752년 신광하는 궁핍한 생활을 해소하기 위해 외가댁 남포 청라(도화동)를 찾아가 의탁하기도 하였다.

 

큰형 석북 신광수는당시 24세 신광하에게 써준 시를 보면 당시의 궁핍한 생활의 내면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내 아우가 어머님을 따라/보령외가에 가서 나그네 되는 일이 많구나/흰 구름은 외로이 제 절로 떠나가는데/꽃다운 봄풀이 시들면 또 어찌 하랴!/헤어지자니 시 쓰려는 마음이 문득 줄어들고/병든 탓에 봄철이 지나가는 것도 안타깝구나/너도 또한 나를 그리워할 줄 알겠으니/꿈속에서 쑥 자라는 언덕으로 나를 찾아오겠지/”

 

신광수 나이 41세 때 신광하 외삼촌인 이제암(李齊嵒1690∽1778)과 외사촌 이우경(李羽慶1724∽1813)의 근거지로 신광수 가족이 자주 찾아 의탁하기도 하였다.

 

 

5. 다시 찾은 고향의 삶

 

그 뒤 7년 후인 1759년 신광하는 보령 외가에서 돌아와 서천군 장항읍 송림리(계산-당뫼) 송강(松江-현 솔리천)으로 이사 해 해안가 방풍(防風) 약초를 캐어 생활하였다.

 

석북 신광수 큰 형이 그 소식을 듣고, “한 세상 살아가기 어렵고 어렵나니, 동생의 그런 삶은 실로 곤궁하기 때문이다”라고 탄식하며 아우 진택 신광하가 살고 있는 바닷가에 찾아가 심정을 시 남겼다.

“온 산에 눈바람이 몰아치는 밤/형제가 등잔불 앞에 앉았네/옷과 음식은 추운 세밑이 걱정스럽고/공명을 이루기에는 흐르는 세월이 서글퍼지네/좋은 세상에 감히 바닷가에서 떠돌랴만/궁벽한 곳에서 밭가는 땅이나 얻고 싶네./살아가는 일일랑 우리 서로 힘써 보자/문장이란 것이 동전 한 푼 되질 못하니./”

 

바닷가에 동생 신광연(申光淵)과 신광하(申光河)가 방풍의 약초를 캐고 또한 바닷물을 길어다 소금을 굽는 자염(煮鹽)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신광하의 진택집 채방풍(採防風)의 시(詩)에 “약초 캐서 생활하며 나의 오두막집 바닷가에 있다—중략—영험스런 방풍뿌리는 오래된 것은 속이 비어있다. 옛 의약서적에 꽃은 약제로 쓰지 않고 뿌리만 약제로 쓰니 둘째 형(申光淵)께 채취해 약으로 드려야 하였지 하며 형의 건강을 걱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생애(生涯)라는 시(詩)에도 송강(松江)의 강위에 삼간집에 살고 있다고 하고 있다. 해교잡영(海僑雜咏) 시 에도 ---장항 송강(松江-솔리천)의 계산(鷄山-당뫼)에 바닷물 끓여 자염하는 12개의 솥이 있다. 내일 해가 뜨면 하얀 소금 꽃이 피어나겠지 내일 아침에는 강경에 올라가 소금시장의 가격을 문의해봐야겠다”.---이하 생략— 라며 한때 광연 형님과 함께 방풍의 약초를 깨고 소금을 만드는 자염업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신광수는 20세부터 20여 년 동안 출입하던 과거 시험장은 씁씁한 낙방과 낭패감을 안겨주었으니 생활의 궁핍함을 말이 아니었다. 과거를 단념하고 1757년에 고향 숭문동으로 돌아온 후의 생활 모습이다.

 

1757년 19세 나이로 해남 석북 신광수의 장인 윤두서(尹斗緖) 손자 윤운(尹惲)에게 시집간 여동생 부용당 신씨(芙蓉堂 申氏)도 마찬가지였다.

 

 

친정인 숭문동으로 이사를 온 여동생이 1759년 보령 외가의 농토를 얻어 떠나가는 뒷모습을 시로 담아두었다.

 

“5월 신성 가는 길에서 너를 이별하자니/총총히 떠나는 네 모습이 가련 하구나/ 가을걷이 끝나면 다시 만날 줄 알지만 /병중이라 만사가 쉬 서글퍼지는 구나/가난하면 골육도 흩어지는 일이 많고/먼 길이라 편지도 때에 맞추기 어려우리/문까지 따라가 제일 우는 녀석은 누군가?/어미 없이 줄줄 따랐던 내 셋째 아이놈 일세/”

이렇듯 석북 형제들이 생활의 궁핍 때문에 헤어져 살아갔다.

 

6. 채제공의 천거로 늦은 관직 생활 시작

 

신광하는 번암 채제공의 도움으로 1786년 조경묘참봉(肇慶廟參奉)에 제수되고 그 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형조좌랑·정조14년(1790)에 강원도 인제현감(麟蹄縣監)·우승지·공조참의를 거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좌승지로 승차 되었다.

 

1791년 63세에 대과 어제(御題) 어고(御考)에 급제한 후 재시험 어고에서도 급제 장원했으며 이듬해 정조 16년(1792년) 4월 24일 형조좌랑 때 정조가 시제를 낸 성시전도(城市全圖)에서도 장원의 영예를 얻었다.

 

정조의 고과 평을 보면 1등은 병조정랑 진택 신광하(申光河), 2등은 검서관 박제가, 3등은 검교직각 이만수이며, 승지 윤필병, 겸검서관 이덕무·유득공은 삼상(三上)으로 공동 4등을 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1등에서 4등까지 6편의 시에 대해서는 직접 평을 하였는데 1등을 한 신광하(申光河)의 시권에 대해서는 ‘소리가 있는 그림 같다 유성화(有聲畵), 2등 박제가의 시권은 ‘말을 알아듣는 그림 같다 해어화(解語畵). 3등 이만수 시권에 대해서는 ’시권이 좋다 시권가(試券哿), 4등 윤필병의 시권에 대해서는 ‘넉넉하다 담(贍)’, 이덕무의 시권에 대해서는 ‘아취가 있다 아(雅)’, 유득공의 시권에 대해서는 ‘모두가 그림 같다 도시화(都是畵)’라고 평가하였다.

 

1796년(정조 20)에는 휴직을 청하고 호서지방을 여행하던 중에 질손 헌동(憲東)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한산에 갔다가 6월 16일 나라의 경사를 맞아 하례하는 대열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고된 일정으로 병이 났고 6월 30일에 성 서쪽 구교(臼橋)의 우거하던 집에서 향년68세로 세상을 떴다. 묘지는 파주시 검산동98-1 월롱산 남록 선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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