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는 동학농민 봉기의 배경과 남접과 북접의 갈등 속에서 한산, 서천지역의 동학운동 봉기에 대한 지역별 동학접주들의 참여자 등과 정부 진압군과 동학농민군 일부 지역의 교전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지역별 동학농민군들과 교전과 피신한 동학 농민 잔당들의 활동과 처단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 한산읍성 11월 12일 점령 전북 남접 동학 농민군이 3월 한산면 신성나루를 건너와 부여군 양화면 수원리 접주 김시형(金時亨) 등의 협조를 얻어 인근 한산면 원산, 야인, 마산면 요곡 접주 이종필(李鍾弼) 등의 동학도 인들이 주민들에게 강요와 협박을 통하여 동학에 가입 활동을 9개월의 기간을 통하여 동학 농민군의 10,000명 세력을 확보하여 한산읍성의 점령하는데 안내자 역할을 하였던 한산 지역 농민군 최득용(崔得用)이 약탈과 방화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정부 진압군이 내려오기 전에 11월 12일 한산읍성은 함락되었다. 2. 정부 진압군을 이끄는 순무선봉진(巡撫先鋒陣) 11월 20일 홍산 도착 순무선봉진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은 11월 20일 홍산현에 도착하여 군대를 주둔하고 숙박하면서 전하는 말을 들으니, 한산, 서천 등지에서 동학 농민들이 소란을 피운다고 하기에 곧바로 한산, 서천으로 출발한다고 보고하였다. 그때는 이미 한산, 서천 두 지역은 동학 농민군에게 함락된 뒤의 일이다. 한산에 도착하여 한산수성장(군수) 김련(金鍊)과 호장 김하은으로 하여금 특별히 수성군과 읍의 관속 수백 명을 거느리고 힘껏 앞에서 인도하게 하고 홍산 유회장 최학래(崔鶴來)는 보부상을 거느리고 직접 뒤를 따르고, 병사들은 가운데 서서 앞을 향해 계속 달려 진격하였는데, 한산읍의 경계를 벗어났는데 적들은 이미 서천읍성에 불을 지르고 들녘으로 가득 물러 나왔다. 이때 동학농민군은 대군의 진압부대가 전진하는 것을 보고 남북으로 흩어져서 몇 천 명은 서천의 길산 삼수동(三水洞) 뒤 언덕에 주둔하였고, 몇천 명은 그 고을 남쪽 연로와 포구 등지에 주둔하였다. 3. 서천·한산 지역 동학 농민군 진압 과정 1894년 12월 4일 선무 선봉진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의 보고에 “홍산에서 한산과 서천 두 곳으로 출발하여 20일에 한산에 도착하니 지난 12일에 동학농민군들에게 마침내 성이 함락되어 수백호의 민가가 모두 불에 타버렸으며, 각처에 있는 관아의 건물도 부서지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유리(由吏:아전) 나종인(羅鍾寅)은 적도에게 붙잡혀 살해당하고 불에 타기까지 하였습니다. 서천읍성도 장차 도륙당할 듯합니다. 한산읍성 수성장(군수)과 읍의 이속(吏屬:아전들) 수백 명을 인솔하였고, 홍산의 유회장(儒會長) 최학래(崔鶴來)는 부상(負商:등짐장꾼) 50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나아가 진압하였습니다. 서천에 도착하니 서천읍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대군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수천 명이 삼수동(三水洞)의 뒤편 기슭에서 머물면서 합류했고, 또 다른 수천 명은 포구 해안가에 모였습니다. 진압군을 거느리고 북산 뒤쪽에서 급습하여 적들을 몇백 명을 죽였습니다. 나머지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습니다. 날이 어둡고 캄캄하여 쫓아가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21일에는 한산. 서천 두 지역에서 군사를 나누어 도망간 적들을 정탐하여 붙잡아 죽였는데 그 수도 몇십 명이 됩니다. 즉시 포살하였습니다” 4. 한산 숭문동(활동리)에서 동학농민군 토벌 한산·서천읍성을 점령하였던 동학농민군 잔당은 흩어져 각 마을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남쪽 금강 나루를 이용하여 도주하지 못하도록 포구를 지키게 하고 화양 와초리를 거쳐 한산 숭문동(활동리)로 향하여 활동리 머물고 있었던 동학농민군 잔당을 토벌하였다는 12월 4일 자 진압군 순무선봉진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의 보고내용이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에 밝히고 있다. 한편 당시 화양면 활동리(숭문동)은 고령신씨(高靈申氏)의 집성촌이기도 하였다. 활동리에서 동학농민군과 함께 활동하였을 인물이 누구였을까? 하나의 자료를 찾아냈다. 숭문동 8문장가 한사람인 석북 신광수(申光洙)의 후손 신석우(申錫雨1869〜1942) 이었다. 동학 농민혁명 자료 총서(고흥군 동학교구의 역사)에서 정창도(鄭昌道)는 1894년 2차 동학 농민봉기 때 진압군을 피신하기 위해 노숙 생활을 하면서 호남과 호서의 각 주군(州郡)을 모두 돌아다녔다. 고흥군 영주산(瀛洲山) 백운동(白雲洞)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깊은 산속에서 지냈는데 그때 함께 고생한 사람이 서불암의 두 스님이었다. 피신한 지 한 달 남짓이 지난 뒤에 집으로 돌아가 숨어 지냈다. 1896년 겨울에 행적이 탄로 나는 바람에 신석우(申錫雨:당시 27세)와 함께 같은 날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다음 해 1897년 가을 8월에 석방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살펴볼 때 활동리(숭문동)에도 동학 도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5. 서천읍성 피해 상황 보고 1896년 4월 1일 서천군수 유기남(柳冀南)이 동학농민군들이 읍성을 점령하여 관청과 민가에 불을 질러 큰 피해가 발생한 것이 보고됐다. 보고서를 보면, 서천군 관청은 원래 동헌(東軒) 향청(鄕廳), 장교청(將校廳), 형리청(刑吏廳)밖에 없었는데 1894년 11월 동학군이 성에 쳐들어왔을 때 동헌이 전부 불타 없어지고 이청(吏廳)은 그 전에 무너졌으며 형리청에는 군수가 거처하고 향청에는 세무서를 설치하였으며 장교청은 장교 등이 거처하는데 이인(人吏)들은 거처할 곳이 없어 공무를 논의하고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6. 화양산 주둔 동학 농민군과 전투 11월 12일 한산읍성을 점령한 동학 농민군은 화양산에 진을 쳤다. 이때 유기남(柳冀南) 서천군수가 평소 백성들을 잘 다스려 유회군(儒會軍) 조직하여 적으로부터 방어하여 서읍성을 방어하였다. 그 전날에 홍성과 남포의 유생들이 이르러 하루 밤을 지나 서천읍성에서 머무르고 다음 날 한산으로 출진하여 기산면 두문리(斗文里) 동쪽 산골짜기에서 대적하여 진을 치고 온종일 교전하였다. 남포병 1인이 탄환을 맞아 죽자 이로 인해 진을 철수하여 서천읍성으로 돌아오니 드디어 화양산에 진을 쳤던 동학농민군들이 산에서 내려와 마을에 불을 놓고 두문동 노씨 가문이 홀로 화를 크게 입었다. 11월 20일에는 홍주와 남포의 병사를 거두어 돌아가니 동학농민군들이 입성하여 성안의 집들과 관청건물에 불을 지르니 모두가 불에 타버렸다. 이러한 피해가 발생하자 유기남 서천군수가 순영에 보고 하여 경병(京兵)을 청하여 20일 홍산에서 한산으로 들어와 서천읍성을 탈환하고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니 동학군들이 죽고 사방으로 도망쳐버렸다. 12월 22일 자로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의 보고를 보면, “지난달 29일 행군하여 한산 두문리(斗文里)를 지나갔습니다. 이 마을은 지난 동학농민군들이 모여 있던 곳이라 200여 호가 불에 타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근심스럽고 참담하였으며, 그곳에 사는 백성들이 길을 막고 통곡하며 하소연하는데 그 떠도는 상활을 보자니 참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7. 단신으로 동학 접주 체포한 마을 백성 포상 12월 1일 진압부대는 새벽에 서천 송동(松洞:신송리)으로 진영을 돌렸는데 본군의 기동(起洞:현 지석리)에 사는 백성 심경칠(沈敬七)이 그곳 마을의 접주 나봉환(羅鳳煥)을 잡아서 진영 앞에 바쳤기 때문에 사실을 조사하여 또한 즉시 총살하였고, 심경칠이 단신으로 괴수를 잡아 왔으니 대단히 가상하여 약간의 돈으로 그 노고를 보답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8. 동학농민군의 진압 후 잔당들의 활동 전북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군 봉기에 대한 조정의 강력한 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 후 동학 잔당들은 각 지역에서 백성을 상대로 피해 입히고 있었다. 1904년 5월 17일 자 법부대신이 충청남도 재판소장에게 지시한 사건의 내용을 보면, 지난 음력 정월 10일 동학도인 70여 명이 서천군 마서면 동죽(東竹)에 살고 있는 조병징(趙秉澄:옥구현감 역임)의 집에 이르러 행패를 부리고 환도(環刀)로 그 부자(父子)를 구타하여 상처를 입히고 재물을 빼앗으며 집에 불을 질렀고 또 돈을 빼앗을 계획으로 조병징을 잡아가서 그 생사를 알 수 없었는데 사흘째 되는 날 수상한 배가 비인군 장구포(長久浦) 앞바다에 머무는 것이 있어 잡혀간 조병징(趙秉澄)이 그 배에 잡혀있다고 하여 당일 장포리 포성대(砲城臺) 방수포정(防守砲丁:병정)으로 공격하여 적들을 제압하여 조병징을 구출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조병징은 조세의 운반책임자인 전운사(轉運使) 조필영(趙弼永)의 친아들이기도 하다. 동학 농민군의 잔당들은 전운사 조필영에 대한 과거의 앙심을 품고 아들에게 보복을 가했던 것이다. 1894년 동학 농민 봉기가 일어나던 때 전북 옥구 현감을 역임하고 있었다. 조병징은 큰집 조정영(趙鼎永)이 후사가 없자 양자로 양부와 함께 마서면 동죽에 살고 있었다. 조병징은 남포 현감을 역임하면서 비인 현감이 공석으로 비인 현감을 겸직하였고, 1893년도 옥구 현감으로 발령 나면서 비인현에 친아버지 전운사 선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1893년 8월에 세운 부친 선정비가 비인중학교 앞에 서 있다. 또한 옥구 현감을 하면서 친아버지 조필영의 전운사 선정비도 세웠다. 9. 전운사 조필영(趙弼永)과 조병징 동학 농민군에 체포되어 1894년 전북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면서 전운사 조필영(趙弼永)과 아들 옥구현감 조병징(趙秉澄)을 체포하여 강금하고 고문을 가하기도 하였다. 매천 황현(黃玹1855∽1910)이 쓴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 조필영과 아들 조병징이 동학농민군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격고 어렵게 탈출하는 과정을 자세히 기록돼 있다. 기록에 따르면 1894년 4월 15일 동학 무리는 조필영(趙弼永)을 체포하여 벌거벗기고 포박하여 꿀을 발라서 낮에는 햇볕에 쬐고 밤에는 돼지우리에 가두어두고 파리와 모기들이 물어뜯게 하여 고통을 주니 조필영은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가족들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적들의 소문을 들으니 그들은 금일중으로 다시 결합하여 포박된 조필영을 끌어낼 것이라 하였다. 조필영은 갈증이 심하여 오줌을 받아서 갈증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또한 상황이 위험에 처해있었다. 조필영의 첩(妾)은 전대에 수 천금을 지참하고 4~5일 동안 적들의 느슨한 감시망을 틈타 해결하여 발가벗은 몸과 맨발로 걸인처럼 조필영을 탈출하게 하였다. 그리고 옥구현감 조병징은 최초로 관직에서 내려오면서 관직을 수행한 고장에 그 부친 조필영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는데 적들은 달아난 조필영이 한스러워 선정비를 넘어트렸다. 그의 아들 조병징(趙秉澄)은 여러 번 주리를 틀어 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옥구현 백성들은 도리어 그를 동정하여 적들에게 “우리 고을 현감은 그의 아버지 조필영(趙弼永)과는 다르고 매우 훌륭한데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주리를 트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 아니야?”라고 하였다. 적들은 배부르게 먹고 웃음을 지었다. 이내 아들 조병징도 또한 도주하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1894년 5월 부여 유생 이복영(李復永1846〜)이 쓴 일기 남유수록(南遊隨錄)의 기록을 보면, 전운사 조필영(趙弼永)은 탈출하여 아들과 함께 가족의 식솔들을 이끌고 화륜선(火輪船)을 타고 서해에 떠서 적도들의 화를 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학 봉기가 진정된 후 육지로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조병징의 묘소는 마서면 계룡 선영에 있다. ※ 그동안 3월부터 제공한 <새로운 창을 여는 서천역사>는 필자의 바쁜 일정으로 인해 이번 원고를 마지막으로 마감하고자 합니다. 애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장동혁(충남 보령·서천/사진) 국민의힘 의원은 16일 열리는 헌법재판소 국정감사를 앞두고 지연되는 심판사건 처리 기간을 지적하고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헌법재판소가 국회에 제출한 지난 10년간 연도별 유형별 심판사건 평균 처리 기간을 보면, ▲(위헌법률심판)의 경우 2013년 536일에서 2022년 639일로 103일 추가 소요되고 있고, ▲(권한쟁의심판)의 경우 2013년 461일에서 2022년 543일로 82일 추가 소요되고 있으며, ▲(헌법소원심판)의 경우 권리구제형이 2013년 444일에서 2022년 663일로 219일 추가, ▲(위헌심사형)이 2013년 567일에서 2022년 924일로 357일 추가 소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심판사건 처리에 있어서 2년 이상 경과 한 장기 지연사건을 보면, ▲2018년 191건에서 ▲2022년 214건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장동혁 의원은 “헌법재판소법(제38조)에서 규정한 법정 처리 기간 180일의 4배 이상인 2년 이상 경과 된 사건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것은 기본권을 침해당한 국민이 헌법상 보장된 권리를 실질적으로 누리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면서 “심판사건을 신중하게 처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도 중요한 만큼, 심판사건 처리 기간이 너무 지연되지 않도록 개선방안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군 제6회 한산소곡주 축제와 제1회 판교 도토리묵 축제가 오는 13일 동시에 시작된다. 서천한산소곡주영농조합법인의 주관으로 펼쳐지는 한산소곡주 축제는 이날 오후 3시 개막식·축하공연을 시작으로 15일까지 한산모시관 공예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판교면 도토리묵 축제 추진위원회의 주관으로 개최되는 판교 도토리묵 축제는 같은 날 오후 4시 30분에 개막식·축하공연을 통해 첫선을 보인다. ◇ 제6회 한산소곡주 축제 한산소곡주 축제는 한산소곡주 시음 및 판매, 홍보 행사와 문화공연, 시대별 음식 체험 공간, 휴식 공간, 농특산물 판매 등이 운영되며 주민 노래자랑, 소곡주 빚기 체험 등 부대행사가 펼쳐진다. 개막식 후 이승환, 강유진 등의 가수가 출연하는 축하공연이 열리며 특히 토요일 오후 7시부터는 여행스케치, 이자연, 위아영, 신사(크로스오버), 명지 등의 가수가 출연하는 소곡주 음악회가 개최된다. 축제와 연계한 행사로는 2023년 제3회 충남 술 발전 포럼(13일 오후 1시~5시)과 2023년 청년 농업인 발전 포럼(14일 오후 2시~4시)이 열린다. 또 2023년 한산소곡주배 축구 행사(14일 오후 6시~7시)가 펼쳐지며 2023년 한산모시 캠핑 스테이(13일~15일)가 진행된다. 소곡주 먹거리 장터는 공예마을 복원 가옥 잔디광장에서 소곡주 10% 할인행사와 함께 소곡주 시음·먹거리·안줏거리 등이 판매된다. 공예마을 기와공방 광장에서는 시대와 함께하는 소곡주의 모습을 재현한 3개 테마의 부스 운영과 소곡주를 반주형식으로 가볍게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 등 청년과 함께하는 시대별 소곡주 체험이 운영된다. 주말 휴일 오후 3시에 운영되는 한산소곡주 빚기 체험은 운영본부 현장에서 선착순 어린이·성인 등 10명을 신청받아 진행되며 체험료는 1만 원(1인 기준)이다. 이 밖에 주 무대에서는 소곡주 경매, 어린이 관람객을 대상으로 한 경품 퀴즈 대회 등이 진행되며 남녀노소 모든 나이를 위한 포토존 설치로 소소한 행복을 느낄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50팀의 캠핑 동호회가 참여하는 한산모시 캠핑 스테이는 한산모시관 잔디광장, 옛 성실중학교 운동장에서 펼쳐진다. 이들은 모시 공예품 만들기 체험 및 모시 홍보 행사에 참여하며 무형문화재와 함께 모시 체험, 모시풀 베기부터 모시 제품 완성까지 전 과정을 캠핑과 함께 체험하게 된다. 이와 관련 이인영 한산소곡주영농조합장은 “이번 축제는 1500년 전통 한산소곡주의 우수함을 홍보하는 것으로, 특히 최근 전통주의 높아진 관심에 발맞춰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마련했다”라며 “남녀노소가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으니 전국의 많은 관광객이 방문해 즐기는 좋은 시간이 되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제1회 판교 도토리묵 축제 제1회 판교 도토리묵 축제는 도토리묵 만들기 등 체험행사, 도토리묵 판매 등 전시 판매, 도토리 골프장 체험 등 홍보 행사, 도토리 전·수육 등 먹거리 판매, 문화공연 등이 펼쳐진다. 개막식 후 강유진, 라동근 등의 가수가 출연하는 축하공연이 열리며 토요일 오후 2시부터는 이승환, 나예원, 조구기, 조용팔 등의 가수가 출연하는 음악회가 개최된다. 아울러 축제 기간에는 지역 예술단체가 참여하는 문화공연이 오전 10시부터 이어지며 축제 마지막 날에는 지역민이 참여하는 노래자랑이 열린다. 체험행사는 도토리묵 만들기 체험, 도토리 생활공예 체험, 어린이 체험, 도토리잎 한지 엽서 뜨기 체험, 치매예방 교육, 가을 감성 초롱 만들기 등이 선보인다. 또 도토리묵 판매, 도토리 녹말 판매, 도토리 국수 판매, 도토리 말랭이 판매, 기타 판교면 특산품 등 전시 판매장도 운영된다. 홍보 행사는 도토리 풀빵 만들기, 도토리 골프장 체험, 도토리 수매 체험하기, 팝콘 무료 제공, 사진 전시 등이 펼쳐진다. 도토리 전, 도토리 수육, 도토리묵 밥, 도토리 묵무침, 도토리 들깨 칼국수 등의 먹거리 판매장이 운영되며 강정, 해바라기 기름, 도토리 송편 등 판교지역 특산품도 판매된다. 이를 위해 판교 도토리묵 축제 추진위원회는 지역특산품 홍보·판매와 향토 음식 부스 운영은 물론, 도토리묵 만들기 체험, 도토리 생활공예 체험 등 다채로운 체험행사와 문화공연 등 전반적인 최종 점검에 들어갔으며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에 대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와 관련 백찬기 판교 도토리묵 축제 추진위원회장은 “우리 판교면의 깨끗한 자연에서 채취된 도토리묵에 정을 듬뿍 담아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라며 “꼭 방문하셔서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도토리묵을 저렴한 가격에 맘껏 즐기시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이어 “도토리묵은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고, 성인병 예방과 피로회복 및 숙취 해소 등에 다양한 효능을 가지고 있으며, 수분함량이 많아 포만감을 주고, 낮은 열량으로 다이어트 분야에서 주목받는 식품”이라고 덧붙였다.
축제란 기본적으로 시민화합과 공동체 회복에 크게 이바지하는 것으로 선택과 집중으로 치러져야 한다. 이는 축제 개최 준비를 아무리 철저히 한다고 해도 항상 문제는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축제 개최를 위해서는 ‘축제를 왜 해야 하는가?’라는 전략을 세워야지만, 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결국 ‘그들만의 잔치, 낭비성 행사’에 그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제는 가장 지역적인 축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듯이 축제의 내용과 흥행을 동시에 충족하도록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씁쓸하다. 타 지자체의 축제가 흥행해서 배가 아픈 게 아니다. 지역경제 활성화를 외치며 거의 매일 동원되다시피 열정을 쏟은 공무원들이 분투가 아쉬워서다. 최근 서천군 행정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엇박자를 자주 만든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는 같은 날 동쪽(한산면)에서는 한산소곡주 축제가, 서쪽(판교면)에서는 도토리묵 축제가 동시에 열리기 때문이다. 서천군은 총면적 366.12㎢에 인구 5만 선이 붕괴한 충남도에서도 청양군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기초단체이다. 이런 소도시에서 같은 날 지역특산물축제가 동시에 열린다는 점에서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축제 모두 군민의 혈세로 열리는 것으로 특별히 두 축제를 겹쳐서 시너지 효과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축제 기간도 문제이다. 지역특산물을 홍보하고, 지역특산물 판매촉진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기 위한 지역축제가 전국적으로 대규모 축제가 몰리는 10월 중순에 개최되고 있다. 과연 얼마나 많은 관광객이 축제장을 찾아줄지 염려스럽다. 한산소곡주 축제의 경우 수요가 가장 많은 추석 명절 전에 축제를 개최해야 해야 했음에도 추석 명절 직후에 축제를 개최한다는 것 자체가 경제 논리에 어긋나 보인다. 축제 장소 선정 문제에도 아쉬움을 남겼다. 물론 주관하는 단체의 사정이야 있겠지만, 지역에서 개최되는 만큼 지역민들과의 소통과 주민 의견수렴을 통해 결정됐더라면 지역민에게 신뢰를 얻어 축제 참여도를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축제 개최 역시 선심성이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다. 서천지역은 크고 작은 지역축제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특히 올해는 일부 읍면 체육대회까지 겹쳐 축제를 위한 축제인지 사업비를 쓰기 위한 행사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장항지역 ‘꼴갑 축제’와 장항읍민 체육대회가 잇달아 개최됐고 한산면민 체육대회와 소곡주 축제가, 판교면민 체육대회와 도토리묵 축제 등이 연이어 치러진다. 따라서 예산이 투여된 지역특산물 축제의 효과는 기대치 보다 훨씬 못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쯤 되면 서천군 행정 시스템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전반적인 점검이 필요한 대목이다. 행정은 주무관이나 주무 부서의 독단적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시스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그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다. 행정은 단체장의 독단적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시스템과 메뉴얼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서천군은 이 시스템이 존재하지도 않고 그러다 보니 작동하지도 않는 것 같다. 부서 간 협의는 오간 데 없고, 부서 간 책임 떠넘기기만 급급한 실정이다. 매사에 숲을 보려 하지 않고, 나무만 보려는 조급함이 졸속행정을 부르는 것은 당연지사로 더욱더 거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행정구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단 축제뿐만이 아니고 행정의 모든 분야에서 조직 운영 시스템을 총체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이제는 서천군 행정도 선진 시스템을 도입할 때가 온 것이다.
일선의 교단에 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입장로서 ‘교권 4법’ 마련을 환영한다. 국가가 교사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줬기 때문에 기쁘지 않을 수 없다. 국회는 지난 21일 오후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교권 강화’에 관련된 법률안을 제일 먼저 가결했다. 이른바 ‘교권 4법’, 즉, ‘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과 ‘초·중등교육법’, 유아교육법, 교육기본법 재개정안에 교권에 관련된 30여 개 조항이 신설·강화됐다. 지금까지 동료 교사들이 학습 및 생활지도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내용이 포함된 것은 다행이다. 그 가운데 교원이 아동학대 범죄로 신고되더라도 정당한 사유 없이 직위해제 금지내용과 교육활동 침해죄에 형법에 해당하는 공무집행방해죄, 무고죄, 업무방해죄 추가라는 점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 걸핏하면 아동학대의 옥쇄가 교사들에게 채워졌던 내용도 대폭 손질됐다. 교원의 정당한 생활지도는 아동학대가 아니라는 내용도 담고 있다. 알다시피 사회에 방출되지 않은 A형부터 Z형까지의 다양한 인간군상이 ‘학생’이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 미성숙한 채 모인 곳이 바로 학교다. 또한 이들을 가르치는 자가 바로 교사다. 교사들은 그래도 학식과 인품이 걸러져 상위에 속하는 사회지식 계층이다. 교사와 학생 간에 갈등이 있다면, 거의 교육활동에서 벌어지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 외 사건에 대해 성급한 일반화로 싸잡아 교사를 나쁘게 매도하는 사회 풍조로, 교사들은 저자세가 되고 힘이 없어졌다. 묵묵히 잘 지도하는 교사들까지 위상을 떨어뜨리는 누명을 씌우고, 학생 인권 탄압이니 공교육 불신이니 하여, 교사를 함부로 대하는 층을 늘어나게 했다. 이런 가운데, 교사들은 미성년자인 아이들을 상대하기에 사회에 적용되는 법의 테두리로부터 소외감을 느끼면서 살아왔다. 학부모들은 교육 현장에 간접으로 존재하는 또 다른 교육 대상으로, Z형 부모로부터 시달리는 것은 이중 고통이었다. 그렇기에 국회에서 통과된 교권 4법은 의미가 있다. 강화된 법으로 일 선 교사들이 자신 있게, 소신껏 교육활동을 펼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더 엄밀히 말한다면 학교 안팎의 악성 민원으로부터 교사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태풍을 맞는 바다에서는 국가 대표 수영 선수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이번 교권 4법 마련은 국가가 법치(法治)라는 구명조끼를 마련한 것이다. 교사들은 학생들과 함께 용감하고 자유롭게 먼바다도 나아갈 수 있다. 우리 교육계와 학생, 학부모는 모두가 알고 있다.
1882년 이후의 각종 사회 혼란과 조선정부의 부패로 민심이 동요하던 가운데 1894년 2월 15일 탐학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군의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집단으로 무장 시위를 벌였다. 또한 한산, 서천지역에서도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우리고장 동학 농민전쟁의 진압과 그 후의 동학잔당의 보복 등에 대하여 2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동학 농민혁명(東學 農民革命), 동학 혁명(東學 革命), 동학 운동(東學 運動), 동학 농민운동(東學 農民運動) 또는 동학 농민전쟁(東學 農民戰爭)으로 불리기 시작한 동학 난(東學 亂)은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백성의 무장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3차)로 나뉜다. 초기에는 동학난, 동비의 난(亂)으로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 농민혁명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 농민운동(甲午 農民運動), 갑오 농민전쟁(甲午 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농민운동 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 고부군 동학 농민 봉기 배경 1892년 전봉준이 살던 고부군에 조병갑(趙秉甲 1844∽1912)이 고부군수로 영전하여 왔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이 형별을 가하였다.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한 조병갑은 농민들을 괴롭혔다. 전라도 고부는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가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한 다음 물 값을 받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여러 죄명을 씌어 벌금을 받아 냈고, 태인군수를 지낸 아버지 조규순(趙奎淳)의 비석을 만든다는 핑계로 돈을 걷기도 하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 고부군수 조병갑의 선정비 또는 신도비를 세우는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임지인 고부군 군민들에게 세금 액수를 인상하여 거둬들였다. 또 주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씌워 2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했다.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이자 당시 훈장이던 전창혁(全彰赫)은 농민들의 요청에 따라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로 인해 심하게 매를 맞고는 귀가한 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었다. 이에 분격한 농민들은 훈장인 전봉준을 선두로 1893년(고종 30) 음력 12월과 이듬해 음력 1월, 2회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체포 또는 축출되었다. 이후 농민의 일부가 동학교도들과 함께 동학 농민 봉기가 시작되었다. 2. 봉기 창의와 사발통문 살포 첫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새벽 1천여 명의 농민군은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삼아 말목장터에 집결하였다. 마침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농민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사발통문의 내용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주 감영까지 함락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농민군은 가장 먼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한 후 그동안 억울하게 빼앗겼던 세곡들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3. 동학도 남접과 북접 갈등 동학 활동에서는 북접과 남접의 내부 갈등이 격심하였다. 북접의 지도자가 최시형(崔時亨)이었고, 남접의 지도자는 전봉준(全琫準)으로 북접의 최시형은 남접을 경계하면서 시간을 끌었고 심지어 최시형은 전북 삼례에 모여 있는 남접군을 토벌하라는 ‘고절문’을 써 붙이기도 하였다. 또한 최시형은 충주에 주둔한 일본군 ‘벌창소’에 남접을 토벌해 달라는 건의서를 두 번이나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남접과 북접의 갈등으로 인하여 서천군 전역에 대한 급진적인 동학 농민 봉기는 일어나지 않고 한산, 서천 동학 농민봉기가 지연되어 조직을 규합하는데 10개월 정도가 지연되었다. 특히 비인군 지역은 북접 최시형을 따르는 종천 도만리 도집강(都執綱) 조영구(趙英九)와 유회군(儒會軍)을 조직한 유회장(儒會長) 종천 지석리 윤자혁(尹滋爀)과 함께 서천읍성의 수비와 비인읍성(庇仁邑城)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하였다. “남접의 무리는 망령되어 척화라 일컫고 무지한 교도들으리 선동하여---생략—우리 북접을 끼고 봉기하려 했으나—중략— 북접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남접이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우리 북접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장차 우리는 남접을 성토하려고 합니다.”라고 【시천교역서 626쪽】에서 밝히고 있다. 이렇듯 서천과 비인지역의 도집강 조영구는 북접의 교단 지시를 적극적으로 따른 것이다. 4. 한산·서천지역 동학 농민 봉기 한산·서천지역 동학 농민 봉기는 전북지역 고부 동학농민 봉기가 일어났을 때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한산군은 교통과 경제적 활동은 금강을 끼고 전북지역과의 교통은 3개의 금강에 나루(신성, 죽산, 와초)가 운영되었다. 전북지역과 왕래하면서 인적교류가 이루어져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 동학의 영향을 끼쳤다. 당시 한산지역의 동학 농민 봉기에 대하여 한산면 야인리에 거주하면서 1894년 3월부터 12월까지 동학 농민봉기 활동 내용을 최덕기(崔德基 1874〜1929) 일기인 갑오기사【甲午記事】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산지역의 동학 농민봉기는 독자적으로 봉기한 전쟁보다는 봉기 이전에 조직된 동학 접주들이 전북지역 함열(咸悅), 웅포(熊浦) 동학도와 부여의 임천, 양화지역의 수백의 동학도들의 지원을 받아 지역의 농민들을 동학에 가입시키고 세력을 확장한 후 1894년 11월 12일 한산읍성(韓山邑城)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당시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이 이끄는 토벌 별군관(別軍官) 유석용(柳錫用)의 첩보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5. 전북지역 동학농민군 한산 신성나루 건너와 갑오기사에 따르면 전북지역 동학농민군은 웅포나루에서 한산면 신성리의 나루를 이용하여 건너왔다. 한산군과 군계인 부여군 양화면 수원리 윤동(允洞)의 동학 접주 김시형(金時亨)의 접주를 중심으로 3월부터 11월까지 야인, 원산, 나교, 마산요곡 등에서 동학 입도 포교 활동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갔다. 특히 지역을 순회하면서 강압적으로 위협을 가하며 동학 입도에 가입을 요구하고, 물자와 재물을 약탈하며 동학에 가담하지 않는 자는 폭행과 납치는 물론 살해까지 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보면 한산지역의 접주와 동학도들은 전북지역 남접 동학의 영향을 받아 조직된 동학도였다. 6. 한산·서천지역의 동학 접주와 활동 인물 한산군지역의 접주는 김약선(金若善), 한산면 호암리 전한규(田漢圭), 김태윤(金太雲), 김희만(金熙萬-최덕기 일기에 允洞접주), 지우범(池右凡), 마산면 요곡리 대접주 이종필(李鍾弼) 등이 있었고, 서천군은 추용성(秋鏞聲), 형제 오경옥(吳敬玉), 오명삼(吳明三)이 있었다.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의 11월 중 한산군수의 보고서를 보면, 형제 오씨(吳氏)는 서천에서 모인 동학군으로 한산경내를 침입하여 우마와 전곡을 약탈하였으나, 수성장이 병사를 이끌고 협공하여 물리치고 일부는 생포하였다고 한다. 또한 12월 11일에는 최기현(崔寄賢)이 운량관(運糧官)을 자처하면서 세곡(稅穀)을 농민들에게 분할 징수하다가 체포되었는데, 농민군에게 살해당한 아전 나종인(羅鍾寅)의 아들에게 보복 차원에서 살해되었다. 비인군은 최재홍(崔載洪)이 있었다, 더 많은 지역별 접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문헌 자료상으로는 남아 있지 않아 확인되지 않는다. 특히 부여군 지역은 양화면 수원리 윤동(允洞) 김시형(金時亨)이 접주로 확인되고 있다. 1894년 11월 12일 한산읍성(韓山邑城)을 점령할 때 동학농민군을 인도하여 안내뿐만 아니라 관청에 불을 지를 때 앞장을 섰던 인물은 최득용(崔得用)이 있었다. 1894년 12월 8일 동학농민군의 진압군을 이끄는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과 진참모관 권종석(權鍾奭)과 별군관 유석용(柳錫用)의 보고서에, ‘참모관과 별군관은 선봉본진(先鋒本陣)으로 복귀하려고 서천(舒川) 송동(松洞-현 신송리)지역에서 길을 나누어 떠나가면서 잔당이 이따금 길을 막고 있으므로, 서산군수 성하용과 상의하고 병정 20명을 나누어 거느리고 오후 5∽7시쯤 한산읍(韓山邑)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유숙하고 읍촌(邑村)의 백성을 불러 모아서 일일이 효칙(曉飭-타일음)하고 위무하였습니다. 다음날 3일 부대 진(陣)을 옮겨 금강나루를 건너려고 한산 죽산진(竹山津-현 용산과 화양죽산 경계포구)에 이르렀는데, 한산의 백성 수백 명이 함열(咸悅), 웅포(熊浦)의 동학도가 와서 한산읍성(韓山邑城)을 함락시키고 읍촌(邑村)을 불태운즉슨 부득불 이 경군(京軍)의 뒤를 따라가서 그 곡절을 알아야겠다고 앞을 다투어 배를 타려고 하기에 일일이 금지 시켜 나루를 건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어 웅포(熊浦)의 앞 강에 이르렀더니 웅포의 백성들이 이 배가 정박한 것을 엿보고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피하였습니다. 그래서 곧 나룻가에 이러러 정박하고 여러 백성을 불러 효유하여 안도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뒤따르던 한산의 보부상과 웅포의 백성들이 협력하여 한산읍성에서 불 놓을 때 앞에서 인도하여 변란을 일으킨 최득용(崔得用)을 잡아들여 조사해서 정확 사실을 확인 다음 현장에서 처치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당시의 관군과 함께 읍성을 지킨 조직은 홍산의 유회장(儒會長) 최학래(崔鶴來)가 이끄는 보부상(褓負商)조직과 향교유생인 지식인들이 조직한 유회군(儒會軍)이 읍성을 방어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선 조직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지역 어르신들의 국외 선진문화 탐방 지원사업비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어르신들의 국외 선진문화 탐방 관련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서천군의회가 이번에는 해당 사업 예산을 거의 절반가량 삭감해 일부 지역 시민단체, 군민까지 반발하는 등 지역사회에 파란이 일고 있다. 군의회에는 지난 14일 군 집행부가 승인을 요구한 지역 내 사회적 약자인 어르신 90명을 선발해 선진지 견학을 보내는 ‘국외 선진문화 탐방’ 지원사업비 5,700만 원 예산안 중 2,700만 원을 삭감 의결했다. 결국, 절반가량이 삭감돼 해외문화탐방 지원비는 3,000만 원으로 결정이 났다. 이를 지켜본 지역 일부 시민단체 등 군민은 말도 안 되는 군의회의 횡포라며 반발하는 한편 삭감된 해외문화탐방 지원사업비를 마련하자는 성금 운동까지 대두되었다. 지역의 한 시민단체는 “해외 선진문화 탐방 대상자 90명 중 50명만 보내라는 것인지. 90명이 일본에 가서 식사하지 말고 굶으면서 여행하라는 것”이라며 비판하면서 “평생을 국가경제발전에 허리 한번 제대로 펴보시지 못하시고 살아오신 어르신분들께 살아생전 외국 여행 한번 시켜드리겠다는 정책이 도대체 뭐가 포퓰리즘 행정인지 묻고 싶다”라고 일갈했다. 또 한 군민은 군청 자유게시판을 통해 “서로 돕고, 소통하고, 어르신을 존경하고, 아이들을 걱정해도 발전에 더딘 서천군을 군민이 정성을 다해 고향을 지키려 힘쓰는데 도대체 군의회는 군민에게 무엇을 안겨주고 있는지 실망감, 회의감이 든다”라며 “어르신들 효 선진지 견학 성금 모금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겠다”라고 밝혔다. 반면 서천군노인회 측은 이를 정중히 사양하고 나섰다. 노인회 측은 어르신들의 국외 선진문화 탐방 지원사업비가 당초 사업비에서 절반가량 삭감돼 아쉬움이 남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경제 사정 속에 사는 군민의 성금으로 이를 충당한다는 것은 도리상 더더욱 아닌 것 같다고 전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보령·서천/사진) 의원은 항소기록 접수의 통지를 받은 날부터 1개월(최대 2개월) 이내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지 아니하면 각하 결정하도록 하는 민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고 27일 밝혔다. 형사소송법에는 항소이유서 제도가 있으나, 현행 민사소송법에는 항소이유서 제도가 없어 1심 판결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다툴 의사가 없음에도 판결 확정을 지연시킬 의도로 항소를 제기하는 것을 예방할 수단이 없는 현실이다. 특히, 민사 항소심에서 소송대리인 교체를 이유로 준비서면 제출 없이 변론기일 변경 신청을 하거나, 제1회 변론기일에 임박하여 항소이유를 기재한 준비서면을 제출하는 경우 등이 다수 발생하여 판결의 조속한 확정으로 권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피항소인 측에서 항소인 측의 고의 소송 지연에 대하여 항의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실제로 법원행정처에서 민사항소심 접수 시부터 첫 준비서면이 제출될 때까지의 평균 소요기간을 조사한 결과 2018년 102.6일 소요되던 기간이 2021년 136.6일까지 계속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또 민사항소심 접수 시부터 첫 기일까지 소요되는 기간도 2018년 138.4일에서 2021년 189.6일로 늘어나는 것으로 드러나 항소심에서의 늦은 준비서면 제출이 승소 당사자의 권리 구제를 지연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장 의원은 “민사 항소심 재판이 지연될 경우, 국민의 헌법상 권리 중 하나인 신속한 권리 실현에 장애가 된다는 지적이 있는 만큼, 민사소송법을 개정하여 형사소송과 마찬가지로 민사소송에 있어서도 법정 기간 내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하도록 함으로써 남항소를 방지하고,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지 않는 등 실질적으로 다툴 의사가 없는 사건들이 조기에 종결되도록 함으로써, 국민의 조속한 권리 실현에 이바지하고, 한정된 법원의 자원을 다툼이 있는 사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최선의 입법적 노력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서천군 서천읍 소재 서천중학교 34명 학생의 소소한 제안이지만, 이 제안들이 학생에게는 참여하는 민주주의 실현과 미래를 준비하는 지역사회의 나아갈 방향 등이 어우러져 지역 활성화는 물론 거대하고 멋진 미래도시를 만들어 가는 힘찬 걸음이자 도약이 될 것을 기대하며 이들의 제안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군 서천중학교(교장 김유집) 1학년 34명의 학생이 지난 3월부터 7월까지 ‘슬기로운 미디어 생활’ 수업을 통해 ‘서천군을 알리는 방안’을 제안했다. 학생들은 서천 출신의 옛 문화예술인을 소개하고 교류하는 문예의 전당을 구축하는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총 다섯 가지의 의견을 제안했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차박(車泊) 캠핑 제안하기 최시호·순백호 학생은 몇 년 사이에 갑자기 캠핑을 취미로 하는 흐름과 더불어, 차에서 캠핑하는 차박이 유행하기 시작했음에 주목했다. 이들은 서천의 경우, 그리 유명한 관광 도시도 아니며 도시의 특성과는 거리가 있음을 지적했다. 다만, 이는 사람이 북적이지 않는 명상 및 힐링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현재 서천의 홍보 영상 등을 보면 먹거리 혹은 문화 관광, 자연 휴양의 느낌을 주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차박 캠핑의 환경으로 적합함을 드러내고 있지 않음에 아쉬움을 표했다. 서천 관내의 차박 캠핑하기 좋은 장소를 선별하여 SNS에 홍보하는 것뿐 아닌 홍보 영상을 이를 위주로 제작한다면, 캠핑족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갈 것임을 발표했다. ◇예술·미디어 복합 공간 및 인적 자원 활용하기 이동원·이선우 학생은 미디어문화센터와 문화예술창작공간 등을 선셋재즈페스티벌 등을 활용, 상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들은 이를 확장해 예술인 및 인근 대학의 학과 혹은 동아리, 관내 청소년들의 장기적인 협력을 통해 상시 전시 프로그램, 지역 새 단장 프로그램 및 매년 이루어지는 예술 미디어 학술제 혹은 축제를 마련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특히 이를 통해 예술, 미디어계와 서천군의 청소년들 사이의 멘토-멘티 관계를 구축하여 인적 자원을 활용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지자체에 활력을 더하는 장기 프로젝트로 자리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레트로 감성의 디자인과 향수 자극하기 박예찬·이서진 학생은 시골스러움을 레트로함으로 생각했다. 장항도시탐험역의 철길과 곳곳에 남아있는 70~8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건물 구조와 간판 등에 착안해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을 서천군 전체로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장항읍은 개화기를 배경으로, 서천읍은 70~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식으로 구획 별로 시기의 특징을 담는 것도 좋을 것이란 의견을 덧붙였다. 특히 홍콩 등의 국가에서 트램을 발견하고, 선로를 활용하여 개화기 시대에 영감을 받은 트램을 제작하여 운행하는 것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들은 서천군이 레트로함을 정비한다면, 다양한 드라마 및 영화 촬영지로도 입소문을 탈 것을 예견했다. ◇전사의 도시 이미지 구축하기 노관규·이승환 학생은 서천의 건물들이 높지 않으며, 지붕 없는 옥상들이 꽤 많고, 건물 사이의 간격이 그리 좁지도 넓지도 않음에 집중했다. 이들은 안전장치 없이 주위 지형이나 건물, 사물을 이용하여 이동하는 곡예 활동이자 개인 훈련 활동인 ‘파쿠르(Parkour)’에 서천군이 적합할 수 있음을 말했다. 공터 등을 활용하여 파쿠르를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면, 각지에서 몰려올 것임을 발표하였다. 덧붙여 서천군에서 다양한 체육 행사가 빈번히 열리는 것을 활용하여, 체육인 혹은 전사의 이미지를 구축하기도 좋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문예의 전당 이미지 구축하기 김대황·함형준 학생은 서천 출신의 문화예술인을 내세워 문예의 전당을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서구적 기법과 동양적 사상을 결합해 시를 쓴 ‘신석초’(서천 출생), 고종황제 어전에서 판소리를 불러 통정대부가 된 ‘이동백’(비인 출생), 초야와 함께 그린 고사인물도 ‘금궤도’의 창작자 ‘조속’(문산 기거), 원나라에서까지 문명을 떨친 학자 이곡과 유교의 입장에서 역사적 소산인 불교를 이해 하려고 한 학자 이색(한산 본관)을 소개했다. 이를 통해 문학, 그림, 소리, 논술 등으로 네 분야를 나누어 전국 규모의 문예 한마당을 개최할 것을 발표했다. 또한 전국적으로 유명한 한산모시문화제 시기를 활용하여, 문화예술의 학문적, 사회적 확장을 제시했다. 이 수업을 기획한 강소산 선생은 “군민 혹은 서천중 학생으로서 직접 서천을 디자인하는 경험을 쌓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실제적 배움으로 연결될 것”이라며 “아이들이 서천다움을 유지하며 매력도를 높일 방안을 다양하게 제시, 이를 공공연히 알려 사회적 효능감을 높이는 기회를 얻고자 마련했다”라며 수업 운영 동기를 설명했다.
충남 서천군의회가 제2차 추경예산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서천군이 편성한 어르신 국외선진문화 탐방 예산을 약 절반 가량을 삭감한 것은 유감이다. 서천군이 어르신 국외 선진문화탐방사업은 그동안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어르신 세대에 대한 공경과 ‘효’의 정신을 후대에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업이라고 누차 강조했었지만, 그동안 군의회는 포퓰리즘 사업이라며 이 예산을 전액 삭감해 왔다. 하지만, 군의회의 김기웅 군수 포퓰리즘 사업이라는 주장은 정치적 변명에 불과하다. 서천군은 그동안 참전유공자 해외 전적지 순례 행사, 초등학생 국제 우호 도시 문화탐방, 중학생 나라 사랑 역사 탐방 해외캠프 등 명목으로 약 3억 2,000만 원의 예산을 지원한 전례가 있다. 지원 대상이 어린이와 청소년에서 어르신으로 변경되었을 뿐 큰 틀에서 보는 사업의 목적은 유사하다. 또한 서천군의회는 지난 6월 노인복지 증진 사례 발굴 및 장수문화 체험을 위한 노인 국내외 선진문화 탐방 사업을 지원할 수 있도록 서천군 노인복지에 관한 조례를 개정했으면서도 정작 예산은 반 토막을 낸 것은 정책추진의 일관성마저 잃은 졸속사감이며 의회 본연의 사명을 벗어난 의회의 독단으로밖에는 평가할 수 없다. 특히 이 예산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모 의원은 장난 섞인 표정과 음성으로 30%만 주지 뭐라며 조롱했다는 소리가 의회 밖에서 들리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이 예산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예결위원도 아닌 군의회 의장이 예산삭감을 좌지우지했다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닌 것 같다. 지난 군의회 행정사무감사특별위원회에서도 정회 시간을 이용하여 행감특별위원들을 모두 모이게 하여 큰소리로 위원들을 호통치는 사태가 일어 일부 위원이 반발한 사례도 있었다. 아무튼 군의회가 어르신 국외 선진문화탐방 사업 예산을 반 토막으로 칼질한 사건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초래하자 서천군의회는 어르신들의 안전을 고려하여 인원을 줄이고자 했다는 둥 변명 아닌 변명으로 군의회의 결정을 합리화하려 하고 있다. 서천군에서 추진하고자 하는 어르신 국외 선진문화탐방사업과 유사한 사업들이 타 지자체에서는 벌써 오래전부터 노인복지 차원에서 시행되고 있다. 또한 이 사업은 어르신에 대한 공경과 효 문화 증진을 위한 사업이라는 차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군의회가 집행부를 견제하고 집행부에서 승인 요청한 예산안을 심의 의결할 권한이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동안 서천군의회의 행보에 견주어 볼 때 이번 예산 칼질이 명분이 있었는지를 의아해 보인다.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집행부에 대한 딴지걸기 예산심의의 전형적인 전횡이라는 의혹의 눈길이 이는 이유는 그동안 군의회나 군의원들의 행실을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아무튼 이번 군의회의 어르신 국외 선진문화탐방사업 예산삭감과 관련하여 서천군 곳곳에서 서천군의회가 서천군의 효 문화에 상처를 냈다고 평가하며 어르신들의 국외 선진문화탐방 사업이 정상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삭감된 예산만큼 군민 성금이라도 걷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군민 성금 모금을 통하여 군의회가 군민의 뜻을 의정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독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이번 군의회의 독선적인 예산 칼질을 주도한 군의원들이나 이에 들러리를 서서 손을 든 군의원들에 대한 질책의 목소리도 높다. 일각에서는 버릇없는 망나니를 뜻하는 격앙된 표현으로 군의원들을 질타하고 나서기도 한다. 군의원을 잘못 뽑은 군민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가 군민 성금 모금 운동 전개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군의회의 권한은 군의원들의 고유권한이 아니다. 군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라는 점을 군의회가 망각하고 있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군의회의 결정은 군민의 의사에 반해서는 안 된다. 군의회 의장이 예결위에 들어가 의회의 결정을 좌지우지하고, 군의원들을 거수기로 전락시켜 끝내 군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내려 군민에게 실망감을 안겨준 이번 군의회 예산삭감 사태로 기초의회 무용론이 다시 거론되고 있어 유감이다.
[sbn뉴스=서천] 나종학 기자 = 충남 김경제 서천군의회 의장 의정활동에 문제점이 많다는 지적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게다가 부패방지법 위반에 대한 의혹으로 경찰에 고발되고 예산안 심의에서도 부적절한 행태를 보이는 등의 의정활동을 문제 삼아 지역의 시민단체가 주민소환을 추진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서천주민자치참여연대는 지난 15일 시민단체 게시판에 ‘김경제 군의원 주민소환 투표 청구 준비와 관련한 안내의 말씀’이라는 제목 아래 김 의장의 주민소환 추진을 예고했다. 이 시민단체는 게시판을 통해 “주민소환투표 청구 준비위원회 구성과 대표자 선임, 청구인 서명 등 법적 절차 이행을 위해 법률대리인을 선임해 현재 절차를 선거관리위원회와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주민소환투표는 투표의 성격상 투표율이 저조해 대한민국 역사상 주민소환투표율 33.33%를 넘기지 못해 개표하지 못했던 점과 모든 주민소환투표 비용을 서천군이 부담해야 하는 점을 고려, 내년 국회의원 선거일에 맞추어 병합(동시)투표가 이뤄질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라고 전했다. 앞서 이 단체는 김 의장이 민간보조금을 받는 사회단체에 자신 소유의 상가를 월 임차액 55만 원씩 받고 부동산임대차 계약을 체결하고, 월 임차액을 지속해서 받아온 행위 관련해 경찰에 고발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군의회 추경 예산안 심의에서도 부적절한 의정활동을 보여 빈축을 샀다. 지난 14일 군의회가 군 집행부의 추경 예산안을 심의하는 회의 석상에 김 의장이 끼어들어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결과를 종용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보자에 따르면 김 의장은 이날 추경 예산안 심의 회의장에 들어와 어르신 국외 선진문화탐방 지원사업비 편성 예산안의 절반가량을 권했다. 앞서 이 사업비 심의 과정에서 이강선 의원이 약 20분 정도 해당 부서장에게 사업비 타당성에 대해 질의했고 이어 김아진 의원이 예산 중 약 30%만 남겨놓기를 제안했지만, 이지혜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은 원안 처리를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군은 어르신 중 사회적 약자 90명을 선발, 3박 4일 일본 후쿠오카 등의 선진지 견학 프로그램을 기획, 경비는 1인당 약 79만 원(자부담 20%)이 소요되는 국외 문화탐방 지원비용 5,700만 원의 예산안을 편성, 의회에 승인을 요청한 바 있다.
누구든 고향을 떠올리면, 가슴이 애틋해질 것이다. 자랑스러운 애틋함인지, 안타까운 애틋함인지의 차이는 있을 테지만 말이다. 서천에서 나고 자라며 교사라는 꿈을 꾸고 이룰 수 있었다. 그런 나에게 있어, 서천이란 고향은 정서적 안정감의 토대이다. 서천의 교육 현장에 오기 직전까지도, 자랑스러운 애틋함이 지배적인 감정이었다. 서천의 교육 현장에 와, 나와 같이 서천이 고향인 아이들을 만나보니 안타까운 애틋함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서천을 과연 자랑스러운 고향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였다. 어떻게 하면 서천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서천에 터를 잡고 살고 싶은 마음을 선물할 수 있을까. 현재도 이 고민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과정에 있다. 다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임을 알기에 동료 지역민과 연대하기 위하여 부족하게나마 칼럼을 통해 고민을 나누고자 한다. 공간은 물리적인 실체를 의미한다면, 장소는 물리적인 실체를 넘어 정서가 반영된, 의미를 지니는 곳을 의미한다. 캐나다의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는 ‘장소와 장소 상실’이라는 저서를 통해 ‘장소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생활 세계이자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토대’임을 밝혔다. 그렇기에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자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임을 말했다. 현대 산업사회의 직격탄 속에서 장소는 잃어지고 있다. 하지만, 서천은 여전히 장소로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누구는 이를 시골의 정취라고 할 것이며, 또 누구는 여전히 발전되지 못했다고 평할 것이다. 필자는 이를 장소성을 지닐 수 있는 공간으로 파악했다. ‘자연경관’과 ‘서천을 서천답게 했던 것’(미곡창고, 장항선 등)들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면 어떨까. 자연과 서천다움을 유지하되, 아이들의 생각을 반영하여 물리적 공간에 정서를 한껏 투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1학기 자유학기제 수업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서천이란 공간에 매력을 느낄까’를 주제로 숱한 논의를 나누었다. 아이들이 생각하기에 매력적인 서천의 공간은 무엇인지, 서천다움을 살리면서도 현대인(정확히는 아이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공간을 창출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상상하고, 말하고, 글로 쓰기를 반복했다. 물론 상상이 실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지만, 이 과정 자체에 지역에 대한, 구체적으로 지역의 한 공간에 대한 학습적 경험과 그에 깃든 정서만으로도 장소화될 수 있을 것이라 낙관했다. 서천 출신의 교사가 서천의 공간에 대한 자신의 장소 경험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수 있을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이번에 서해신문에서 아이들의 서천 공간의 장소화하는 방식에 대한 기사를 게재한 덕분에 아이들의 서천이란 공간을 장소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경험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서천 지역민들은 분명, 다양한 공간을 장소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서천을 걱정하고, 여전히 서천에 발을 붙이고 삶을 영위하는 것 아니겠는가. 어떻게 하면 서천의 아이들이 단순한 공간이 아닌 장소로서 서천을 기억하게 될까. 고향을 생각하고, 자랑스러운 애틋함을 느낄 수 있게 될까. 서천의 공간들로 하여금 나는 얻은 것이 많아, 서천이라는 지역 자체가 내게는 장소화되었다. 얼굴을 알든 모르든 어른들께 인사하면 칭찬으로 화답받던 신부락 시장, 친구들과 짧은 보폭으로 몇 시간을 우왕좌왕 걸어 도착하여 나름의 뿌듯함을 느낀 송림욕장, 언니와 함께 배를 타고 군산을 오가며 독립심을 장착해가던 도선장, 주말 아침이면 가족과 함께 들러 깨죽을 먹으며 안락함을 느낀 닐다방! 벌써 9월의 중순이다. 가을의 초입이라고 말하기엔 여전히 날이 더워, 끝 여름이란 호칭을 붙이고 싶다. 끝 여름을 배웅하기에 이 서천이 얼마나 다정다감한가. 짠 내 나는 바다에서 뛰놀다 보면, 끈질기게 달라붙는 옷자락들과 그 사이로 소록 바람이 들어와 바다 향을 묻히는! 낮은 건물과 그 위로 차곡히 널어둔 빨래에 일몰의 노을로 색을 입히는! 환경에 대한 감상을 내뱉고는, 역시 서천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지길 소망한다. 또, 그 생각으로 하여금 서천의 삶을 영위하려 마음먹는 이들이 생겨나길 소망한다. 나의 고민과 감상, 소망은 이제 시작이다. 아직 만날 아이들이 많고, 어떤 깨달음을 줘야만 하는 사명이 있고, 무엇보다 서천을 잊히는 고향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1. 최고의 법은 무엇인가? 법이라고 모두가 똑같은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도 있고 덜 중요한 것도 있다. 이 말은 어떤 법은 지키고 어떤 법은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법에도 경중이 있다는 것이다. 범법자도 하나는 중범자로, 하나는 경범자로 취급된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법의 불공평성도 있다. 권세 있고 힘 있고 돈이 있으면 법을 뚫고 나가기도 하고 특별대접을 받으려고 하고 특별대접을 하기도 한다. 힘없고 약한 자들은 억누르고 무시하고 쉽게 체포도 하고 구속도 한다. 만민이 법 앞에는 평등해야 법의 질서가 서고 법치국가가 되는 것이다. 힘깨나 쓴다고 법을 초월하는 자들에게 따끔한 경고가 필요 할 때이다. 법 중에 최고의 법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섬기는 법이 최고의 법이고 여기에 금할 법이 없는 것이다. 나의 조국, 나의 민족, 내 가족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최고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법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약2:8) 2. 행동하는 지성(知性), 행동하는 양심(良心)을 가지라. 행동하는 지성, 양심은 이론이나 지식으로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이성이나 합리적인 방법에 따른 선별 의지를 전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이다. 행동하는 지성과 양심은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한다. 행동하는 양심이 없으면 그 양심은 화인 맞은 양심이요 죽은 양심이다. 죽었다는 것은 활동이 정지된 상태를 말한다. 행동하는 지성과 양심만이 능력이 역사한다. 죽은 지성 죽은 양심 죽은 신앙은 부패와 죄악이 관영할 따름이다. 요즈음 정치인이나 성직자나 권세 자 중에 행동하는 지성과 행동하는 양심가들이 많지 않다. 중범죄자와 도둑들이 많다. 내로남불이다. 자기 자신을 볼 줄 모른다. 상대방의 티는 보고 내 눈에 들어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중환자가 많다. (마7:3-4) 빨리 병원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한다. 조물주(造物主)가 주신 지성과 양심을 회복(回復)하는 길만이 살길이다. 나 자신과 가정, 지역사회, 그리고 국가를 위해서이다. 3. 혀를 바르게 사용(使用)하라 서양 격언에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속담도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고 하였다. 요즘의 국회의 대정부 질의나 답변을 보면 피파 망신 주기, 설전이 벌어진다. 국민과 시청자들은 짜증이 난다.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진정성 있는 질의·답변을 통해서 국민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정치인과 관료들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말의 실수가 없다면 그는 온전한 사람이고 완전한 사람이다. 성경 야고보 3장 2절은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수했으면 실수로 인정하고 사과(謝過)하는 미덕을 갖고 사과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사과하면 오히려 큰 죄인으로 정죄(定罪)하는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 영사해주고 그 인격이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무리 큰 배라도 키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인생에 있어서 혀는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지체이므로 혀를 바르게 사용하자.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의 언어는 매우 중요하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그 나라를 움직인다. 국회의원들의 말과 행동은 악한 법이든 선한 법이든 입법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민과 국가발전을 위해서 언행 심사를 바르게 해야 한다. 혀를 조장하고 잘 다스리는 수준 높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국민은 지켜보고 있다. 거짓말과 사기 치는 입술을 절제하라. 샘이 한 구멍에서 어찌 쓴물과 단물이 나오랴? (약3:11) 서로 중상모략하는 언쟁을 중지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혀의 사용 용어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 우리 모두 덕 있는 말, 긍정적인 말, 위로의 말을 사용합시다. 정직과 진실한 말로 믿음을 주고 신뢰를 회복합시다. 최고의 법(法)인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행동하는 지성과 양심으로 사회의 빛과 등불이 되고 혀를 바르게 사용하는 언행(言行) 심사를 통해 화목하고 화평한 지역과 이 나라 이 민족을 만들어 가는 데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봅시다.
지난 9월 5일, 서천 문예의전당에서 몽골국립예술단의 공연이 있었다. 공연의 제목이 특이하게도 ‘서천아리랑’이었다. 호기심에 내용을 살펴보니, 전통예술단 혼과 몽골국립예술단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만든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라 한다. 몽골과의 협연인데 어째서 ‘서천아리랑’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어쩌면 몽골 예술의 근본은 노마드(Nomad)에서 비롯되고 우리의 예술은 그 뿌리가 아리랑에 닿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방향은 다르지만 떠남이라는 공통점을 갖고있는 그 둘을 융합한 작품을 서천에서 첫선을 보이는 것이라면 ‘서천아리랑’이라는 이름이 썩 어울려 보인다. 절로 정감이 가고 입에 착 붙는다. 몽골국립예술단의 공연은 매우 흥미로웠다. 대초원의 창공을 날아가는 독수리를 연상시키는, ‘흐미’라 불리우는 독특한 발성법과 유목민족 특유의 활달한 춤사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마두금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악기들도 다채로웠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몇몇 악기는 현대적으로 상당히 개량된 것으로 보였고 합주에 필요한 좋은 음색을 갖고 있었다. 역시나 국가를 대표하는 예술단답게 격조 높은 무대였다. 이날 무대에는 또 하나의 보석이 숨어 있었다. 서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고 웅장한 연주로 ‘서천별곡’이라는 곡을 들려주었다. 권해경 지휘자가 작곡했다는 그 곡을 들으며 서천의 예술이 풍성해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서천의 예술가들이 저마다의 감성으로 서천을 표현하는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더 많은 서천아리랑과 서천별곡이 태어날수록, 더 많은 서천의 시와 노래와 그림과 춤이 태어날수록 서천은 누구나 살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고장이 되어갈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 서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밑그림을 그리고, 몽골국립예술단이 색칠을 했다면,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전통예술단 혼이었다. 그들이 날렵한 몸짓으로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몽골 초원에 봄이 오고 화사한 꽃들이 피어났다. 특히, 혼의 무용수가 들고 춤추는 공작선 부채와 몽골 무용수의 모자에 꽂혀있는 공작 깃털의 공통점을 발견하고는 그 예상치 못한 이어짐에 짜릿한 동질감을 느꼈다. 공작선과 공작모가 한 몸처럼 어우러져 마치 공작새가 춤추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서천과 몽골의 특별한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우연은 노력에 의해 필연이 된다. 서천의 공작부채와 몽골의 공작모자를 어떤 이는 우연의 일치로 여기겠지만 나는 필연이라 생각한다. 그 필연은 십 여년 전 한 기업가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몽골로 사업을 넓히면서 알게 된 몽골 예술인들을 서천의 예술인들과 연결시켜준 서천기업인협의회 장현기 회장이 아니었다면 서천과 몽골의 인연은 시작되지 않았고 이번 공연도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장현기 회장의 후원 아래 몽골국립예술단과 서천의 전통예술단 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2015년에 몽골에서 혼의 첫 공연이 성사된 이후 해마다 서로를 방문하며 공연을 이어왔다. 서천의 문화유산을 활용하기 위해 애쓰던 혼은 한산면에 전래되어온 공작선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드는 등의 노력으로 충남을 대표하는 무용단으로 성장했고, 몽골과의 협연도 결실을 거두어 ‘서천아리랑’이라는 작품에 이르게 되었다. 예술을 통해 문을 연 서천과 몽골의 인연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지난 7월에 김기웅 서천군수가 몽골을 방문해서 몽골정부와 우호증진협약을 맺었다. 이는 지금까지의 교류가 한 단계 더 성장하여 다방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몽골국립예술단도 서천을 교두보 삼아 한국에서의 입지를 넓히고 있다. 이번 방한에는 서천 뿐만 아니라 충남도청을 비롯해 부여, 청주, 아산, 대전, 계룡 등을 혼과 함께 순회하며 합동공연을 펼쳐 그들의 명성을 높였다. 기회는 노력하는 자에게 미래가 된다. 전국 228개 기초 자치단체 중에서도 인구 수로 172위인 작디 작은 서천이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의 15배가 넘는 나라를 상대로 이러한 인연을 이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0여 년간 몇몇 사람이 보이지 않게 기울여온 노력이 이제 조금씩 빛을 보고 있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그들을 돕고 우리가 힘을 더해준다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침 가을이다. 새삼 풍요롭고 아름다운 서천의 가을이다.
우리고장 화양면 활동리(숭문동)는 고령 신씨가 세거하면서 17세기 당대의 8문자가를 배출한 고장이다. 특히 숭문동은 조선의 대표적 3대 여류시인으로 신사임당, 임벽당 김씨,와 함께 명성 떨친 여류시인 부용당 신씨의 고향이다. 진택 신광하의 여동생 부용당 신씨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조선의 대표 3대 여류시인(女流詩人)을 말한다면 신사임당(申師任堂), 임벽당 김씨(林碧堂 金氏), 그리고 부용당 신씨(芙蓉堂 申氏 1732∽1791)를 말한다. 임벽당 김씨와 부용당 신씨는 서천이 낳은 여류시인이다. 비인 남당리 임벽당은 15세기, 신부용당은 17세기의 여류시인이다. 대표적 3대 여류시인 중 2명이 서천 인물이다. 부용당 신씨는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숭문동)에서 석북 신광수(申光洙 1712∽1775) 첨추공 부친 신호(申皓 1687∽1767)의 딸로 태어났다. 부용당 신씨의 가문은 큰오빠 석북 신광수(申光洙 1712∽1775)를 비롯하여, 기록 신광연(申光淵 1715∽1778), 진택 신광하(申光河 1729∽1796)의 오빠들은 당대 문장가로 널리 명성을 날렸다. 부용당 신씨도 오빠들처럼 여류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또한 후손들도 문장가를 낳아, 숭문동(崇文洞)에서 배출된 문장가들이 명성을 남겼다. 부용당 신씨는 석북 신광수의 이복동생이다. 부친 신호(申澔)와 모친 성산 이씨(星山 李氏)는 석북 신광수와 신광연을 낳았고,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둘째 부인으로 보령 청라 이천령(李千齡) 따님 전주 이씨(全州 李氏)와 결혼하여 신광하와 부용당 신씨를 낳았다. 부용당 신씨는 3명의 오빠로 하여금 수업을 받았기에 문학가문의 시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 석북 신광수 막내 여동생 문인이 되다. 조선시대에는 남성 사대부가 문학을 주도하고 있었다. 여성으로써 문인으로써 작품을 남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부용당 신씨 이전에는 허난설헌(許蘭雪軒), 신사임당(申師任堂), 우리 고장 비인 남당리 임벽당 김씨 등 몇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석북 신광수 4남매의 막내였던 부용당 신씨는 별호를 산효각(山曉閣)라고 하였다. 나이가 비슷한 조카들과 어울려 오빠들에게 시문을 배웠다. 그동안 부용당 신씨의 삶과 문학에 관한 연구가 없었다. 부용당 신씨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75년 석북 신광수 서거 200주년을 맞아 한국한문학연구회에서 간행한 ‘숭문연방집(崇文聯芳集)’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숭문연방집은 우리 고장 한산(韓山) 숭문동(숭문동-현 화양면 활동리)에 세거한 석북 신광수, 기록 신광연, 진택 신광하, 부용당 신씨의 문집을 모아 간행한 것으로 숭문연방집의 해제는 당시 1975년 한국한문학연구회 회장 이가원(李家源 1917∽2000) 선생이 해제를 썼다. 특히 진택집(震澤集)은 진택공의 종7대손 신완식(申完植)과 이가원 회장이 부족한 부분을 보완 필사본으로 영인발간 하였다. 조카 신석상(申奭相)이 ‘부용당집(芙蓉堂集)이라고 한 것이 여러 권이 있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부용당신씨는 많은 작품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나 소수만 남아있다. 2. 결혼 전 조카들과 함께 공부하다. 석북 신광수의 4남매는 숭문북동(숭문북동-현 화양면 대등리)로 새 집터를 마련하고 새집을 짓고 1750년 새해를 맞아 신년의 감회와 다짐을 하는 시(詩) 신제춘사(新第春詞)에 4남매와 아들딸들이 함께 새집에서 글공부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새집이 이미 새로 이루어졌고/새해가 새로 왔네./영화스러운 빛이 초목에 피어나고/물건들이 모두 절로 이루네./봄 술도 또 새로 익었으니/당(堂)에 올라 부모님께 헌수를 하네./형제와 누이들이 문장으로 서로 우애하고/아손(兒孫:자기 아들과 손자)들이 다시 열을 지어/모두 시와 글을 외우네./가다가 부로(父老:나이 많은 어른)들을 만나면/들 사람 모습이 조금도 꾸밈이 없네./관장(官長:군수)의 일은 말하지 않고/다만 농사일만 이야기 하네/풍년들어 의식이 족하고/구실 돈은 기한을 어기지 않으니/이 밖에 더 무엇을 바라리오./맑은 마음으로 스승을 삼으려 하네./【新舍旣新成。新年復新至。榮光發卉木。物物咸自遂。春酒亦新熟。上堂壽父母。兄弟及少妹。文章自相友。兒孫復成列。詩書誦在口。時遇近父老。野態無餙辭。不言官長事。但道桑麻時。豐年足衣食。租賦無愆期。此外何所求。淸心以爲師】 석북집 <신석초 역> 큰오빠 석북 신광수와 부용당 신씨는 이복(異腹: 어머니가 다른) 남매로 나이 차이가 20여 세나 되고, 부용당신씨 큰오빠 아들인 조카들과 나이가 비슷하였다. 부용당 신씨는 또래이자 나이 어린 조카들과 함께 벗처럼 자랐다. 부용당 신씨의 넷째 조카인 신석상(申奭相 1737∽1816)이 지은 ‘제고모윤부인문(祭姑母尹夫人文)’을 통해 부용당의 생전 모습을 알 수 있다. “숙질간으로 나이가 서로 같고 도(道)가 서로 같다면 숙질이면서 친구이니, 어찌 남녀 간이라 하여 차이가 있겠는가?--생략-- 소자의 형제 다섯 명은 고모와 나이가 들쑥날쑥 차이가 났지만, 위아래로 서로 돕고 함께 책을 배우고 글을 짓고 음식을 먹고 장난을 치며 함께 즐겼다. 그 후 부인은 나이가 더욱 들어가니, 배운 것을 버리고 거의 글자를 잊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부용당 신씨와 조카들과 어떠한 생활을 하였는지 알 수 있다. 석북 신광수는 직접 아들들을 가르쳤는데 아들 신석상은 고모와 함께 공부하고 글을 지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부용당 신씨도 함께 공부한 것으로 여류시인으로 작품을 남기는데 세 오빠의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한다. 3. 궁핍한 생활고로 친정 숭문동과 외가인 보령으로 이사 가다. 부용당 신씨는 1750년 19살 나이로 해남윤씨 공제 윤두서(尹斗緖)의 손자 윤운(尹惲)에게 시집을 갔다. 남편 윤운(尹惲)은 큰오빠 석북 신광수 처조카이기도 하다. 큰오빠 석북 신광수(申光洙)의 부인은 해남윤씨 공재 윤두서(尹斗緖)의 딸이다. 또한 신광수 부인은 친정에서는 올케가 되며, 시댁에서는 시고모가 된다. 부용당 신씨는 결혼 초에는 해남에서 살다가 친정인 숭문동으로 이사를 와서 당분간 살았다. 1759년에 보령 외가에 농토를 얻어 한산 숭문동을 떠나 부용당 신씨는 큰아들 윤규영(尹奎永)과 둘째 윤규응(尹奎應-초명:尹持訥)을 데리고 보령 신성(현재 주포면 보령리)로 이사 갔다. 오빠 신광수는 동생 부용당 신씨가 외가로 떠나는 모습을 시로 남겼다. 그리고 큰오빠 신광수와 신광하는 보령을 자주 찾아갔다. 보령 청라의 외삼촌 이제암(李齊嵒)과 외사촌 이우경(李羽慶)의 도움으로 곤궁한 생활을 견디며 살아갔다. ‘보령 외가에 논을 빌려 농사지으러 가는 여동생을 이별하며’의 시에, “5월 신성(新城) 가는 길에서 너를 이별하자니/총총히 떠나는 네 모습이 가련하구나./가을걷이 끝나면 다시 만날 줄 알지만/병중이라 만사가 흩어지는 일이 많고/먼 길이라 편지도 때에 맞추기 어려우리/문까지 따라가 제일 우는 녀석은 누간가?/어미 없이 졸졸 따랐던 내 셋째 아이놈일세./”라고 한 것으로 친정과 외가댁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4. 결혼 23년 만에 남편 잃어 부용당 신씨는 결혼 23년(1773년) 만에 남편을 잃었다. 남편 윤운(尹惲)은 윤선도(尹善道)의 5대손이고 공제 윤두서(尹斗緖)의 손자이니 부용당 신씨로서는 명가에 시집을 간 셈이었다. 당시 43세인 부용당 신씨는 두 아들을 두었고 또 다른 아이를 뱃속에 기르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죽자 부용당 신씨는 순절하기로 결심을 세웠다. 보령으로 조문을 갔던 조카 신석상(申奭相)이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이 의(義)이겠으나, 뱃속에 있는 유복자를 가지고 따라 죽는 것은 의(義)가 아님이다”라고 하니, 부용당 신씨는 흐느끼면서 “내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또한 그리하려는 것이었느니라, 이제 너의 말을 듣고 내 어찌 차마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부용당 신씨는 남편을 따라 자살하려 하였으나, 신광수의 아들인 조카 신석상(申奭相)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당시 큰아들 윤규영과 12살 둘째 아들 윤지눌(윤지눌-개명 윤규응)을 두었고 그 후 유복자 딸을 낳았고, 딸은 여주 이씨(呂州 李氏) 이치범(李治範)에게 시집을 갔다. 5. 둘째 아들 윤규응 진천군수 제수와 모친 삶의 마감 신부용당은 2남을 두었었는데 큰아들 윤규영(尹奎永), 둘째는 초명에 윤지눌(尹持訥)로 쓰다가, 순조 1년(1801년) 윤규응(尹奎應)으로 개명하였다. 개명하게 된 사연은 천주교 박해 시절 윤지눌(尹持訥)의 6촌인 윤지충(尹持忠)이 천주교에 입교하면서 조상 위패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사건인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전주 감영에서 순교하여 역적의 항렬을 사용할 수 없음을 이유로 조정에 개명을 요구, 허락받아 개명하게 되었다. 신부용당은 아들 윤지눌(尹持訥)은 정조 14년(1790년) 29세 나이로 문과 병과 1등으로 뽑혔다. 정조 임금의 특별한 배려로 최단기에 승진하니 주변 사람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평양 상원군수(祥原郡守)를 거쳐, 진천군수(鎭川郡守)로 부임하게 되어 부용당 신씨는 아들을 따라가 그곳에서 살다가 삶을 마쳤다. 윤지눌(尹持訥)은 아들이 없어 당숙 윤지경(尹持敬)의 셋째아들 윤종구를 양자로 입양하였다. 아들 윤지눌(尹持訥)은 정조 19년(1795년) 정조가 주서(注書)를 천거하도록 하였는데, 정조는 다른 유모씨(柳某氏)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윤지눌(尹持訥)은 외사촌 정약전(丁若銓)을 천거하였다. 정조는 다시 다른 사람을 천거하도록 하였으나 그래도 바꾸지 않았다. 정조는 진노하고 철월부(鐵原府)로 귀양을 보냈다. 외사촌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귀양가는 윤지눌(尹持訥)을 전송하며, “첫 번째 쇠북소리에 혜화문이 열리더니/ 산 넘고 물을 건너 북으로 가는 길 겹겹이로세/ 산이 대신 일산을 펴 외로운 말을 맞고/얼음발을 안개가 내려 구룡을 숨겨주리/다행히도 잠시나마 청쇄달에서 놀아지만/ 우리 함께 백운봉을 오를 때만 같겠는가/ 듣자하니 신진 축에 뛰어난 인물 많아/ 검은 머리 붉은 얼굴에 감정 자태 다 좋다네./”라고 위로하였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공재 윤두서(尹斗緖)의 손녀딸 윤소온(尹小溫 1728-1770년)이다. 부용당 신씨는 다산 정약용의 외숙모가 된다. 신부용당 아들 윤지늘(尹持訥)은 귀양을 마치고 외가인 당시 한산군 활동리(숭문동)에서 살다가 가세가 기울면서 서천군(舒川郡)지역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 후 부친과 모친 부용당신씨, 아들 윤지눌의 묘는 본가인 전남 해남군 화산면 신리로 이장하였다. 申芙蓉堂 詩 ‘늦가을’ “가을 산의 나무여, 비단 장막이 되었고(山木秋兮錦帳)/내려앉는 기러기여, 내 낀 물가로구나(下鴻羽兮烟汀)/산 빛이여, 찬란히 붉고(山光兮粲)/강 빛이여! 푸르고 푸르도다(江色兮蒼蒼)/”