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 흐림서산 3.5℃
  • 대전 3.3℃
  • 홍성(예) 3.6℃
  • 흐림천안 2.7℃
  • 흐림보령 3.0℃
  • 흐림부여 3.0℃
  • 흐림금산 4.4℃
기상청 제공

[기획] 한산·서천 동학 농민전쟁 진압과 동학 잔당 활동 ①

URL복사

 

1882년 이후의 각종 사회 혼란과 조선정부의 부패로 민심이 동요하던 가운데 1894년 2월 15일 탐학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군의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집단으로 무장 시위를 벌였다. 또한 한산, 서천지역에서도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우리고장 동학 농민전쟁의 진압과 그 후의 동학잔당의 보복 등에 대하여 2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동학 농민혁명(東學 農民革命), 동학 혁명(東學 革命), 동학 운동(東學 運動), 동학 농민운동(東學 農民運動) 또는 동학 농민전쟁(東學 農民戰爭)으로 불리기 시작한 동학 난(東學 亂)은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백성의 무장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3차)로 나뉜다.

 

초기에는 동학난, 동비의 난(亂)으로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 농민혁명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 농민운동(甲午 農民運動), 갑오 농민전쟁(甲午 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농민운동 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 고부군 동학 농민 봉기 배경

 

1892년 전봉준이 살던 고부군에 조병갑(趙秉甲 1844∽1912)이 고부군수로 영전하여 왔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이 형별을 가하였다.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한 조병갑은 농민들을 괴롭혔다.

 

전라도 고부는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가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한 다음 물 값을 받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여러 죄명을 씌어 벌금을 받아 냈고, 태인군수를 지낸 아버지 조규순(趙奎淳)의 비석을 만든다는 핑계로 돈을 걷기도 하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 고부군수 조병갑의 선정비 또는 신도비를 세우는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임지인 고부군 군민들에게 세금 액수를 인상하여 거둬들였다.

 

 

또 주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씌워 2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했다.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이자 당시 훈장이던 전창혁(全彰赫)은 농민들의 요청에 따라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로 인해 심하게 매를 맞고는 귀가한 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었다.

 

이에 분격한 농민들은 훈장인 전봉준을 선두로 1893년(고종 30) 음력 12월과 이듬해 음력 1월, 2회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체포 또는 축출되었다. 이후 농민의 일부가 동학교도들과 함께 동학 농민 봉기가 시작되었다.

 

2. 봉기 창의와 사발통문 살포

 

첫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새벽 1천여 명의 농민군은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삼아 말목장터에 집결하였다.

 

 

마침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농민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사발통문의 내용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주 감영까지 함락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농민군은 가장 먼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한 후 그동안 억울하게 빼앗겼던 세곡들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3. 동학도 남접과 북접 갈등

 

동학 활동에서는 북접과 남접의 내부 갈등이 격심하였다. 북접의 지도자가 최시형(崔時亨)이었고, 남접의 지도자는 전봉준(全琫準)으로 북접의 최시형은 남접을 경계하면서 시간을 끌었고 심지어 최시형은 전북 삼례에 모여 있는 남접군을 토벌하라는 ‘고절문’을 써 붙이기도 하였다.

 

또한 최시형은 충주에 주둔한 일본군 ‘벌창소’에 남접을 토벌해 달라는 건의서를 두 번이나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남접과 북접의 갈등으로 인하여 서천군 전역에 대한 급진적인 동학 농민 봉기는 일어나지 않고 한산, 서천 동학 농민봉기가 지연되어 조직을 규합하는데 10개월 정도가 지연되었다.

 

특히 비인군 지역은 북접 최시형을 따르는 종천 도만리 도집강(都執綱) 조영구(趙英九)와 유회군(儒會軍)을 조직한 유회장(儒會長) 종천 지석리 윤자혁(尹滋爀)과 함께 서천읍성의 수비와 비인읍성(庇仁邑城)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하였다.

 

“남접의 무리는 망령되어 척화라 일컫고 무지한 교도들으리 선동하여---생략—우리 북접을 끼고 봉기하려 했으나—중략— 북접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남접이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우리 북접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장차 우리는 남접을 성토하려고 합니다.”라고 【시천교역서 626쪽】에서 밝히고 있다.

 

이렇듯 서천과 비인지역의 도집강 조영구는 북접의 교단 지시를 적극적으로 따른 것이다.

 

 

4. 한산·서천지역 동학 농민 봉기

 

한산·서천지역 동학 농민 봉기는 전북지역 고부 동학농민 봉기가 일어났을 때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한산군은 교통과 경제적 활동은 금강을 끼고 전북지역과의 교통은 3개의 금강에 나루(신성, 죽산, 와초)가 운영되었다.

 

전북지역과 왕래하면서 인적교류가 이루어져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 동학의 영향을 끼쳤다.

 

당시 한산지역의 동학 농민 봉기에 대하여 한산면 야인리에 거주하면서 1894년 3월부터 12월까지 동학 농민봉기 활동 내용을 최덕기(崔德基 1874〜1929) 일기인 갑오기사【甲午記事】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산지역의 동학 농민봉기는 독자적으로 봉기한 전쟁보다는 봉기 이전에 조직된 동학 접주들이 전북지역 함열(咸悅), 웅포(熊浦) 동학도와 부여의 임천, 양화지역의 수백의 동학도들의 지원을 받아 지역의 농민들을 동학에 가입시키고 세력을 확장한 후 1894년 11월 12일 한산읍성(韓山邑城)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당시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이 이끄는 토벌 별군관(別軍官) 유석용(柳錫用)의 첩보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5. 전북지역 동학농민군 한산 신성나루 건너와

 

갑오기사에 따르면 전북지역 동학농민군은 웅포나루에서 한산면 신성리의 나루를 이용하여 건너왔다.

 

한산군과 군계인 부여군 양화면 수원리 윤동(允洞)의 동학 접주 김시형(金時亨)의 접주를 중심으로 3월부터 11월까지 야인, 원산, 나교, 마산요곡 등에서 동학 입도 포교 활동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갔다.

 

특히 지역을 순회하면서 강압적으로 위협을 가하며 동학 입도에 가입을 요구하고, 물자와 재물을 약탈하며 동학에 가담하지 않는 자는 폭행과 납치는 물론 살해까지 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보면 한산지역의 접주와 동학도들은 전북지역 남접 동학의 영향을 받아 조직된 동학도였다.

 

 

6. 한산·서천지역의 동학 접주와 활동 인물

 

한산군지역의 접주는 김약선(金若善), 한산면 호암리 전한규(田漢圭), 김태윤(金太雲), 김희만(金熙萬-최덕기 일기에 允洞접주), 지우범(池右凡), 마산면 요곡리 대접주 이종필(李鍾弼) 등이 있었고, 서천군은 추용성(秋鏞聲), 형제 오경옥(吳敬玉), 오명삼(吳明三)이 있었다.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의 11월 중 한산군수의 보고서를 보면, 형제 오씨(吳氏)는 서천에서 모인 동학군으로 한산경내를 침입하여 우마와 전곡을 약탈하였으나, 수성장이 병사를 이끌고 협공하여 물리치고 일부는 생포하였다고 한다.

 

또한 12월 11일에는 최기현(崔寄賢)이 운량관(運糧官)을 자처하면서 세곡(稅穀)을 농민들에게 분할 징수하다가 체포되었는데, 농민군에게 살해당한 아전 나종인(羅鍾寅)의 아들에게 보복 차원에서 살해되었다.

 

 

비인군은 최재홍(崔載洪)이 있었다, 더 많은 지역별 접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문헌 자료상으로는 남아 있지 않아 확인되지 않는다.

 

특히 부여군 지역은 양화면 수원리 윤동(允洞) 김시형(金時亨)이 접주로 확인되고 있다.

 

1894년 11월 12일 한산읍성(韓山邑城)을 점령할 때 동학농민군을 인도하여 안내뿐만 아니라 관청에 불을 지를 때 앞장을 섰던 인물은 최득용(崔得用)이 있었다.

 

1894년 12월 8일 동학농민군의 진압군을 이끄는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과 진참모관 권종석(權鍾奭)과 별군관 유석용(柳錫用)의 보고서에, ‘참모관과 별군관은 선봉본진(先鋒本陣)으로 복귀하려고 서천(舒川) 송동(松洞-현 신송리)지역에서 길을 나누어 떠나가면서 잔당이 이따금 길을 막고 있으므로, 서산군수 성하용과 상의하고 병정 20명을 나누어 거느리고 오후 5∽7시쯤 한산읍(韓山邑)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유숙하고 읍촌(邑村)의 백성을 불러 모아서 일일이 효칙(曉飭-타일음)하고 위무하였습니다.

 

다음날 3일 부대 진(陣)을 옮겨 금강나루를 건너려고 한산 죽산진(竹山津-현 용산과 화양죽산 경계포구)에 이르렀는데, 한산의 백성 수백 명이 함열(咸悅), 웅포(熊浦)의 동학도가 와서 한산읍성(韓山邑城)을 함락시키고 읍촌(邑村)을 불태운즉슨 부득불 이 경군(京軍)의 뒤를 따라가서 그 곡절을 알아야겠다고 앞을 다투어 배를 타려고 하기에 일일이 금지 시켜 나루를 건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어 웅포(熊浦)의 앞 강에 이르렀더니 웅포의 백성들이 이 배가 정박한 것을 엿보고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피하였습니다. 그래서 곧 나룻가에 이러러 정박하고 여러 백성을 불러 효유하여 안도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뒤따르던 한산의 보부상과 웅포의 백성들이 협력하여 한산읍성에서 불 놓을 때 앞에서 인도하여 변란을 일으킨 최득용(崔得用)을 잡아들여 조사해서 정확 사실을 확인 다음 현장에서 처치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당시의 관군과 함께 읍성을 지킨 조직은 홍산의 유회장(儒會長) 최학래(崔鶴來)가 이끄는 보부상(褓負商)조직과 향교유생인 지식인들이 조직한 유회군(儒會軍)이 읍성을 방어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선 조직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포토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